서민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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徐珉濠
1903년 00월 00일 - 1974년 01월 24일

KBA 역대 총재
임병직
(3대)
서민호
(4대)
이홍직
(5대)
KBA 역대 총재
이홍직
(5대)
서민호
(6대)
선우인서
(7대)

대한민국의 전 정치인이다. 호는 월파(月坡)이다.

1903년 전라남도 고흥군에서 태어났다. 보성고등보통학교, 일본 와세다대학 정경학부(전문부에 해당)를 를 졸업하였다.

귀국 후 전라남도 보성군 벌교읍에서 남선무역주식회사를 설립하여 운영하였고, 1935년 송명학교를 설립하여 교장을 지냈다. 재임 중 1942년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1년을 복역하였다.

8.15 광복 후 관료가 되었다. 1946년 6월 전라남도 광주부윤, 같은 해 10월 전라남도지사가 되었다.

1950년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무소속으로 전라남도 고흥군 을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1952년 거창 양민 학살사건의 국회 조사단장으로 활동하던 중, 그 해 4월 자신을 암살하려던 대위 서창선을 살해한 사건으로 복역하였다. 그러다가 1960년 4.19 혁명으로 출옥하였다.

1960년 제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무소속으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고, 민의원 부의장에 선출되었다.. 1961년 5월 남북교류를 주장하다가 입건되었으나, 혁명검찰에서 기소유예로 풀려났다.

1963년 자유민주당 최고위원에 선임되었고, 그 해 치러진 제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서울특별시 용산구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1965년 민중당 최고위원을 지냈다. 그러나 같은 해 한일기본조약을 반대하는 정치투쟁으로 김재광, 윤제술 등과 의원직을 사퇴하였다. 1966년 혁신계 인사들과 함께 민주사회당을 창당, 대표최고위원이 되었다. 1967년 민주사회당을 대중당으로 개칭, 제6대 대통령선거에 입후보하였으나, 야당후보 단일화를 위해 사퇴하였다. 같은 해 제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대중당 후보로 전라남도 고흥군 선거구에 출마하여 민주공화당 신형식 후보를 꺾고 당선되었다.

1971년 신민당과 대중당의 합당을 이루지 못하고 개별 입당하였다. 그 해의 제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신민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였다가 민주공화당 신형식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1973년 정계에서 은퇴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