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봉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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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네스코 세계유산
이름경주역사유적지구[1]
Gyeongju Historic Areas /
Zones historiques de Gyeongju
국가·위치대한민국 경상북도 경주시
등재유형문화유산
등재연도2000년
등재기준(ii)[2], (iii)[3]

瑞鳳塚

1 개요

경주시 노서동 고분군에 있는 대형 고분. 이름은 스웨덴의 '서'자와 봉황의 '봉'자로, 스웨덴 왕자가 봉황 장식의 금관을 발굴해 이런 이름이 붙었다.

2 발굴 경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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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스타프 황태자가 참가한 발굴 현장

금관총에서 우연히 신라 금관이 발견된 이후 일본인 고고학자들이 대거 경주로 몰려들었는데, 1926년 당시 마침 스웨덴의 황태자이자 고고학자이기도 했던 구스타프 공작[4]일본을 방문 중이었다. 일제는 그가 고고학자라는 점을 파악해 직접 이 무덤을 발굴해 달라고 청했고, 고대 동양의 무덤을 직접 발굴할 기회에 호기심이 동한 그는 기꺼이 참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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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봉총 금관 발굴 당시

조사 결과 이 무덤은 신라 특유의 돌무지 덧널무덤 양식으로, 이전에 발굴했던 훼손된 무덤들과 달리 신라 고분의 전체적인 구조를 파악할 수 있었다. 금관, 금목걸이, 가슴장식, 금반지 등이 출토되었다. 피장자는 여성으로 밝혀졌다.

'연수 원년'이라고 새겨진 그릇이 출토되었는데 연수는 고구려연호로 추정되나 아쉽게도 언제적의 연호인지 알 수 없다.

구스타프 황태자는 그 날 오후 열차를 타고 경성에 들러 만찬회를 가진 뒤, 원래라면 11일 오전에 중국으로 기차를 타고 넘어갈 계획이었다. 그러나 구스타프 황태자는 경성에서 점심을 먹은 뒤 일정을 변경해서 다시 고분 발굴현장으로 돌아왔다. 아마 금관이라는 특이한 유물을 직접 발굴해 낸 것이 내심 기뻤기 때문이었던 듯. 그렇게 해서 그는 또 하룻밤을 경주에서 머물고 본래 일정보다 4일 늦게 서울과 평양을 다시 거쳐 중국으로 넘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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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서봉총 옛 터에 발굴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여기서 발굴된 금관 등에 대한 흑역사가 있다. 이 당시 발굴을 주도한 일본인 학자 고이즈미 아키오는 이후 평양박물관장을 역임했는데, 이 때 서봉총에서 나온 유물들을 대여해서 평양박물관에서 특별 전시회를 열었다. 여기까지는 별 문제가 없었는데, 전시회가 끝나고 술집에서 뒤풀이를 하면서 금관을 가져다가 연회에 참석했던 기생에게 씌워주곤 기념촬영까지 했다. 이 사진이 언론에 오르면서 엄청난 비난이 쏟아졌고, 결국 고이즈미 아키오는 박물관장 직에서 물러나야 했다.
  1. 석굴암, 불국사, 양동마을 제외
  2. 오랜 세월에 걸쳐 또는 세계의 일정 문화권 내에서 건축이나 기술 발전, 기념물 제작, 도시 계획이나 조경 디자인에 있어 인간 가치의 중요한 교환을 반영
  3. 현존하거나 이미 사라진 문화적 전통이나 문명의 독보적 또는 적어도 특출한 증거일 것.
  4. 훗날 스웨덴의 국왕이 되는 구스타프 6세 아돌프이며, 2016년 현재 스웨덴 국왕 칼 16세 구스타프는 그의 손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