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연고 공동화 정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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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국 프로축구 30년사"[1] 307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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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을 연고로 한 일화 천마(현 성남 FC), 유공 코끼리(현 제주 유나이티드), LG 치타스(현 FC 서울) 3개 구단을 정부가 개입하여 1996년 서울 이외의 도시로 연고지를 이전하도록 강제한 것을 지칭한다.

한편 반 FC 서울 사이트 유저들이 주축이 되어 한국어 위키백과의 서울 연고 공동화 정책 문서를 직접 거론하며 한국어 위키백과에 문서가 생성된 후 서울 연고 공동화 정책이라는 용어와 내용이 국내에 알려졌다는 내용을 개인 블로그, 나무위키의 서울연고공동화 정책 문서 등에 기재하면서 퍼트리고 있지만 명백한 유언비어이다.

서울 공동화 내지 서울 공동화 정책이라는 용어와 정책의 핵심 내용은 2009년 한국어 위키백과 문서 생성은 물론 한국어 위키백과가 아예 없던 시절부터 언론#, 당시 축구팬들 # 그리고 심지어 FIFA 홈페이지를 통해 외국에도 League's Decentralisation Policy # 로 명기되어 이미 널리 알려져 있었던 용어와 내용들이다.

2 진행 경과

2.1 배경

1993년 11월 1일 당시 재임중이던 김영삼 대통령은 아시아 지역에서 개최하기로 FIFA가 내정한 2002년 월드컵 대회를 유치하기를 희망하는 국민적 움직임에 호응하여, 대선공약대로 민간 주도의 대회 유치 활동에 대한 정부의 지원을 약속하였다. # 이에 같은 해 12월 13일 축구협회는 대통령 재가를 거쳐 대회 유치 의사를 발표하고 본격적인 활동에 접어든다. # 개최 준비 당시 사용한 정보는 주로 1994 미국월드컵 선정 때의 미국측 자료와 개최 경쟁국이었던 일본의 동향 조사 결과였다. 월드컵을 유치하기 위해서는 1996년 6월 개최지 결정 전까지 도시 선정 및 해당 도시에 축구전용구장을 건립 계획을 확정할 필요가 있었다. #

프로축구연맹에서는 지역 연고 확립의 필요성을 인지하고 있었으며, 특히 1993년말 당시 총 6개 프로구단 중 3개 구단이 서울에 집중되어 있어 서울에서는 연고 개념이 희미하고, 타 지역(특히 대구광역시, 인천광역시, 광주광역시, 대전광역시 등의 대도시)에서는 연고 구단이 없어 축구 붐이 일지 못하는 것을 큰 문제로 지적하였다. # # # 한편 수원의 경우 LG에 연고 이전 시 제공할 수 있는 혜택들을 제시하는 등 지자체에서도 축구 구단을 유치하고자 하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

하지만 구단들끼리의 연고 배정 논의는 각 구단이 철저히 자신의 이익을 우선했기 때문에 합의를 보기가 어려웠다.[2] 특히 가장 큰 문제는 서울을 연고로 하고 있는 3개 구단이 서울 동대문운동장을 홈구장으로 유지하는 것을 고집했다는 것이다. #

2.2 정부 개입

프로축구연맹 자체적인 지역연고제 확립 노력에도 불구하고 서울 3개 구단 사이의 형평성 문제 등으로 구체적인 실행 방안에 대한 동의가 이루어지지 않자, 1994년 7월 4일 문화체육부가 나서 도시 위주의 연고제 확립과 전용구장 건립을 추진하기 시작하였다. # 이로 인해 서울 3개 구단은 서울에 남지 못할 가능성을 대비하여 일화는 성남, 유공은 부천, LG는 서울 또는 수원 등을 대안으로 제시하였다. #

정부의 개입으로 힘을 얻은 프로축구연맹은 1995년 2월 13일 이사회에서 1996년 1월 1일자로 서울을 공동구역으로 두고,[3] "서울에 축구 전용구장 건립할 경우 서울 복귀에 우선권을 부여한다"는 조건을 달아 3개 구단을 다른 지역으로 이동시키기로 결정하였다. # 하지만 3개 구단은 여전히 서울 연고 고수 방침을 포기하지 않았는데, 유공은 목동, 일화는 동대문을 홈구장으로 주장하였고, LG도 형평성 문제를 근거로 서울 연고를 유지할 것을 밝혔다. # 특히 1995년 9월 20일 이사회에서 유공의 경우는 "우리는 서울을 떠날 수가 없다. 정 떠나야 한다면 축구단 운영을 포기해야겠다"라는 강경한 자세를 취했다. # 결국 1996년 6월의 월드컵 개최지 발표라는 마감시간을 준수하기 위해서는 1995년 2월에 합의한 기한인 1996년 1월 1일 준수가 필요하다고 판단한 프로축구연맹은 청와대의 도움을 요청, 서울 3팀의 연고지이전 지침을 청와대로부터 하달받아 각 구단에 전달하였다. # 하지만 이러한 초강수에도 3개 구단은 연고지 이전을 위한 자발적인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

2.3 결말

유공이 부천, 일화가 천안으로 연고지를 옮긴 뒤 1996년 4월 27일 마지막으로 LG가 안양으로 연고지를 옮겨 서울 공동화 정책 시행은 완료되었다. # 또한 지역 연고 강화를 위해 모든 구단명에 도시를 명시하도록 재편하였고, 간략히 표시할 때는 도시명만을 쓰도록 각 언론사에 협조를 요청하였다. #[4]

하지만 새로운 연고지의 상황은 그야말로 최악이었다. 안양 종합운동장은 1년 동안 보수를 하고서야 겨우 경기를 할 수 있었고, 부천에는 당시 아예 축구를 할 수 있는 경기장이 없어서 1996년부터 2000년까지 서울 목동 경기장에서 홈경기를 개최했으며 천안 오룡 운동장은 조명탑조차 없어서 야간 경기를 하다가 주위가 온통 암흑천지가 되어 경기 진행에 차질이 빚어지자 제비뽑기로 승부를 가리는 촌극이 벌어졌다. 그리고 아프로 아시안 클럽 챔피언십 1996 시즌(vs. 올랜도 파이러츠 F.C. (RSA))의 홈 경기도 서울에서 치렀다. 운영 또한 마찬가지여서 천안 일화는 90년대 후반 내내 암흑기를 겪었고 안양은 2003년 후반부터 이미 마음이 떠났는지 킥오프 5분전에 경기를 취소시키는 만행을 저질렀으며 팬들 상대로의 이벤트도 전면 중단했고 부천은 모기업이 대놓고 박대하면서 팬들의 공분을 샀다. 또한 리그 사무국에서 독단적으로 중립경기라는 명목으로 중요 경기들을 서울에서 치름으로써 잇속을 챙기려 했으나 큰 이익을 거두지 못하고 오히려 각 구단 연고지 팬들의 빈축만을 샀다.

결국 천안 일화는 2000년 성남으로 연고를 다시 옮겼으며, 성남 일화로써 K리그를 한때 지배했음에도 종교적 이유등 여러가지로 성남 지역 정착에 어려움을 겪다가 2013년 성남시에서 인수하여 시민구단으로 재창단하는 형식으로 연고 정착에 나서고 있다. 안양 LG는 서울월드컵경기장 건설비용의 약 3%에 해당하는 75억원을 분담금 형태로 프로축구연맹에 내는 조건으로 서울로 복귀, 2004년 FC 서울로 팀명을 변경하였는데, 이는 당초 합의한 조건인 축구 전용구장 건립이라는 조건과 비교할 수도 없을 정도로 약화된 조건이어서 문제가 되었다. 부천 SK는 2006년 제주도로 연고 이전을 하면서 제주 유나이티드가 되었다. 각 구단이 연고지를 이전하는 과정은 그다지 매끄럽지 못했는데, 상세한 내용은 각 구단 항목에서 기술한다.

3 평가

지방축구 활성화라는 명분을 위해 추진된 정책이었지만, 이로 인해 가장 인구가 많은 서울에 연고 구단이 없게 되는 결과가 초래되었다. 90년대 말부터 K리그 붐이 발생하여 2002년 월드컵에 절정에 달하였는데, 이 시기에 서울에서 K리그 붐을 일으키지 못한 것은 소탐대실이라는 평가를 피할 수 없다. 2004년 FC 서울이 생김으로써 서울 공동화 시대는 막을 내렸지만 원래 유공과 일화를 응원하던 서울 팬이나, 안양, 부천, 천안 등 각 구단이 애착을 갖고 선택한 것이 아니었던 도시의 축구팬들은 연고 구단을 타의에 의해 빼앗긴 상실감을 맛보게 되었다.[5]

정몽규 총재는 2012년 TV조선과의 인터뷰에서 인구 1000만명 도시에 축구단 4~5개 정도는 있어도 좋을 것이라는 입장을 밝혔고, 2015년부터 강남을 연고로 한 서울 이랜드 FC가 출범하게 되었다.

4 일본 유사 사례

당시 김영삼 정부는 지방자치제도와 스포츠를 연결하려는 움직임이 있었으며, 이웃한 일본은 YS정부가 벤치마킹하기 좋은 상황이기도 했다. 그렇기 때문에 스포츠와는 별 관련이 없는 내무부(현 안전행정부)에서도 스포츠를 통한 지역 활성화 방안을 제시하는 등 서울 연고 공동화 정책을 집행함에 있어 정부차원에서 일본의 사례를 벤치마킹했다고 보여지는 정황을 찾을 수 있다.

1993년 J리그가 출범하고 J리그 연맹은 일본의 국기인 프로야구의 인기를 넘는것은 불가능하다고 판단하였고, 특히 수도 도쿄를 연고로 삼은 프로야구팀인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넘사벽급 인기로 리그 전체에 균형적인 발전이 어렵다고 판단하여 대도시 대신 야구팀이 없는 중소형급 도시에 연고지를 두도록 정책을 밀어붙이고 있었는데, 이를 위해 2천만 명이나 되는 지역 인구와 그에 따른 막대한 부가가치를 창출할 수 있는 도쿄의 연고권을 비워두어 J리그 전체의 공동 연고지로 설정하였다.

정확히 표현하자면 도쿄 국립경기장을 특정 팀이 독점할 수 없도록 만든 것인데, 일단 도쿄 국립경기장이 아닌 다른 도쿄도 내 축구장이라면 연고구단을 창단할 수 있었다. 하지만 한동안 도쿄를 연고로 한 구단은 창설되지 않았고, 이에 따라 J리그는 창설 후 수년 동안 도쿄 연고팀 없이 일단 전구단이 돌아가면서 도쿄 국립경기장에서 중립경기를 개최하는 형태로 시즌을 진행하게 되었다. 과정이야 어찌됐든 중소도시 중심 연고제는 성공적으로 뿌리를 내리면서 대박을 터뜨렸고 이 과정을 옆에서 지켜본 한국 프로축구연맹은 자극을 받아 이를 벤치마킹하게 되었다.[6]

세월이 지나 도쿄가스를 모태로 한 FC 도쿄가 1999년 J리그로 승격, 2001년에는 베르디 가와사키가 연고를 이전해 도쿄 베르디가 되어 도쿄 더비가 이루어졌다. 두 팀 모두 2001년 건립된 아지노모토 스타디움을 홈구장으로 쓰고 있으며, 도쿄 국립경기장을 비워놓는 건 현재까지도 유효하다. 하지만 두 팀 모두 도쿄전력과 요미우리라는 거대 스폰서를 잃으면서 전력이 약화되어 J1과 J2 사이를 오르내리는 동안 오사카부 연고의 감바 오사카세레소 오사카가 AFC 챔스에 진출하면서 오사카와 도쿄의 축구 인기가 완전히 역전되었다.

5 다른 종목의 사례

KBL의 경우도 "수도 공동화 정책"을 추진해서 97년부터 00년까지 서울을 연고로한 프로팀이 없었다. 그러다 2001년 수도 공동화 정책을 폐기했고 서울을 연고로 할수 있게 되자 청주시를 연고로 하고 있던 청주 SK 나이츠수원 삼성 썬더스가 연고이전해 서울을 홈으로 쓰게 되었다.

V-리그의 경우, 2005~2009년 동안 서울연고구단이 없었고, 서울올림픽공원 제2체육관에서 중립경기를 가졌다. 2009년 장충체육관을 홈구장으로 서울 우리캐피탈 드림식스가 창단되었고, 인천 GS칼텍스가 장충으로 연고이전하면서 서울에 남녀두팀이 자리를 잡았다. [7]

여자농구 WKBL은 서울연고팀이 없다. 대신 4팀이 경기도에 있다.
  1. 프로축구연맹에서 2013년 6월 발간한 자료. 연고 이전을 주도했던 한웅수 전 FC 서울 단장이 2013년 2월 프로축구연맹 사무총장으로 내정되자마자 이 자료가 발간된 것에 대해 반 FC 서울 사이트에서 "서울 연고 공동화 정책"라는 용어를 공식화함으로써 FC 서울의 연고지 이전을 정당화하기 위한 것이라는 의견이 제기된 바 있다. 하지만 "서울을 공동((空洞)구역으로 둔다"는 표현이 이미 1994년 12월 10일 프로축구연맹 이사회 관련 보도자료에서 원래 계획했던대로 서울 연고지를 공동((空洞)구역으로 할지 아니면 서울 연고지 내에서 지역적으로 3등분(동대문운동장, 잠실올림픽주경기장, 목동운동장) 할지 추후 논의키로 했다는 기사내용에서 이미 나왔고 (보도자료) 당시 인터넷이 일반인에게 거의 보급되지 않았기 때문에 해당 용어가 검색되지 않는다는 것을 근거로 당시에 없었던 표현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근거가 빈약하다.
  2. 기사를 통해 1990년 2월 대한축구협회에 통합되었던 프로축구연맹이 재독립하기 전 발생했던 갈등을 엿볼 수 있으며, 이에는 호남팀 창단 등 구단 연고에 대한 이슈도 포함되어 있다.
  3. 서울 공동화라는 표현의 첫 사례에 해당한다.
  4. 프로 후발주자인 한국 농구와 배구 역시 이것을 답습했는데, 연고 정착에 실패하고 그걸 억지로라도 만회한다는 명목으로 구단 명칭에 지역명을 끼워넣었다는 점이 모두 동일하다. 특히 천안은 축구와 배구 두 종목에서 피해를 봤는데, 제비뽑기 승부라는 흑역사로 인해 천안시 지자체에는 동정의 여지가 없더라도 천안 거주 스포츠 팬들은 무고한 희생자가 되었다. 프로농구의 경우 SK 나이츠와 삼성 썬더스가 각각 청주와 수원에서 서울로 연고를 이전했고, 프로배구는 남자부의 경우 우리캐피탈이 신규창단하면서 서울을 연고지로 삼았고, 여자부의 GS 칼텍스가 인천에서 연고를 이전했다. 공교롭게도 타 종목에서도 SK와 GS 팀이 연고이전을 했다.
  5. 물론 부천과 안양은 프로축구구단을 만들었다 이것에 대한 이야기는 각각 부천 FC 1995FC 안양 참고.
  6. 그런데 이 정책이 먹힐 수 있던 것은 당시 일본프로야구 12개 팀의 연고가 기형적으로 특정 지역에 몰렸던 탓이 컸다. 일본의 도쿄-수도권에 6개팀(요미우리, 니혼햄, 야쿠르트, 세이부, 요코하마, 지바 롯데), 오사카 권역에 3개팀(한신, 오릭스, 긴테츠)이 있는 상황이라 대다수 지방 도시에는 프로야구 연고 팀이 없었다. 이 시점에서 수도권과 오사카 권역을 빼고 프로야구 팀을 가진 곳은 후쿠오카, 히로시마, 나고야 뿐이었다. 이는 2000년대 중반 니혼햄의 홋카이도 연고이전, 센다이를 기반으로 한 라쿠텐의 창단으로 어느 정도 해소된다.
  7. 다만 장충체육관 리모델링 공사로 2012~2015년 동안은 드림식스가 아산시, GS칼텍스가 구미시와 평택시를 잠시 이용해, 2015년부터 다시 서울로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