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왕(삼황오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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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호 | 우순(虞舜) / 제순유우(帝舜有虞) | |
성 | 우(虞) | |
휘 | 중화(重華) | |
아버지 | 고수(瞽叟) | |
생몰기간 | 음력 | ? ~ ? |
재위기간 | 음력 | ? ~ ?(39년) |
목차
1 소개
삼황오제 중 오제의 한 명으로 언급되기도 한다.
2 이상적인 인격자로서의 모습
순은 성천자인 요에게서 왕위를 선양받은 이상적인 성인군자의 모습으로 묘사된다. 가정에서는 부모와 형제들이 그를 죽이려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효도를 다하고 우애를 잃지 않았으며, 사회적으로는 그 뛰어난 인격으로 가는 곳마다 사람들을 교화시켰기 때문에 명망을 얻어 요에게서 선양을 받았다는 것이다.
십팔사략에 따르면 가정에서 순을 죽이려는 음모를 주도한 것은 어머니였다. 아버지인 고수는 기록에 따라서는 어머니와 한통속이었다고도 하고 우매해서, 혹은 시각에 장애가 있어서 그런 음모를 알아차리지 못했다고도 하지만 어느 쪽이건 순에게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예컨대 순의 어머니가 순을 죽이기 위해 순에게 우물을 파라고 한 후 순이 땅을 파고 있는 동안 그 우물을 무너뜨려 생매장하려고 했지만, 순은 이를 예상하고(!) 미리 빠져나갈 구멍을 만들어 두었기 때문에 살아났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순은 우물을 파라는 말에 반항하지도 않았고 자신을 죽이려고 한 것에 대해 항의하지도 않았으며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효도를 다했고, 어머니와 함께 자기를 죽이려고 한 동생 상에게도 우애를 잃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다른 사람이 "당신처럼 똑똑한 사람이 왜 그런 계모 치하에서 참고 지내느냐"고 묻자 순은 "아버지께는 어머니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허유에게 양위하려다 허유에게 거절당한 요는 순의 명성을 듣고 자신의 딸 두 명을 모두 순에게 시집보냈는데, 이 순은 두 명은 흠잡을 데 없이 원만한 부부생활을 했으며, 이를 본 요는 마침내 순을 후계자로 낙점하고 왕위를 선양했다고 한다. 순은 선양을 받아 왕이 된 후에도 부모 앞에서는 항상 공손한 모습을 보였으며 동생은 제후에 봉했다고 한다.
한비자에서도 36편인 논란편에서 유가의 주장을 소개하고 있다.
여산의 농부들은 밭고랑을 서로 침범하고 있었다. 순이 가서 경작을 하니, 1년 뒤에는 밭고랑이 바르게 되었다. 황하 강변의 어부들이 낚시터를 두소 다투고 있었는데, 순이 가서 낚시질을 하니 1년 뒤에는 순윗사람에게 양보하게 되었다. 동이(東夷)의 도공이 만든 그릇은 품질이 나빴지만, 순이 가서 그릇을 만드니 1년 후에는 그릇이 훌륭해졌다.
공자는 이러한 일에 대하여 감격해서 말했다.
"농사나 어업이나 그릇 만드는 일은 순의 본업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순이 가서 작업을 한 것은 백성의 잘못을 바로잡기 위한 것이다. 순은 실로 어진 사람이다. 스스로 경작을 하는 수고를 아끼지 않으니 백성이 그를 따르게 되었다. 성인의 덕에 의한 교화는 바로 이런 것이다."
- 참고로 유명한 고사인 모순이 바로 36편인 논란편에 나온다. 한비자의 주장은 요가 성천자였다면 당연히 나라의 법률을 통해서 기강을 잡을 수 있었을 텐데 순이 쫓아다니면서 그런 '교화'를 할 필요가 없지 않았겠느냐는 것. 다시 말해서 순이 그런 교화를 실행해야 했다는 것과 요가 성천자라는 것은 모순이라고 창과 방패의 고사까지 동원해 가면서 설명하는 것이다. 이어지는 부분에서는 순과 같은 비범한 인격자조차도 하나의 교화를 행하는데 1년이 걸렸는데, 문제 하나를 해결하는데 1년씩 걸린다면 언제 나라의 문제를 모두 해결할 수 있겠느냐면서, 반면 평범한 군주라도 법으로 다스린다면 수많은 문제를 훨씬 짧은 시간 내에, 그것도 동시에 해결할 수 있으니 유가의 방식은 잘못되었다고 비판한다. 평범한 사람도 효율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놓고 비범한 인물조차 오랜 시간이 걸리는 방법을 권하는 자들과 국가의 대사를 의논해서는 안 된다는 것.
서경에 따르면 순은 왕위에 오른 후에도 성인으로서의 교화에 중점을 두고 덕으로서 나라를 다스렸다고 한다. 서경의 순전(舜典)에서는 순은 무위(無爲)로서 나라를 다스렸으며, 법을 적용할 때도 귀양보내는 것으로 오형[1]을 용서해주었고 형벌의 적용에는 항상 신중을 기하였다고 한다.
3 유가의 묘사와는 다른 모습
유가가 성인군자로 묘사한 것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 전승이 단편적으로 전해지기 때문에, 위에 묘사된 순의 모습이나 선양이 사실은 유가에 의해서 왜곡된 것이 아니냐는 주장도 제기되어 왔다. 실존인물인지부터가 의심스럽기는 하지만, 실존인물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마찬가지로 원래 전승되던 모습이 유가에 의해서 왜곡되었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3.1 선양은 실제로 있었던 일인가?
요순의 고사는 권력을 장악한 신하가 왕위를 넘겨받을 때 흔히 동원되는 프로파간다가 되었지만, 사실은 요순의 선양 그 자체가 원래부터 프로파간다였을 가능성이 있다. 후대의 역사서에 기술된 바와는 달리 죽서기년에는 요가 감금되었다는 언급이 나온다.
옛날에 요의 덕이 쇠하였고, 순에게 갇히게 된다. 순은 요를 감금하고, 다시 단주[2]를 막아서 부친과 서로 만날 수 없게 하였다.
또한 상서에도 요의 중신들을 죽이거나 추방한 기록이 남아있다.
공공을 유주에 유배시키고, 환도를 숭산으로 쫓아내고, 삼묘는 삼위로 갔으며, 곤을 우산에서 죽였다. 네 명의 죄를 처벌하자 천하가 복종했다.
이들 기록은 순이 무력으로 요를 감금하고 왕위를 넘겨받았으며 요의 신하들을 숙청한 연후에야 권력을 공고하게 할 수 있었음을 시사한다. 따라서 요순의 선양은 후대의 창작이거나 혹은 순 자신이 퍼뜨린 프로파간다일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다.#
역사서에서의 그의 행태는, 정치적인 공작이었다는 쪽에 손을 들어주고 있다는 이야기다.
3.2 이상적인 인격자인가?
한비자 36편에서 언급한 내용은 유가들의 주장을 소개한 것이며, 한비자 51편인 충효편에서 전하는 한비자가 직접 설명하는 순의 모습은 그와는 전혀 다르다.
고수는 순의 아버지지만 순은 그를 추방했다. 상은 순의 동생이지만 순은 그를 죽였다. 아버지를 추방하고 동생을 죽였으니 어질다고 말할 수 없다. 요의 두 딸을 아내로 삼았고 요의 천하를 탈취했으니 의롭다고 말할 수 없다. 어질지도 의롭지도 않으니 밝다고 말할 수 없다.
한비자의 이야기에 좀 더 깊이 들어간 해석도 서술해보겠다.
먼저, 평촌에서 일하던 한낱 농민일지라도 수십년을 들여 요의 두 딸을 얻고 중신이 되었으며 섭정왕에 오르고 천자위를 차지한다는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다. 이는 순이 단순한 인격자라고 보기엔 무언가 다른 쪽의 비범함이 있음을 알려준다.
태평성대에 자신의 평판을 세간에 알리며 왕이 되려면, 극진한 효를 보여 요임금이 손수 추천한 징벽제도로 오르는 쪽이 더 수월했을 것이고, 실제로 말년에 서서히 권력을 장악하기 시작했다는 점을 보면, 이를 노렸음이 어느정도 맞아 떨어진다.
등용된 순은, 백성들의 모든 일을 1년이 걸리더라도 손수 해결하기 시작했고, 그는 백성들의 총애를 얻었다. 나중에 요임금은 노쇠하여 단주 이외에 가장 총애하는 순에게 모든 일을 맡겼다. 이후 죽서기년에 언급된 요임금 부자의 감금을 하고서도 어리석은 단주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멀찍이 남하로 내려가 보좌만 하겠다는 섭정 8년으로 이어졌는데,
사마천이 쓴 내용은 이러했다.
순이 단주에게 양보하고 남하 남쪽으로 갔다. 제후들이 배알할 때 단주에게 가지 않고 순에게 갔다. 소송을 하는 자들도 단주에게 가지않고 순에게 갔다. 칭송하는 노래를 부르는 사람들도 단주를 노래하지 않고 순을 노래했다. 순은 말했다. " 하늘의 뜻이다. " 그러고는 천자의 자리에 올랐다.
이는, 수백년뒤 왕망이 한을 무너트릴 때, " 하늘의 뜻이다 " 라고 말하며 고스란히 행태가 비슷했다는 점에서 보면, 왕망은 요순시절의 간계를 꿰뚫어보고 이용한 것일지도 모르는 해석이 가능하다. 이같은 점에서 이상적인 인격자라 판단을 내리기엔 부적절한 가능성을 많이 내포하고 있다.
재미있는 사실은, 바로 다음 왕인 우왕 시절에도 이 같은 현상이 이어졌다는 것이다.
요임금 말기부터 이어져온 홍수 문제는 매년 끊임없는 피해를 입혔기에 국가의 모든 관리보다 가장 우선시 되었으며, 순임금이 민심을 얻으려면 치수관리가 시급했다. 치수관리를 하던 곤이 9년이 지나도 수습을 못하자 사형을 시켰으나, 별 수 없이 나라에서 치수관리를 가장 잘하는 자신이 살해한 곤의 아들인 우를 등용했다.
생각해보자. 아무리 위급해도 자기가 살해한 자의 아들을 등용한다는게 덕으로써 말이 되겠는가? 아들에게 있어서 순임금은 물론 사사로운 의도로 그런 것은 아닐지라도 자기 아버지를 죽인 불구 대천지 원수이다.
우가 등용되었을 때, 홍수는 모든 대업중 가장 위에 위치한 위기로 번져 있었고, 그 또한 순임금이 그랬던 것 처럼 위기를 해결하여 민심을 얻고, 순임금 말년엔 순의 아들 창균을 피하는 것을 빌미로 멀찍이 물러나는 척을 하며 섭정을 시작하자, 모든 제후의 일처리가 그쪽으로 갔으며, 나중에는 고스란히 천자의 자리에 올랐다.
마치 단주를 피하는것을 빌미로 물러나는 척을 하며 섭정을 하다가 고스란히 천자의 자리에 오른 순 임금 때와도 똑같지 않은가?
이 둘의 선양이 역사에서 신격화되었다는 것을 보면, 이 둘의 이상적인 인격자라는 것은 다음과 같은 해석과 역사책의 행동에서 미루어봤을 때, 좀 더 생각해야 할 부분인 것 같다.
3.3 덕으로써 나라를 다스렸는가?
서경의 순전(舜典)에서는 순이 처벌을 신중하게 하고 과실로 인한 죄는 용서해주었다며 인의로써 나라를 다스렸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지만, 그와 동시에 기본적인 형벌을 만든 것은 순이었다고 언급하고 있다. 즉 순은 형벌을 철폐한 쪽이 아니라 만들어낸 쪽에 속한다. 이 때문에 순이 원래부터 형벌이 아닌 도덕적 교화에 중점을 두고 천하를 다스렸다는 이미지였다는 것에 대해 의문을 표하는 사람들도 있다.
다만, 위의 가능성으로 보아하듯이 덕으로 다스린다고 본질이 착한 임금은 아닐 가능성도 적지 않다.
3.4 의의
사실 위에서 보듯이, 흔히 인식되는 '순'과 역사상의 실존인물 '순'이 어느정도 차이나는지는 알기가 어려우며, 왜곡의 가능성이 존재한다. 애초에 실존인물인지부터가 의심되는 임금이다. 그러나 '요순시대'는 유학에서 '이상사회의 모델'로서 여겨졌으며, 사실 유학자들 역시도 '왜곡의 가능성', '실존하지 않았을 가능성' 등을 알고 있었다. 유학자들이 요순시대나 주나라를 운운하는 것은, 역사상의 실존했던 특정 시대로 돌아가려는 과거지향적인 움직임이라기보다는 '이상적인 사회모습'을 제시하고 그것을 목표로 삼은 것에 가깝다. 특히 '요가 순에게 선양한 것'은 민본주의의 바탕이 되었다. 비록 '쿠데타의 구실로 악용되었다'는 부정적인 평가도 있으나, '통치자의 권력은 백성으로부터 나온다'는 주장의 근거가 되었다. 맹자는 다음과 같이 주장하였다.
1. 왕의 권력은 하늘로부터 온다.
2. 그러나 하늘의 의지는 민심을 통해서 드러난다. 즉 실질적으로는 민심이 곧 천심이 되며, 권력의 근본은 백성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다.
3. 따라서 민심이 떠난 왕은 이미 왕이 아니며, 백성들의 지지를 받는 사람이야말로 진정한 왕이다.
맹자는 자신의 주장을 요와 순의 사례를 통하여 설명하였다. 요가 죽자 백성들은 요의 아들이 아니라, 순을 지지하였다. 즉 백성의 지지를 받는 순이야말로, 진정한 하늘의 선택을 받은 사람이라고 설명한 것이다. 2000년전 백성은 하루하루 세금과 군사력이나 제공하는 기계로나 취급되던 시절에, 요와 순의 사례는 '백성은 권력의 근본'이라는 혁명적 주장의 근거가 되었다. 물론 '요순의 사례는 너도나도 천명(=백성의 뜻)을 운운하며 쿠데타를 일으키는 명분이 되었다'는 악평도 일리는 있다. 그러나 너도나도 천명드립을 쳐야할 만큼 '백성은 권력의 근본'이라는 사상이 보급되었다는 것은, 요와 순이 단순한 '옛날 사람', '전설속의 사람'이 아닌 그 이상의 의의를 가지는 이유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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