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소개
韓非子. Han Fei Zi. (BC280? ~ BC233)
중국 전국시대의 철학자. 본명은 한비(韓非)이다. 전국시대 말기에 한(韓)나라에 살던 공자(公子)로 한왕(韓王) 안(安)의 서자로 태어났다. 법치주의를 주장했으며 법가를 집대성한 철학자로 널리 알려져 있다. 보통이라면 '한자(韓子)'라고 해야겠지만, 후에 당의 한유를 한자라 불러 헷갈리지 않도록 이름을 통째로 넣어서 한비자로 불린다.
젊어서 진(秦)의 이사(李斯)와 함께 순자(荀子)의 밑에서 동문수학했다. 이사는 매우 언변이 뛰어났으나 한비자는 말더듬이었다고 한다. 허나 학문에 있어서는 이사가 한비자에 미치지 못했다. 이 때 한비자는 법가 뿐만 아니라 도가, 유가, 묵가 등 여러 학문을 두루 섭렵하고 법에 의한 부국강병의 논리를 정립했다. 한비는 철학자 중에서도 형명가(刑名家)라고 할 수 있는데, 이는 형명학을 주장하는 사람이란 뜻이며 형명학은 명실론(名實論)[1]을 법의 적용에 응용하려던 일종의 법률학이다. 한나라는 전국칠웅 중에서도 문화가 떨어지고 당시에는 세가 기우는 형국이어서 한비자는 이를 걱정하여 여러 계책을 한왕에게 간하였으나 별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진시황이 매우 존경했던 인물로도 유명한데, 사마천의 사기에 의하면 한비자가 쓴 저서인 고분(孤憤)과 오두(五蠹)를 본 진시황이 크게 감명을 받아 "이 사람과 교유한다면 더 바랄 것이 없겠다"라고 했다고 한다. 진나라의 재상이 된 이사는 "한비를 얻고 싶다면 한나라를 공격하라. 그러면 한비가 사신으로 올 것이고 그때 회유하면 된다"라고 진시황에게 간한다. 물론 그게 아니라도 어차피 공격을 했겠지만.
어쨌든 대륙 통일의 신호탄으로 한나라를 공격했을 때 한나라에서는 예상대로 한비자를 사신으로 보내어 침공을 막으려고 하였고, 한비자는 진시황에게 가서 한나라를 공격하지 말고 조나라를 공격해야 하는 이유를 진시황에게 설명했는데
- 첫째. 한나라는 이미 진나라의 속국이나 다름없어 한나라를 공격하면 아무도 진나라를 믿지 않게 될 거다.
- 둘째. 한나라가 멸망하면 조나라가 즉각적으로 위나라와 동맹하여 조나라를 공격하기 힘들어진다.
- 마지막 이유. 조나라를 먼저 공격해 위나라와 제나라를 정벌하면 한나라는 편지 한통으로 항복하게 되니 굳이 공격할 필요가 없다.
이상 3가지 이유를 들었다.
한비자는 원래 말더듬이라 달변가는 아니였지만 논리 정연한 글솜씨에 진시황은 넘어가버리고 게다가 한비자는 진나라 같은 대국이 요가를 이용하여 뇌물로 타국의 관리를 매수하는 건 법가사상을 기초로 하는 진나라에겐 맞지 않다고 요가를 욕하였다.
이를 알게 된 이사와 요가는 진시황에게 한비자는 한나라의 왕족 출신이라 진나라에 대한 충성심이 조금도 없고 한비자가 이야기한 계책은 전부 한나라를 위한 계책이라고 설득하여 한바자를 감옥에 가두고 독살시켜버렸다.
여기서 만약 진시황이 한비자를 죽인 이사와 요가를 원망해 진상을 밝히고 이사와 요가를 처벌할려고 했다면 얼마든지 할 수 있었지만 진시황은 이사와 요가의 계획의 실용성을 충분히 인지하고 그리하지 않았다. 대신 한비자가 죽은 이후 한비자를 사면하여 그의 정책과 사상을 이용하고 알릴 수 있게 하였다.
이사가 한비자를 죽인 것은 어디까지나 정치적 견해가 달라 죽일 수밖에 없는 것이지 한비자에 대한 질투가 아니었다. 설사 한비자와 친한 친구사이였다 해도 한비자가 한나라를 정벌하는데 방해가 되어 죽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1.1 미디어 믹스
삼국지 12,13 |
삼국지 12에서는 전국칠웅 시나리오에서 한나라 소속으로 등장. 같은 동창(?)인 이사보다 통솔, 지력은 높고(각각 33, 90) 무력은 이사가 더 높고, 정치는 이사와 같다. 전법은 문무저하
삼국지 13에서도 등장. 능력치는 33/17/90/98로 중신특성은 상업중시. 전법은 수비명령. 전형적인 문관이므로. 후방 내정용으로나 쓰자. 특기는 상업3 / 문화4 / 순찰7
2 한비자와 그 일파가 쓴 저서
전한 시대에 정리된 것으로 추정되는 한비자와 그 후학들이 쓴 논저이다. 55편 20책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이 중 한비자가 직접 쓴 것으로 추정되는 저서는 오두, 현학(顯學), 고분이다.
성인은 수백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하니 평범한 사람들로도 굴러가는 제도 구축에 노력하는 것이 더 나은 일이라 역설하였다. 성인의 현능함을 이용하는 것이 무용하다고 역설한 것은 법가의 공통된 견해이다. 또한 한비자는 다른 학자들이 옛성인들을 언급하는 것을 비판했다. 한비자 본인도 옛사람들이나 그들의 시대가 더 좋았을지도 모른다고 인정한다. 허나 시대가 바뀐 까닭에 옛날과 같이 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옛날에는 사람의 숫자가 적었으므로 재화가 넉넉하였다는 것이다.[2] 허나 오늘날을 돌이켜 보면 백성들은 아들 다섯을 부양하기에 많다고 여기지 않으나, 이 다섯 아들이 제각기 다섯 아들을 낳으면 할아버지는 스물 다섯의 손자가 생기니 자연히 차지할 수 있고, 재화가 줄어들어 다툼이 생긴다. 그러므로 새 시대에 맞는 새 정책이 필요하며, 한비자는 이를 옛 성인의 시대라 할지라도 제각기 다른 시대의 성인의 계책을 실행한다면 웃음거리가 될 것이라며 다시금 수주대토에도 빗대어 설명하였다. [3][4]
법(法)과 술(術)과 세(勢)를 중시했다. 이는 한비자가 최후의 법가이자 동시에 법가를 집대성한 법가의 거두로 불리는 이유이다. 한비자 이전의 법가에는 크게 3가지의 계통이 있었다. 첫째로 신도의 계통을 꼽을 수 있는데 이들은 세를 중시했다. 둘째로 신불해의 계통을 꼽을 수 있는데 이들은 술을 중시했다. 셋째는 상앙의 계통인데 이들은 법을 중시했다. 한비자는 어느 하나라도 빼놓을 수 없다고 여겼다.
한비자에 따르면 세는 군주에게 있어서 밑천이다. 일찍이 신도가 두 신하와 한 군주가 세력의 균형을 이루고 있을 때를 언급했다. 임금은 두 신하 중 하나를 쳐서 세력의 절대우위를 점하라는 충신의 간언을 무시하였다가 한 명의 신하가 다른 신하를 쳐서 세력을 흡수하자 열세에 놓여 당하고 말았다. 이처럼 세는 군주에게 있어서 기본적인 밑천이다. 술은 군주가 신하를 부리는 술수이다. 군주는 적절한 신하를 뽑아 임용해야 하며 신하의 실적에 따라 상벌을 명확히 해야 한다. 군주가 신하를 제대로 부리지 못하면 국정은 온전히 운영될 수 없다. 법은 신하가 백성을 다스리는 규칙이다. 법이 엄정하지 못하면 나라가 어지럽다. 세, 술, 법을 적절히 병용하는 것이 치국의 요체이다. 법과 술은 군주의 수단이며 세가 없으면 수단을 부릴 힘이 없다. 한비자의 많은 부분은 술에 할애되어 있다.[5]
고분편에서 한비자는 술과 법을 다루는 선비에 대해 논한다. 지술지사, 술을 아는 선비는 식견과 통찰력이 있어야 한다. 이를 통해 사리사욕을 취하려는 신하들이 꾸미는 음모를 밝힐 수 있다. 능법지사는 법을 아는 선비인데 굳세고 곧아야 한다. 굳세고 곧지 못하면 간교함을 바로잡을 수 없기에, 이를 등용해 사리사욕을 꾸미는 간신과 귀족을 몰아내야 한다. 그러나 세를 따르지 못할 경우 법술지사는 누명이 씌워져 죽거나, 자객의 손에 목 숨을 잃을 것이다. 법술지사는 군주의 마음을 사로잡지 못하면 저러한 운명에 취할 것이다.[6]
한비자는 순자의 제자이므로 순자의 영향을 받았다. 순자는 순자는 유가 중에서도 상당히 논리적인 부분을 중시했는데 이는 당시 전성기를 누리던 명가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한비자는 명가의 영향도 받았다. 명가의 주된 노력 중 하나는 이름과 실질을 알맞게 부합시키려는 것이었다. 유가에서는 이것이 아비가 아비답고 아들이 아들다운 윤리론으로서 나타난다. 한비자에서는 이름과 실질의 부합이 관직에 있어서 중요하다고 여긴다. 재무부 장관이라는 이름이면 재무부 장관다운 실적이 있어야 하며, 임명한 이후에는 명과 실이 잘 부합되는가 심사하여 상벌을 내려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를 법가의 다른 말로 표현하면 형명(形名)이다.
다시 말하자면 재무부장관은 관명이다. 재무부장관이 해야 할 일은 이름의 내용이자, 직(職)이다. 재무부장관, 곧 재무부장관 직을 맡은 사람이 바로 실이며, 다른 말로는 형이다. 형명상합, 명실상합등은 명과 실, 직과 형이이 조화로운 상태를 이른다. 순명핵실(循名核實), 종합명실(綜合名實)은 이를 잘 판단해 상과 벌을 내리는 것을 말한다. 이는 술에 속하는 것이다. 한비자는 상벌은 군주의 두 가지 권병, 도구라 말한다.
한비자는 순자의 제자이기 때문에 더욱 상벌을 중시했다고도 할 수 있다. 인간은 본디 호오의 감정을 지닌 존재이다. 이익을 좇고 해를 꺼린다. 그러므로 이해로써 사람을 부릴 수 있다. 인간이 선하지 않음은 모든 법가가 주장하는 바이지만 한비자는 더욱 강하게 주장한다. 한비자 육반편에는 부모 자식의 관계에 멋지게 빗대어 설명한다.
부모가 자식을 대할 때에도 아들은 기뻐하나 딸은 꺼린다. 같은 몸에서 나왔으나 아들과 딸 사이에 구별이 생기는 것은 부모가 훗날의 장기적인 이익을 계산하기 때문이다. 부모가 자식을 대할 때에도 계산하는 마음이 있는데 부모자식도 아닌 관계는 어떠하겠는가?
외저설좌상편도 비슷하다.
품꾼을 샀을 때 주인이 돈을 주고 밥을 맛있게 해주는 것은 품꾼을 사랑해서가 아니라, 그래야만 품꾼이 열심히 일하기 때문이다. 품꾼이 열심히 일하는 까닭은 주인을 사랑해서가 아니라 열심히 일해야 반찬이 맛있고 품삯도 쉽게 받기 떄문이다. 주고 받음이란 이러하다. 마음의 모든 작용은 한결같이 자신을 위하는 마음과 함께 한다. 그러므로 사람은 이익이 걸리면 적이라도 화해하나 손해가 생기면 부모자식간에도 원망한다.
앞서 옛날에는 사람이 적었고 재물이 많았으며, 오늘날에는 사람이 많아 재물이 적어졌다고 한비자는 말한다. 봄에는 형제끼리도 양식을 양보하지 않지만 가을에는 나그네에게도 밥을 준다. 사람의 인성이 옛날에는 관대했고 오늘날 야비하지 않다. 다만 환경의 차이이다.[7] 형벌과 정치는 그러므로 시대에 따라 강하고 약하고 차등이 필요하다. 현학편에서 한비자는 공맹의 덕치와 예치는 무시한다. 흉포를 막는 것은 위세일 뿐이지, 덕후(德厚) 따위로는 혼란을 막을 수가 없다고 한다.21세기를 꿰뚫어 보는 한비자의 혜안! 덕후무용론! 남이 내게 선행할 것을 의지치 않고, 남이 내게 감히 나쁜 짓을 못하도록 하겠다. 남이 내게 선행할 것을 의지하면 한 나라 안에 열댓 명도 의지할 수 없겠지만, 감히 악행을 저지르지 못하게 한다면 한 나라를 숙정할 수 있다. 통치자는 다수에게 통할 방법을 택해야 하므로 덕은 버리고 법을 따라야 한다고 주장한다. 법은 필연이지만, 선행은 우연인 것이다.
한비자의 사상은 도가 사상과도 통한다.[8] 한비자와 명가도 그렇듯 당대의 제자백가들은 서로 영향을 주고 받았는데 법가의 통치술과 도가의 통치술은 본래부터가 서로 통하는 바가 많았다. 개중에서도 대단한 지혜를 가진 성인이 쓸데없다고 주장하는 거나 무위의 통치술 등은 도가와 법가가 특히 공통적으로 주장하는 바이다. 도가의 통치술은 많은 부분이 무위의 통치술로 화를 피해 은거하는 것에 집중한다. 이는 앞서 논한 신도가 세를 중시함과 통한다. 군주는 현명함으로 세에 거스르는 일을 꾸밀 필요가 없이 세에 따라서 행동하라는 것이다. 앞서 두 명의 신하와 한 명의 군주의 이야기를 했는데 군주가 세에 따라 두 명의 신하 중 한 명을 쳐서 세를 흡수했거나, 한 명의 신하가 승리한 후에는 늦더라도 왕위를 내려놓고 은거했다면 화를 피했을 것이다. 따라서 신도는 때로는 법가로 분류되고 때로는 도가로 분류된다.
본래 무위의 술은 공자가 먼저 주창한 것이다. 공자의 주장에 따르면 순이 바로 무위의 술을 활용하였다. 순은 그저 조정에 장중하고 단정하게 앉아만 있으면 그만이라는 것인데 이것은 유가에서 말하는 덕치라고 할 수 있다. 덕으로 사람을 교화한 경지를 말하는 것이다. 반면 도가에서 말하는 무위는 작위가 없어 몸이 안전한 은자의 경우를 이른다. 한비자는 이를 결합시킨 것이다. 무위는 무위이되 그 꾸밈이 없음은 유가도 아니고 도가도 아니다. 세에 있어서 무위는 두 신하와 한 명의 군주의 경우처럼 세를 따라가는 무위를, 술에 있어서 무위는 군주가 직접 일을 하지 않고 신하를 세워서 상벌을 다루는 것을, 법에 있어서 무위는 역시 군주가 직접 일을 하지 않고 신하가 법을 적용시키는 것을 가리킨다. 이를 보면 신도는 법가와 도가의 다리 역할을 하고 있으므로 때로 법가로 분류되고 때로 도가로 분류되는 것이 각자 이유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양권편은 자못 명가와 도가의 흥취가 섞여 있다. 군주는 중앙에서 세를 쥐고 있으면서 신하들을 열심히 일한다는 것이다. 군주는 신하의 일처리를 관찰하며 형과 명의 기준을 바르게 세우는 것이 이치를 바르게 하는 것이다. 각 사물과 재료는 그에 적합한 일과 용도가 있다. 모든 것이 적합한 곳에 처하면 군신 상하는 무위의 도로 다스릴 수 있다. 닭은 새벽을 알리고, 고양이는 쥐를 잡는다. 신하가 그와 같다는 것이다. 군주는 닭과 고양이를 기르면 그만이지 결코 쥐를 잡을 재능, 새벽을 알릴 재능이나 근면함을 갖출 필요가 없다. 만약 군주가 어떤 능력을 특별히 더 귀중하게 여긴다면 신하는 그 능력을 이용해 군주를 기만할 것이다. 논변과 총명함을 군주가 사랑한다면 신하가 그 능력을 이용할 것이니 결코 좋지 못하다는 것이다. 명가와 도가의 흔적을 엿볼 수 있다.
군주는 이처럼 신하에게 일을 맡긴 채, 명과 실의 조화를 살펴 상벌이라는 두 권병을 이용해 그들의 공효를 평가한다. 이전 버전의 한비자 문서에서는 한비자가 도가와 통하지만 노자에 국한되지 장자와는 별 관련이 없다고 말했으나, 장자 천도편에도 비슷한 구절을 찾아볼 수 있다.[9][10]
도덕경을 인용하는 해노, 유노 편 등은 비록 사마천은 한비자의 저작으로 여겼지만, 사실 후세의 편집이라는 학설이 유력하다. 이들이 도가와 통하기는 한다. 말하자면 장자는 그냥 사람들을 자연스럽게 내버려 두면 알아서 잘 살지 않겠냐고 했다.[11] 노자는 덜 욕심내고 무지한 상태에 머물면 순박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다른 도가의 일파는 사물이란 영위할 만한 것은 못 되지만 영위하지 않을 수 없고, 일은 은닉되어 있지만 도모하지 않을 수 없고, 법은 조잡하지만 실시하지 않을 수 없다고 여겼다. 이들은 분수, 형명, 인임, 원성, 시비, 상벌 등을 논하긴 하였으나 역시 하늘, 도덕, 인의 등을 중시했다. 그러므로 한비자는 도가와 통하되, 또 다르다.
현학편에서는 자유주의 경제학 비슷한 이야기도 한다. 곧 유가에 대한 비판인데, 유가는 빈궁한 자에게 토지를 나눠주자고 하지만 똑같은 조건 하에서 빈궁한 자와 부유한 자는 그 노력에서 차이가 나는 이유가 있을 것이므로 유가의 주장은 공리공담에 불과하며, 오히려 그냥 내버려두면 모두 열심히 일할 것이기 때문에 생산이 증가될 것이라는 얘기도 한다.
훗날 이른바 신도가, 곧 현학의 무리들도 이 통치술과 연결되는 바가 있다. 하지만 대차게 망하고 말았다.
사상이 비슷하기 때문에 마키아벨리와 비교되기도 한다...고 주로 알려져 있으나, 실은 사상적 면에서 딱히 비슷한 점은 찾아보기 어렵다. 비슷한 느낌을 주는 것은 정치에서 '인의' 또는 '도덕'에 큰 무게를 두지 않기에 비정하게 보이기 때문이다. 구체적인 내용에서는 마키아벨리는 정치적인 면을, 한비자는 법에 의한 복종을 강조하기 때문에 접점이 별로 없다. 대표적으로 '신용'에 대한 둘의 관점은 '신용' 목적이 아니고 나라를 다스리는 도구라는 점에서 의견이 일치하지만, 마키아벨리는 할 거짓말 다 하면서 어떻게든 '신용'이 있는 척만 하면 되는 데 반해서 한비자는 끝까지 신용이 있는 척 가장할 수는 없기에 실제로 '신용'이 있어야 한다고 이야기하고 또 작은 틈이 어렵게 쌓아놓은 '신용'을 무너뜨릴 수 있기에 절대로 거짓말을 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더 본질적인 면에서 보면, 흔한 대중의 오해와는 달리 한비자와 마키아벨리는 비정한 권모술수주의자가 전혀 아니고, 윤리적 원칙의 중요함을 부정한 인물도 아니다. 다만, 현실주의자 로써 윤리적 원칙, 즉 '옳은 것' 이 덕이나 인의 등을 내세운다고(단, 덕 이나 인의라는 개념은 현대인 기준으로는 너무 추상적이니... 교육 이나 계몽등의 형이상학적인 수단이라고 생각하면 될 것이다.) 지켜지는 것이 아니라, 현실적인 강제력을 통하여 지켜지게 해야 하는 것이었다고 주장한 것 뿐이며, 이러한 현실주의가 후세에 오독되어 마치 세상에는 덕도 인의도 없고, 윤리도 없이 그저 실질적인 강제력이 세상의 규범 전부라고 주장한 것처럼 받아들여진 것. 한비자와 마키아벨리의 공통점이란 딱 이정도다. 이 정도의 공통점으로 '사상이 비슷하다' 고 평가될만한 것인지는 물론 독자의 판단에 맞긴다.(사족이지만, 이 정도의 공통점으로 비슷하다고 판단할 만 하다면 정치나 법, 철학이나 사상등의 사회적 상부구조가 경제적 이해관계와 같은 하부구조에 의해 결정된다고 주장한 마르크스 역시 한비자와 마키아벨리와 비슷하다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두 인물의 주장 자체를 놓고 보면 그리스-로마 철학 이래 수천년간 축적되어 온 '서양 철학의 기반 위에 세워진' 마키아벨리의 사상과 제자백가 이래 수천년간 축적되어 온 '동양 철학의 기반이 된' 한비자의 주장을 같은 선에 놓고 비교하기는 대단히 곤란하다. 누가 더 낫고 더 못하다는 차원이 아니라, (법가와 한비자의 용어를 빌리자면) 한비자는 '법'과 '술'과 '세'를 모두 자신이 제시해야 하는 입장었지만 수천년간의 사유를 통해 '법'의 개념이 상당히 명확해진 시대에 살았던 마키아벨리는 기존에 형성된 '법'에 대한 공감대 위에서 그것을 실천하기 위한 '세'와 '술'을 섬세하게 섦명하는 데 집중할 수 있었다는 것. 그래서 한비자는 법가 철학을 집대성한 이이고, 마키아벨리는 근현대 정치학의 시초인 것이다.
당시의 다른 사상가들과는 다르게 세상이 진보하고 발전한다고 생각했다. 이것은 상당히 혁신적인 사상이다.[12] 당시의 사상가들은 주로 옛 성인들에게 가탁해 주장을 수립하기를 즐겼기 때문이다.[13] 한비자는 중국 고대 사상가 중에서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하니 새 시대가 찾아올 때마다 새로운 변화를 꾀해야 한다고 선언한 사상가이다.[14]
다만 사회변화에 대한 인식과는 달리, '오두'등지에서 상공업에 대한 인식은 당대의 다른 사상가들과 별반 다르지 않게 나쁘게 보았다. 다만 시대 상황을 고려해야 하는 것이, 고대 중국은 어디까지나 농업 중심의 사회였으며, 상공업은 당연히 농업보다 급수가 떨어지고 저울눈을 속이는 취미를 가지고 있어서 고대 국가 입장에서 통제를 하기 위한 품이 많이 들었다. -특히 농업 중심의 자급자족의 시대에서-상업은 물자의 이동이라는 눈에 잘 보이지 않는 부분보다도, 실제로 생산하는 것이 없음에도 중간에 자기 이윤만 챙기는 모습이 더 눈에 잘 들어온다. [15] 또한 한비자가 살던 시대의 공업은 좀 더 나은 농기구나 병장기 같은 부국 강병에 도움이 되는 물품을 만드는 것을 의미하기 보다는, 주로 사치품 제작을 의미했다.
위에 말한 '신용'을 당장의 결과보다 우선하였기에 일종의 과학적 방법론을 제시하기도 하였다. 누군가 어떤 사업을 함에 있어, 그 사업의 결과가 사업 전에 그가 예상한 것보다 나쁘게 나오면 사업 실패를 이유로 처벌해야 하지만, 그 예상보다 더 좋은 결과를 얻어도 속임을 이유로 처벌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결과에 따라 사전의 예상에 대한 평가를 바꾸지 말라는 것이다. 그런 원칙에 따라 틀릴 때가 있는 점이나 신은 신뢰할 수 없는 것이므로 나라를 다스리는 데에 이용하기 부적합하다고 하였다. 이는 수천년 후의 칼 포퍼의 '반증'과도 유사점을 보인다.
인터넷상에서는 한비자의 나라가 망하는 10가지 징조라는 글로 유명한데 원 출처는 다음과 같다.
자세히 읽어보면 일부 문장은 한비자의 의도와 다르게 왜곡되었다는 점을 알수있다.- ↑ 이름과 실상이 부합하는지 여부를 따지는 논법
- ↑ 관직에 대해서도 같은 말을 한다. 요순 시절의 일화를 보면 천자도 육체노동을 하는데 살림이 풍성치 않았다. 그러므로 천자를 쉽게 사양했다. 하지만 한비자 당대는 현령 자리를 해도 자손에게 넉넉한 재물을 남긴다.
- ↑ 한비자의 정치개혁이 지나치게 법과 세를 중시하여 비현실적이라는 의견도 있다. 일례로 땅도 작고 머릿수도 적으며 사방이 강대국인 약소국에게 '외교로 살아남으려 하기 보다는, 법치로 강대국이 되어 이 위기를 벗어나면 된다.'라는 빵이 없으면 케이크를 먹으면 되지같은 주장도 보인다. 한비자의 주요 글들이 쓰인 전국시대 후기의 상황을 보면, 이미 진나라가 나머지 6국을 합친 것 만큼 강대해진 상황에서 6국이 귀족들의 반대가 없더라도 수 년이 걸릴 정치개혁을 하기에는 너무나도 시간이 촉박했다. 이러한 점은 통치에 대한 일반 이론에 대한 글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고, 당시 한나라 임금에게 국정개혁에 대해 바쳤을 편들에서도 보인다. 그리고 이는 적어도 대등하거나 강대한 다른 나라와의 관계에 대한 언급이기에 통일 제국의 통치자를 염두에 두고 쓴 글도 아니다.
- ↑ 그러나 이와 같은 비판은 이론서와 실정에 대한 구분을 잘 하지 못하는 비판이라고 할 수 있다. 한비자가 쓴 한비자는 이론서이며 각주에 달린 비판은 실정에 맞춘 임기응변을 요구하는 것이다. 한비자의 저술이 당대 실정에 맞지 않는 부분이라고 할 수 있겠으나 장구한 이론서를 쓰고자 할 때 그와 같은 것은 시간과 노력과 페이지가 남았을 때 하는 두 번째 고려사항이지 첫 번째 고려사항이 될 수 없다.
- ↑ 군주가 무엇인가 좋아하거나 싫어한다는 감정표현조차도 거기에 남들이 영합하여 나라를 그르칠 결정을 하게 할 수도 있으니 숨겨야 하며, 극단적으로는 잠꼬대로 국가 중대사나 그에 대한 군주 자신의 생각을 말할 수도 있으니 잠자리도 혼자 해야 한다고까지 말한다. 군주는 인간성을 제거해야 한다는 이야기인 동시에, 고위 공직자의 엄정한 공정성을 요구하는 주장.
- ↑ 문전편에서 당계공과 한비자의 대화가 언급되는데, 당계공은 화를 피하고 몸을 보존하는 도가의 은일의 원리를 따르지 못한다고 한비자를 걱정한다. 한비자는 이를 수긍하나, 한편으로는 백성의 이익과 서민의 안녕을 도모하는 것이 법가의 정신이므로 일신의 안녕만을 도모하지는 않겠다고 한다.
- ↑ 순자의 영향을 엿볼 수 있다.
- ↑ 특히 한비자에 실려있는 '해로'와 '유로'는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도덕경 해설서로 지금 전해져 오는 도덕경의 글과는 조금 다른 글자를 쓰기도 하기에 도덕경 원전에 대한 연구에 의미를 갖는다. 다만 그 해석의 내용은 단장취의의 한계를 보인다.
- ↑ 장자 천도편에서도 신도의 사상과 비슷한 구절이 있다. 무위하면 천하를 부리기에 여유가 있지만 유위하면 천하로부터 부림당해 부족하다는 구절이 그것이다. 군주와 신하가 동시에 무위하거나 유위하면 군주와 신하가 어울리는 것이니 그르다. 군주는 무위함으로 천하를 부려야 하고, 신하는 유위해서 부림당해야 한다. 옛날 왕들은 지혜로워도 몸소 생각하지 않았고, 달변이어도 몸소 말하지 않았고, 능력이 뛰어나도 먼저 도모하지 않았다. 하늘과 대지가 꾸미지 않아도 만물이 변화하고 생육되며 제왕이 무위해도 천하의 공적으 이룩되는데 이러한 무위의 덕이 천지, 만물, 인간을 다스리는 도이다. 그러므로 옛날 대도를 밝힌 사람은 하늘, 도덕, 인의, 분수(인의의 질서로 나뉘어진 몫을 지킴), 형명, 인임(재능에 따라 직책을 맡김), 원성(심사, 판별), 시비, 상벌을 밝힌다. 상벌이 밝혀지면 귀천과 지우에 따라 직위와 자리가 바루어져 천하가 태평해진다고 했다. 비록 형명이나 상벌을 낮은 위계에 위치시켰으나 이는 한비자와 통하는 구절이다.
- ↑ 법가에 대한 도가의 비판은 똑같은 맥락을 따라가는데 형명과 상벌이 낮은 위계의 것이므로 이것만을 논하는 자는 부리는 자가 아니라 부림당하는 자라는 것이다. 말하자면 형명과 상벌을 논하나 사적인 정에 이끌리지 않는 사람의 수는 극히 적다. 이것이 법가의 약점이라는 주장이다.
- ↑ 순자는 이를 자연과 인간사를 혼동한다고 깠다.
- ↑ 한비자를 처음이라고 단언하기 어려운 것이 상앙의 상군서에도 이와 비슷한 생각을 하는 구절이 있다.
- ↑ 옛날부터 내려오는 경험을 중시하며, 그리고 자신이 살아가면서 얻는 경험을 바탕으로 생활하며 농업사회의 특성으로 보는 의견이 있다. 왜냐면 그리스와 같은 해양, 상업세력과는 확연히 다른 특성이기 때문이다.
- ↑ 플라톤을 위시한 몇몇 그리스 철학자들은 유학자들과 마찬가지로 '사회는 변화한다.'라는 명제는 받아들였지만, '나쁘게'라고 생각했기에 사회 변화를 최대한 억제해야 한다....고 말했는데, 모든 그리스 철학자들이 그런 것만도 아니다.
- ↑ 이런 중농주의적 인식은 근대 서유럽이나 조선 후기의 실학자에게도 볼 수 있고, 현대에 이르러서도 금융권에 불신을 갖고 있는 사람들 가운데에서도 볼 수 있다. 그렇다고 이런 인식이 현실을 꼭 잘 못 보고 있다는 것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