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환(농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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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김태환(金泰煥)
생년월일1950년 6월 29일
국적대한민국
출신학교동대문상고
포지션가드
신체사이즈170Cm
지도자국민은행 농구단 감독 (1989~1998)
중앙대학교 감독 (1998~2000)
창원 LG 세이커스 감독 (2000~2004)
서울 SK 나이츠 감독 (2005~2006)
종교불교

1 소개

한국의 농구 감독. 대학을 나오지 않고, 밑바닥에서 출발해 프로팀 감독까지 올라간 근성의 인물. 그리고 공격 농구의 상징이다.

2 선수 시절

원래는 야구 선수였다. 선린중까지는 야구를 했지만, 집안에서는 유일한 아들인 그가 운동 대신에 공부를 하기를 원했다. 하지만 기어이 운동을 하려고 했고, 급기야 선린상고 시험에서 일부러 시험을 망치며 운동을 하겠다는 의지를 보였다. 그것까지는 좋은데, 그러면서 학교에 떨어지는 통에 야구를 못하게 된 것. 그렇지 않아도 키가 작아서 운동 선수로 대성하기 힘들다는 평도 있었는데, 학교 진학도 어려워지자 발등의 불이 떨어졌다. 결국 동대문상고로 가서 고등학교 1학년 때, 처음 농구공을 잡고 3년을 보냈다. 하지만 구력 3년짜리 170cm의 검증되지 않은 가드를 받아줄 대학은 어디에도 없었다.

3 지도자 시절

집안 형편이 너무 좋지 않던 상황에서 대학은 사치였고, 결국 김태환이 선택한 것은 국민학교 농구부 코치. 19살에 홀어머니와 여동생의 생계를 위해 수유국민학교 코치로 지도자 경력을 출발했다. 국민학교에서 6년을 코치로 뛰다가 무학여중 코치 자리를 얻었는데, 연습경기를 실패하자 당시 교장이 "쓸 만 하다고 해서 데리고 왔다니 별 수 없군." 하고 나갔다. 이 때, 자신의 처지. 학벌도, 연줄도, 신체적 강점도 없는 자신의 현실을 절감하고 승리를 위해 죽도록 노력했다. 결과는? 무학여중은 1976년 모든 대회 전승 우승을 했다.

중학 무대에서 이름을 날린 그를 여고 학교에서 그냥 두지 않았고, 1980년에는 선일여고 코치로 부임해서 또 다시 전승을 했다. 그리고 한 때, 생계를 위해 1983년에는 바레인으로 건너가서 농구 코치를 하며 돈을 벌었다. 그리고 마침내 1985년에 진성호 코치가 떠난 국민은행 여자 농구단의 코치로 임명되어 드디어 메이저 무대에 진입할 수 있었다. 임영보(1978~1987 재임.)-진가일 감독(1987~1989 재임.) 곁을 거치며 코치로 훈련을 담당하면서 선수들을 조련하다가 결국 1989년, 국민은행 감독에 임명되었다.

국민은행 감독으로 혹독한 스파르타 식 훈련과 체력을 강조하는 농구를 선보이며, 당시 최강이던 삼성 생명의 아성을 두 차례 무너뜨리며, 1991년과 1994년 농구대잔치 우승에 성공했다. 스카우트 싸움에서 밀리던 은행권 팀이 차지한 우승이라서 더 의미 부여를 하는 사람이 많다. 이 때 이후로, 김태환은 젊은 명장으로 이름을 날리게 되었다.

국민은행 감독 막판인 1996년에 심판 판정 문제를 둘러싸고, 심판의 경기 조종설을 제기하다가 징계를 먹기도 했고, 어차피 여자 농구계에서 이룰 것은 다 이뤘기 때문에 미련도 남지 않았던 상황, IMF로 인한 여자 농구계의 붕괴 속에서 결국 여자 농구를 떠나게 된다. 마침 새로운 수장과 함께 재 도약을 노리던 중앙대학교에서 그를 스카우트했고, 그렇게 전무후무한 고졸 출신 대학 지도자가 등장했다.

송영진, 김주성, 황진원 등을 스카우트하며, 중앙대를 일약 공격 농구를 구사하는 대학 무대의 최강자로 변신시키며, 중앙대의 전성시대를 열었다. 1998년에 스카우트 관련해서 돈을 받았다는 혐의로 구속되었지만, 재판 끝에 무죄가 선고되면서[1] 중앙대 감독 직을 계속 유지할 수 있었다. 그리고 중앙대 감독에서 얻은 명성을 통해 마침 이충희 감독 체제에서 새로운 체제를 만들려고 했던 창원 LG 세이커스에서 그를 불렀고, 그렇게 프로 감독이 되었다.

창원 LG에서 보여준 농구는 한 마디로 공격 농구의 끝. 프로농구 역사상 최초이자 아마도 마지막이 될 평균 득점 100점의 무시무시한 런앤건을 구사하며 창원 LG를 그야말로 극단적인 공격 농구의 끝으로 보여줬다. 전임인 이충희 감독이 극단적인 수비 농구를 구사한 것과 완전히 정 반대의 농구. 화끈한 공격 농구를 구사하며 부임 첫 해인 2000-01 시즌에 정규시즌 2위를 차지했고, 챔피언결정전에서 아깝게 지며 준우승에 만족해야 했지만, 창원 LG를 최고의 인기 구단으로 만들었다.

2001-02 시즌은 잠시 쉬어갔지만, 2002-03 시즌 트레이드로 팀을 갈아 엎고, 전력을 재정비해서 또 다시 공격 농구 돌풍을 일으키며 34승 거두며 구단 최고의 성적을 냈다. 시즌 1위인 대구 동양 오리온스와는 상대전적에서 밀려 2위. 그러나 이 2위가 하필이면, 상성상 극악이던 원주 TG삼보 엑서스를 만나 2승 3패로 떨어지는 결과를 낳고 만다. 거의 다 잡았던 5차전에서 데이비드 잭슨의 미친 쇼에 밀려 떨어진 것. 그 뒤로 공격 농구의 동력을 잃으며, 결국 재계약에 실패하고 만다.

잠시 쉬다가 2005년 서울 SK 나이츠의 감독으로 부임했고, 감독으로 또 다시 공격 농구를 추구하며 공세를 벌였지만, 결국 한 시즌 만에 중도 해임되고 말았다. 다만, 스타일리시한 공격 농구에 열광하는 팬들이 많기 때문에 여전히 그의 농구를 그리워하는 사람들이 많다.

4 해설위원직

감독 생활을 접고 잠시 압구정동에 고깃집을 내고 외도를 하다가 사업을 접고, OBS를 거쳐 강을준 해설위원이 KBS N SPORTS로 옮긴 후 현재 MBC SPORTS+에서 농구 해설을 하고 있다. 구수한 목소리에 괜찮은 해설 실력을 보여준다는 평. '짬뿌슛' 같은 재미난 영어발음과 입담이 마치 80년대 복싱해설을 연상케한다며 농구 팬들의 반응은 매우 좋은 편이다. 엄청난 양의 농구 정보를 수기로 작성해 준비하는 열정이 대단하고, 매 경기마다 속담, 사자성어, 해외 격언, 진화론(...)에다 축구같은 타 스포츠의 통계까지 접목시켜 고퀄리티 해설을 하고 있다. 김선형이 덩크하는 것은 아이돌에게 트로트를 시키는 것이라든가... 거의 모르는 분야가 없을 정도로 다방면의 걸친 습자지 지식으로 농구계의 김구라로 불리우기도 하며, 스포츠계 3대 개드립퍼 구라해설가: 야구의 허구연(허구라), 축구김동완(스페셜완), 농구의 김태환(고깃집사장님) 외모나 말투가 배우 주현을 연상케한다고 하여 해설계의 주현이라고도 불리운다. 김태환식 대표적인 표현은 "다소", "짬푸", "크슛", "~ 이라고 보여지네여엉", ~한다는 거, ~있대는거↘↗등이 있다.
다만 나이가 있어서인지 반대로 상당히 틀에박힌 농구관을 가진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개인기를 부리는 선수를 별로 탐탁치 않게 생각하는 등 빠르게 변화하는 현대농구와는 약간 동떨어진 이야기를 하기도 한다.

5 김태환 어록

이 분도 강을준 감독이나 안준호 감독 못지 않게 어록이 풍부하다. 한 번 감상하자.

SK 감독 시절 외국인 선수가 부진하자 曰, "너는 나이가 몇갠데 레얍을 못넣어?"
데이먼 브라운이 개인 플레이하니까 통역사에게 曰, "얘 일대일 하지 말라고 해. 일대일 하면 빼버릴 거야."
SK 감독 시절 전희철 에게 "희철아...너 아직 니가 잘나간다고 생각하니???"
역시 SK 감독 시절 팀이 근소하게 리드하고 있는 상황에서 정락영이 특유의 오버스런 플레이로 턴오버하자, "꼭 여유있을 때 그 지랄이냐고!!!!"
SK 감독 때, 김일두가 신인으로 한참 날리다가 어느날 갑자기 난사하고 부진했다. 그러자 작전타임 때 曰, "너 제주도에 있는 고구려대 나왔냐?"
SK 감독으로서 마지막 경기. 외국인 선수 루로가 막던 화이트가 1,2,3쿼터 삽질만 하다가 갑자기 4쿼터에 폭풍 7득점 할 때 타임을 불러서 루로 빤히 보면서 曰, "얘가 아직 화이트를 몰라서 그래"
이번에는 중앙대학교 감독 시절, 조우현이 나가서 똑같은 플레이를 고집스럽게 하자 타임을 불러서 하는 명 대사. "니가 국민학생이냐 왜 말을 그렇게 안들어"
중앙대학교 감독 시절, 당시 송영진, 황진원, 김주성 등이 활약할 때, 선수들이 심판 판정에 억울해하며 경기에 집중을 하지 않자 작전 타임을 불러 놓고 "야~ 심판하고 싸움은 내가 할테니까 늬들은 농구나 해~!!"
작전 타임 때 쓰는 영어 한 마디. "드리블을 롱하게 치지 말고, 쇼트쇼트하게 치고 패스를 기브하란 말야!" 지상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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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어떤 기록에는 결국 무혐의 처분이 되었다고 한다. 자세한 사항을 확인바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