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페인

Sinn Féin
창당일1905년 11월 28일[1]
1970년[2]
이념민족주의, 민주사회주의
슬로건평등한 아일랜드의 건설
(Building an Ireland of Equals)
대표게리 애덤스
원내대표게리 애덤스[3]
데이비드 컬리네인[4]
레이몬드 매카트니[5]
마티나 앤더슨[6]
국회 의석 수아일랜드 공화국 상원 3석 / 60석
아일랜드 공화국 하원 14석 / 166석
영국 하원 4석 / 18석[7]
유럽의회 의석 수아일랜드 공화국 3석 / 11석
영국 1석 / 3석 [8]
북아일랜드 의회 의석 수29석 / 108석
아일랜드정당
국회여당여당
지지
피너 게일피어너 팔
야당
신페인노동당AAA-PBPI4C녹색당사민당WUA

영국의 주요 정당
(괄호 안은 영국 서민원 의석 수)
집권당보수당
(330석)
야당노동당
(229석)
스코틀랜드 국민당
(54석)
자유민주당
(9석)
민주통일당
(8석)
신 페인
(4석)
웨일스당
(3석)
사회민주노동당
(3석)
얼스터 연합주의자당
(2석)
녹색당
(1석)
무소속
(5석)
의장
(1석)

1 개요

아일랜드 공화국북아일랜드에서 활동중인 좌파정당으로, 아일랜드 독립운동의 상징과도 같은 존재이다. 신페인이라는 단어는 게일어로 우리 자신(Ourselves)라는 뜻이다.

오늘날 신페인당은 사람들이 흔히 기억하는 20세기 초반의 신페인당과 약간의 차이가 있는데, 1970년 IRA가 북아일랜드에서의 무장투쟁 지속 여부를 놓고 분열됐을 당시 신페인 역시 분열되었기 때문. 무장투쟁의 지속을 주장한 세력[9]은 신페인 당에 잔존했고, 반대한 세력은 아일랜드 노동자당이라는 신당을 창립한다.

2 역사

2.1 독립 투쟁 시기

신페인이라는 단어가 어떻게 맨 처음 등장했는지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설이 존재하였지만, 신페인 당 본인들의 주장에 따르면 1902년 3월 17일 성 패트릭의 날을 기념하여 발간된 게일어 신문에서 '노동자 계층이 억압받는 한, 우리(Sinn Féin)들은 언제나 저항할 것이다.'라는 사설이 실린 것에서 유래하였다고 전해진다.

19세기 후반부터 아일랜드인들은 활발한 민족주의 운동을 벌이기 시작했고, 이 중에는 자신들 고유의 언어인 게일어 부흥운동도 포함되어 있었다. 게일어 부흥운동의 일환으로 더블린을 비롯한 아일랜드 내 주요도시들에서는 게일어 사교클럽이 활성화돼있던 것은 당연지사. 이런 사회적 배경 속에서 <통일 아일랜드인>(The United Irishman)와 같은 민족주의 성향 잡지를 발간하던 언론인 아서 그리피스가 아일랜드 민족주의자들을 결합하면서 1905년 신페인당은 탄생하게 된다.

하지만 신페인 설립자들 대다수가 시인하듯이 초창기 신페인당은 어떤 뚜렷한 목표의식을 지닌 독립투쟁단체가 아니라 NGO, 심지어는 사교클럽에 가까운 존재였고 아일랜드 독립운동 세력 사이에서 별다른 두각을 나타내지도 못하는 상황이었다.[10] 이런 신페인당이 급성장할 수 있었던 계기를 마련해준 것이 바로 1916년의 부활절 봉기. 사실 이 부활정 봉기를 주도한 것은 신페인 보다 훨찍 일찍부터 독립무장투쟁을 주도했던 아일랜드공화주의형제단이라는 단체였고 신페인 당은 부수적인 역할을 담당했을 뿐이었다. 그런데 신페인 당을 부활정 봉기의 주역으로 오해한 영국 당국이 신페인 당을 주로 탄압하기 시작하면서 신페인당은 대중들의 인식에 확고히 자리잡은 것은 덤이거니와 엄청난 지지를 받게 된 것.

부활절 봉기 직후 있었던 1916년의 아일랜드 의회 선거에서 신페인당은 정원의 70%가 넘는 의석을 확보하면서 단숨에 아일랜드 독립운동의 기수로 떠오르게 된다. 본래 아일랜드 의회에서 선출된 의원들은 영국 국회의사당으로 가야했지만 이들이 그럴 리가 있나.. 당연히 출석을 거부하고 1919년 아일랜드의 독립을 전세계에 선포한다. 마이클 콜린스의 영도 하에 IRA가 창설된 것도 이 때의 일. 영국 역시 무지막지한 탄압으로 대응했지만 전세계의 여론이 아일랜드에게 우호적이었던데다가, 1차대전 직후 영국 자신들의 상황도 엉망이었고, 결정적으로 아일랜드의 민심이 일편단심 IRA였기 때문에 신페인당은 마침내 아일랜드의 독립을 쟁취해낸다.[11]

2.2 독립 이후

하지만 독립과 동시에 신페인당은 커다란 시련에 부딪히게 된다. 천신만고 끝에 독립을 얻어냈지만 완벽한 군사적 승리를 바탕으로 얻어낸 독립을 아니었기에 신생 아일랜드 공화국은 영국과 정치적인 협상을 해야만 했고, 오랜 협상 끝에 아일랜드는 '북아일랜드를 영국의 영토로 인정'하며 '명목상으로는 자치국'이라는 지위와 '영국 국왕에게 계속 충성을 맹세할 것'을 영국에게 약속해야만 했던 것. 아일랜드 강경 민족주의자들에게 이 협상은 도무지 받아들일수가 없는 결과였고, 결국 신페인은 분열되고 아일랜드는 독립하자마자 내전을 겪고 만다. 어제까지만 해도 동지였던 이들은 하루 아침에 갈라졌고, 마이클 콜린스와 아서 그리피스를 비롯한 조약 찬성론자들과 이몬 데 발레라를 비롯한 조약 반대론자들이 3년 넘는 세월동안 서로에게 총구를 겨누었던 것.[12]

3년의 내전 끝에 조약 반대파들은 무장투쟁 대신 정치 투쟁으로 방향을 전환하고 공화당(Fianna Fáil)을 수립한다. 조약 찬성파들이 수립한 당은 통일 아일랜드당(Fine Gael). 이 두 정당은 2011년까지도 아일랜드에서 원내 제 1,2당을 차지하면서 아일랜드 정계를 주름잡아 왔다.

한편 영국의 영토로 존속한 북아일랜드는 이러한 타협안에 만족할 수 없었고, 새로운 IRA를 창설하여 영국을 상대로 무장투쟁을 존속해온다. 하지만 영국은 물론이거니와 믿었던 아일랜드마저 북아일랜드 내 IRA를 탐탁치않게 받아들이면서 활동에 심한 제약이 걸리게 된다. 결국 1970년에 이르면 북아일랜드 IRA마저도 무장투쟁 노선의 포기를 선언하는데, 이 과정에서 무장투쟁의 포기여부를 놓고 당내에서 격렬한 내분이 존재했다. 개요 항목에서 서술했듯 무장투쟁의 포기를 주장한 노선은 아일랜드 노동자당이라는 신당을 창당했으며, 무장투쟁을 지속할 것은 주장한 노선이 계속하여 신페인당에 남게 된다. 그렇지만 말이 분당이지, 사실상 이 과정에서 재창당을 거쳤기 때문에 현존하는 신페인당을 과연 1905년 창설된 그 신페인 당의 연속체로 보아야하는지, 아니면 별개의 당으로 보아야하는지에 대해서는 꽤나 말이 많은 판국이다.

그렇지만 무장투쟁의 지속을 주장했던 신페인 당 마저도 90년대에 이르면 한계에 부닥치고, 결국 1998년 미국 상원의원 조지 미첼[13]이 주도하는 가운데 성금요일의 협약 이라고 불리는 평화조약을 체결하면서, 신페인 당은 궁극적으로 무장투쟁을 포기하고 대중 정당으로의 활동을 선언한다.

3 여담

  • 1910~1920년대 당시 신페인 당의 독립 노선은 두 가지였는데, 하나는 마이클 콜린스가 주도하는 IRA의 무장투쟁이었고, 또다른 하나는 이몬 데 발레라가 주도하는 아일랜드에게 우호적인 국제 여론 조성, 즉 외교노선이었다. 이중에서도 이몬 데 발레라의 외교전은 미국 내 아일랜드계들의 큰 호응을 받아 아일랜드의 독립에 상당한 기여[14]를 했고 당시 미국 체류중이었던 이승만이 여기에 깊은 인상을 받고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대통령으로 취임 당시 그대로 벤치마킹한다.[15]
  • 아일랜드 내전 및 분당을 거치면서 본거지였던 아일랜드 공화국에서는 오랫동안 정치적으로 약해졌지만 아직도 북아일랜드에서는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 2007년에 원내 제2당으로 부상해 부총리를 배출하더니(참고로 북아일랜드 자치정부의 총리와 부총리는 이름만 다르지 권한은 동일하다. 제도적으로 타협을 강제한 것) 2009년에는 최다 득표 정당으로까지 성장. 심지어 최근에는 아일랜드 공화국에서도 지지율이 상승 중이다! 기존 3대 정당을 위협하는 수준이다. 이후 선거 결과가 나오면 추가바람.
  • 이 정당은 반영(反英) 투쟁 전략으로서 입후보는 하되 당선 후에 의회에 등원하지도 않고 당연히 취임 선서도 하지 않는 투쟁 방식을 아일랜드 독립 전쟁 직전부터 사용했다. 이것을 abstentionism이라고 한다. 애초에 독립 전쟁도 제1차 세계대전 직후 신페인이 영국 총선에서 아일랜드 지역구 의석 대부분을 석권한 뒤, 영국 국회에 등원하지 않고 더블린에 자체적으로 의회를 만들어(물론 영국 정부는 인정하지 않았음) 독립을 선언하면서 시작되었다. 쉽게 말해 "영국 너네들의 정통성을 인정하지 않지만 너희들의 선거 인프라를 활용해서 여론의 지지를 증명하겠다!" 무임승차? 라는 전술인 것.
    • 과거에 이 전술은 영국 뿐만 아니라, 영국과의 타협으로 생긴 아일랜드 자유국, 그리고 그 후신인 현재의 아일랜드 공화국에서까지 사용했었다. 하지만 신페인이 1980년대 들어 아일랜드 공화국의 정통성을 부정하지 않는 방향으로 선회해 아일랜드 공화국에서는 이 전술의 사용을 중단했다.
    • 1990년대 이후 북아일랜드 자치의회와 북아일랜드 산하 지방의회들에서도 신페인 후보가 당선됐을 경우 정상적으로 직무를 수행한다. 자치정부에서도 민족주의 진영 최대 정당이 돼 있는 상황이고.
    • 그래서 현재는 이 전술을 오로지 영국 국회(정확히는 하원인 서민원의 북아일랜드 지역구 의석)에서만 쓰고 있다. 상원인 귀족원은 대부분이 임명직이고, 임명직이 아니면 세습직이라 신페인 의석이 없으므로 이 전술을 쓸래야 쓸 수가 없다.
    • 신페인이 적어도 겉으로는 평화 노선으로 전환하고 아일랜드 공화국의 정통성을 인정해 당선 시 정상적으로 의정 활동을 하는 방향으로 선회하자 여기에 반발해 뛰쳐 나온 분파가 아직도 있다고 한다. 이들을 Republican Sinn Féin(아일랜드어: Sinn Féin Poblachtach)이라고 부른다. 아일랜드 공화국과 영국 모두에서 정식 정당으로 등록돼 있지 않지만 스스로는 정당이라고 자칭한다.
  • 유럽의회에서는 교섭단체로 유럽 좌파-노르딕 녹색 좌파 연합(European United Left/Nordic Green Left, GUE/NGL)에 속해 있다.
  1. 독립운동 시기 신페인당 기준
  2. 정당으로서의 신페인당 기준
  3. 아일랜드 공화국 하원. 1972년 IRA가 진 맥콘빌이라는 10명의 아이를 키우던 무고한 여성을 영국의 스파이라고 몰아서 살해하고 암매장한 사건의 배후에 있다는 의혹을 받아 2014년 체포 되었다가 증거가 애매하고 정치적으로 민감한 걸 고려해서인지 나흘만에 석방 되기도 했다.
  4. 아일랜드 공화국 상원
  5. 북아일랜드 의회
  6. 유럽의회
  7. 북아일랜드 지역구 한정
  8. 북아일랜드 지역구 한정
  9. 이들을 PIRA라고도 부른다. 여담이지만 21세기 들어와서는 PIRA마저도 무장투쟁을 포기한 상황.
  10. 아닌게 아니라 창립하고 3년이 지난 1909년에서도 당원이 1,000명이 채 안됐다. 심지어 그 중에서 절반은 더블린 거주자였고 시골 지역으로 가면 당원이 한자리수 인 곳까지 있을 정도(...)
  11. 정말 간신히 얻어낸 독립이었다. 리암 니슨이 주연(당연히 마이클 콜린스 역이다.)으로 등장한 마이클 콜린스의 전기 영화를 보면 영국군의 압도적인 화력에 밀려서 패배 일보직전까지 밀렸지만 지구전에 지친 영국군이 IRA의 상황을 파악하지 못하고 강화를 제안해서 간신히 승리한 것으로 묘사된다.
  12. 마이클 콜린스 본인도 내전의 와중에 암살당하고 만다. 정확히는 이동 도중 반대파의 습격을 받아 사망.
  13. MLB 스테로이드 스캔들과 관련해 미첼 리포트를 작성한 그 상원의원 맞다. 아일랜드계 미국인이기 때문에 북아일랜드의 현실에 관심이 많았다고 전해진다.
  14. 미국 상원이 공식적으로 아일랜드의 독립을 촉구하는 결의안을 채택했을 정도이다. 뿐만 아니라 사회경제문화적으로 WASP계가 주도하는 건 맞아도 이데올로기적으로는 20세기 초반에는 여전히 반영 공화주의가 막강했고, 아직 영국령이였던 캐나다와의 국경 분쟁도 있었기 때문에 반영 여론이라고 딱히 배격 받은건 아니다.
  15. 한국 독립 촉구안을 미국 의회에 상정했지만 부결크리를 맞았다(...) 이승만의 전략이 이몬 데 발레라의 전략에 비해 효과를 발휘하지 못했던 데에는 여러 이유가 있다. 첫째는 IRA의 무장투쟁이 커다란 효과를 거두었기에 영국이 협상 테이블로 나올수 밖에 없었다는 점인데, 발레라는 외교노선을 통해 IRA가 자금 지원을 받을 수 있게 노력한 반면, 이승만은 태평양 전쟁 이전까지 임시정부의 여러 무장 투쟁에 적대적이었다. 둘째는 정치적 압박을 넣어줄 세력의 차이인데, 발레라가 활동하던 시기에 동포인 아일랜드계 미국인은 머릿수(...)로 미국 정부를 압박할 수 있었고 미국 역시 반영 성향이 강해서 아일랜드에 대한 지지를 끌어내기 쉬웠던 반면, 이승만에게는 정치적 압박을 넣을 재미교포의 수도 부족했고 그렇다고 미국이 반일 성향이 있는 것도 아니라... 망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