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당(영국)


영국의 주요 정당
(괄호 안은 영국 서민원 의석 수)
집권당보수당
(330석)
야당노동당
(229석)
스코틀랜드 국민당
(54석)
자유민주당
(9석)
민주통일당
(8석)
신 페인
(4석)
웨일스당
(3석)
사회민주노동당
(3석)
얼스터 연합주의자당
(2석)
녹색당
(1석)
무소속
(5석)
의장
(1석)

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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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bour Party[1]

영국중도좌파~좌익 정당.

오랫동안 보수는 토리 보수당, 진보는 휘그 자유당 양당체제였던 영국 정치지형에서 자유당을 밀어내고 영국 의회 양당 중 하나가 된 당이며, 현 제1야당이다. 정치적으로는 사회주의, 사회민주주의를 표방하고 있으며 90년대 전세계에 불던 신자유주의 물결 속에서 토니 블레어 전총리에 의해 국유화 정강 폐지등 '제3의 길' 노선으로 가게 되었으나[3][4] 최근 노동당수에 당선된 제러미 코빈에 의해 변화될 조짐이 보이고 있다.

2 역사[5]

2.1 노동자의 정계 진출에서 창당까지

1867년 차티스트 운동의 결과로 도시 거주 남성에게 보통선거권이 주어지면서 노동자의 정치 참여가 보장되었다. 이들은 노동조합의 보호와 노동자의 처우 개선을 위해 활동하였고, 대개 자유당과 연대하여 자유당 소속으로 선거에 출마하였다. 1874년, 광산 노동자 출신의 2명이 자유당-노동자 연대를 통해 의원으로 당선되었고 이것이 영국 노동자들의 정치 참여의 시작이었다.

1889년 비숙련직, 단순노동자들이 주도한 제1차 노동자 대투쟁과 신노동조합운동 이후 기존 노동자들의 정치 활동을 정당으로 묶어내기 위해 1893년 독립노동당이 창당되어 영국 최초의 노동자 정당이 탄생하였고, 1900년에 독립노동당과 공상적 사회주의성향의 페이비언 협회, 마르크스주의 성향의 사회민주연맹, 그리고 기존 노동조합이 연합, 노동대표위원회(Labour Representation Committee)라는 이름으로 발족하여 공식적으로 노동당이 시작되었다. 그 해의 첫 선거에서 얻은 의석은 고작 2석.[6] 물론 자유당과의 연대는 계속 유지, 사회주의 강령은 넣지 않고 기존의 노동조합 보호와 노동자 권리 보장들의 사안에만 집중하였다. 현재의 이름인 노동당으로는 1906년 총선에서 29석을 얻으며 의석수를 크게 늘린 후에 개칭하였다.

이듬해인 1907년 노동당 소속 국회의원들은 '노동당 의원단'을 구성, 이들이 당 대회에서 의결된 사안의 결정권을 쥐게 하는 결의안을 통과시키는데, 이는 이후 노동당의 오랜 전통인 원내 노동당(중앙당, 우파) vs 원외 노동당(지구당, 좌파) 갈등의 불씨가 된다.[7] 1900~1910년대 노동당은 노동자들의 지지를 통해 약진 의석수를 늘려갔으나 정책에서는 지나치게 우경화, 자유당과 큰 차이를 보여주지 못했다. 이러한 성향은 1910~1914년 벌어진 제2차 노동자 대투쟁에서도 비슷했는데, 노동당은 노동자 대투쟁에 대해 양비론에 가까운 입장을 취하며 파업 강경 진압에 찬성하였다.노동당 맞아?

2.2 제1차 세계대전과 사회주의 노선 정립

노동당이 좌파 정당으로 거듭난 계기는 제1차 세계대전이었다. 전쟁 초기 노동당은 1915년 거국내각에 참여, 기존의 국제주의 노선을 포기하고 징병을 지지, 파업을 저지, 당내 양심적 병역거부자와 반전 운동가들을 앞장서서 공격했다. 그러나 1917년 전쟁중 벌어진 러시아 혁명로 노동자들이 사회주의에 대한 기대감을 가졌고, 이에 영향을 받아 노동조합원 수와 노동운동도 증가, 노동자들의 요구에 의해 노동당은 사회주의로 선회하기 시작했다. 1917년 거국 내각에서 사퇴한 아서 핸더슨[8]은 혁명의 한 가운데에 있던 러시아를 방문한 후 유혈혁명 저지를 위한 노동당의 좌경화를 주장하였다. 한편, 1918년 선거법 개정으로 여성들도 선거권을 가지면서 노조 소속 노동자만을 위한 정당에서 더 넓은 계층의 사람들을 포용할 필요도 생겼다. 이시기 노동당은 당명을 국민당으로 바꾸자는 의견까지 나왔을 정도.

논의 끝에 1918년 바뀐 당헌에서는 생산수단의 사회화를 통한 공정한 노동과 분배를 추구하는 사회주의 강령(일명 당헌 4조)을 채택하였고, 지역당, 개인단위 가입제도를 도입해[9] 노조 소속이 아닌 노동자, 진보적 지식인, 주부 등을 포섭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했다. 또한 다른 한 편으로는 의회 활동에 집중하기 위해 노동자 투쟁을 억제하고 아일랜드 독립 운동에 대해 독립은 지지하지만 독립운동은 안된다라는 개드립을 치며[10] 보수화되는 부분을 보이기도 했다.

2.3 연립 정부 수립과 제2차 세계 대전

대중정당화와 사회주의 강령 채택, 그리고 온건화 등 각고의 노력과 자유당의 몰락덕으로 1923년 총선에서 노동당은 자유당과의 연정을 통한 첫 집권에 성공, 당수 램지 맥도널드를 총리로 하는 내각을 세운다. 맥도널드 내각은 보건·의료 분야에서 보건부 장관 존 휘틀리의 노력으로 공공주택 52만 호를 건설하였고 런던 포플러구에서는 대대적인 복지 정책을 통해 사망률을 떨어트린 '포플러 운동'이 일어나기도 했다. 그러나 자유당의 반대와 당내 지도부의 보수화로 사회주의 정책을 이행하기는 커녕 모호한 입장을 취해 지지를 잃기만 했다. 오죽하면 당시 재무부 장관이던 필립 스노든은 자기 입으로 '런던 시티[11]에 내 동상을 세워준다는 설이 있다'라고 했을까…. 결국 맥도널드 내각은 집권 9개월만에 내각 불신임으로 해산, 이어진 선거에서 40석을 잃으며 보수당에 정권을 넘겨준다.[12]

이후 강령의 일부 수정과 1926년 총파업을 계기로 1929년 첫 원내 1당에 등극, 자유당과의 연정으로 맥도널드 내각을 다시 수립한다. 그러나 대공황의 한가운데에서 노동당은 기존의 자유방임적 경제 체제에 대하여 큰 대안을 내놓지 못하고 보수당의 정책을 그대로 따라가며 지리멸렬한 모습을 보였다. 결국 1931년 실업급여 삭감안이 결정타가 되어 내각이 붕괴, 총리 램지 맥도널드가 국가노동당으로 분당해서 보수당 중심의 거국내각에 가담하면서 정권을 내주게 되었다. 또한 그 해 재선거에서 노동당은 무려 235석을 털리며 추락했다.

노동당은 이 참패를 계기로 대안 세력으로 재편하기 위해 좌경화, 심지어 훗날 총리가 되는 클레멘트 애틀리혁명정당론까지 꺼냈을 정도이다. 이는 단지 선거 참패 때문만이 아니라 독일에서 나치의 집권하는 등 파시즘이 세력을 넓혀나가자 이에 맞서기 위한 것도 컸다. 그렇게 1932년 노동당 당 대회에서 은행 국유화 등을 결의하고 귀족원 폐지, 주요 산업시설 사회화 등을 발의하였으나, 블록 경제로 영국 경제가 다시 호전 양상을 보이자 발의된 개혁안은 도루묵이 되어버렸다. 반파시즘 운동에 있어서도 파시즘 반대 시위를 반대하는 등 삽질은 여전했다. 그나마 혁신에 열의를 보이던 당내 좌파 역시 활동과 사상에 있어 영국 공산당에 의존하는 등 지리멸렬한 모습을 보였고, 이는 반파시즘 연대 결의안, 당내 조직인 사회주의자동맹 해산안을 연달아 저지하지 못하는 것으로 드러났다.

1939년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면서 노동당은 이듬해 보수당의 윈스턴 처칠을 총리로 하는 거국내각에 참여한다. 이 시기 노동당은 노동부 장관, 내무부 장관을 얻고 내치를 담당하였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이시기 노동당은 파업에 대한 강경 진압, 노동운동 탄압을 위한 노동쟁의법의 폐지에 소극적으로 대응, 인도의 불복종 운동을 탄압하는 등의 안건에 동의하기도 했다.

2.4 요람에서 무덤까지, 복지국가의 건설

제2차 세계대전이 종결된 이후, 독일에 대한 소련 경제 체제의 승리와 케인스주의의 성장을 보고 사회적 분위기가 '계획'을 신뢰하는 쪽으로 흘러가고, 노동당은 대규모 지지를 얻었다. 그러한 무드 속에서 1945년 7월, 유럽에서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후 치뤄진 선거에서 노동당은 393석을 얻으며 첫 단독 과반 내각인 애틀리 내각이 집권한다. 노동당은 중앙은행, 탄광, 가스, 전력, 철도등 주요 산업을 국유화하고, 베버리지 보고서에 바탕한 이른바 '요람에서 무덤까지'로 불리는 대대적인 복지 정책을 펼친다. 이당시 탄생한 것이 전국민에게 무상의료를보장하는 국민의료서비스(National Health Service, 약칭 NHS)이다.

그러나 1947년 2차세계대전 이후 쌓인 부채와 무역적자가 금융위기로 번지면서 긴축정책을 실시, 복지정책이 한풀 꺾이게 되었다. 또한, 이 시기 노동당이 얼마나 적극적으로 사회주의적인 정책을 펼쳤는지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대표적인 사회주의 정책 중 하나인 생산 수단의 국유화도 크게 진전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파업을 탄압하고 임금을 동결하는 등 노동자에 반하는 정책을 내놓기도 했다. 다른 한편으로 외교 정책 역시 기존 정책을 유지, 아대륙과, 미얀마를 제외한 나머지 식민지를 유지했으며, 남아공에서 아파르트헤이트 정책을 추진한 집권 국민당에 대한 유화책를 도왔으며, 핵무기를 개발했다. 결국 1951년 보수당에 정권을 다시 내주기는 하였지만, 보수당 또한 사실상 노동당 정책의 연장선상에서 국정을 펼침으로써 요람에서 무덤까지라는 신화를 창조하였다고 볼 수 있다.

노동당은 1964년까지 무려 13년동안 정권을 내주며 지리멸렬했다. 1955년에서 1963년까지 노동당 당수로 있던 휴 게이츠컬은 노동당의 사회주의 강령을 포기, 수정자본주의로 방향을 틀기도 했다. 그러나 다른 한 편으로는 어나이린 베번을 중심으로 한 '베번 좌파'가 등장, 지구당을 장악하고 노동당의 좌경화를 시도했으나 당내 우파와 다른대안을 제대로 내놓지 못하며 흐지부지되었다. 한편 1951, 1955, 1959년 3번의 선거를 모두 패해3연벙? 의석을 계속 갉아먹자 이것에 대한 대안으로 당헌 4조의 사회주의 강령 폐지를 시도했다. 물론 강력한 반대로 무산. 다만 국방 정책에서는 핵무기 철폐운동에 적극 참여하는 등 나름대로 활동을 하였으나, 대중의 반응은 냉랭하였다.[13] 결국 핵무기 폐기안은 당 대회에서 압도적으로 부결, 물거품이 된다.

2.5 영국병

노동당의 반전은 1960년대 중반에 시작되었다. 영국병의 징조가 드러나던 1963년 해롤드 윌슨이 당수로 취임, 기존의 사회민주주의 노선을 수정자본주의로 개편하고, 경영 혁신과 과학 혁명을 내걸고 제조업 투자를 늘려 GDP를 올리려 하였다. 이를 통해 1964년 집권에 성공하나 파운드화 가치가 하락, 울며 겨자먹기로 디플레이션 정책을 추진하였다. 또한 1966년 선원 파업에 강경하게 대응, 노동당의 특기인 '당이 안 주도한 파업 때려잡기'를 다시 한 번 선보인다. 또한 보수당의 압박으로 이민 허가에 제동을 걸면서 정작 영국계 백인은 입국을 자유화하는 인종차별적 행태를 보이기도 했다.비슷한 시기의 어느 분한테 부끄럽지도 않냐 이놈들아 또한 짐바브웨의 인종차별 정책에 솜방망이 제재를 가하고 남아공에 무기를 공급하는 등 외교에서도 비양심적인 모습을 보였다. 여담으로 몬티 파이선죽은 앵무새로 풍자했던 것 역시 이시기의 윌슨 정부이다(…)

1970년 신자유주의로 돌아선 보수당의 에드워드 히스에게 정권을 내주고 노동당은 절치부심하였다. 보수당은 노조의 등록과 노사 조정기간을 의무화 하는 등 노조의 통제에 나섰고 민주노총 : 뭐? 이게 통제야?[14], 이로 인해 파업이 급증하면서 보수당의 지지율이 추락해자 노동당은 여기에 급진적 정책으로 동조했다. 당시 토니 벤을 중심으로 한 당내 좌파는 금융, 건설, 운수, 조선 등의 산업의 국유화, 핵무기 폐기 등을 내걸었고, 1973년에는 이를 종합한 대안경제전략(Alternative Economic Strategy, 약칭 AES)를 내놓았다. 이를 통해 노동당은 1974년 두 번의 선거를 통해 집권에 성공, 2차 윌슨 내각을 수립한다.

노동당은 집권 후 대안경제전략을 실행에 옮겼으나, 그것은 위기에 몰린 브리티시 레일랜드영국항공 정도에 그쳤다. 또한 대안경제전략은 국민기업위원회가 주도하는 계획 협약에 따른 계획 경제를 추구했으나, 다국적기업과 대기업의 규제망 피하기 앞에선 속수 무책이었다. 결국 1976년 한계에 달한 영국병이 폭발, IMF에 금융지원을 받고 대안경제전략을 철폐, 복지 예산마저 삭감하며 노동당의 이상적인 계획은 실패로 끝났다. 그리고 이에 따른 파장으로 1978~9년 파업으로 '불만의 겨울'이 도래, 노동당의 암흑기가 시작된다.

2.6 암흑기

1979년 노동당은 '신보수주의'를 내건 보수당의 마거릿 대처에게 정권을 내주었고, 이에 대응하기 위해 당내 좌파였던 마이클 풋을 당수로 선출, 토니 벤을 중심으로 한 '벤 좌파'가 부상했다. 그러나 이로 인해 당내 우파가 반발, 사회민주당으로 분당, 자유당과 연대하면서응답하라 19세기냐? 한 때 지지율 47%까지 찍으며 대처 정권을 위협하던 기세는 어디가고 지지율이 반토막, 1983년 선거에서 참패, 1918년 이후 최악의 득표수를 기록했다. 심지어 앞서 말한 토니 벤마저 보수당에게 패배했을 정도. 그나마 소선거구제여서 지역기반이 탄탄해서 이정도로 선방했지, 당시 득표율을 노동당 27%, 사민-자유당 연합 25%로 지지율 2위도 위태로웠고 비례대표제였으면 더 심하게 털렸을 것이다(…).

이 참패로 당내 우파인 닐 키넉이 당수에 취임, 노동당은 다시 우경화되었고 벤을 중심으로 한 지역당, 원외 기반의 당내 좌파와 중앙당, 원내 기반의 당내 우파 사이의 알력 다툼도 극심해져 내부 문제도 심각해졌다.[15] 이 와중에 80년대 당내 좌파 켄 리빙스턴이 런던 시장에 당선되고 지방선거에서 노동당, 특히 당내 좌파가 선전하여 런던 코뮌 시대가 열리면서 노동당에 빛이 보이는듯 했다. 그러나 보수당 정권의 예산 깎기 스킬에 지방 정부가 제대로 대응하지 못한 것과 중앙당과의 갈등, 결정적으로 대처 정권의 시의회 폐쇄 크리에 GG를 쳐야 했다. 거기다 1987년 총선에서도 당수 닐 키넉의 삽질로 삼연벙패배, 런던 코뮌은 실패로 끝났다.

1990년 인두세 문제로 대처가 정계를 은퇴하자 노동당은 92년 총선 승리의 기회를 잡는 듯 했다. 여러 여론조사에서 노동당의 지지율은 보수당을 앞질렀고, 총선 직후의 BBC 출구조사는 노동당과 보수당의 초박빙을 예측했다. 그러나 막상 투표함을 뜯고 난 결과는 지지율 7%p차이로 보수당의 과반 확보, 노동당의 4연패로 나왔다.(…) 동당 2 2012년 동북아의 모 정당이 생각나는건 기분 탓이다 선거 막판의 뜬금없는 이슈 갈아치우기[16]와 주요 지지층인 노동자들이 인두세를 피하기 위해 선거인 등록을 거부한 것이 큰 패인이었다. 결국 2연패의 빛나는 업적을 거둔 닐 키넉 당수는 사임, 존 스미스를 새 당수로 선출한다.

2.7 신노동당

1979년에서 1997년까지 계속된 보수당의 장기 집권 시기가 지난 후, 제3의 길을 내세운 토니 블레어를 중심으로 다시 정권을 잡고 노동당의 장기 집권 시대가 시작된다. 블레어의 '신' 노동당이 20세기 노동당의 모습과 다른 점은 바로 사회주의 강령을 포기한 것이다. 비록 신자유주의의 대안으로 제3의 길을 내세우고 있기는 하지만 사실상 마거릿 대처의 정책과 유사하다는 비판도 듣는다. "인간의 얼굴을 한 대처주의"라는 말도. 차라리 스스로 중도 정당임을 자처하는 자유민주당이 더 좌파적이라는 말이 나왔을 정도.

토니 블레어 이후의 노동당은 이름만 노동당이란 목소리가 노동당 당원들로부터 나왔으며, 특히 블레어가 실행하고 후임 총리였던 고든 브라운이 재무장관 시절 입안했던 신자유주의 정책들은 2009년 세계금융위기 때 부메랑으로 돌아왔다. 결국 선거에서 지면서 데이비드 캐머런에게 정권을 내주었다.

2.8 2010년 이후

40대의 에드 밀리밴드[17]가 당수로 선출되었다. 유럽에서 90년대를 전후해 다시 정권을 잡았던 대다수의 중도좌파 정당들이 그렇지만, 강령을 "제3의 길"에서 다시 (물론 현실적인 수준의) 좌파로 수정하는 작업에 골치를 앓고 있는 점에서는 노동당도 예외는 아니다. 당권을 쥔 밀리밴드는 이 과정에서 신노동당이라는 슬로건을 폐기하였다.

2014년 들어서 스코틀랜드 독립투표가 가시화 되면서 영국 노동당은 위기를 겪었는데 스코틀랜드 지역이 마거릿 대처 시절의 경제정책과 제조업 구조조정의 여파로 스코틀랜드가 큰 피해를 보면서 보수당이 지지를 잃게 되어 급속히 노동당의 텃밭화[18]가 진행되어왔던지라[19] 스코틀랜드가 독립하게 되면 노동당으로서 엄청난 타격을 입게 된다. 당연히 노동당에선 스코틀랜드 출신인 고든 브라운[20] 前 총리를 내세우면서 독립반대운동에 나서고 있었고, 결국 독립투표가 부결되면서 노동당에선 가슴을 쓸어내리고 있다.

그러나 2015년 총선 정국이 들어와서부터는 불안에 떨고있는데 총선정국이 오면서 스코틀랜드 지역에서 스코틀랜드 국민당의 지지율이 높아지는 바람에 노동당이 스코틀랜드에서 참패할 가능성이 높아져 과반의석을 확보하기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실제 여론조사에서도 타 지역에서 보수당과 자민당 의석을 빼았아서 의석을 대폭 늘릴걸로 전망되나, 텃밭인 스코틀랜드에서 대패해 대략 270석대 가량을 확보할것으로 전망되어서 헝의회가 다시 재현된다고 예측되고 있었다. 그리고 실제 투표에서는 보수당이 SNP 버프로 보수층이 결집하는 바람에 예상보다 많은 의석수를 얻어[21] 단독정부를 구성하였고 물론, 스코틀랜드에서 SNP가 예상대로 압승하면서[22] 결국 232석을 얻는데 그쳤다.

에드 밀리밴드는 처참한 총선 결과(영국 전체)에 책임을 지고 당수에서 사퇴했다. 이에 해리엇 하먼(Harriet Harman) 부당수가 당수 대행을 맡게 됐는데 하먼은 차기 당수나 부당수 경선에 출마하지 않을 것이며 차기 지도부가 확정되면 본인 역시 부당수에서 물러나겠다고 발표했다. 중앙당 뿐만 아니라 스코틀랜드 노동당(영국 노동당의 스코틀랜드 지부)에서도 소동이 일어났다. 스코틀랜드 노동당의 당수인 짐 머피(Jim Murphy) 또한 스코틀랜드에서의 대참패[23]에 대한 책임론이 일어났다. 그러나 그는 당 안팎에서 빗발치는 사퇴 요구를 일축하였을 뿐만 아니라 2016년 스코틀랜드 자치의회 선거에도 출마해 설욕할 의사를 내비쳤다. 그러자 당연히 논란이 계속되었고 스코틀랜드 노동당 지도부는 짐 머피를 계속 신임할 수 있는지 지도부 멤버들끼리 표결을 했는데 근소하게 신임으로 결정되었다. 하지만 머피는 끊이지 않는 사퇴 압력에 굴복, 지도부의 신임 결과와 상관 없이 한 달 내에 사퇴할 것이며 2016년 자치의회 선거에도 출마하지 않겠다고 발표하게 되었다. 참고로 머피가 스코틀랜드 노동당 당수가 된 건 2014년 12월 13일이었으니 반 년 정도만 당수직을 역임했다가 엄청난 굴욕을 당하고 물러나게 된 것이다. 하필 왜 SNP가 급상승 중일 때 당수가 돼서 이 고생인가 안습...

총선 대패 이후 다시 제3의 길로 돌아가야 집권할 수 있다고 믿는 계파(블레어파)와 확실한 좌파 노선을 추구해야 등 돌린 유권자들이 돌아온다고 믿는 계파가 중앙당과 스코틀랜드 지역당의 차기 당권을 놓고 겨루게 되었다. 중앙당의 경우 차기 당수·부당수 경선 날짜가 9월 12일로 확정됐다.

2015년 9월 12일 경선에서 좌파계열인 제러미 코빈이 승리하였다! 이 경선 결과는 어떻게 보면 충격적이라고도 볼 수 있는것이 불과 몇 달 전만해도 코빈의 경선 승리확률은 1 대 100이라고 예측한 도박 사이트들도 있었기 때문.[24] 영국판 버니 샌더스라는 평가를 얻고 있다. 블레어를 위시한 노동당의 90년대부터 시작한 '중도화'와 정반대의 노선을 걷게 될것으로 예상된다. 이 결과를 두고 블레어는 정치적 재앙이라고 평가하면서 마거릿 대처에게 밀리고 정치적으로 분열되었던 노동당의 흑역사인 80년대로 돌아가는 수순을 밟을 것이라고 경고 했다.[25] 제러미 코빈은 데이비드 캐머런의 긴축 재정에 반대하고 사회주의자라고 자칭하는 정치인[26]으로 노동당의 노선보다 좌파성향을 많이 띄는 사람이다. 민영화 되었던 영국 철도 시스템과 에너지 회사들은 다시 국유화 하고 대학 등록금을 폐지하는것을 공약으로 걸었다. 또한 양적 양화를 통해 영국의 노후화된 인프라를 다시 건설하겠다는 약속도 하였다.

이런 경제정책보다 더 논란이 되는것은 코빈의 외교정책. 그는 영국이 나토에서 탈퇴하고 이라크 전쟁 때문에 토니 블레어를 전쟁 범죄 재판에 부쳐야 한다고 주장한다. 또 러시아의 주장과 비슷하게 서방과 나토의 공격적인 외교정책이 동부 우크라이나 위기를 불러왔다고 믿고 있다. 중동문제에서도 이스라엘보다는 팔레스타인편을 더 들어주는 편이며 2009년에는 영국 의회에 자신이 초대한 헤즈볼라 대표단은 자신의 친구라고 지칭하기도 했다.

이렇게 노동당의 노선에 비해 많이 좌파적인 인물인데도 불구하고 당선된 이유는 젊은층의 열렬한 지지도 있지만 무엇보다 보수당의 중도화에 따른 노동당의 정체성 혼란에 있다. 캐머런을 위시한 보수당정부는 동성 결혼을 찬성하고 지구 온난화를 인정하며 모든 국민이 의료보험을 갖고 있을 권리가 있다고 믿고 있고 국가 재정에 큰 영향을 미치는 세금 감면을 반대한다! 공화당과 정말 많이 비교된다 이렇게 되면서 중도화된 노동당과 정치적 노선에서 거의 차이가 없어진것. 이러다 보니 정책 차이가 별로 없는 상태에서 밀리밴드가 패배한 이유는 그냥 밀리밴드가 이상하게 생겨서[27] (...)라는 분석도 나오고 있다.

더군다나 코빈에 대항하는 블레어주의자 캠프의 선거전략이 정말 끔찍하게 지리멸렬했던 것도 한 몫 했다. 반 블레어주의자 캠프는 코빈 하나로 통일했는데, 블레어주의자들은 앤디 버넘, 이베트 쿠퍼, 리즈 켄덜 셋으로 쪼개졌다. 그리고 그나마 선거전략이라고 채택한 것들이 코빈을 이길 사람은 나 뿐+다른 사람에게 표 던져봤자 결선투표에서 사표 됨 뿐이고, 실제 정책 관련은 사실상 전무. 이러니 뭐가 될 리가 없다(...)[28] 결국 투표 결과 60%를 득표한 코빈에 비해 버넘은 19%, 쿠퍼는 17%, 켄덜은 4% 득표에 그쳤다. 블레어주의자들이 지리멸렬한 이 상황에서 노동당은 좌파적인 인물인 제러미 코빈을 당선시키면서 90년대 중도화 이전의 모습으로 돌아가려는 노력을 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특히 코빈은 영국 여왕을 찬양하는 영국 국가의 제창을 거부할 정도로 군주제를 반대하는 극렬 공화주의자인데, 그가 과연 오랜 전통인 영국 여왕에 무릎을 꿇는 충성맹세를 할 것인가에 대해 설왕설래가 있었다. 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코빈은 추밀원 위원 취임식에 정당 대표로는 이례적으로 불참하면서 여왕에 대한 충성맹세를 끝끝내 거부하였다. 이에 대해서 영국 내부에서 논란이 되고 있으며, 특히 보수 계열에서는 여왕을 무시하는 것이냐면서 강력히 반발하였다.

2016년 지방선거런던시 시장선거에서는 노동당 출신이자 최초의 무슬림 시장인 사디크 칸이 당선되었다. 그러나 스코틀랜드 자치의회에서는 보수당에게 제 2당의 지위를 내주고, 웨일즈 자치의회에서도 과반수를 얻지 못했다. 보수당과는 무승부에 가까운 결과를 내었다. 사디크 칸은 선거운동 기간동안 강경 이미지를 가진 당대표 코빈을 멀리하고 '제3의 길'을 주장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제레미 코빈이 장기적으로 노동당을 이끌 수 있을지 시험에 올랐다.

3 역대 선거결과

연도의석수득표율득표율증감비고하원 총 의석
19002석1.8%+1.8창당670석
190629석5.7%+3.9'노동당' 당명 이래 첫 선거
1910.0140석7.6%+1.9
1910.1242석7.1%-0.5
191857석21.5%+14.4원내 제2당 진입707석
1922142석29.7%+8.2615석
1923191석30.7%+1.0
1924151석33.3%+2.6
1929287석37.1%+3.8집권(맥도날드 내각)
193152석30.8%-7.7분당[29]대공황에 의한 실각
1935154석38.0%+7.4
1945393석49.7%+11.7전후 재집권(애틀리 내각)/역대 최대득표640석
1950315석46.1%-3.6
1951295석48.8%+2.7역대 2번째 최대 득표/실각[30]625석
1955277석46.4%-2.4630석
1959258석43.8%-2.6
1964317석43.8%0.0과반수를 1석 넘기며 집권(해럴드 윌슨)
1966364석48.0%+4.0역대 3번째 최대 득표
1970288석43.1%-4.9실각
1974.02301석37.2%-5.9재집권(해럴드 윌슨)[31]635석
1974.10319석39.2%+2.0득표 1위 회복
1979269석36.9%-2.3실각
1983209석27.6%-9.3650석
1987229석30.8%+3.2651석
1992271석34.4%+3.6
1997418석43.2%+9.818년만의 재집권(토니 블레어)/역대 최대의석659석
2001413석40.7%-2.5
2005356석35.3%-5.4646석
2010258석29.1%-6.213년만의 실각(고든 브라운)650석
2015232석30.4%+1.4

4 관련 정당·조직

1990년대 말에 스코틀랜드·웨일스 자치가 시작되면서 스코틀랜드와 웨일스 내 지역 조직을 통솔하는 강력한 지부를 두게 되었다. 명칭도 스코틀랜드 노동당, 웨일스 노동당이라고 하며 자체적인 당 대표를 뽑고 지도부를 갖추고 있다. 이 점은 보수당·자민당도 마찬가지이다.[32]

노동당과 연계된 외부 조직으로 페이비언 협회(Fabian Society)가 유명하다. 고대 로마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한니발을 상대로 지구전을 펼쳐 승리한 것처럼 사회주의를 유혈 혁명과 급진적인 방법이 아닌 점진적인 방법(사회민주주의)으로 이룩하겠다는 의미에서 Fabian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과거에 노동당의 우파파[33]가 탈당하여 사회민주당을 조직했다가 결국 현재의 자민당에 합류하였다. 해당 항목 참고.

본래 영국 노동당은 그레이트브리튼, 즉 잉글랜드·스코틀랜드·웨일스만 커버했다. 창당 당시 아일랜드 섬 전체가 영국의 일부였는데, 여기는 아일랜드 노동당[34]의 관할 지역으로 쳤기 때문. 아일랜드가 분할돼 북아일랜드만 영국에 남은 이후에도 이때의 방침이 오랫 동안 남아서 2000년대까지 북아일랜드 사람들의 입당을 막았다. 어차피 북아일랜드에서는 영국 주요 정당들이 활동을 안 하거나 해도 미미한 상황인 데다가, 영국 노동당은 1990년대 초까지 북아일랜드가 영국에서 벗어나 아일랜드 공화국과 통일 아일랜드를 이루는 걸 지지했었다.[35][36] 영국 노동당 입장에서는 북아일랜드 현안은 현지 주요 정당 중 하나인 사회민주노동당(Social Democratic and Labour Party, SDLP)[37]과 연계해 처리하면 된다고 봤던 것도 있고. 하지만 북아일랜드의 연합주의(북아일랜드가 영국에 남는 걸 지지) 성향의 진보주의자들이 영국 노동당에 입당하게 해달라는 요구가 죽 있어왔고, 결국 노동당은 법적 분쟁 가능성을 피하기 위해 2000년대에 북아일랜드인들의 입당을 허용했다. 하지만 입당은 허용했으나 아직도 북아일랜드 선거에 후보를 공천하지도 않고 있고 선관위에도 북아일랜드를 활동 지역으로 등록해놓고 있지 않다.[38] 입당은 받되 방치 중 당연히 현지 노동당원들이 중앙당에 지속적으로 북아일랜드 내 선거에 공천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북아일랜드의 현지 노동당은 스스로를 통칭 Labour Party in Northern Ireland로 적고 있는데,[39] 선관위에 Labour Party of Northern Ireland라는 별도의 군소 정당이 등록돼 있기 때문에 회피한 것.

한편 노동당의 전통적인 자매 정당으로 1917년에 창당한 협동당(Co-operative Party)#이라는 정당이 있는데, 협동조합주의에 초점을 맞춘 정당이다. 협동당의 당원들 중 선거에 출마하려는 사람들은 노동당에도 동시 입당하여[40] 출마한다. 그래서 이런 사람이 선거에 출마했을 경우 대개 투표 용지에 소속 정당을 "Labour Co-operative Party"로 표기한다.[41][42] 2015년 총선의 경우 노동당 당선자 232명 중 21명이 협동당 당원이기도 하다.#

노동당은 유럽 정당인 유럽사회당(Party of European Socialists, PES)의 일원이며, 유럽의회에서는 PES를 중심으로 구성된 교섭단체인 사회민주진보동맹(Progressive Alliance of Socialists and Democrats, S&D)에 소속돼 있다. 또한 2013년에 창설된 국제 조직인 진보동맹(Progressive Alliance)의 정회원이다.[43] 2013년까지는 사민주의 성향의 사회주의 인터내셔널(Socialist International)의 정회원이었으나 현재는 옵저버로 변경됐다. 애초에 진보동맹 자체가 사회주의 인터내셔널에 대한 회원 정당들의 반발[44] 끝에 별도로 창설된 조직이라 영국 노동당도 이에 발맞춘 것.

5 여담

  • 노동당의 사실상의 당가가 적기가다. 놀랄 일이 아닌게 적기가 자체가 1889년 런던 항만 파업이 동기부여가 되어 아일랜드 작가 짐 코넬(Jim Connell)이 작사한 노래이기 때문. 당연히 북한 노래가 아니다[45] 적기가는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응원곡이기도 하다.[46]
  • 영국 사회주의 노동자당(British Socialist Workers Party)이라는 군소 정당이 있다. 소위 국제 사회주의(IS) 급진 좌파계열로, 대한민국에선 다함께라는 단체가 이 계열에 속한다. 영국 노동당과 헷갈리지 않게 주의할 것.
  1. 절대로 Labor Party가 아니다. 영국에선 Labour라고만 써도 노동당으로 통한다.
  2. 북아일랜드에 노동당원들이 소수 있으나 현지 선거에 후보를 내지는 않으며 영국 선관위에도 자기 당을 북아일랜드에서 활동하는 정당으로 등록하진 않았다.
  3. 원래 영국의 노동조합자체가 19세기부터 사회주의와 같은 이념적 지향보다는 조합주의적인 노동자의 권익 추구를 목표로 삼았고, 성립 당시에 다른 한 축을 담당한 것은 온건한 페이비언주의자들이었다. (공산주의자들에게 '공상적 사회주의'라고 불렸던 바로 그 주의.).
  4. '제3의 길' 노선까지 커버하게 된 것은 미국 민주당 역시 마찬가지이다.
  5. 해당 부분의 신노동당 이전 문단은 (마르크스주의에서 본) 영국 노동당의 역사: 희망과 배신의 100년라는 책을 참조하여 작성했다. 국내에서 영국 노동당의 역사에 대해 가장 자세히 서술한 책아니 그냥 이거 하나다으로 보다 자세히 알고 싶다면 한 번쯤 봐도 좋다. 다만 책 제목만 봐도 알겠지만(…) 노동당보다 더 왼쪽의 입장에서 서술되어서 적당히 걸러서 볼 필요가 있다.
  6. 자유당 소속으로 당선된 노동자를 합하면 11명이다.
  7. 물론 100% 이렇게 양분이 되는 것은 아니지만, 노동당의 갈등은 대체로 이런 경향을 띄었다.
  8. 노동당 우파로서 사회주의를 반대했던 인물, 노동당 소속의 첫 장관이었다.
  9. 이전까지는 노동조합, 단체 단위의 가입만 가능했다.
  10. 당시 노동당의 주장은 '무장 투쟁에 반대할 뿐이다. 우리는 정부의 강경 진압에도 반대한다.'였으나 정작 실제로는 특수부대를 동원한 무력진압에 대해서는 반대 의견을 내놓지 않고 침묵했다.
  11. 월 가와 함께 쌍벽을 이루는 금융가
  12. 그러나 노동당은 그나마 나았다. 자유당은 그 선거에서 118석을 털렸다….
  13. 이 운동이 일어난 것은 1960년, 반전·반핵 운동이 크게 일어나는 68운동이 일어나려면 조금 멀었다. 어찌보면 시대를 앞선 걸지도….
  14. 사실 선입견과 달리 한국의 노조는 생각보다 유럽의 노조보다 세력이 약하다. 일단 노조에 대한 인식이 사회전반적으로 영 좋지않은데다가, 조직률도 후달리고, 정치적으로도 영향력이 적다. 이 때문에 정부에게도 더 많이 통제를 받는 편이고….
  15. 이전 문서에서는 극좌화되었다고 적혀있었지만, 실제 당 지도부는 앞서 말한 마이클 풋을 제외하면 당내 우파가 줄곧 차지해 극좌화라고 하기는 힘들다.
  16. 국민의료서비스 개편을 반대한 광고가 성공하여 지지율을 10%p 가까이 끌어올렸으나, 계급 선동 아니냐는 비판 하나에 당 지도부가 선거 마지막 주에 이슈를 선거제도 개편으로 바꾼다(…)
  17. 마르크스경제학자인 아버지를 두었고, 형 데이비드 밀리밴드와 대표 경선에서 맞붙어서 화제가 되었다. 데이비드는 동생에게 패배하고 몇 년 뒤 의원직을 사퇴했다. 아무래도 당을 이끄는 동생을 계속 보기가 껄끄러웠던 모양. 이후 선더랜드 AFC의 임원을 역임했지만, 파시스트 의혹을 받는 파올로 디카니오의 감독 임명에 반발해서 여기서도 사퇴한 뒤 미국에 본부가 위치한 국제구호위원회(IRC) 의장 겸 CEO로 취임해 버렸다. 정치적 성향은 동생인 에드보다 온건한 성향으로 여겨진다. 애초에 형제의 당내 계파가 다르다. 데이비드는 블레어파이고 에드는 브라운파로 분류된다. 흔히 블레어와 브라운을 노동당의 중도 노선을 대표하는 정치인들로 취급하지만 브라운이 블레어보다는 약간 더 좌측에 있다고 평가된다. 브라운 밑에서 전략가로 일했던 에드 밀리밴드는 그보다도 더 좌측으로 여겨지는 듯.
  18. 다만 이건 하원에 한정된 이야기다. 스코틀랜드 자치의회와 스코틀랜드 산하 각 지방의회 선거로 간다면 얘기가 또 달라지는데 스코틀랜드 의회선거에선 100% 소선구제가 아니고 소선거구/비례대표 병립투표제라 의석이 압도적이지는 않았고(노동당의 득표율이 40%대 초반 수준) 2007년부터 스코틀랜드 국민당(SNP)이 원내 1당을 차지하고있고 노동당은 2당 신세가 됐다. 게다가 2014년 스코틀랜드 독립 주민투표 때 SNP가 뜰 판이 깔려 버려 2015년 총선에서도 SNP가 스코틀랜드에 할당된 59석 중 56석을 싹쓸이하는 기적을 일으켰다.
  19. 2010년 총선 기준으로 하원의석 650석 가운데 스코틀랜드에 배정된 의석이 59석인데 이중에서 41석을 노동당이 차지했다. 물론 2015년 총선에서는 SNP가 압승을 거두는 바람에 상황이 달라졌다.
  20. 토니 블레어 전 총리도 스코틀랜드 출신이지만 스코틀랜드 밖에서 살아온 기간이 길고 지역구도 잉글랜드 북부인 더럼의 세지필드(Sedgefield)였다. 반면 고든 브라운은 스코틀랜드에서 태어났을 뿐만 아니라 평생 스코틀랜드에 지역구를 두고 정치를 했다.
  21. 사실 보수당의 득표율 자체는 2010년과 비슷한 수준이었다. 그러나 자유민주당 표가 노동당쪽으로 많이 안 돌아가면서 노동당은 시망...
  22. 전체 59석 중 56석이 SNP의 손에 떨어졌다. 그리고 보수, 노동, 자민 3당이 남은 3석을 한 자리씩 사이좋게 나눠 가졌다(...).
  23. 앞 주석에서 썼듯이 스코틀랜드에서 고작 1석만 당선됐다. 머피 본인도 SNP 돌풍을 이기지 못해 낙선하고 말았다. 그는 1997년부터 하원 의원을 죽 역임해 왔는데 정치 인생에서 처음으로 낙선한 것이다.
  24. 사실 이건 에드 밀리밴드 시절 개정된 투표 룰을 대부분이 아직도 이해를 못 하고 있던 탓도 컸다. 원래는 진성당원과 노동당 지지 노조원들만을 대상으로 하던 투표권이 밀리밴드 시절에 들어서면서 3파운드만 낼 시 "등록 지지자" 자격을 받고 투표가 가능해진 것. 그리고 그 등록 지지자 층에게 어필을 한 게 코빈 뿐이었다. 원내 노동당 의원들의 전통적인 원외세력 공포증이 여기서 치명적 오판을 낸 것.
  25. 참고로 이 코빈의 정책은 80년대에 실패한 것이라는 드립은 젊은 유권자층에게 특히 악영향을 끼쳤다. 자신들의 불만점을 정확히 찝어주는 코빈에게 열광하는 이들에게 있어 블레어의 경고는 그냥 꼰대질 취급만 받았고, 더 심할 경우에는 블레어가 반대하는 정책이니 좋은 것이다라는 반응까지 튀어나왔다. 애시당초 젊은 층의 대부분은 80년대 상황을 모르기도 하고 말이다.
  26. 사실 노동당 의원 중에서 가장 당 중앙 방침에 많이 개겨본 의원 중 하나다.(...) 당론에 반대하는 투표를 500번 이상을 했다고 한다.
  27. 에드 밀리밴드가 유독 사진발을 못 받는 얼굴이라 생긴것 부터가 총리감이 아니라는 악담을 수없이 듣고 다녔다. 궁금한 사람은 Ed miliband sandwich로 구글링해 보자
  28. 그나마 앤디 버넘은 당선자가 누가 되건 하나로 모여야 한다면서 퇴로를 열기라도 했지, 이베트 쿠퍼와 리즈 켄덜은 둘 다 여성 후보를 뽑아야 좀 더 여성 친화적 정당을 만들 수 있다면서 정작 둘이서 더 크게 치고 박았다. 그리고 대부분의 블레어주의자들은 코빈이 승리할 시 어떠한 당내 직함도 맡지 않겠다는 강경 자세를 취했고, 결국 앤디 번햄 계열을 제외한 모두가 백벤치로 물러났다. 물론 백벤치에서 프론트로 돌아오기가 정말 힘들다는 건 제쳐두자
  29. 맥도날드 세력이 '국가노동당'으로 분당하여 보수당의 거국내각에 참여했다.
  30. 애틀리 정권이 의석을 늘리기 위해 승부수를 걸었는데,소선거구제의 문제로 역대 최대득표에도 불구하고 정작 보수당의 처칠에게 패하면서 실각했다. 원인은 국가노동당이 보수당과 합당되면서 보수당 후보들이 단일화 효과를 톡톡하게 본 것.
  31. 이 경우는 보수당의 득표가 37.9%임에도 노동당의 기본 텃밭들이 건재한 가운데 보수당이 패배하면 이뤄진 것이다. 결국 재선거가 이뤄진다.
  32. 단, 보수당의 경우 북아일랜드에도 마찬가지 조직을 공식적으로 두고 있다는 차이점이 있다. 노동당과 자민당은 북아일랜드에 당원들이 있긴 해도 현지에 자체적으로 후보를 내지도 않고 선관위에 등록돼 있지도 않다. 현지 당원들이 자체적으로 홈페이지를 운영하는 등 활동을 하긴 하지만...
  33. 노동당의 이념 분포에만 한정하면 우파라고 서술할 수 있다. 참고로 이전 버전에서는 '신노동당'이라고 설명이 붙었었는데 이건 잘못된 서술이다. 왜냐면 신노동당(New Labour)은 토니 블레어·고든 브라운 시절의 노동당이 썼던 슬로건이기 때문. 노동당 탈당 후 사회민주당을 창립했다가 자유민주당에 합류한 중도파는 신노동당 체제 성립 훨씬 이전에 당을 떠난 사람들이므로 신노동당과 전혀 관련이 없다.
  34. 현재 아일랜드 공화국의 주요 정당 중 하나이다.
  35. 2000년대 중후반까지만 해도 그레이트브리튼에서는 내부 분규로 골치 아픈 북아일랜드에서 손 떼라는 여론이 더 높았기 때문에 노동당이 이런 정책을 유지할 수 있었다.
  36. 1990년대 초반에 영국 주요 정당들은 북아일랜드 문제에 대해 확정적인 당론을 없애고 현지 주민들의 의사를 존중한다는 쪽으로 입장을 선회했다.
  37. 북아일랜드에서 활동하는 평화적 수단에 의한 아일랜드 통일을 지지하는 사회민주주의 성향의 정당이다.
  38. 자민당도 노동당과 마찬가지로, 북아일랜드인들의 입당을 받아들이긴 해도 북아일랜드에 공천하진 않으며, 공식적인 자매 정당인 북아일랜드 동맹당을 통해 북아일랜드 관련 정책을 처리한다. 자유민주당(영국) 문서 참고. 반면 보수당의 경우는 노동당이나 자민당과 상황이 다르다. 본래 얼스터 통일당(UUP)과 밀접한 관계에 있었으나 1970년대 이후 관계가 틀어져, 1980년대 말부터 북아일랜드 현지에 당 조직이 들어서서 선거에 자기 당 후보를 공천하고 있다. 당선을 못 시켜서 문제지만... 보수당 문서 참고.
  39. 단 선관위에 정식으로 당 조직이 등록돼 있진 않다. 어차피 현재로서는 노동당의 중앙당에서 직접 북아일랜드 내 선거에 후보를 낼 의사가 없기 때문.
  40. 영국에서는 복수 당적을 보유하는 것이 합법이다. 단 협동당의 당규상으로는 자매정당인 영국 노동당이나 북아일랜드의 사회민주노동당(SDLP)에만 입당할 수 있게 제한을 두었다고 한다.
  41. 영국 선관위에는 각 정당이 자기 당을 서술하는 문구(description)들을 등록해놨다가 선거 때 투표 용지에 당명 대신 그 문구를 쓰는 경우들이 있다. 이렇게 복수의 정당이 동일한 사람을 후보로 공천하는 경우 이 정당들이 공동으로 쓸 문구를 선관위에 등록한 뒤 이것을 투표 용지에 후보 이름 옆에 당명 대신 인쇄되게 하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42. 출처: 영국 선관위 홈페이지의 노동당 등록 정보, 협동당 등록 정보.
  43. 대한민국더불어민주당미국 민주당 등이 진보동맹의 정회원으로 가입돼 있다.
  44. 예를 들어 독일 사회민주당은 사회주의 인터내셔널에 계속 반민주적인 정당들을 포함시키고 있다며 반발해 회비 납부를 끊었다.
  45. 사실 한국어 번안곡도 일제시대 독립군이 부르던 것이다. 이것을 북한이 자신들이라고 쓰고 사실상 혹부리우스의 정통성을 주장하기 위해 자기들의 작품인양 선전한 것. 그러니까 한국 좌파는 북한을 멀리하는게 좋습니다
  46. 여담이지만, 퍼거슨 감독 역시 열렬한 노동당 지지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