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일랜드 내전

The Irish Civil War(영어)
Cogadh Cathartha na hÉireann(아일랜드어)

아일랜드에서 영국-아일랜드 조약(Anglo-Irish Treaty)을 받아들여 성립된 아일랜드 자유국 국방군과 이를 반대한 조약 반대파 IRA(= 먼스터 공화국) 사이에 1922년 6월에서 1923년 5월에 걸쳐 약 1년간 진행되었던 내전.

1 배경

영국식민지배를 받고 있던 아일랜드는 여러 번 독립운동을 시도했으나 번번히 실패하여 독립이 좌절되었다. 그러나 1916년 4월 일어난 부활절 봉기 이후, 영국군의 잔혹한 탄압에 격분한 아일랜드 민중들이 신 페인(Sinn Féin)당과 IRA를 주축으로 한 아일랜드 독립운동에 적극적으로 협력함으로써 1919년 1월 시작된 아일랜드 독립전쟁은 큰 힘을 얻게 된다. 여기에 아일랜드 대기근시기를 중심으로 미국으로 건너간 많은 아일랜드계 미국인들이 독립운동에 재정적인 지원을 해 준 것도 한 몫을 했다.

아일랜드군의 집요한 테러, 암살, 기습 게릴라 작전에 손을 든 영국은 결국 영국-아일랜드 조약(Anglo-Irish Treaty)을 체결하여 아일랜드를 자치령으로 인정한다. 그러나 이 조약은 불완전한 내용으로, 아일랜드 공화국으로 완전 독립을 원하던 대다수의 반영 운동가들에게는 받아들이기 힘든 내용이 많았다. 대표적인 조약 내용은 다음과 같다.

  • 북아일랜드에 해당하는 얼스터 지방 중 6주를 영국령으로 남겨둔다.
  • 아일랜드는 완전한 독립국이 아니라 당시의 캐나다호주와 같은 대영제국 자치령으로 남게 되며 같은 대우를 받는다.
  • 아일랜드 의회의 의원들은 영국 국왕에게 충성을 맹세해야 하며, 영국 국왕은 상징적인 통치자로 군림한다.
  • 아일랜드의 항구 중 일부를 영국 해군에게 계속 개방한다.

이를 이해하기 쉽게 일제강점기 당시의 한반도로 비유해 보자. 독립운동의 결과로 한국의 독립을 인정받아서 일본 정부와의 독립 조약을 맺는데 조약 내용이 다음과 같다고 가정하자. '한국 정부는 형식상 일본 정부 산하의 자치령으로 존재하며 일본 덴노가 형식상 지배자로 군림한다', '일본계 주민이 다수 거주하는 지역은 한국 정부의 영토가 아닌 일본 본국의 직할령으로 보존하며 이 직할령에는 일본군 병력이 주둔할 수 있다', '한국의 의회 의원들은 형식상 일본 덴노에게 충성 의식을 행해야 한다', '독립 후에도 한국 정부는 일본 해군에게 일부 항구를 개방한다' 등. 이 조약 내용이 한국의 독립을 일본이 분명히 인정한다는 전제 아래라 할지라도 과연 한국인들이 이 조약 내용을 쉽게 수용할수 있을까?

이에 대해 마이클 콜린스(Michael Collins)를 위시한 조약 찬성론자들은 '완전 독립을 위한 일시적인 조약이다. 이것을 발판삼아 완전한 독립으로 나아가도록 해야 한다. 지금 상황에서는 이것이 최선의 방책이다.'라는 식으로 맞섰다. 결과론적으로는 이쪽이 옳은 것이었다. 당시 대영 저항운동을 벌이던 IRA 조직은 인적, 물적 자원에서 거의 한계에 달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건 후세의 관점이고 당시 아일랜드인들의 생각으로는 '이제 조금만 더 밀어붙이면 완전한 독립을 이룰 수 있을텐데, 여기서 멈추다니 말이 돼?' 라는 게 대세였다. 후일에는 당시 조약 반대론자였던 이몬 데 발레라 또한 자신이 조약에 찬성하지 않았던 것을 큰 실수라고 말한 바 있다. 그러나 이 조약으로 인해 남북 아일랜드가 분단되었고 결국 북아일랜드는 영국령으로 굳어진 점에서 이 조약은 분단을 영구화한 조약이 되었고, 그런 점에서 콜린스와 아서 그리피스를 위시한 조약 찬성파를 비난하는 주장도 없지는 않다.

결국 아일랜드 의회는 근소한 차이로 이 조약을 비준했고, 이에 대해 당시 아일랜드 공화국 대통령직에 있던 이몬 데 발레라(Éamon de Valera)는 조약에 반대해 대통령직을 사임하고 의회를 나와 조약 반대파인 그의 지지자들로 구성된 신 페인당을 이끌며, 자신들이야말로 아일랜드 공화국의 정통 의회라고 주장하며 아일랜드 자유국 정부와 의회를 배신자로 규정했다. 이들은 1916년 부활절 봉기 당시 선포되었던 아일랜드 공화국의 정통성을 자신들이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며 아일랜드 자유국측을 공박했다. 이리하여 아일랜드영국과의 전쟁에서 승리하여 자치권을 얻어냈으나 이번에는 내전을 맞이할지도 모르는 일촉즉발의 상황에 이르게 되었다.

2 내전

2.1 포 코트 점거 및 더블린 시가전

이런 상황에서 1922년 4월 14일, IRA의 주요 간부 중 하나인 로리 오 코너(Rory O'Connor)가 200명의 대원들을 이끌고 수도인 더블린 시내에 있는 아일랜드의 대법원 포 코트(Four Courts)를 점거하여 자유국 정부를 규탄하고 조약 반대자들의 봉기를 호소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조약 찬성파로 아일랜드 자유국의 총리가 되어 있던 마이클 콜린스는 포 코트에서 퇴거할 것을 요청했으나 이것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이들의 행동을 반란으로 규정하였고, 영국의 개입과 조약이 철회되어 다시 아일랜드가 점령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여 반대파를 철저히 진압할 것을 결심하였다. 조약 반대파 측도 여러 번에 걸친 콜린스의 퇴거 요청을 거절하고, 심지어 6월 27일에는 J.J 오 코넬이라는 자유국 국방군 장성을 납치하기까지 하여 자유국 정부국 측은 더 이상의 인내를 할 수 없는 상황에 다다르게 되었다. 결국 6월 28일 아일랜드 자유국군은 포 코트에 포격을 개시한다.

아일랜드 자유국측은 영국군으로부터 무기를 지원받아 중화기를 갖추었으며, 이 때문에 원래부터 수적으로도 불리했던 IRA측은 상대가 되지 못해 6월 30일 포 코트의 IRA는 항복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건물 뒤편에 위치해 있던 공문서 보관소가 포격을 받아 약 1000년간에 달하는 귀중한 현장 사료가 소실되기도 했다. 첨언하자면 이 사건 때문에 현대 까지도 영어권 아일랜드 역사책들의 서문을 보면 저자와 주제를 불문하고 꾸준하게 나오는 대목이 "안타깝게도 내전 당시 포 코트 사료 보관실의 화재 때문에 사료가 손실 되어 완전한 설명을 하는 건 불가능하지만 그나마 남아 있는 자료를 최대한 활용하여 어쩌구..." 식의 해명글이니 후대의 역사학자들에게 대단히 골치 아픈 유산을 남긴 셈이다.

한편 조약 반대파 IRA의 또 다른 지휘관 중 하나인 오스카 트레이너(Oscar Traynor)가 이끄는 IRA는 더블린 시내의 오 코넬 거리를 점령하고 국방군측과 격전을 벌였다. 이것이 더블린 시가전으로, 이 전투에서 국방군 및 IRA 쌍방 및 민간인을 포함하여 약 4~500여명의 사상자가 발생한다. 일주일에 걸친 이 전투에서 자유국 국방군은 영국으로부터 지원받은 우수한 장비로 인해 IRA측을 압도했다. IRA측은 결국 더블린 시내에서 퇴각하였으며, 자유국 정부군은 이 전투 이후 수도 더블린의 지배권을 완전히 장악하게 된다. 7월 5일 더블린 시내에 남은 IRA 대원들이 항복하고, 마지막까지 남아 저항하던 IRA의 지휘관 캐덜 브루하(Cathal Brugha)[1]가 자유국군에 의해 사살되어 더블린 시가전은 끝나게 되나, 이것은 내전의 서막에 불과했다.

2.2 전쟁의 확대

포 코트 포격과 더블린 시가전의 소식이 전국으로 알려졌고, 더블린에서 퇴각한 IRA 세력이 아일랜드 전역으로 잠입해 들어감으로써 아일랜드인들은 본격적으로 조약 찬성파와 조약 반대파로 나뉘어 전국적인 내전에 들어가게 되었다. 이미 대통령직을 사임한 상태였던 데 발레라는 IRA측에 가담하였으며, 독립전쟁 당시 IRA의 코크[2] 지역 제2 여단장을 맡았던 리암 린치(Liam Lynch)를 IRA의 총사령관으로 임명하여 본격적인 저항 운동을 시작했다.

조약 반대파 측은 리머릭, 워터포드, 코크 등 아일랜드 남서부의 먼스터[3] 지역을 세력권으로 하여 이를 먼스터 공화국(Munster Republic)이라 일컬으며 항전을 계속하였다. 그러나 조약 반대파 측은 지휘계통도 일원화되어 있지 않았으며 무기와 탄약 등 모든 면에서 자유국 국방군에 비해 압도적으로 열세였다. 결정적으로 이들은 포병 전력을 가지지 못했기 때문에 제대로 된 공세를 취할 수 없었고 결국 더블린 시가전 이후 내전 기간 내내 수세로 일관한다.

이에 비해 조약 찬성파측은 월등히 우세한 전력을 갖추어 조약 반대파측을 시종일관 압도했다. 특히 마이클 콜린스가 아일랜드 독립전쟁 당시 영국측의 주요 요인에 대한 암살을 수행하기 위해 육성했던 'The Squad'라는 부대는 내전 당시 'Dublin Guard'로 재편되어 조약 반대파에 대항해 싸울 때 가장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했고 조약 반대파들에게 가혹했다. 이 때문에 이들은 조약 반대파들에게는 'Green and Tans'[4]라고 불리며 증오의 대상이 되었다.

이리하여 아일랜드 자유국 국방군은 더블린 시가전이 끝난 약 한 달 뒤인 1922년 8월경까지 먼스터의 주요 지역을 모두 장악하게 된다. 1922년 7월 20일에는 리머릭이 함락되었고, 8월 10일에는 먼스터 공화국 최후의 보루였던 워터포드와 코크가 함락되었다. 우수한 장비로 압도한 국방군 앞에 IRA의 저항은 산발적으로 전개되어 쉽게 분쇄되었고, 유일하게 전투라 할 만한 것은 리머릭 함락 이후 벌어진 킬멀록(Kilmallock) 전투뿐이었으며 여기서도 IRA는 패하였다. 먼스터 공화국이 사실상 실체를 잃고 소멸한 1922년 8월 이후부터 내전의 양상은 요인 암살과 테러, 게릴라전으로 흘러가게 되었다.

2.3 게릴라전과 종전

먼스터 공화국의 수도격이었던 아일랜드의 제2도시인 코크가 함락된 이후 IRA 최고 지휘관인 리암 린치는 게릴라전으로 전술을 바꾸었다. 그는 휘하 단원들에게 독립전쟁 당시처럼 분산하여 게릴라 활동을 전개할 것을 명령했다. 이 과정에서 조약 찬성파에 서서 국방군을 지휘하던 독립 영웅 마이클 콜린스가 8월 22일 코크 근처의 도로에서 IRA에 의해 암살당하기도 했다. 마이클 콜린스가 살해당하기 열흘 전인 8월 12일 대통령 아서 그리피스 또한 심장마비로 인해 사망한 상황이었는데, 자유국 정부는 W.T. 코스그레이브(W.T. Cosgrave)가 수반이 되었고, 군부는 리처드 멀케이(Richard Mulcahy)가 지휘관이 되어 내전을 계속해나가게 되었다. 이들은 조약 반대파에 대해 예전보다도 훨씬 강경한 입장을 취했다.

IRA측은 암살활동에 주력하여 조약 찬성파의 의원들을 살해하는 등 테러 전술로 저항했고, 이에 대해 자유국 정부 측은 IRA측이 게릴라전을 계속한다면 사로잡힌 IRA측 간부를 처형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IRA측이 의원 숀 헤일즈(Sean Hales)를 살해하자, 자유국 정부는 포 코트 함락 당시 사로잡혔던 로리 오 코너를 비롯한 4명을 총살형에 처했다. 전쟁의 가장 비참하고 잔혹한 학살과 보복은 내전 말기인 이때 가장 극심했는데, 이 기간 중 아일랜드 자유국 정부는 체포한 조약 반대파측의 77명을 재판 없이 처형하였다. 또 자유국 국방군은 반정부 게릴라 활동이 활발하던 케리(Kerry)카운티에서 사로잡은 IRA 대원 9명의 몸에 지뢰를 묶은 뒤 폭파시켜 죽이는 등 잔학행위를 저지르기도 했다. 물론 이에 대한 IRA측의 보복 테러 또한 빈발하였다.

내전 기간 중 적어도 153명 이상의 조약 반대파 수감자들이 불법적으로 처형되었으며, 이에 대한 조약 반대파측의 보복 테러도 격심하여 자유국 정부 수반인 코스그레이브의 숙부를 비롯하여 많은 정치인들이 살해당했다.

조약 반대파와 IRA는 민중의 지지를 얻는 데 실패하여 결국 와해될 수밖에 없는 운명에 있었다. 이들은 내전 발발 직후 실시된 총선거에서도 큰 지지를 얻지 못하였으며, 결정적으로 아일랜드 사회에 큰 영향을 행사하는 가톨릭교회가 자유국 정부를 지지하고 IRA를 불법 폭력단체로 규정지음으로써 조약 반대파는 사실상 내전에서 승리할 가망을 완전히 잃고 말았다.

이리하여 1923년 초 시점에서 전황은 이미 조약 반대파측에 절망적이었고, 자유국 정부의 승리가 기정사실화되어가고 있었다. 조약 반대파의 수장격이었던 이몬 데 발레라는 IRA의 지휘부에 정전할 것을 요청했으나 IRA측은 이를 거부했다. 1923년 4월 10일 IRA의 총사령관이었던 리암 린치가 국방군에 의해 사살된 뒤 내전은 사실상 종막을 향했고, 5월 24일 데 발레라의 아일랜드 공화국군 해산 선언과 함께 내전은 끝났다. 내전이 끝난 이후 데 발레라를 비롯한 많은 조약 반대파측 인물들이 체포되었으나, 내전이 끝난 직후 유화정책을 취한 자유국 정부에 의해 대부분이 짧은 기간 안에 풀려났다.

3 영향

이 내전이 아일랜드에 끼친 영향은 지대했다. 아일랜드 독립전쟁 당시 하나가 되어 싸웠던 독립 투사들이 조약 지지파와 조약 반대파로 나뉘어, 얼마 전까지도 동지이자 친우였던 상대의 목숨을 노리며 서로 증오해야만 하는 비극이 연출되고 만 것이다. 아일랜드 자유국 정부군은 약 800명의 사상자를 냈으며, 조약 반대파 IRA 측은 정확한 기록은 없으나 약 2,000~4,000명 가량의 사상자를 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또 민간인 사상자도 약 1,000~3,000명 가량 될 것으로 추정된다.

경제적으로도 내전으로 인한 주요 건물과 산업 시설의 파괴, 철도 등 사회간접자본에 대한 IRA 측의 파괴공작으로 인해 막대한 타격을 입었다. 전쟁 수행을 위해 든 비용도 당시 유럽에서 최빈국이었던 아일랜드의 재정에도 큰 부담을 주었다.

4 그 이후의 아일랜드

1926년 반조약파의 거두였던 이몬 데 발레라가 무장 투쟁을 포기하고 합법 투쟁을 주장하며 자유국의 정계에 참가할 것을 선언하였고, 공화당(Fianna Fáil)을 창당하여 이듬해 의원에 당선되었다. 데 발레라와 공화당은 1932년 정권을 장악하였고, 이에 대항하여 예전의 조약 찬성파였던 반대파는 통일 아일랜드당(Fine Gael)을 구성하였는데 이 두 당은 2011년까지 아일랜드의 제1당과 제2당의 위치에 있었다.[5] 내전을 겪은 세대가 1970년대까지도 아일랜드의 정권을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아일랜드 내전은 아일랜드의 정치에도 큰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이몬 데 발레라는 결국 그의 주장을 관철시켜 차례차례 아일랜드의 완전 독립을 향해 나갔고, 마침내 1937년 아일랜드가 독립국임을 선포한다. 그리고 1949년에는 영연방에서도 탈퇴하여 완전한 독립을 이룩하게 된다. 단 결과적으로 아일랜드 공화국북아일랜드 통합은 이론상으로는 포기하지 않았으나 사실상 포기한 것이나 다름없이 되어버렸고, 지금은 아일랜드의 남북 분단이 고착화된 상황이다. 일단 너무나 오랜 세월이 지난데다 1998년의 굿 프라이데이 협정 이후에는 현상 유지가 가장 나은 대안이라는 것이 영국, 아일랜드 공화국, 북아일랜드 주민 대다수의 생각이다.

한편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는 IRA 조직[6]은 지금까지도 이 영국-아일랜드 조약이 불법적임을 주장하고 있다. 이들은 아일랜드 내전 이후 정국의 변화에 따라 계속해서 분열을 거듭하여 쇠약해졌으며, 아일랜드 공화국의 수립 이후 거의 힘을 잃은 상태였으나 1960년대 후반 이후 심해진 얼스터 신교도들의 북아일랜드 거주 가톨릭 교도에 대한 탄압과, 결정적으로 이 분쟁을 막기 위해 왔던 영국군이 저지른 피의 일요일 사건(2번)에 의해 다시 지지를 얻게 되어 1990년대까지도 활발한 저항 활동을 벌이게 된다. 그러나 이들도 지금은 현 상황을 인정하여 굿프라이데이 협정 이후에는 북아일랜드 자치 정부 의회에 IRA 간부들이 가담하기도 했다.

물론 그래도 아직까지도 이를 인정하지 않는 극소수의 세력들이 있어서 완전히 테러 위협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다만 밥 먹듯이 테러(혹은 의거)가 일어났던 70~90년대의 상황에 비하면 매우 평화로워진 것은 사실. 2011년 5월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 2세가 아일랜드를 방문한 것도 평화 분위기를 더하는 데 한 몫을 했다.

결론적으로 아일랜드와 영국의 역사, 그리고 북아일랜드 분쟁사에서 아일랜드 내전의 영향을 떼놓고는 이야기할 수 없다고 할 수 있다.

5 관련 문서

  1. 아일랜드 독립전쟁 당시 IRA의 총참모장을 맡은 최고 지휘관이었으나, 휘하의 정보부장이었던 마이클 콜린스가 강력한 카리스마로 실질적인 지휘관 역할을 했기 때문에 콜린스와의 사이는 좋지 않았다. 또 1920년 당시 영국으로 게릴라 전선을 확대할 것을 요구했으나 콜린스에 의해 거절당한 일 때문에도 콜린스와의 사이는 좋지 않았다. 어찌 되었건 부활절 봉기 당시의 주요 간부이자 아일랜드 독립 영웅 중 하나인 그가 전사한 것은 내전에 불을 지피게 된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2. 아일랜드 제 2의 도시.
  3. 아일랜드 섬의 지역 구분 중 하나. 아일랜드는 크게 구분할 때 렌스터(중부, 수도 더블린이 속하는 중심지역), 코노트(서부), 얼스터(북부), 먼스터(남서부)의 네 지역으로 구분한다. 정식 행정구역은 아니고 한국으로 비유하면 영남이니 호남이니 하는 크고 두리뭉실한 단위의 분류.
  4. 아일랜드 독립전쟁 당시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던 영국군 베테랑으로 구성되어 아일랜드에 파견되어 독립운동을 탄압했던 'Black and Tans'라는 영국군 부대에 빗대어 부른 이름. 매우 강경하고 잔학한 진압 및 수색 방식으로 오히려 더 큰 저항을 불러일으키는 계기를 만들기도 했다. 아일랜드 자유국군의 군복이 녹색(카키색)이었기 때문에 'Green' and Tans라고 부른 것.
  5. 아일랜드 공화당은 1932년 이래 단 한번도 제1당의 지위에서 밀려난 적이 없었다가(야당 연합정권에게 정권을 내준 적은 있었다) 2011년 IMF신세까지 지게 된 금융위기의 여파로 선거에서 참패하여 처음으로 제1당의 지위에서 밀려나게 된다. 어째 동쪽의 어느나라 같다 이후에는 제1당을 차지한 피네 갤 당과 대통령을 배출하고 제 2당을 차지한 노동당의 연립정부가 들어섰다.
  6. 강경파인 Provisional Irish Republican Army로, PIRA라고 약칭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