阿利斯等(생몰년 미상, 재위:? ~ 538)
탁순국의 역대국왕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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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순국의 마지막 왕. 아리사등은 왕명이며 이름은 기능말다간기(己能末多干岐)로 추정된다.
- 상위항목 : 가야/왕사
1 소개
가라왕(加羅王)이 신라왕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여 드디어 아이를 가졌다. 신라가 처음 여자를 보낼때 100인을 아울러 보내 그녀의 시종으로 삼았으므로, 받아들여 여러 현에 나누어 배치했는데, 신라의 의관을 입도록 하였다. 아리사등은 그들이 복장을 바꾸어 입었다고 성내며 사자를 보내 돌아가게 하라고 시켰다. 신라는 크게 부끄러워 그녀를 도로 돌아오게 하려고 했다.(후략) - 《일본서기》계체기 23년 3월조.
당시 가야연맹의 수장이었던 반로국이 신라와 손을 잡았지만 신라의 속셈을 눈치채고 강경한 대응을 했던 것으로 일본서기에 나타난다.
이후 백제와 신라가 침공할 기운이 보이자 탁순국 근처로 와있던 왜의 사신 게누노오미(毛野臣)를 중재인으로 삼아 신라와 백제왕에게 탁순과 남가라(구야국)지역을 비무장 지대로 인정해주길 바랬으나 신라와 백제가 무시했다.
531년 안라회의가 열렸지만 아무 소득을 얻지 못했고 이어 백제가 군대를 전진 시켜 칠원에 구례모라성[1]을 쌓는 등의 압박을 가해오자 탁순국 내부는 혼란에 빠진다. 더군다나 일본측 중재인으로 왔던 게누노오미는 안라 회의 이후, 구사모라[2]에 머물면서 자신들의 세력 확장에만 치중하고 탁순국을 도와주지 않았기에 왜의 도움도 바랄수 없는 상황이었다.
탁순국 내부에서는 백제에게 투항하자는 백제파와 신라에 투항하자는 신라파의 의견이 많았으나 아리사등은 결국 신라에 투항하기로 결정하였다. 결국 구야국이 멸망한지 6년후인 538년에 신라에 투항하며 탁순국은 역사속으로 사라졌다.
2 멸망후
탁순국은 신라에 편입되어 굴자군으로 지정되었으며 이후 경덕왕이 의안군(義安郡)으로 고쳤는데 이때 범위가 칠제현[3], 합포현[4], 웅신현[5]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를 근거로 탁순국이 단순한 소국이 아닌 넓은 영토를 가졌다라는 의견도 존재한다. 다만 탁순국이 협조적으로 신라에 투항했기에 탁순국 당시 영토보다 넓은 지역을 배정 받았을 수도 있다는 의견도 있기에 아직 확실한 영토는 아직 알수가 없다.
3 가족관계
《일본서기》에는 아들 "일라"의 존재도 기록하고 있다. 탁순국 멸망후 백제에서 벼슬을 받아서 달솔이라는 직책을 달고 있는 것으로 나온다. 일본에서 임나를 되찾기 위해(...) 임나의 일원이었던 탁순국 왕자인 일라를 찾아 데려오려 했으나 위덕왕이 일본이 강해지는 것을 두려워해 보내주지 않다가 일본 사신이 덴노의 어명(...)을 전하자 쫄아서 내주었다는 황당한 기사. 이후 덴노에게 조언했다가 이를 본 백제 신하들이 죽이려 하자 몸에서 스스로 불을 내서 겁을 준후 죽었다가 살아났다 다시 죽었다고 한다.
일종의 신화적인 내용이 가미되어 있어서 실제 아들인지는 불분명 하다.
- 가을 7월 1일 : "우리 선고덴노의 치세에 신라는 내관가(內官家)[* 일본의 속국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임나일본부|임나(금관 가야)를 자신의 속국으로 바라보고 있는데 이는 일본서기의 프로파간다가 담긴 단어이다.]인 나라를 멸망시켰다. 아메쿠니오시하라키히로니하노스메라미코토(天國排開廣庭天皇) 23년에 임나는 신라에 의해서 멸망하였다. 그러므로 신라는 우리 내관가를 멸망시켰다고 말한 것이다.], 선고덴노는 임나를 회복하고자 꾀하였다. 그러나 이루지 못하고 죽어서 그 뜻을 달성하지 못하였다. 이로써 짐은 신령스러운 계책을 받들어 다시 임나를 일으키고자 한다. 지금 백제에 있는 화위북국조(火韋北國造) 아리사등의 아들 달솔(達率) 일라(日羅)는 어질고 용맹하다. 그러므로 짐은 그와 함께 도모하고자 한다." 라고 말하였다. 곧 키노쿠니노미야츠코오시카츠(紀國造押勝)와 키비노야마노아타히하시마(吉備海部直羽嶋)를 보내어 백제에 불러들였다.
- 겨울 10월 : 키노쿠니노미야츠코오시카츠 등이 백제에서 돌아왔다. 조정에 "백제국의 왕은 일라를 아까워 (일본으로) 보내려 하지 않습니다." 라고 보고하였다.
- 이 해에 또 키비노야마노아타히하시마를 보내어 일라를 백제에서 불렀다. 하시마(羽嶋)는 이미 백제에 가서 먼저 따로 일라를 만나고자 혼자 집의 문 앞으로 갔다. 잠시 후 집 안에서 나온 한(韓)의 부인이 한어(韓語)로 "너의 뿌리를 내 뿌리 속에 넣어라."라고 말하고, 곧 집 안으로 들어갔다. 하시마는 곧 집 안으로 들어갔다. 이에 일라가 맞이하여 손을 잡고 자리에 앉게 하였다. 몰래 "제가 은밀히 들으니, 백제국주는 천조(天朝)를 의심하여 신을 보낸다면 머무르게 하고 돌려보내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때문에 아까워하면서 보내려고 하지 않습니다. 마땅히 칙을 알릴 때 엄하고 무서운 안색을 드러내면서 재촉하여 급히 부르십시오."라고 고하였다. 하시마는 곧 그 계책에 따라 일라를 불렀다. 이에 백제국주는 천조를 두려워하여 감히 칙을 어기지 못하였다. 백제국주는 일라, 은솔 덕이(恩率 德爾)‧여노(余怒)‧기노지(奇奴知)‧참관(參官) 타사(柁師) 덕솔 차간덕(德率 次干德) 수수(水手) 등 약간의 사람을 보냈다.
일라 등이 길비(吉備)의 코지마(兒嶋) 둔창(屯倉)에 이르자 조정에서는 오호토모노아라테코노무라지(大伴糠手子連)를 보내어 위로하고, 다시 대부(大夫) 등을 나니와관(難波館)[6]에 보내어 일라를 찾아보게 했다. 이 때 일라는 갑옷을 입고 말을 타고 문 앞에 이르러서 곧 건물 앞으로 나아갔다. 그리고 절도 있게 무릎을 꿇고 절하며 한탄하기를 “히노쿠마노미야니아메노시타시라시메스스메라미코토(檜隈宮御寓天皇)때에 우리 주군(君) 오호토모노카나무라노오호무라지(大伴金村大連)가 국가를 위하여 바다 밖에 사신으로 갔던 화위북국조 형부채부아리사등(火葦北國造 刑部靫部 阿利斯登)의 아들 신(臣) 달솔 일라는 덴노의 부름을 받고 두려워하며 내조(來朝)했습니다”라 하였다. 이에 갑옷을 벗어 덴노에게 바쳤다. 덴노는 아토의 쿠하노이치(阿斗桑市)에 관사(館舍)를 지어 일라를 머물게 하고 바라는대로 공급해 주었다. 또 아배노메노오미(阿倍目臣)와 모노노베노니헤코노무라지(物部贄子連)‧오호토모노아라테코노무라지을 보내어 일라에게 국정을 물었다. 일라가 대답하기를 “덴노가 천하를 다스리는 바의 정치는 반드시 백성들을 보호하고 기르는데 있습니다. 어찌 갑자기 군사를 일으켜 도리어 멸망에 이르려하십니까. 그러므로 지금 논의하는 자들로서 조정에 있는 신(臣)‧연(連)의 이조로부터【이조(二造)란 국조(國造)와 반조(伴造)이다】아래로는 백성에 이르기까지 모두 부유하게 하고 부족함이 없게 하십시요. 이렇게 3년을 하면 양식과 병사가 풍족하고 백성들로 하여금 즐겁게 하여 물불을 꺼리지 않고 나라의 어려움을 함께 근심할 것입니다. 그런 다음에 선박을 많이 만들어 진(津)마다 줄지어 두고 객인[7]들이 보게 하여 두려운 마음을 일으키게 하십시요. 그리고 유능한 사신을 백제에 보내어 그 국왕을 부르되 만일 오지 않으면 태좌평(太佐平)‧왕자(王子) 등을 부르십시요. 그러면 저절로 복종할 마음이 우러나올 것이니, 그런 뒤에 죄를 물어십시요”라 하였다. 또 “백제인이 꾀하여 ‘배 3백 척으로 츠쿠시(筑紫)를 달라고 하자' [8]라고 했습니다. 만약 그것이 진실로 청하는 것이라면 겉으로는(츠쿠시를) 내려주십시요. 그러면 백제는 새로 나라를 세우려고 반드시 먼저 여자들과 아이들을 배에 싣고 올 것입니다. 국가에서는 이 때를 대비하여 일기(壹伎)‧대마(對馬)에 복졍(伏兵)을 많이 두었다가 이르는 것을 기다려 죽이십시요. 오히려 속임을 당하지 말고 중요한 곳마다 튼튼한 요새를 쌓으십시요”라 아뢰었다.
이에 은솔(恩率)‧침관(參官)이 나라로 되돌아 갈 때에【옛 책에는 은솔을 한 사람, 참관을 한 사람이라 하였다】 몰래 덕이(德爾) 등에게 “내가 츠쿠시(筑紫)를 지나갈 때 쯤을 헤아려 너희들이 몰래 일라를 죽인다면 내가 왕에게 모두 아뢰어 높은 벼슬을 내리도록 하고 자신과 처자식들에게도 후에 영예를 내리도록 하겠다”라 하였다. 덕이(德爾)‧여노(余奴)가 모두 수락했다. 참관 등은 드디어 치카(血鹿)에서 출발하였다. 이 때 일라는 쿠하이치노무라(桑市村)로부터 나니와관(難波館)으로 옮겼다. 덕이 등은 밤낮으로 서로 모의하여 죽이고자 하였는데 이 때에 일라의 몸에서 빛이 나 불꽃같았으므로 덕이 등은 두려워서 죽이지 못하였다. 드디어 12월 그믐에 빛을 잃기를 기다려 죽였다. 일라가 다시 살아나서 “이는 내가 부리던 노비(奴)등의 짓이지 신라가 한일이 아니다”라는 말을 마치고 죽었다【 마침 이 때에 신라 사신이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 것이다】. 덴노가 니헤코노오호무라지(贄子大連)와 아라테코노무라지(糠手子連)에게 명하여 워고오리(小郡)의 서쪽 부근 언덕 앞에 거두어서 장사지내게 하고, 그 처자식과 수수(水手) 등은 이시카하(石川)에 살게 했다. 이에 오호토모노아라테코노무라지가 논의하여 “한 곳에 모여서 살면 변고가 생길까 두렵다”라 하였으므로 처자식들은 석천 백제촌(百濟村에 살게 하고 수수 등은 석천 대반촌에 살게 했다. 덕이 등을 붙잡아 하백제 하전촌에 두고 몇몇 대부(大夫)를 보내어 그 일을 따져 물었다. 덕이 등이 죄를 자백하여 “진실로 이는 은솔‧참관이 시켜서 한 짓입니다. 우리들은 그 밑에 있기 때문에 감히 거스릴 수 없었습니다”라 하였다. 이 때문에 옥에 가두고 조정에 복명했다. 아시키타(葦北)에 사신을 보내어 일라의 권속을 다 불러 덕이 등을 주어서 뜻대로 죄를 판결하게 했다. 이 때 이시키타노키미(葦北君) 등이 (덕이 등을) 받아서 모두 죽여 미메시마(彌賣嶋)에 던져버리고【미메시마는 아마 히메시마(姬嶋)일것이다.】 일라를 이시키타(葦北)에 이장(移葬)시켰다. 그 후 바닷가에 있는 사람들이 “은솔의 배는 바람을 만나 바다에 빠졌고, 참관의 배는 쓰시마(津嶋)에서 떠돌아 다니다가 비로소 돌아갈 수 있었다”라 하였다.
ㅡ 일본서기 권20 민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