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파국의 역대국왕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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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명 | 이뇌왕(異腦王)/이부리지가(已富利知加) |
생몰년도 | ? ~ ? |
재위기간 | 494 혹은 524 ~ 6세기 중엽으로 추정 (미상) |
뇌가 2개인 왕
반파국의 8대왕 혹은 9대왕.
《일본서기》에 등장하는 이름으로는 이부리지가(已富利知加)라고 불리웠다. 하지만 기능말다간기또한 이뇌왕의 이름일수 있다는 의견이 있다.
1 소개
대가야에서 이름이 알려진 몇 안되는 왕. 백제의 세력 확장을 막기위해 친 신라 노선을 택하였으나 결국 가야연맹의 멸망을 앞당긴 인물로도 평가 받는다.
(선략) 또 석순응전(釋順應傳)에는 대가야국 월광태자(月光太子)는 곧 정견모주의 십세손으로 부는 이뇌왕이라 하는데 신라에 구혼하여 이찬 비지배의 딸을 맞아 태자를 낳았는데 이뇌왕은 뇌질주일의 팔세손이다. (후략) -《신증동국여지승람》 고령현(高靈縣)
최치원의 쓴 기록을 참조로 기록한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정견모주의 8세손이라고 칭하여 져있다. 아들은 신라 여자와 사이에서 낳은 월광태자가 있다.
신라와 가야에선 지(知)나 치(淄)가 존경의 의미인 "님"과 같은 의미로 사용 되었기에 이뇌왕의 뇌(腦)는 치(淄)의 잘못된 기록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
전견모주의 8세손이어서 8대왕으로 인식할수 있지만 아들인 월광태자는 10세손이다. 그렇기에 신증동국여지승람의 내용에 따라 8세손 = 8대왕으로 볼지, 월광태자가 10세손임으로 아버지인 이뇌왕이 9대왕이라는 설들이 있다. 하다못해 가락국기만 제대로 남아있다면...
2 친신라 노선
이뇌왕의 재위시기 삼국의 정세는 더욱 치열해져 갔다. 고구려의 남진 정책이 점차 수그러 들고 있었고 백제는 동성왕이 왕권을 강화하며 정국을 평안케 했고 그 뒤를 무령왕이 이어받아 강력한 중앙집권 체제를 유지했다, 신라는 법흥왕이 율령 반포와 공복제정등을 통해 중앙집권국가 체제를 완성해 나아갔다. 이러한 상황에서 백제 무령왕은 가야일대에 대한 영향력을 확장하기 위해 가야연맹을 압박하기 시작했고, 그결과 6세기 중엽 중요한 항구였던 다사진을 백제에 빼앗겼다. 이에 위기감을 느낀 이뇌왕은 신라와 손을 잡기로 결심한다.
九年 春三月 加耶國王遣使請婚 王以伊湌比助夫之妹送之9년 봄 3월에 가야국 왕이 사신을 보내 혼인을 청하였으므로, 왕이 이찬 비조부(比助夫)의 누이[2]를 그에게 보냈다. -《삼국사기》 본기 법흥왕 9년
신라는 이를 받아들이고 이찬 비조부의 누이를 100여명의 종과 함께 이뇌왕에게 보낸다. 하지만 법흥왕은 가야연맹과의 손을 잡기 위해서가 아니라 낙동강 유역으로의 진출을 노리고 혼인동맹을 체결한 것이었다. 이는 《일본서기》에 자세하게 나타난다.
가라왕(加羅王)이 신라왕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여 드디어 아이를 가졌다. 신라가 처음 여자를 보낼때 100인을 아울러 보내 그녀의 시종으로 삼았으므로, 받아들여 여러 현에 나누어 배치했는데, 신라의 의관을 입도록 하였다. 아리사등은 그들이 복장을 바꾸어 입었다고 성내며 사자를 보내 돌아가게 하라고 시켰다. 신라는 크게 부끄러워 그녀를 도로 돌아오게 하려고 했다."전에 그대가 장가드는 것을 받아들여 나는 즉시 혼인을 허락했으나, 지금 이미 이처럼 되었으니 왕녀를 돌려주길 바라오"
가라(加羅) 기부리지가(己富利知伽)[3]가 대답하였다.
"부부로 짝지워졌는데 어찌 다시 헤어질 수 있겠소? 또한 아이가 있으니 그를 버리면 어디로 가겠소?"
결국 (신라는) 지나가는 길에 도가(刀伽),고파(古跛),포나모라(布那牟羅)의 세성을 함락시키고 또한 북쪽 변경의 다섯 성을 함락시켰다. - 《일본서기》계체기 23년 3월조.
탁순국을 포함한 여러 가야 소국들이 신라의 이러한 행동에 반발하자 이뇌왕은 결국 법흥왕에게 동맹 파기와 다름없는 "누이를 돌려달라"는 이야기를 듣게되고 이를 이뇌왕이 거절하자 성 5개를 빼앗겼다.
十一年 秋九月 王出巡南境拓地 加耶國王來會11년 가을 9월에 왕이 남쪽 변방의 새로 넓힌 지역을 두루 돌아보았는데, 이때 가야국 왕이 찾아왔으므로 만났다. -《삼국사기》 본기 법흥왕 11년
이후 법흥왕의 순시때 직접 찾아가 대면하기도 하였으나 이때의 일은 자세히 기록되지 않아 알수가 없다.
이러한 인련의 사건이후 가야연맹의 소국들은 반파국은 이러한 문제를 해결할수 없다고 판단하고, 안라국을 중심으로 뭉치기 시작했다. 그리고 반파국과 맞먹는 힘을 가진 안라국은 가야연맹의 자주권과 영토문제를 해결하기위해 안라회의를 추진한다.
이 이후의 일들에 대해선 기록이 남아있지 않다. 가족 관계는 신라에서 넘어온 양화부인과 아들인 월광태자가 알려져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