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어인

(아프리카너에서 넘어옴)

Boer 다만 네덜란드어/아프리칸스어식 발음은 부르이다.(이에 대해서는 네덜란드어 항목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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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구지우마차를 이끌고 가는 정착 초기의 보어인들의 모습. 미국과 달리 남아공의 '포장마차'는 말보다는 주로 황소로 끌었기 그럼 포장마차가 아니라 포장우차잖아 때문에 옥스왜건(Ox-wagon)혹은 오서바(Ossewa)라 불리었다.[1][2]

1 개요

아프리카너(Afrikaner)라고도 하는데, 남아프리카 백인의 60%를 차지하며 남아공에 거주하는 보어인의 수는 약 320만 정도로 추산되고 나미비아나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등에 거주하는 보어인까지 합하면 350만명정도이다. 본래 케이프 아프리카너와 보어는 구별되어 쓰였으나 영국에 의해 정복당한 다음에는 그딴 거 없다. 보어라는 이름은 '농부'라는 의미가 있다고 한다. 지금도 네덜란드어로는 농부란 뜻이고 가끔 성씨로 쓰이기도 하며 독일어의 바우어(Bauer)에 해당한다. 엄밀하게 말하면 아프리카너는 아프리칸스를 모어로 쓰는 남아공 백인 전부를 일컬는 것이고, 이 중에서 적지않은 수는 네덜란드계가 아니라 프랑스 위그노나 독일에서 넘어온 사람들도 많이 된다. 그리고 아파르트헤이트가 폐지된 현대에 와서 보어란 단어 자체가 원래의 민족, 언어적 의미 보다 미국의 화이트 트래시, 레드넥 처럼 촌스럽고, 인종차별주의적이고, 광신도이며[3][4] 아직도 머릿속은 아파르트헤이트 시절에서 벗어나지 못한 교육 받지 못하고 사회에 대한 불만만 가득찬 백인 빈곤층을 의미하는 단어로 변질되었기 때문에 현지에서도 역사적인 문맥에서가 아니라 실재로 누굴 가리켜 저 사람 이 사람은 보어인이라 하면 상당히 불쾌한 반응을 일으킬 것이다. 현대 들어와서 저런 민족적 의미로 아프리칸스어 화자 백인을 일컬는 단어는 아프리카너로 교체 되었다.

애시당초에 흑인들을 동부지역으로 몰아내고 정착한데다가 아파르트헤이트를 통과시키시고 또한 아파르트헤이트를 주도한 정당인 국민당을 적극적으로 지지를 보이는 경향을 보였기에[5]아파르트헤이트 시절에 흑인들과의 관계는 크게 나빴으며, 덕택에 보어인을 쏴라(shoot the boer!)라는 노래도 흑인들에게 널리 애창되었을 정도였다. 1990년대 들어서 인종차별정책을 폐지하고 아파르트헤이트 폐지 국민투표도 상당수 보어인들이 인종차별 정책 폐지에 찬성표를 던졌던데다가 ANC 집권후에 인종간 화합을 주요시책으로 삼으면서 관계가 만히 풀렸다고 하지만 여전히 빈부격차가 심한 상태라 현재도 흑인과의 관계가 썩 좋다고 말하기는 그렇다.

이들이 '네덜란드인'이 아니라 '보어'라고 따로 구별된 이유는 순수한 네덜란드인들로만 구성된 것이 아니고, 후술할 다양한 백인계 민족들이 아프리칸스어를 쓰면서 정착했기 때문이다.

본국인 네덜란드와의 관계도 썩 좋지는 않았다. 애초에 이들이 다른 독자적인 민족 집단으로 정체성을 가진 계기 자체가 막상 본국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에서 정착하라고 내보네 놓고 보호나 지원은 똑바로 안 해주니 빡쳐서 동인도 회사 상대로 반란을 일으켰던것. 시종일관 네덜란드 본국에서는 남아프리카의 보어인들을 집나갔더니 갈수록 꼴통짓만 하는 덜떨어진 자식으로 봤고, 역으로는 자신들을 배신한걸로도 모잘라 참된 종교, 즉 근본주의적 칼뱅주의를 버리고 자유주의에게 영혼을 팔아 먹은 없는것만도 못한 부모로 봤다. 그나마 보어전쟁이 벌어지자 잠깐이나마 네덜란드 본국에서 관심을 가져주기도 했지만[6] 이게 또 친나치 행위와 연관되는 바람에 2차대전 이후로는 보어인에 대한 네덜란드인들의 시선이 다시 냉담해졌고, 그래서 아파르트헤이트 시절 남아공을 제일 많이 까던 나라중 하나가 네덜란드였다.

2 역사

2.1 초기 정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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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2년 동인도회사의 얀 판 리베이크(Jan van Riebeeck)가 데리고 온 네덜란드 농부들로부터 시작해 칼뱅교도들과 프랑스계 위그노들, 그리고 주류 종교에 탄압받던 여러 개신교 성향의 백인들이 이 종교활동의 자유를 찾아 지금의 남아공 지역으로 옮겨간 사람들이 기원이다. 초기에는현재의 웨스트-노던 케이프 지역에 모여살았고 현지 흑인들과 교류하거나 혹은 충돌하고 노예교역(...)도 하면서 그럭저럭 살았는데 나폴레옹 전쟁 이후 케이프 지역이 영국에게 넘어가고 노예 해방정책을 펴자 농민들이 다수였던 보어인들이 대거 반발했고 영국은 이를 분쇄하는 정책을 폈다. 버틸수가 없어진 보어인들은 대거 내륙으로 이주했다. 당연히 이 과정에서 현지 흑인들과의 충돌이 일어났고 이 과정에서 소총 등을 이용한 원주민 학살이 자행되었다.이걸 이름하여 '그레이트 트렉(Great Trek)'[7]이라고 한다. 이들은 크게 세 부류로 나뉘어 상대적으로 케이프 식민지에 가까운 오렌지 강 유역에 정착한 한 부류는 오렌지 자유국을, 더 북쪽으로 올라가 발 강 너머, 림포포 강 유역에 정착한 부류는 트란스발 공화국을, 동쪽 해안지대로 우회한 나머지 한 부류는 콰줄루[8] 일대에 정착해 나탈 공화국을 세웠다.

2.2 영국과의 충돌

케이프 식민지를 차지한 영국은 보어인의 그레이트 트렉을 막지 않고 방치해 사실상 보어인의 나라들의 독립을 인정한 상태였다. 그러나 19세기 중반에 이르자 케이프 식민지로는 만족하지 못한 영국이 점점 보어인이 살던 내륙으로 진출하기 시작했다. 결국 나탈 공화국은 버티지 못하고 케이프 식민지에 합병되었고 보어인이 세운 두 공화국은 영국의 이런 진출 야욕에 위협을 느끼기 시작했다. 하지만 영국은 이 두나라를 합병하지 않고 1852년의 샌드 강 협정, 1854년의 블룸폰테인 협정으로 보어인들의 독립을 인정했다.

그러던 중 남아프리카 내륙에서 금과 다이아몬드가 발견되자[9] 영국은 남아프리카 내륙으로침략의 마수를 뻗고 그 과정에서 당연히 보어인들의 나라와 충돌하게 된다. 그와중에 콰줄루의 줄루 왕국과 보어인의 트란스발 공화국 사이에 충돌이 벌어지고 이를 빌미로 1877년 영국은 트란스발 공화국을 병합한다. 보어인은 당연히 반발했지만 줄루 왕국의 위협이 지속되는 이상 그냥 참을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1879년 줄루 왕국이 영국령인 나탈을 공격하자 줄루 전쟁이 발발, 영국은 줄루 왕국을 멸망시키고 나탈에 합병시킨다.

줄루 전쟁이 끝나고 줄루 왕국의 위협이 사라지자 보어인들의 불만이 다시 터져 나오기 시작하는데 영국이 트란스발 일대에 군대 배치를 늘리자 결국 1880년 트란스발 공화국은 반란을 일으킨다(1차 보어 전쟁). 넓은 국토와 적은 수를 기반으로 보어인들은 유격전으로 영국군을 괴롭히고 된통 당한 영국은 1881년 트란스발 공화국의 독립을 인정한다. 하지만 1886년 트란스발의 비트바테르스란트 지역에서 거대한 금광이 발견되자 케이프 식민지의 영국인들이 트란스발로 이주하면서 그 수가 점점 불어나 트란스발 내에서 보어인과 영국인 간의 갈등이 커지게 된다. 결정적으로 당시 케이프 식민지의 수상 세실로즈가 트란스발 내 영국인들의 대표 리앤더 제임슨을 획책해 1896년 쿠데타을 일으키게 만들면서(제임슨 습격사건) 빡친 트란스발은 영국인들에 대한 차별 대우 법안을 통과시킨다. 영국은 트란스발 내 영국인들을 평등하게 대우하라고 요구하나 트란스발은 이를 거부, 모든 영국인에게 자국에서 나가라고 통보, 사실상 선전포고를 날린다. 그리하여 1899년 트란스발이 케이프 식민지를 공격하면서 영국과 무력충돌이 벌어지고 영국의 강압적인 행태에 불만을 품은 오렌지 자유국이 트란스발 측에 가담하면서 영국과 보어인 사이에 또다시 전쟁이 발발한다(2차 보어 전쟁).

당시 세계 최강이라 자부하던 영국군이 1, 2차 보어 전쟁기간 동안 상당히 고전하였는데, 보어인들은 창과 활로 무장하고 닥돌하는 원주민이 아니라 화약 무기에 익숙하였고 수렵에 매우 익숙했던 사람들이었다. 특히 넒은 남아프리카 땅에서 개척민으로 살다보니 말을 잘 타는 사람들이 많아 최후의 용기병이라 부를 법한 기마 척후/교란전에 능숙했다. 아직 참호전이 발달하지 않았던 시기라 마우저 소총으로 은폐와 엄폐를 적절히 활용해 유격전을 펼치는 보어인들의 전략에 영국군은 크게 당황할 수밖에 없었고 위장이라는 개념도 없었던 시기라 가시성이 높은 영국군의 군복은 좋은 타겟이었다. 특히 수십명씩 조를 이루어 이동하는 보어군의 소부대를 뜻하는 코만도(Kommando)가 나중에 정예부대를 상징하는 단어가 될 정도였다. 게다가 당시 독일로 부터 수입해온 크룹사의 야포나 맥심 기관총으로 무장까지 할 정도로 호락호락한 상대가 아니었다.

하지만 영국군도 전략과 전술을 다듬어 이들에 대항하게 된다. 붉은색의 군복은 눈에 잘 띄지 않는 색으로 바뀌었고 대포처럼 운반거에 거치해 운용하던 기관총도 콤팩트한 삼각대 운용 방식으로 전환하게 된다. 또한 게릴라에 대한 지원을 끊기 위해 보어인 마을을 완전히 박살내고 민간인들을 지정한 수용소에 강제 수용시키는등 초토화 작전으로 보어인 게릴라에 대항한다.

결국 초토화 작전에 버티지 못한 보어인들이 협상을 요청해 1902년 4월 평화 협상이 시작되었고 5월 31일, 베레니깅 조약을 통해 2차 보어전쟁은 영국의 승리로 끝났다. 이 조약으로 보어인들의 두 나라, 트란스발 공화국과 오렌지 자유국은 케이프 식민지에 합병되었다.

2.3 남아프리카 연방 수립 이후

하지만 보어 전쟁에서 큰 피해를 입은 보어인에 대해 동정적인 여론이 펼쳐지면서 보어인은 케이프 식민지의 주도권를 잡기 시작했고 1910년, 케이프 식민지는 남아프리카 연방으로 전환, 영국으로부터 자치권을 획득하는데 성공했다. 이런 자치권을 바탕으로 보어인들은 자신들의 언어와 문화를 보존했다. 그리고 영국계에 비해 쪽수가 상대적으로 많았던 보어인들이 주축이 된 국민당이 창설되었고 이들이 집권하면서 전체 인구에서 소수였던 백인들의 이익을 위해서 여러 인종차별적인 법안을 통과시켰다. 그나마 초기엔 (국민당에 비해서) 덜 인종차별적이었던 영국계 중심의 연합당(초기엔 남아공당)도 집권하는 양당체제여서 인종차별이 극단적인 수준까지는 가지않았지만[10] 1948년 총선에서 국민당이 70석을 얻어 65석을 확보하는데 그친 연합당에게 승리를 거둔 뒤에[11] 유색인종의 투표권을 완전히 박탈하는 법을 통과시켜 일당 우위체제를 구축하는데 성공하고 아파르트헤이트라는 정책을 펼치며 흑인과 유대인, 인도인 등 유색인종을 철저하게 탄압하였다. 이런 짓거리는 80년대 후반까지도 이어졌다가 90년대 초반이 되어서야 그만두게 된다.

현재는 쪽수에서부터 밀리기 때문에 주류정치권에서 완전히 밀렸으며, 이들이 지지하는 정당도 국민당에서 민주연맹으로 바뀌었다.[12] 사실 도시 지역이야 몰라도 시골지역에선 보수적인 이들이 많다고 하지만, 쪽수에서부터 밀리기 때문에 그나마 세가 되는 민주동맹을 지지하는 것. 물론 극우파[13]의 경우에는 따로 극우정당을 차리기는 하지만 지지하는 사람은 소수다. 간혹가다 노던 게이프 주 남부지역과 웨스턴 케이프 주 일부 지역을 합쳐서 보어인 자치구를 만들자는 얘기가 나오고는 있지만 호응하는 사람이 적어서 중앙정부에서 그냥 흘러가는 소리정도로 취급하고 있다.

주요도시와 근교지역에 살고있는 보어인들의 경우에는 그럭저럭 잘먹고 잘살고 있지만[14] 농민들의 경우에는 그 동안 흑인들이나 컬러드들을 값싸게 부려먹거나 비하하거나 돈 대신 생산하고 남은 포도주를 지급하는 식의 차별을 가해왔기 때문에 흑인과 컬러드 노동자와의 원한관계가 위낙에 깊은데다가[15] 아파르트헤이트 이후에도 흑인과 컬러드 노동자들을 저임금으로 부려먹는 경우가 많기에 빈민층을 대상으로 재산 몰수여론도 왕왕 일어서 상당한 위험에 처해있다는 후문도 있다고.

3 여담

트란스발 공화국은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전신이 되었으며, 오렌지 자유국도 이에 합병되어 지금은 오렌지 자유주라는 특별독립구가 되었다. 더불어 줄루제국도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일부로 편입되어 현재의 대국이 되었다. 더 자세한 사항은 남아프리카 공화국#s-2에서 찾아보도록 하자.

여담이지만 이들은 거주지를 옮겨 다녔던 많은 아프리카의 부족들과는 달리 한 곳에 오래 정착했기 때문에 이들의 짬밥은 의외로 엄청나다. 많은 흑인 부족들보다도 한 곳에서 오래 살았다. 보어인들의 별명으로는 아프리카의 하얀 부족이라는 말이 있는데, 짬밥을 생각해보면 과장은 아닌 셈.

비록 강력한 중앙정부는 없었으나 보어인들의 전투력은 일찍부터 강력했으며, 주위의 흑인 부족들은 당연히 상대가 안 되었고 심지어 당대 최강의 세력을 자랑하여 중부지역의 흑인부족들을 서부로 밀어놓거나 흡수하던 줄루제국도 이들에게 밀렸을 지경이다. 보어인 500명이 흑인 수만 명을 쓸어버리고 보어인은 단 3명만 부상, 흑인은 3천 명 이상 죽은(...) 피의 강 전투(Battle of Blood River, 1838년)에서 이미 시작된 것으로, 영국군이 들어오기 전에 이미 수십만 제곱킬로미터의 영토(현재의 남아프리카 공화국 내륙지방)및 거주하던 흑인을 모두 지배하에 넣은 상태였다.
  1. Ossewa는 구 남아공 국가이자 현 남아공 국가의 일부인 "Stem van Suid-Afrika"에도 언급된다.
  2. 아파르트헤이트 항목에 서술되어 있는 2차 대전 전간기의 친나치 단체 이름도 여기서 유래한 것이다. 조상이 살았던 땅나치새끼들에게 핍박받고 있거늘 실제로 2차대전 이전까지 네덜란드에서는 아무래도 동족이라는 인식이 있었는지 동정적인 여론이 대세였지만 2차대전이 끝나고 그런 거 없다가 되어버렸다. 이유는 본문에 후술
  3. 아파르트헤이트 시절 주류 종교였던 아프리카너 개혁교회는 반근대주의, 근본주의적 노선을 상당히 깊게 받아들였으며, 아파르트헤이트 정권의 주된 종교였고, 교회 자체로는 반성하고 바꾸려고 하는 교회들도 많지만 아직도 꼴통 마인드 그대로 사는 양반들도 많은게 현실이다.
  4. 다만 보어인들이 광신도란 건 한참 옛날 얘기가 되어버린 지 오래. 유럽이나 북미, 호주 백인들처럼 젊은 세대들은 기독교에 관심이 없다.
  5. 물론 전부는 아니었고 일부 보어인의 경우에는 인종차별정책에 부끄러움을 느끼며 선거에서 아파르트헤이트 반대 야당을 찍거나 아파르트헤이트 반대운동에 동참하기도 했다. 대표적인 경우가 보어 전쟁 당시 보어측의 지도자 중 하나였던 아브라함 피셔의 손자로서 아프리카너 성골 중 성골임에도 불구하고 기득권 다 때려치고 공산당원으로서 넬슨 만델라를 변호했던 브람 피셔. 그리고 현대 아프리카너 문학의 거장 작가들인 브레이튼 브레이튼바흐나 안드레 브링크도 저명한 보어인이면서도 아파르트헤이트 체제에 반대했던 유명인사들이다.
  6. 한국에서도 유명한 신학자인 아브라함 카이퍼의 아들 역시 친 보어인 성향이었다. 한마디로 호부견자.
  7. 아프리칸스어로는 흐로트 트렉(Groot Trek).
  8. 응구니족의 일파인 줄루족이 줄루 왕국을 세운 곳으로 현재 콰줄루-나탈이란 이름으로 옛 나탈 주의 이름에 붙어있다.
  9. 19세기 말 남아프리카 킴벌리 지역의 다이아몬드 생산량은 그 당시 전세계 다이아몬드 생산량의 약 95%를 차지했다. 현재 세계 최대의 다이아몬드 생산 기업인 드 비어스(De Beers)가 생긴 것도 이 때.
  10. 그래도 상당수 인종차별 법안이 이시기에 통과되었다. 예를 들면 백인들이 대부분의 토지를 차지할수있게 한다던가, 광산업에 있어서 백인들이 유색인종이나 흑인들보다 무조건 급여를 많이 받아야 된다던가 등, 등 다만 이 시기엔 이런 법안을 무시하거나, 위반하는 일이 잦았기는 했다.
  11. 참고로 득표율은 연합당이 49.2%로 과반에 가까운 득표를 했으나 인구가 적은 농촌선거구에서 국민당이 우세를 보이며 집권할수 있었다.
  12. 민주당과 국민당의 합당으로 설립된 정당이기는 하다. 국민당계 당원들이 따로 탈당했다가 선거에서 완전히 밀려서 ANC로 통합되어버린고로 일단 계보상으로는 남아공당의 후신으로 친다. 1934년부터 1976년까지 남아공의 주요정당이었던 연합당도 국민당과 남아공당의 합당으로 결성된 정당이지만 1940년대 이후로는 남아공당원이 주류를 차지했기 때문에 보통 남아프리카당에서 이어진것으로 치는것과 비슷한 맥락
  13. 1980년대 후반부터 1990년대 초반까지 이들이 창당한 정당인 보수당이 상당한 세를 얻기도 했다. 그렇지만 1994년에 다인종 선거가 치러지면서 완전히 몰락한다.
  14. 경제력에서 영국계 백인에게 밀렸다고는 하지만 어디까지나 상대적인 얘기고 그 동안 쌓아놓은게 있기 때문에 일반 흑인에 비하면 잘살고 대도시 지역의 치안이 좋지 않다고는 하지만 안전한 신도시(... 물론 흑인이나 컬러드 중산층들도 이사와서 살기는 한다. 흑인들이나 컬러드들도 돈 없는 사람들이 태반이라 빈민촌에서 사는 사람이 많은거지, 돈 좀 만져본 흑인이나 컬러드들은 당연히 안전한 신도시에서 살고 싶어한다.)로 이주할만한 여력이 있는 사람들의 비율이 크게 높은건 사실인지라 그나마 잘먹고 잘사는 축이기는 하다. 흑인 중산층들이 지속적으로 늘어나고 있다지만 전체 흑인의 20%도 안되는 수치이니...
  15. 더군다나 특히 보어계 농민들의 경우에는 국민당에게 몰표를 줌으로써 아파르트헤이트 정책을 공약으로 내걸던 국민당을 집권시켰고 덕택에 아파르트헤이트 시대를 개막시켜 흑인들과 컬러드들을 강제로 오지로 내쫓게 만든 주역이기도 했다.(...) 물론 1차적 원인은 선거구 경계를 제때 설정하지 못한 연합당 정부의 실책때문이기는 하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