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투어 자이스-잉크바르트


Arthur Seyss-Inquart
Arthur Seyß-Inquart (독일어 표기)

1892년 7월 22일 ~ 1946년 10월 16일

1 개요

히틀러의 간신이자 오스트리아이완용.
폴란드네덜란드학살자.

이 말들로 정의될 수 있다.[1]

빈 대학을 차석으로 입학하고 수석 졸업한 수재로, 전직 오스트리아 변호사, 오스트리아 나치당 총리, 나치 독일의 네덜란드 총독 등 고위관직을 지냈고, 전범재판 당시 측정된 IQ141[2]. 실상은 오스트리아를 독일에 팔아먹은 매국노이자 유태인과 네덜란드인을 20만명 이상 학살전범이다.

별명네덜란드의 도살자. 바로 안네 프랑크를 죽게 한 장본인이다.

2 초기의 활동

잉크바르트는 당시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령이던 묄른 지방의 슈탄네른(현 체코 스토나조프)에서 중학교 교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처음 이름은 아르튤 차이티흐(Arthur Zajtich)였지만 나중에 자이스 잉크바르트로 개명했다. 1907년에 가족들이 빈으로 이사하면서 법률을 공부하던 그는 제1차 세계대전시 1914년 8월에 오스트리아 육군의 티롤 수렵병연대에 입대했다. 동부전선과 이탈리아 방면에서 종군한 잉크바르트는 1917년에 중상을 입어 후송된 채 종전을 맞이했다. 종전 후 빈 대학에서 법률을 배우며 법학박사 학위를 취득해 변호사를 개업한 잉크바르트는 능력있는 변호사로 각광받긴 했는데 그는 "연설보다는 때론 침묵이(진실을 숨긴) 재판에 승기를 가져온다"라는 말을 했었다. 1927년에 등산차 산을 찾았다가 절벽에서 떨어져 빈사의 부상을 입은 잉크바르트는 이후 한쪽 무릎이 펴지지 않아 보행이 자유롭지 않게 된다. 거기서 뒤지지

여기까지만 요약하면 평범한 오스트리아 변호사의 평범한 일상스토리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이후 악마성이 눈을 뜨기 시작하는데...

3 본격적인 악행과 여생

3.1 오스트리아의 매국노, 잉크바르트

종전 후 변호사로 활동했고, 오스트리아의 극우 민족주의 정당인 조국전선과 긴밀한 관계를 맺으면서 1933년에는 엥겔베르트 돌푸스 내각에 입각하기도 했다. 돌푸스가 암살된 뒤에도 정계에 남아있었으나, 독일의 오스트리아 병합을 위해 암약하고 있던 나치당과도 막후 관계를 맺고 있었다. 1931년에 오스트리아 나치당에 입당한 잉크바르트는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합병을 주장했다. 1936년 7월 11일에 빈의 공사이던 프란츠 폰 파펜의 주선으로 히틀러와 오스트리아 총리 쿠르트 슈슈니크 사이에 협정이 체결되었는데 여기엔 비밀조항이 붙어 있었다. 히틀러가 오스트리아에 내정간섭을 그만두는 대신 오스트리아 나치당의 온건파를 오스트리아 정부요원으로 박아둔다는 내용이었다. 잉크바르트는 오스트리아 나치당에서 <온건파>의 리더여서 비합법활동은 거부했다. 그는 정부가 자신들과의 협의에 응하지 않으면 폭력적인 비합법활동을 그만둘 수 없다는 급진파 리더 요제프 레오폴드와 대립했다. 슈슈니크 총리도 레오폴드보다는 잉크바르트와의 협의를 좋아했다.

그렇지만 이것이 슈슈니크 자신의 비극인 줄은 꿈에도 몰랐다.

1937년 5월에 슈슈니크 총리는 잉크바르트를 오스트리아 정부의 참사관으로 임명했다. 그리고 1938년 2월 12일엔 독일의 베르히테스가덴에서 히틀러와 슈슈니크 총리의 회담이 열렸는데 여기서 잉크바르트는 내무장관으로 내정하기로 약정되었다. 슈슈니크는 2월 16일에 잉크바르트를 내무상으로 임명했다. 1938년 2월 26일에 슈슈니크 총리는 <오스트리아의 독립을 폐기한다>고 선언했다. 이에 반발한 오스트리아 나치당이 독일과의 합병을 요구하는 폭동을 일으켰지만 내무장관인 잉크바르트는 이를 단속하지 말라고 오스트리아 경찰에 지시했다. 그 후 슈슈니크는 24세 이상의 국민에게 독일과의 합병찬반을 묻는 국민투표를 기획했다.

오스트리아 나치당의 지지자들은 거의 가 10대에서 20대 초반의 젊은이여서 이 계층의 투표를 배제하면 합병안은 부결될 것이라고 잉크바르트는 생각했다. 슈슈니크는 이탈리아의 베니토 무솔리니에게 이 계획의 지지를 구했지만 독일과의 관계악화를 염려한 무솔리니는 여기에 찬동하지 않았다. 이것이 히틀러의 역린을 건드렸다.

슈슈니크의 국민투표안에 성질이 뻗친 히틀러는 국방군 최고사령관이자 딸랑이 육군대장 빌헬름 카이텔 장군에게 오스트리아 침략계획인 <오토 계획>의 실행준비를 명령했다. 3월 11일 오전 2시에 독일 육군 부대가 국경으로 출동하자 오스트리아 정부는 히틀러와 헤르만 괴링 장군에게 국민투표의 연기, 슈슈니크의 수상직 사임, 잉크바르트의 수상취임, 독일에 질서유지를 요구하는 조건으로 협상했다.

그리고 프란츠 폰 파펜요아힘 폰 리벤트로프 독일 외무장관은 친 나치의 자이스-잉크바르트를 내상에 임명하라는 일종의 최후통첩을 슈슈니크 총리에게 직접 전하였다. 슈슈니크 총리는 굴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오스트리아 경찰은 독일 추종자의 지휘를 받게 되었다.

3월 10일 오후 4시, 슈슈니크 총리는 국민투표의 중지와 총리에서 사퇴할 것임을, 즉 '굴복'의 뜻을 라디오로 방송했다. 슈슈니크 총리는 자이스-잉크바르트를 후계로 추천했지만, 대통령인 미크라스는 승인을 꺼렸다. 그러나, '굴복' 방송에 힘이 난 각지의 오스트리아 나치당원은 빈, 린츠, 그라츠, 인스부르크등의 지방 정부의 시설에 하켄 크로이츠 기를 걸었다. 다시 독일은 아직 내무장관이던 자이스-잉크바르트에게 "파병 요청"을 강요해, 자이스-잉크바르트는 오후 9시 45분에 파병 요청을 하였다. 끝내 12일이 되기 조금 전, 미크라스 대통령은 마침내 자이스-잉크바르트를 총리로 지명했다. 자이스-잉크바르트가 총리가 되었고 그는 곧 독일군의 지원을 요청하였다.

독일 육군은 3월 12일에 오스트리아 국경을 넘었으나, 그 과정이 근대 육군의 교과서라던 예전의 명성은 못 찾을 어설픈 모습이었다. 히틀러가 조급하게 요구하는 바람에 참모총장 베크 장군과 차장 에리히 폰 만슈타인 장군은 3일 만에 작전안을 짜서 움직여야 하였으며, 보급과 행군 모두 착오의 연속이었다. 차량들이 오스트리아의 민간주유소에서 돈을 주고 가솔린을 조달함은 기본이었고, 보병사단들의 행군상황은 사단장이 예하 제대의 현 위치를 못 파악하였으며, 선봉은 오스트리아 영내에 있는데 후방지원 부대는 병합작업을 진행하는 그 순간에도 독일 국내에서 오스트리아를 향해 행군하는 도중이었다. 이 꼴을 본 주오스트리아 이탈리아 대사관의 국방무관이 "독일군의 행군 군기는 극히 열악하다"고 지당한 말을 했다. 만약 오스트리아 주민과 오스트리아 육군의 저항이 격렬했다면 병합은 완전히 물건너가는 정도가 아니라 히틀러의 권력조차 붕괴할 가능성이 컸다.

그러나 끝내 독일 육군은 오스트리아 국민의 열렬한 환영을 받으며 무저항으로 오스트리아로 진주했고, 대통령에게 사임을 강요하여 대통령의 권한을 대행하게 된 자이스-잉크바르트는 3월 13일 빈에서 히틀러와 만나 병합에 관한 법률안에 서명했다. 해냈다 해냈어 자이스가 해냈어

이후 독일군이 오스트리아 전역을 접수한 가운데, 형식적인 법 절차로 나치당 감독 아래 4월 10일 국민투표를 했다. 이 투표는 투표지부터 병합 찬성에 유리하게 만들었으며, 어떤 지방에서는 투표소를 경비하는 독일 육군 병력 앞에서 공개투표도 했다고. 당연히 이런 분위기에서 나온 결과는 97% 찬성.

3.2 오스트리아 나치 실세 잉크바르트

잉크바르트는 그대로 오스트마르크 주 제국지사 겸 총리로 취임해 1939년 4월 30일까지 그 지위를 유지했다. 독일과의 합병 후, 잉크바르트는 바로 오스트리아의 유대인 색출에 나섰다. 유대계열이던 재벌이던 로스차일드 가문 빈 분가의 당주이던 루이 나탈니엘 폰 로트실트 남작도 체포되었다. 그리고 유태계 재벌인 로트실트 남작과 거래를 한다.

로트실트 남작은 거액의 재산을 바치는 조건[3]으로 풀려나 미국으로 망명하여 그 후론 오스트리아로 돌아가지 않았다. 이 때문에 빈 로스차일드 가문은 가계가 단절되고 말았다. 1938년 3월 15일에 히믈러로부터 명예 SS중장의 지위를 얻은 잉크바르트는 1941년 4월 20일엔 SS대장으로 진급했다. 제국지사 퇴임 후 잉크바르트는 1939년 5월부터 히틀러 내각에서 무임소장관으로 입각했다[4]


히틀러와 함께한 잉크바르트(히틀러 왼쪽). 히틀러의 오른쪽은 하인리히 힘러, 그리고 맨 오른쪽은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 친위대 중장.

여기까지만 본다면 오스트리아를 팔아먹은 매국노이자 그저 돈에 미친 (어디까지나 상대적으로)평범한(?) 인간 쓰레기라 할 수도 있을 지 모른다. 아마 인지도가 별로 없는 나치 고관1 정도로 끝났을 것이고 굳이 사형까지 당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그리고 안슐루스 자체도 과정이 불법적이긴 했지만 당시로서는 그닥 나쁘지 않은 일이었다고 여겨진다. 독일 민족 단일국가 건설이라는 명분도 있었고 독일과 오스트리아 모두에서 병합 찬성률은 굉장히 높았다. 신성 로마 제국을 잇는 독일 민족 단일 국가 결성의 꿈과 강대국인 독일인으로 사는 것이 나을수도 있다는 생각이 합쳐진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 이후 미친 살인귀로 제대로 각성하게 된다.

3.3 폴란드와 네덜란드의 살인귀, 잉크바르트

1939년 9월 1일에 독일군의 폴란드 침공으로 제 2차 세계대전이 발발했다. 폴란드를 점령한 독일은 폴란드 남부에 별도의 주를 만들 계획을 세우고 남폴란드 제국 주지사에 잉크바르트를 내정했으나 이를 취소, 나치당의 법률부장이자 히틀러의 변호사인 한스 프랑크가 수장인 총독부를 세우고는 잉크바르트를 10월 12일에 부총독으로 임명했다.[5] 원래는 자신이 지배할 점령 지역을 자신보다 8살이나 어린 프랑크에게 빼앗긴 잉크바르트 입장에서는 프랑크 총독을 싫어했고 부총독 재임기간 내내 그와 대립했다. 대표적으로 폴란드 내의 특명작전 즉 AB작전에서도 지휘권을 두고 대립했으나 실질적으로 이 작전을 수행하는 친위대가 잉크바르트의 손을 들어주면서 AB작전 기획 감독 권한을 잉크바르트가 지니게 된다.

1940년 5월 15일에 네덜란드 왕국이 독일에 항복했다. 5월 28일에 잉크바르트는 점령지 네덜란드의 국가판무관으로 임명되어 네덜란드의 전권을 장악했다. 하지만 점령당한 네덜란드나 벨기에 모두 초기에는 그 여파가 미미했고 점령 직후 몇 달간은 거의 아무런 변화가 없는 것처럼 보였다. 언론은 겉으로는 완벽한 자유를 누렸으며 암스테르담의 주요 신문인 '드 텔레흐라프(de telegraaf)는 제국 마르크와 길더 간 환율을 좀 더 부각해서 싣는 것 이외에 다른 변화는 없었다. 식당과 카페, 영화관은 다시 문을 열었고, 금주령은 철회되었다. 잉크바르트는 제국 판무관[6] 되었으며 그는 단호하지만 온화한 태도를 보이며 부드러운 어조로 제국 판무관 취임선서를 했다.

"본인은 오늘부터 네덜란드 민간 행정의 최고 수반 자리를 맡게 되었습니다. 총통의 아량과 독일군의 노력으로 불과 며칠 만에 공공질서가 회복될 수 있었습니다. 앞으로 일정 조치들이 취해지겠지만, 필요한 사항에만 한정될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총통의 궁극적인 목표가 호의를 가진 모든 사람들에게 평화와 질서를 보장하는 것임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시민들은 계속 올바르게 처신해서 이러한 은혜에 대한 감사의 표시를 해주시기를 기대하는 바입니다.

제국 판무관 잉크바르트는 처음부터 자신의 권위를 한껏 즐겼는데, 그의 취임연설은 헤이그의 오래된 리데르잘Ridderzaal(기사의 홀)에서 이루어졌다. 그곳은 네덜란드 빌헬미나(Wilhelmina) 여왕이 정부의 겨울 회기를 시작하며 엄숙한 의전행사를 하던 장소였고, 이곳에서 연설을 한 이유는 네덜란드인들에게 모욕을 주기 위한 것이였다. 심지어 잉크바르트는 네덜란드에서 가장 엄숙한 자리에서 변화된 분위기를 강조하기 위해서 쾰른 라디오 오케스트라까지 불러들였다. 한동안은 좋은 관계가 이어지는 것 같았으며 네덜란드 정부는 독일 정부와 함께 존재하는 것이 허용되었다. 네덜란드의 여왕과 수상은 영국으로 망명했지만 헤이그에 있는 네덜란드 관료조직은 그대로 남아 독일점령지 행정기구로 존속했고 정부의 각부 주요 서기관들이 네덜란드 최고 권위의 민간 행정부를 구성했다. 그들은 정기적인 회의를 가지면서 내각과 비슷하게 행동했지만, 그것은 그저 허울에 불과했다. 독일은 처음에는 이렇게 네덜란드인들로 구성된 권력 기관은 묵인했지만, 시간이 지나자 모두 네덜란드 인사들에서 오스트리아 출신으로 갈아치워버렸다. 점령행정기관은 오스트리아 독일계 인물로 고정되었는데 잉크바르트의 측근인 행정기획 전담 판무관 뵈머, 경제 전담 일반 판무관 피슈벡, 친위대 및 경찰고급지도자인 SS대장 한스 라우터 장군으로 각각 임명되었다. 특히 라우터 장군은 네덜란드 치안 담당 일반 판무관에 임명되었으며 노르트베스트 친위대 및 경찰 고위지도자라는 직위도 함께 가지고 있었다. 노르트베스트는 범게르만 행정구역에서 네덜란드에 붙은 명칭이였다. 이중 의미가 더 큰 직책은 노르트 베스트 친위대 및 경찰 고위지도자 직책이였는데, 그 자리는 라우터 장군이 아돌프 히틀러의 대리인이자 치안경찰과 보안대, 게슈타포를 비롯해 모든 네덜란드 경찰등을 포함해 네덜란드의 모든 친위대 조직을 지휘한다는 의미였다.

괴벨스 선전장관은 오스트리아인은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시절부터 종속민족을 많이 지배했었기에 종속민족을 잘 부린다고 착각했다. 잉크바르트는 살려는 드릴게비유대계 네덜란드인에 대해선 독일과 네덜란드간의 휴전협정에 따라 죽을자유를 보장한다고 했지만[7] 유대계인 네덜란드인은 대상이 아니라고 못박았다. 라우터장군은 네덜란드 자리에 임명되자마자 아르투어 자이스 잉크바르트와 함께 한순간도 지체하지 않고 네덜란드 유대인 처리문제에 모든 것을 집중했다. 네덜란드의 유대인 가운데에는 도축업자들이 많았으므로 그들을 거지로 만들기 위해서 1940년 8월 7일에는 종교적 목적으로 가축을 도살하는 것이 엄격히 금지되었다, 그리고 비유대인 도살업자와 유대인 도살업자를 차별했고, 유대인은 더 이상은 비유대인 도살업자에게 주문을 받을 수 없었다. 그렇게 네덜란드의 유대인 도살업자들은 하룻밤 사이에 무려 85%의 거래처를 잃어버려서 완전히 파산 직전으로 내몰렸다. 그리고 그해 8월에는 유대인과 연계된 모든 기업을 표적으로 삼아서 그들과 거래하는 것을 모조리 금지시켰다, 이 법령은 작은 규모의 기업이나 상점에도 예외 없이 적용되었다. 그 결과 네덜란드의 14만명의 유대인은 엄청난 타격을 입었는데, 그 이유는 유대인의 60%가 암스테르담에 거주하고 있었고, 그 절반이 다이아몬드 사업이나, 제조업, 중고물품거래와 노점을 망라하는 무역상업 분야에 종사하고 있었기 때문이였다.

한동안은 폭력적인 억압이 최소한으로 억압되었으나 암스테르담의 오래된 유대인 지구에서 시위가 발생하면서 폭력이 난무하기 시작하였다 잉크바르트는 시위 지역을 봉쇄하고 그 지구의 고위 지도자들을 소환해 유대인 위원회의 창설을 요구했다. 그러자 유대인들이 반발하여 남부 암스테르담 지역에서도 반란이 일어났고, 시위대는 사법경찰 카포와 충돌했고 전면적인 체포가 벌어지기 시작했다. 20-35세의 유대인 400명이 검거되어서 마우트하우젠 강제수용소로 강제이송되었으며 이 날 이후 박해는 무자비해졌다. 유대인들은 정해진 최소한의 금액만을 쓰게 했는데 그 금액은 터무니없이 적은 수준이여서 아사자가 늘어만 갔으며, 유대인은 공무원이 될 수 없다는 법령이 공표되어서 유대인은 공직에서 추방되고 유대인 기업들도 차례로 접수되었다. 유대인은 비유대인과 결혼할 수 없었으며 게슈타포와 그 부속 기관들은 유대인을 체포하기 시작했는데, 이 모든 과정에서 네덜란드인 변절자로 알려진 V-맨(veteranensmanner)이라고 알려진 위장요원들의 은밀한 지원을 받았는데, V-맨의 숫자는 대단히 많아서 유대인들을 체포하는 데에 엄청난 도움을 주었다고 한다.[8] 그렇게 체포된 유대인들은 모두 강제수용소로 보내졌다. 이웃 벨기에에 살고 있는 유대인 9만명의 삶도 이전까지는 안전한 것으로 보였다, 그곳은 네덜란드와 마찬가지로 의류 교역과 기타 소규모 사업이 번창하고 있었고, 안트베르펜은 다이아몬드 교역의 중심지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 지역이 안전하다는 착각은 6개월도 지나지 않아서 깨져버렸다. 독일인들이 도착하자 벨기에의 강제이송의 비극이 시작되었다. 벨기에에도 유대인위원회가 설립되었고 유대인들을 닥치는 대로 체포하기 시작했다. 게슈타포는 2만 5천 프랑을 내는 조건으로 벨기에 적십자를 통해 유대인을 스위스로 이송하는 것을 승인했다, 이 거래가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이송된 사람들의 확인 편지를 쓰게 했지만, 이것은 대부분 거짓말이였고, 대부분의 유대인은 이렇게 큰 대가를 치르고도 스위스가 아니라 강제노동수용소로 옮겨졌다.

네덜란드 남부와 북부에는 헤르초겐부슈 강제수용소와 베스테르보르크 통과수용소 두 곳이 있었는데 그 중 베스테르보르크 수용소[9]는 잉크바르트가 창설한 곳으로, 1943년 1월에 친위대 경제관리본부가 들어서기까지 수용소로 쓰였다. 잉크바르트가 지배한 네덜란드는 다른 독일 점령지에 비해 극심한 유대인 탄압이 이어졌다. 당시 네덜란드에서 살고있던 유대인은 14만명이였는데 그 중 11만명 이상이 네덜란드 국외의 절멸수용소나 강제수용소로 보내졌다. 그 후 전후에 수용소로 보내진 11만명의 유대인들 중에서 살아남은 자는 고작 3,000명 정도였다. 죽은 사람 중에는 <안네의 일기>저자인 안네 프랑크도 네덜란드에서 이송되어 사망한 사람들 중 하나였다. 수감자들의 식비를 SS 대원들이 착복해 굶어 죽는 수감자가 속출했고, 수용능력의 배가 넘는 수용소에 처 넣어 질병과 숨막힘으로 죽어 갔다.

독일의 전황이 악화됨에 따라 비유대계 네덜란드인에게도 가혹한 강제노동이 부과되었다. 유대인 포함 네덜란드인 53만명이 강제노동에 부역하기 위해 징집되었고 그 중에서 약 25만명의 사람들이 강제노동을 위해서 독일로 이송되었다. 잉크바르트는 원래 만 21살에서 23살까지의 사람들만 골라서 25만명을 채우려고 했지만 숫자가 만2천명 밖에 되지 않아서 실패했다고 한다. 레지스탕스 활동자는 즉결처분되었으며 이를 도운 사람들도 연좌제로 처벌되었다. 레지스탕스에 관련되었던 최악의 학살은 퓌턴(Putten)이라는 곳에서 일어났었는데, 마을 근교 다리에서 총격이 일어나자 마을을 싸그리 밀어버리고 생존자들은 모조리 함부르크에 있는 노이엔가메 강제 수용소로 끌려갔었다.[10] 잉크바르트의 통치하에서 약 5만명의 네덜란드인이 처형되고 5만 여명의 네덜란드 사람들이 굶어죽었다.[11] 결국 잉크바르트의 통치 아래에서 약 205,091명의 네덜란드인이 사망했다. 그리고 이 희생자들 중에서 절반이 넘는 107,000명은 네덜란드에 살고 있던 유대인들이였다. 그러나 이 숫자는 실종자와 PTSD에 시달려 자살하거나 학대 받아 자살하는 사람들의 숫자를 제외한 것이기 때문에 그의 통치 때문에 사망한 사람들이 30만명이 넘어간다는 이야기도 존재한다. 이러한 잉크바르트의 통치 때문에 네덜란드는 현대 까지도 큰 굴곡 없는 탈민족주의의 서유럽 국가임에도 종종 독일인 관광객들이나 이민자들에게 이 당시 공출의 경험을 제대로 되살린 '자전거 도둑'이라 비아냥 거리는 등 반독 정서가 강한 편이다.

여담으로 이는 네덜란드뿐만 아니라 유럽 전체에도 해당된다. 전 유럽대륙이 나치 독일에게 침공당해 유럽인들이 대량학살당하고 여성들은 성노예로 강간당하거나 끌려가는 등 갖은 수모를 당했기 때문. 독일 게르만인들은 무사했냐고? 이들의 취급도 전쟁 말기 그들이 유린했던 유럽인들과 똑같았다. 결국 이 일로 옛날부터 내려온 과거의 좋은 대독 관계는 죄다 말아먹고 현재까지도 네덜란드 및 유럽은 현재는 비교적 잦아들었지만 여전히 반독 감정이 센 국가이다. 거기에 아돌프 히틀러로 인하여 독일인 전체에 대한 이미지가 왕창 떨어진 건 덤.

노르망디 상륙 작전의 성공으로 네덜란드에 대한 연합군의 공세가 시작된 뒤에는 히틀러가 내세운 초토화 정책에 따라 네덜란드 각지의 항구나 제방에 대한 파괴 명령을 내려 공세 지연을 꾀했고, 연합군과 대치 중에는 휴전 회담에 독일 대표로 참석하기도 했다.

4 악행의 대가

1945년 4월 30일에 자살한 히틀러의 정치적 유언에 따라 차기정부의 외무장관으로 지정된 잉크바르트였지만[12] 혼란으로 인해 실질적으로 임명되지 못하여 대통령이 된 해군원수 카를 되니츠 제독도 히틀러의 유언에 따른 내각구성을 무시해 5월 2일에 크로지크 내각이 구성되어 크로지크가 외무장관직을 승계했다. 잉크바르트는 되니츠 제독에게 자신의 네덜란드 제국 판무관 지위를 5월 8일까지 인정받았는데, 그 직후 독일이 연합국에 항복하여 크릭스마리네U보트로 국외로 망명하려던 잉크바르트는 캐나다 육군에 의해 체포되었다. 전후 뉘른베르크 전범 재판에 전범으로 기소된 잉크바르트는 처음엔 개소리를 늘어놓았지만 곧 체념하고 말았다. 냉정한 어조로 담담히 학살행위를 증언하는 그의 행동에 법정내 사람들은 놀랐는데 잉크바르트는 사형을 각오했기에 "나에게 주어진 판결에 대해 증오하지 않는다. 독일의 재건에 증오는 분명히 장애가 될 것이다."라고 말했다.


재판장에서 빌헬름 프리크과 이야기하는 잉크바르트.

그리고 1946년 10월 1일에 잉크바르트는 평화에 관한 죄, 전쟁범죄, 인도에 반한 죄로 사형(교수형)이 언도되었다. 사형판결을 받은 잉크바르트는 시종일관 침착했다. 사형판결을 받고 나서는 "교수형이라... 상황을 고려해 봤을 때 나는 다른 결과를 기대하지도 않고 있었다. 괜찮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1946년 11월 16일 밤에 사형수 10명(자살한 괴링 장군은 제외)의 형 집행이 있었는데 잉크바르트는 사형수들 중에서 가장 마지막에 형이 집행되었다. 그의 마지막 말은 "이 형 집행이 제 2차 대전의 비극의 종언이 될 것이며 그리고 이를 교훈삼아 모든 국민의 평화와 이해가 이뤄지길 빈다. 나는 독일을 믿는다."였다.

처형된 아르투어 자이스-잉크바르트 혐짤 주의
자살한 괴링 장군을 포함한 잉크바르트 등 사형수 11명의 유해는 뮌헨 근교의 화장장에서 화장된 후 유골은 미 육군에 의해 공개되지 않은 채 강에 뿌려졌다. 잉크바르트 휘하에서 파시즘 정당인 NSB의 당수로 활동한 안톤 뮈세르트도 네덜란드 하그에서 총살형에 처해졌고 네덜란드 친위대 및 경찰고급지도자를 지낸 라우터 장군도 총살형이 집행되었다. 이놈들은 자기 상관과는 달리 연합군 육군 헌병들에게 총살형 직전까지 두들겨 맞았고 사형 직전까지 얻어터지다가 인사불성이 되어서 유언도 못하고 사랑하는 총통의 전기톱으로 육류분쇄가 되었다.

5 그의 후손은?

잉크바르트의 아들은 오스트리아로 돌아갔지만 전후에도 나치사상을 버리지 못했다. 그러나 그의 아들, 즉 잉크바르트의 손자인 헬무트 잉크바르트는 인종차별에 반대하였다. 이에 네덜란드의 안네 프랑크 재단 이사장이던 디크 하우바르트는 그를 매우 반기며 헬무트에게 가입초청을 했다.[13] 그러나 헬무트는 <자신의 조부이름에 무서운 기억을 가진 사람들의 걱정을 끼치게 한다며 자신의 행동이 네오 나치주의자들에게 휘둘려 안네 프랑크 재단에 적의가 가게 하는 것은 바라지 않으며 그저 죄송할 뿐>이라며 가입희망을 철회했다. 그래서 디크 하우바르트는 꽤나 실망했다고 한다.
  1. 오히려 나라를 팔아먹기만 한 이완용보다 유대인 학살까지 저지른 이 자가 그 죄질이 더 나쁘다.
  2. 표준편차 15다. 참고로 그 유명한 멘사의 기준도 표준편차 15로는 130이며 141은 무려 0.3% 그야말로 대단히 높은 지능을 대단히 안 좋은 곳에 써먹은 사례.
  3. 추정치로 현가 3조 5천억원이다.
  4. 공식 직함은 제국 장관. 국무위원이기는 하나 행정 부처의 장은 아니다. 하지만 나치의 행정 변천과 권력투쟁의 과정을 따져보면 입각 자체가 히틀러의 믿을 수 있는 측근이 됨과 동시에 최고의 논공행상이라고 볼 수 있다.
  5. 1941년까지 재임한다.
  6. 식민지나 지방의 행정권을 총괄하는 최고위 행정가. 공식 의전은 제국 주지사급이다. 나치 시대의 제국 판무관은 히틀러가 임명하도록 되었으며 예컨대 노르웨이 제국 판무관처럼 준식민지의 괴뢰정부를 감독하고 지휘하는 업무를 수행했다. 법적인 권한은 입법, 사법, 행정을 모두 장악한 총독보다 행정 권한만을 지닌다는 점에서 약하지만 준식민지의 사법, 입법부의 구성원들이 모두 나치당 소속 현지 공무원들이고 식민지 나치당 지구의 총책임자를 겸한다는 점에서 총독만큼의 권한을 가진다.
  7. 물론 거짓말이다. 네덜란드는 비록 폴란드와 같은 식민지급의 대우는 받지 않았으나 국민들이 수시로 노역에 끌려가고 생필품까지 공출되며 일부는 독일군으로 징집되어 전장에 보내져 반인륜 범죄를 강요당하는 등 상당한 고통을 받아야 했으며, 현재도 이 시기를 경험한 세대는 집안에 한두달 이상은 먹을 수 있는 비상식량을 항상 쌓아 두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또한 약속과는 다르게 상당수가 프랑스인들이나 체코인들과 더불어 2등 국민급 취급을 받았다고 한다.
  8. 이에 대해서 암스테르담의 거주자 토스 하커르는 "많은 겁쟁이 동포들이 유대인이 살고 있는 집이나 유대인이 숨어 있는 장소를 기꺼이 알려주었다"고 증언했다.
  9. 아우슈비츠 다음으로 유태인들이 많이 사망한 절멸수용소다.
  10. 교회 안에 가둬놓고 총질하는 일은 없었지만, 레지스탕스 한명 갖고 마을 전체를 몰살시키려 했다는 점에서 네덜란드판 오라두르쉬르글란 학살사건 혹은 제암리 학살사건에 비견될 수 있다. 특히 희생자의 대다수가 개신교도였다는 점에서는 후자와 더욱 비슷하다.
  11. 이때문에 네덜란드가 제2차 세계대전 이전의 인구로 돌아가기 까지 꽤나 오랜 시간이 걸렸다.
  12. 잉크바르트는 외무장관이 아닌 법무장관이 되기를 간절히 바랬다. 특히 1942년 당시 법무장관인 슐레겔베르거가 급사하자 차기 장관 자리를 두고 롤란트 프라이슬러 등과 대립했지만 결국 법무장관이 되지 못했다.
  13. 어디에선 거절했다곤 하지만 오히려 안네 프랑크 재단에서 초청한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