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어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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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9년 2차 보어전쟁의 마페킹 포위 때 보어 민병대

Anglo-Boer War. Complement War Vore War 현재의 남아프리카 공화국 지역에서 발생한 전쟁으로 1차 보어전쟁(1880년-1881년)과 2차 보어전쟁(1899년-1902년)로 나뉜다.

1 배경

주된 이유는 영국이 이집트 카이로부터 남아프리카 케이프타운까지 연결되는 아프리카 종단정책(Cape to Cairo Road)[1]을 펼치면서 남아공에 살던 보어인과 충돌하게 되면서였다. 당시 보어인은 남아프리카 공화국(South African Republic)을 세웠는데 지금의 남아공(Republic of South Africa)과는 다르다. 당시의 남아프리카 공화국을 트란스발 공화국이라 하기도 한다.

당시 남아프리카의 인구 대부분을 차지하는 사람들은 흑인이었지만, 보어인들은 이 전쟁이 네덜란드계 백인들과 영국계 백인들의 싸움이었다고 프로파간다를 퍼뜨렸다. 그러나 실제로는 흑인 3만 명이 보어인의 억압에 맞서 영국군에 가담했다.

2 제1차 보어전쟁

교전국
23px-Flag_of_Transvaal.svg.png 남아프리카 공화국23px-Flag_of_the_United_Kingdom.svg.png 그레이트 브리튼 아일랜드 연합왕국

영국은 1852년에 세워진 트란스발 공화국과 1854년에 세워진 오렌지 자유국을 식민화하려고 했다. 이에 보어인들은 저항했고 1차 보어전쟁이 발생했다. 트란스발 전쟁이라고도 한다. 트란스발 공화국은 보어인들이 주축이었고 바다와 접하기 위해 흑인왕국인 줄루왕국을 몰아냈다. 트란스발 동부에선 이 나왔고 오렌지 자유국에선 다이아몬드가 나왔다. 영국은 당시 기술자 등을 광산 등에 파견했고 지대한 관심을 지녀 트란스발을 합병하려고 한다. 이에 트란스발에선 폴 크루거를 사령관으로 하여 전쟁을 선포하여 영국군과 전쟁을 치른다.

트란스발군의 총전력은 3천명 수준이었고 영국군은 1천2백명 수준이었다. 영국군은 400명의 전사자를 내고 대패했다. 반면 트란스발군의 피해는 41명 수준이었다. 트란스발군의 지휘관은 피엣 주버트(Piet Joubert) 대장이었고 영국군의 지휘관은 조지 콜리(George Pomeroy Colley) 소장이었는데 콜리 소장은 전사했다. 1881년 3월 23일 프리토리아 협정을 맺어 영국은 트란스발 공화국의 독립을 재인정했다.

당시 영국 육군은 레드 코트라는 별명답게 전투복이 빨간색이었고 탄입대나 방서 헬멧, 각종 장구류도 옛날 그대로 눈부신 하얀 색이라 딱 표적처럼 보여서 저격하기 좋았다고 한다. 다만 모든 부대가 빨간색 복장은 입은건 아니고 카키색 군복을 입은 부대들도 꽤 있었다. 하지만 1차 보어전쟁 당시 빨간색 옷을 입은 부대가 사상자를 많이 입자 군복과 위장의 중요성이 더욱더 부각되었다. 덕분에 영국군은 현지에서 노획한 커피나 피같은 홍차 보급품 등으로 장구류를 갈색으로 물들이느라 많은 시간을 보내야 했다고.

3 제2차 보어전쟁

교전국
영국/영국령 남아프리카/로디지아/영국령 인도/영국령 실론/오스트레일리아/뉴질랜드/캐나다오렌지 자유국/트란스발 공화국

20세기 전쟁사의 첫 장면제1차 세계대전의 예고편.

국가 차원은 아니지만 트란스발 공화국을 지원한 해외 자원참전병들도 있었다. 네덜란드가 2천명, 독일이 550명, 프랑스가 400명, 미국이 300명, 이탈리아가 250명, 폴란드가 225명, 아일랜드가 200명, 스칸디나비아에서 150명, 러시아에서 100명 정도가 보어인들을 지원해 참전했다. 일부 오스트레일리아인들도 보어를 편들어 참전했다.

2차 보어전쟁은 1899년부터 1902년까지 발생했다. 20년 전의 전쟁과 달리 금광 등의 이유로 더 많은 영국인들이 남아프리카로 유입되었고 요하네스버그 등에서는 영국인과 영국이 데려온 인도인 등 외국인들이 보어인들보다 더 많아지기도 했다. 이들은 주류세력인 보어인들에 의해 차별대우를 받았는데 이를 구실로 세실 로즈 등의 제국주의자들은 보어 정부를 뒤엎을 쿠데타 등을 꾸미기도 했다. 1895년에 일어났던 제임슨 습격 사건(Jameson Raid)이 그 대표적인 예. 하지만 로즈의 표현을 인용하자면 '준비되어 있던 요하네스버그'는 결국 봉기하지 않았고 쿠데타 시도는 무위로 돌아간다. 덕분에 로즈는 케이프 식민지 총독직을 사임하게 되었지만, 남아프리카와 로디지아에서의 그의 영향력은 여전했다. 독일 제국카이저 빌헬름 2세는 이 쿠데타 시도를 두고 크뤼거 대통령의 성공적인 방어를 치하하는 전보를 보냈는데 이가 바로 크뤼거 전보(Kruger Telegram) 사건이다. 전보가 더타임스에 실리자 영국인들은 즉각적으로 반독감정의 물결을 형성했으며 심지어 빌헬름 2세의 외할머니인 빅토리아 여왕마저 이에 유감을 표하기도 했다.

1899년 9월에 영국은 트란스발 공화국에게 영국인을 트란스발의 자국민과 평등히 대하라는 내용의 전언을 보내나 트란스발은 케이프 등에 주둔한 영국군에게 48시간 내에 퇴각하라고 답했다.

1899년 10월 12일 보어인들은 영국의 케이프 식민지 등을 공격했다. 영국군은 초반에 속수무책이었으며 특히 12월엔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영국군의 주요 전략은 전열을 갖춘 보병들의 횡대 전략이었는데 보어인들은 민병대 위주의 기병부대여서 진형을 짜지 않고 영국군에게 접근해서 지형을 이용해 기습을 가했다.[2] 12월 10일 슈토름베르크(Stormberg) 전투에서 영국군은 오렌지 자유국군과 충돌하여 135명이 전사했고 600명이 포로로 잡혔다. 12월 11일엔 1만4천명의 영국군이 킴벌리 공략을 펼쳤으나 참호를 파고 대기하던 보어군에게 당해 120명의 전사자를 냈다. 12월 15일 코렌조(Colenso)의 피해는 막대했는데 2만1천명의 영국군이 레이디스미스(Ladysmith)를 탈환하기 위해 투겔라(Tugela) 강을 건너던 중에 포격 등에 노출되어 1127명이 전사했다.

이 일로 영국에선 대규모 애국주의 광풍이 불었다. 빅토리아 여왕 시대 후기에 이르러 영국은 미국독일의 등장으로 차차 쇠퇴해가던 시절이었는데 그 반작용으로 보어전쟁엔 엄청나게 관심이 집중됐다. 1900년이 되자 영국은 대규모 반격을 펼친다.

하지만 1900년 1월 영국군은 스피온 콥 전투(Battle of Spion Kop)에서 대패했다. 당시 영국군의 지휘관은 찰스 워렌이었는데,[3] 이 전투에서의 패배로 인해 영국 왕립군사학교 역사상 최악의 인물로 찍히는 불명예를 안게 되었다.

이 전투는 한 문장으로 요약하면 "이 산이 아닌가봐"로 정리할 수 있다(...). 찰스 워렌은 위에 언급한 레이디스미스로 가는 길목의 요충지인 스피온 콥을 확보하도록 했는데, 병력이 야간에 안개를 틈하 산을 올라서 진지를 펴고 보니 정작 스피온 콥이 아니라 다른 곳이었고, 그곳은 보어군의 포병 부대[4]가 사전에 조준하고 있던 곳이었다. 독일제 화포로 무장한 보어군 부대는 영국군에게 포격을 가해서 큰 피해를 입혔는데 이 화포는 신형 무연화약을 사용해서 발사시 연기가 나지 않아 영국군은 화약 연기를 이용해서 좌표를 추적할 수 없었고, 결과는 일방적인 포격전으로 흘러갔다.

이 와중에도 워렌은 제대로 된 대책을 세우지 않은채 멍하니 있었다. 이 당시 일화로 종군 기자이자 경기병 연대의 장교로 참전했던 윈스턴 처칠이 "상황이 나쁘게 흘러가는데 뭐라도 하셔야죠."라고 말하자 워렌은 쓸데없이 간섭한다며 처칠을 끌어내라 명령했다고. 결국 우군인 스코틀랜드 여단의 우회 공격과 탄약 부족으로 보어군이 슬슬 철수하려 할 즈음에야 워렌은 병력을 철수시킨다. 이 당시 보어군의 피해는 전사자 68명, 부상자 267명인데 반해 영국군은 전사 243명, 부상자 1,250명으로 영국군의 완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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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영국군이 반격하는 과정에서 영국군은 보어인들을 집결캠프(강제수용소)를 세워 12만명의 보어인을 수용했는데, 이는 뒷날 나치 독일아우슈비츠에서 활용하게 된다. 강제수용소에서 27,927명의 보어인이 기아 등으로 사망했다. 사망자 중 22,074명은 16세 이하였다. 아프리카 흑인도 14,154 명이 기아로 사망했다. 사진 촬영 후 바로 사망한 보어인 소녀 보기에 따라 끔찍하니 클릭시 주의할 것. 이때문에 이 강제수용소를 두고 최초의 조직화된 학살이라 보기도 한다.

1900년 9월에 이르러 영국은 트란스발의 대부분을 점령했고 보어인들은 게릴라전으로 맞서게 된다. 영국군은 이에 맞서 초토화작전으로 나간다.

1902년 5월에 보어는 항복하고 두 공화국은 소멸하여 남아프리카의 영국 식민지로 들어간다. 영국은 승리하긴 하였으나 막대한 피해를 입었고 강제수용소와 초토화작전으로 국제적으로도 비난을 당했다. 영국은 이 전쟁으로 영향력을 많이 상실했고 아시아에서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해 일본을 동맹국으로 삼아 영일동맹을 맺었다. 남아프리카에서 일어난 전쟁이 당시 한반도의 정세에도 영향을 미친 셈이었다.

4 여담

  • 아서 코난 도일이 육군 군의관으로 2차전쟁에 참여했는데 당시 영국 정부를 옹호하는 글을 써서 기사 작위를 받기도 했다. 이 전쟁은 외국에서 엄청난 비판을 받았지만 코난 도일은 애국심을 호소하며 전쟁을 정당화했다.
  • 윈스턴 처칠도 종군기자로 2차전쟁에 참전했다가 보어군에게 포로로 잡혔다가 탈출하여 쓴 책으로 유명세를 얻었고 이듬해에 하원의원으로 정계에도 진출하게 된다.
  • 나치 시대에[5] 크뤼거 아저씨라는 영화가 보어전쟁을 직접적으로 그리고 있다. 보어전쟁후 망명한 크뤼거 대통령이 사망하기 전에 보어전쟁을 회상하는 형식인데. 당연히 영국은 망해가는 제국주의 국가에 인종말살정책 후에 보어인들이 아파르트헤이트라는 정책을 주도한걸 보면 코웃음이 난다, 멸절 강제 수용소를 운영하는 천하의 개쌍놈국가로 묘사하고 있다. 근데 나치가 그런거 비판하는 건 아닌데? 허나 그렇게 따지면 영국도 대영제국 시절을 생각하면 나치 비판 못한다 금광 운영권을 위해 쿠데타를 획책하는 세실 로즈,[6] 중증 알콜 의존증에 시달리는 빅토리아 여왕(!), 그리고 쿨하게 피수용자를 학살하는 수용소장[7]의 연기가 일품인 작품
  • 이 전쟁의 영향으로 네덜란드에서는 한동안 친척뻘 민족이라며 보어인들에 대한 동정적인 여론이 크게 일었으며 이는 2차대전 당시 나치 부역자들이 생기는 원인들 중 하나가 되었다. 그러나 2차대전이 끝나고 남아공의 인종차별 정책이 도를 넘게 되자 네덜란드 여론은 다시 적대적으로 선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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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영국군은 전쟁 중 눈에 띄는 레드 코트를 버리고 카키색 전투복을 입고 싸웠다. 다만 장구류가 흰색이라 시망. 그래서 영국군은 커피나 홍차 찌꺼기를 구해서 염색하려고 혈안이었는데 영국군도 똥별이 있는지 검열때 걸리면 채찍형이었다.
  • 보어전쟁에서 영국군은 산업혁명 이후 비참해진 영국 하층민들의 생활상 때문에 징병 연령대의 청년들이 신체적 결함이 속출하여 전쟁터에 투입할 인원을 모집하는 데 애를 먹어야 했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차후 유럽 경쟁국들과의 전쟁에서 병사들의 질 차이로 질 수도 있다는 문제의식이 생겼고 영국 정부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하층민들에게 충분하게 식료품을 살 수 있도록 돈을 지원해 주거나 아예 급식을 제공하는 방안을 마련했다. 시각에 따라서는 이 정책을 현대의 국가 주도 복지의 시발점으로 보기도 한다.
  • 로런스 오츠는 매우 촉망받는 뛰어난 장교였으나 이 전쟁에서 절름발이가 되는 중상을 당한 것이 원인이 되어 퇴역당하지 않는 조건으로 로버트 스콧의 휘하에서 탐험대원이 되었다. 그러나 남극 탐험 도중 그를 포함한 탐험대 전체가 사망했다.
  • 한국에도 정발된 '어느 멍청한 소대장의 작전 이야기'가 보어전쟁 배경으로 하고 있다. 보병 소대장, 중대장이 배울만한 전술서이다. 다만 출판된지 시간이 지나서 현재 서점에서 절판이라 중고 책방으로 구할 수 밖에 없다. 그래서 모 사단 작전장교가 간부들 대상으로 스캔본 뿌린게 함정 참고로 이 책을 쓴 저자는 바로 스윈튼 소장으로 영국의 전차 개발에 크게 기여한 인물이다.
  • 이 때 당시 조선에서 황현이 쓴 매천야록에도 언급되어있다. '보어인들의 강한 저항에 감동한(...) 영국이 그들을 모두 죽이지 않고 살려두었더라' 라고 소개해놓으며 위정척사파들에게 짐승이라고 배척받는 서양에서도 제 나름대로의 도덕과 의리가 존재한다는 것을 소개하였다.[8]
  1. 이 정책은 프랑스의 횡단정책과 충돌하여 파쇼다 사건을 일으키기도 했다.
  2. 특히 보어인들은 게릴라 저격전술로 영국군을 사냥했다. "저격수 보이지 않는 공포"에 해당내용이 자세하게 나온다.
  3. 찰스 워렌은 유명한 잭 더 리퍼 사건 당시 런던 경찰 총책임자였는데 이 때도 엉터리 같은 행동으로 수사에 지대한 어려움을 끼쳤다.
  4. 여담으로 보어군은 특성상 민병대의 비율이 높아서 군복을 제대로 입지 않은 경우가 많은데, 이 포병부대는 보어군 부대 중 유일하게 전 장병이 제복을 제대로 갖춘 부대였다.
  5. 그런 이유로 이 영화는 2차 매체 발간이 금지되어 있고 상영회 때 상당히 엄격한 신원조사를 지금도 하고 있다.
  6. 참고로 이 영화에서 세실 로즈로 나온 독일 배우는 나치 선전영화 '유태인 쉐스'에서 인간말종 유태인으로 열연했다.
  7. 당연한 일이지만 윈스턴 처칠과 대단히 비슷하게 생긴 배우가 나왔다.
  8. 그런데 사실 위정척사파들은 서양의 위험성을 경고하기는 했지만 그들에 대한 맹목적인 증오를 표출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만국공법(=국제법)을 보고 감탄하여 자신들의 주장의 근거로 쓰거나 의병을 일으킬 때도 서양 무기의 위력은 인정하는 모습을 보였다. 사실 조선에서 서양인이 공격당하는 일도 동시대 일본이나 청나라에 비하면 거의 없는 편이었다.사실 더 큰 적이 있어서 그랬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