晏嬰(? ~ 기원전 500년)
춘추시대 제나라 때의 명신. 자는 평중(平仲). 흔히 안자(晏子)로 알려져 있다.
사마천의 사기 열전 중 백이숙제열전 다음으로 자리한 관안열전의 '안'이 바로 이 사람을 가리킨다.
목차
1 출신
키가 6척으로 당시 기준에서는 너무 작은 키였다.[1] 가족들도 그가 태어났을 때 약해서 살지 못하겠다고 생각했는데 살아있자. 아버지 안약이 그에게 주술적 의미로 영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고 한다.
본디 제나라에는 안씨가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춘추시대를 다룬 역사서에서 제나라 안씨 일족이라 칭함은 모두 안영의 일족들을 뜻한다. 본래 안씨 일족은 조상 대대로 송나라의 대부였으나 송나라가 화씨 일족에 의해서 국정이 좌지우지되고 초나라와 진나라 사이에서 뇌물을 바쳐가며 나라가 근근히 유지되기만 하였고, 공자의 조상들마저 화씨 일족에 의해서 노나라로 망명가게 되자 안영의 할아버지 대에 이르러서는 제나라에 정착하게 되었다. 만약 화씨 일족이 없었다만 송나라에는 공자와 안영이 동시에 존재했을 것. 흠좀무.
2 제나라를 지탱하다
안영의 아버지 안약이 제환공도 정벌하지 못했던 내나라를 정벌하여 산동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식읍을 받은 이후로 그도 정계에 진출하게 되었는데 이미 이때부터 제나라에서 명망이 높았다. 얼마나 높았냐면 계찰이 찾아와 담론을 나누고 싶다고 했을 정도.(...)[2] 아버지 안약 사후 당시에도 이미 형식적으로 것으로 치부되던 3년 거상[3]을 치뤄낸 것으로도 명성이 높다.
생김새나 풍채는 볼품이 없었던 데다가, 검소하고 청렴한 성격으로 강직해 직언을 자주하여 미움을 받을 것 같지만 직언을 할때 적절한 비유를 통해서 비꼰 일이 많아서 군주가 스스로 깨닫게 하는 방법을 자주 취해 실제 의미로는 강도높은(거의 모욕에 가까운) 비난을 했어도 죽을 때까지 존경을 받을지언정 탄핵을 받은 일은 없었다.
3 촌철살인의 명재상
또한 이 비유가 오늘날에도 적용될 정도로 워낙 교훈적이기 때문에 고사성어로 많이 만들어지기도 했는데 남귤북지, 곡격견마, 양두구육등의 고사성어가 있으며 교훈적인 비유가 아니라도 그와 관련된 고사성어가 제법 많이 존재한다.(의기양양, 준조, 이도살삼사등)독설가 난쟁이 재상이라니 티리온 라니스터 돋네효 사실 춘추시대 제나라에서 유래한 고사성어는 대부분 안영에게서 유래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특히 안영에게 가르침을 받는 주된 대상은 제나라의 경공. 사실 이런 일화들은 주로 <안자춘추>에 많이 전하는데 안자춘추는 후세 사람들이 편찬한 것이다.
한 번은 제나라에 장마가 닥쳐 집이 무너지고 백성들이 굶주리자 안영은 국고를 열어 곡식을 풀자고 간언했으나 경공은 듣지 않았다. 안영은 "궁에서 키우는 개는 배불리 먹이시면서 백성들은 굶기십니까?"하고 비판하고는 퇴임해 버렸다. 얼마 후 잘못을 깨달은 경공이 사과하기 위해 안영의 집을 찾자 안영은 이미 곡식과 가재도구를 모두 백성들에게 나누어준 후였다고 한다.
마부와 관련된 일화가 전해져 온다. 안영의 마부는 8척인반면 안영은 6척이었다. 그래서 마부는 항상 기세등등하여 자신이 주인인듯 목에 힘을 주고 다녔다.어느날 마부의 부인이 마부에게 헤어지자고 말했고 마부는 놀라 이유를 물어보았다. 부인이 말하기를 안영 같은 분은 겸손하게 다니는데 일개 마부인 당신은 왜 그렇게 기세등등하게 다니냐고 말했다. 마부는 이에 깨달음을 얻어 예전과 같은 행동을 하지않게 되었고 이 일을 전해들은 안영을 마부를 벼슬길에 추천했다. 이유인즉 자신의 잘못된 점을 인정하고 고쳤기 때문이었다. 오오 마부가 벼슬길에 오르는 평등사회
3.1 초 영왕을 농락하다
초나라에 사신으로 간 적이 있는데, 이때 초 영왕을 사정없이 깨버린것이 가장 유명하다.
맨 처음 초에 도착했을때 초나라의 신하인 원계강이 왕명을 받들고, 일부러 안영에게 욕보이기 위해서 꾀를 내어서, 성문 옆에 개구멍을 만들었는데, 안영이 도착하자, 문을 잠가놓고는, 왕이 몹시 기다리니, 우선 개구멍으로 들어가라고 했는데, 이때 "내가 개의 나라에 온 것이 아니거늘 어찌 개구멍으로 사람을 들이는가!"라고 외쳤다. 이후 정문으로 들어왔는데, 정문에는 유신들이 좌우로 쫙 깔려있었는데, 그중에서 투자길[4]이 와서 안영에게 인사를 하자, 안영은 곧바로 "투씨라면 이 나라의 충신이었던 투백비 장군의 후예가 아니시오?"라고 먼저 선수를 쳐서, 감히 입을 못열리게 했다. 투자길을 뒤이어, 여러 유신들이 안영에게 말싸움을 걸었지만, 모두 패배하고 있었는데, 오사[5]가 와서, 손님에게 무슨 무례라며, 유신들을 전부 쫓아내고, 안영을 궁전으로 모셨는데, 대전으로 들어오는 동안 칼을 빼든 무사들이 죽 서있는데도 기죽지 않고 "평화를 위해 온 사신을 이토록 두려워 하십니까?"라고 당당히 왕을 보았다. 초 영왕이 그의 외모를 비하하며 "제나라에는 인재가 없는가? 왜 자네같은 못난 사람이 왔는가?"라고 비꼬자 "큰 인재는 큰 나라에 보내고, 작은 인재는 작은 나라에 보내는 법. 저같이 형편없는 인물은 형편없는 나라에 오는 것이 당연합니다."라고 받아쳤다.
그 후 영왕이 귤을 가져와 대접하는데, 귤이 없던 제나라의 사람이자, 귤을 본적도 없어서 귤을 껍질째 먹고 말았다. 그러자 "얼마나 먹고싶었으면 껍질 채 먹는가?"라고 비웃었는데 "본디 왕의 명 없이는 함부로 다루지 않는 법. 까고 먹으라 말하지 않았는데 어찌 귤 껍질을 버리리까?"라며 초 영왕을 엿먹였다. 이후, 초 영왕의 호위무사가 제나라 출신의 도둑을 끌어와서는, 호위무사가 도둑의 국적이 제나라라고 하자, "제나라 사람들은 순 죄인뿐이로군?"이라고 하자 안영은 "맛좋은 귤이라도 강북에 심으면 탱자가 열리듯, 죄를 모르는 제나라 사람이 초나라에만 들어오면 죄인이 되니 초나라야말로 죄악의 땅인 것은 아닌지요?[6]"라고 웃었다.
3.2 이도살삼사
이후 제나라로 돌아온 뒤 당시 제나라의 제후, 제경공에게는 세명의 뛰어난 무장이 있었는데 이들은 공손접(公孫接), 전개강(田開疆), 고야자(古冶子)였다. 이들을 2개의 복숭아로 하여금 서로를 시기하게 만들어 장유유서같은 기본적인 예를 모르는 무뢰배라는 점을 이용해 제나라 전씨 일족에게 붙은 이들 셋을 차도살인지계로 살해하였다. 이에 제경공이 안도하면서도 동시에 안타까워하자 안영은 "그들은 힘은 있으나 지략이 없어 큰 인재는 될 수 없었습니다."라고 하며 한 사람을 그들에게 소개하니, 그가 바로 사마양저다.
다만 이 부분은 책마다 설명이 틀리다. 특히 열국지같은 경우는 6개의 복숭아라고 소개하여 6개의 복숭아 중 2개는 각 나라의 임금인 제경공과 노소공이, 2개를 제,노의 재상이었던 안영과 숙손차가 섭식하고, 나머지 2개를 가지고 서로 다투게 해 죽도록 만들었다고 나왔으나 안자춘추의 경우에는 그저 2개로만 나와있다.
사마양저를 추천하여 국방을 안정시키고, 그 스스로는 외교와 내정을 담당하여 제나라는 제환공 이후에 가장 눈부신 발전을 이루었으며 안영이 살아있는 동안에는 진(晉)나라도 양설힐 같은 인재가 있었지만 감히 쳐들어갈 생각을 못했다. 초영왕은 아예 안영이 사신으로 온 이후에 바로 친선해버렸을 정도. 그럼에도 진나라가 제나라를 칠 생각할 수 없었다. 이유인즉 그가 추천한 사마양저가 진나라를 깨먹었기 때문(...).
3.3 촉추의 세 가지 잘못
제나라 경공은 새 사냥을 좋아했는데 촉추라는 사람에게 자신이 잡은 새들을 관리하는 임무를 맡겼다. 그런데 촉추가 실수해서 그 새들이 모두 도망가고 말았다. 화가 난 경공은 촉추를 죽이라고 명했는데 이를 본 안영은 "촉추에게는 세 개의 죄목이 있습니다. 제가 촉추의 죄 세 개를 지적한 다음 죽여도 늦지 않으니 허락해 주십시오"라고 청했고 경공은 그렇게 했다. 그리고 나서 안영은 촉추에게 이렇게 말했다.
"너는 세 가지의 죄를 저질렀다. 하나는 관리를 소홀히 하여 새들을 놓친 죄, 두 번째는 우리 임금이 새 때문에 사람을 죽이게 만든 것이며, 이 일로 다른 나라 임금들이 제나라 군주는 사람보다 새를 중히 여긴다고 생각하게 될 것이니 이것이 너의 세 번째 죄이다"
이러고 나서 안영은 촉추를 죽이라고 청했지만 부끄러워진 경공은 그냥 촉추를 풀어주었다고 한다.
3.4 시장에 살면 좋은 점
안영은 시장가의 시끄럽고 지저분한 곳에서 거처했다고 한다. 보다 못한 경공은 좋은 집을 주겠다고 안영에게 제의했지만 안영은 "시장 가까이에 있어서 물건을 쉽게 살 수 있으니 이익"이라며 거절했다. 경공이 "경은 시장 가까이에 산다면 어떤 물건이 비싸고 싼지도 알겠군"라고 묻자 안영은 "어찌 모르겠나이까? 쌍으로 신는 보통 신은 싸고, 용(踊)은 비싸옵니다"라고 대답했다.
여기서 '용'은 다리를 자르는 형벌인 '월형(刖刑)'을 당한 사람들이 신는 신발을 말한다. 그러니까 안영은 "월형을 받은 신하들이 얼마나 많으면 용의 가격이 올랐겠습니까?"라며 제나라 형벌의 가혹함을 돌려서 비판한 것이다.
3.5 화(和)와 동(同)의 차이점
경공이 사냥에서 돌아오는 길에 양구거라는 신하가 경공을 맞으러 달려왔다. 경공이 "오직 양구거만 내 마음과 맞는구나(與我和)"라며 기뻐하자 안영이 "그저 맞장구치는 것(同)뿐이지 어찌 마음이 맞다(和) 하겠습니까?"라고 대꾸했다. 경공이 동(同)과 화(和)의 차이점을 묻자 안영은 이렇게 대답했다.
"화(和)를 음식에 비유하면 초, 장, 소금을 넣어 음식의 부족한 맛을 보충하고 지나친 맛은 제어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면 하나의 요리가 되어 마음을 평화롭게 합니다. 군주와 신하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군주가 잘 못하는 것은 말해서 고치게 하고, 잘하는 것은 북돋아서 그릇된 일을 못하게 하는 것을 마음이 맞는 것(和)이라고 합니다. 그저 군주가 좋아하면 자기도 좋다 하고, 싫어하면 싫다 하면서 맞장구나 치는 것을 동(同)이라 합니다. 이것은 물로 물의 간을 맞추는 것과 같은데 무슨 맛이 나겠습니까?"
한마디로 군주에게 영합하기만 하는 것을 군주와 마음이 맞는 것이라고 볼 수는 없다고 경공을 따끔하게 질책한 셈.
4 공자와의 관계
공자가 동시대에 살았던 인물중에서 가장 존경한 4인중에 한명이기도 하다.[7] 하지만 노는 제의 가상적국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에 정작 안영은 공자를 위험 인물로 여겼다. 제나라에서 등용되고자 했던 공자는 안영이 유학을 하는 자들은 믿을 수가 없고 노와 제는 풍습이 다르니 바꿀 수 없다고 강하게 반대를 해서 결국 제나라를 떠나야 했다.
그러나 실제로 공자가 안영을 안자로 높이고 함부로 그의 이름을 부르지 않았을 정도로 우러러봤던 만큼, 안영 역시 공자를 현인중의 현인으로 평가했었다. 안영이 노와 제의 실제상황이 달라 걸맞는 정치를 할 수 없으며 "유자(儒者)들은 유세를 떠는데만 능하고 그 예와 형식을 지키는데 1세대에는 끝낼 수가 없으니 실제로는 말만 그럴듯하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라고 했을지언정 자신에게 예(禮)를 가르친 현인 월석보와 공자중에서 누가 더 뛰어나냐는 제경공의 질문에는 "월석보는 현인임이 분명하고, 공중니는 현인 중에서도 현인입니다"라고 했을 정도.
또한 공자는 자신을 반대한 안영을 미워하지는 않았다고 하며, 안영을 "안평중은 사람을 잘 사귀었다. 오래 되어도 공경하여 함부로 대하지 않았다"라고 평가한 바 있다.
사실 당시의 제나라는 안영이 없다면 진(陳)의 공실 출신인 전(田)씨가 내일 공실을 뒤엎을지 모레 뒤엎을지 모르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안영이 말했던 '일세에 과업을 끝낼 수 없다'는 말처럼 제나라에 공자의 정치를 적용하기에는 많은 무리가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5 평가
사기를 시작으로 정사로 인정받는 중국 사서에서도 이미 먼치킨급으로 대우받고 있으며 아예 후세에 집필된 안자춘추에서는 아예 대놓고 찬양모드로 나온다.(...)
사마천이 가장 존경하였던 인물이다. 사마천은 만일 자신이 안영과 같은 시대에 살고 있다면 마부가 되어 채찍질하는 것을 자랑스레 여길 것이라고 공언할 정도였으며[8] 관중과 나란히 평가되고 있을 만큼 중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정치인 중 한명으로 꼽히기도 한다.
6 현대 매체에서의 안영
공자의 생애를 다룬 애니메이션 '공자전'에서는 어쩐지 외모부터 십상시삘 나오는 악역으로 나온다. 그것도 그냥 악역이 아니라 양호를 능가하는, 공자 일생일대의 최대의 적으로. 전항의 공자암살기도나 여미의 부저추신계[9]도 모두 안영이 꾸민 일로 묘사한다. 흠좀무. 공자를 견제한 인물들 중 가장 거물이라서 이런 식으로 등장시킨 듯한데 안영이 본시 명재상으로 존경받는 인물인 만큼 이정도로 까이는건 심한면이 있다. 한국판에서의 성우는 재미있게도 작중에서 양호와 같은 성우이자 라이온 킹의 스카로 유명한 김병관. 악역 포스가 제대로 묻어난다.
중화TV에서 제작한 사극 <공자>에서는 공자를 견제하고 부저추신계도 꾸미긴 하지만, 제나라를 위하는 정치인일 뿐 악역으로 묘사되진 않는다. 공자에 대해선 그의 능력과 인품, 궁극적으로는 그가 주장하는 왕도정치가 옳다는 것도 인정하지만 지금은 난세이므로 패도를 추구해야한다고 주장한다.
- ↑ 21세기 대한민국의 1척은 30cm를 넘지만 후한 시대의 1척은 23cm 정도. 성인 남성이 6척=138cm이면.. 춘추시대의 1척은 또 다를 수도 있다. 더구나 진나라 통일 이전 중국에서는 도량형도 지방마다 달랐기 때문에 다를 가능성이 매우 크다.
- ↑ 계찰은 공자가 계자(季子)라 부르며 우러러볼 정도의 인물이었다. 오의 왕자로 합려의 막내 숙부이기도 한 사람이며 워낙 인품이 뛰어났지만 왕이 되기를 거부한 탓에 그 아버지가 왕위계승을 부자 상속이 아닌 형제 상속이 되도록 유언을 남겼을 정도다. 하지만 결국 계찰은 왕이 되기를 거부했기 때문에 셋째 아들(계찰이 넷째였다)의 아들인 요가 왕위에 오르면서 합려와 반목을 하게 된다. 그 뒤로 유명한 어장검 스토리가 이어진다.
- ↑ 무덤 옆에 움막을 짓고 죽으로 끼니를 때우며 복상하는 것
- ↑ 초나라의 충신가문인 투씨 집안으로, 그의 조상인 투백비가 제나라로 신하로 갔는데, 워낙 버르장머리가 없게 행동하자, 개빡친 제나라의 태대부였던 관이오에게 참수당한다
- ↑ 그 유명한 오자서의 아버지다.
- ↑ 그 유명한 남귤북지, 귤화위지
- ↑ 나머지 3인은 주나라의 노자, 위나라의 거자, 초나라의 노래자이다.
- ↑ 심지어 본인이 집필한 사기의 안영 열전에 '안영의 마부라고 으스대다 마누라한데 욕먹은 마부의 이야기가 나오는데도!
- ↑ 노나라 왕에게 120필의 말과 함께 춤에 능한 80명의 미녀를 보내서 노나라 왕 정공이 항락에 빠져 정사를 멀리 하게 만든 계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