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한국의 애국행진곡
해군 군악대장을 역임한 이교숙이 작곡하였으며, 이후 편곡을 거쳐 현재는 해군행진곡으로 쓰이고 있다.
2 일본의 애국행진곡
愛国行進曲
일본 제국 당시 국민가요로 보급된 노래이자 일본군 육군의 군가(軍歌). 군함행진곡과 더불어 대표적인 일본 군가다.
초연은 1937년 12월 24일 수상관저에서 이루어졌으며, 이틀 뒤인 26일에 대중적으로 공연되었다. 처음부터 저작권이 설정되어 있지 않아 일본 컬럼비아레코드를 비롯한 다양한 음반사에서 갖가지 버전이 나왔으며 당시 SP판의 판매고가 100만장을 넘을 정도로 상업적으로는 높은 실적을 거두었다. 하지만 현대에는 쇼지 타로의 히트곡(...) 중 하나로 인식되는 경우도 적지 않은 듯하다.
군함행진곡보다 역사가 짧은 편으로, 이미 중일전쟁 막장테크를 제대로 타고 있던 시점이었던 1937년에 일본 군부와 정부가 '국민 정신 총동원' 이라는 군국주의 표어를 대놓고 내걸어 공모했다. 우선 가사 공모가 진행되었고, 채택 주체였던 내각 정보부에 제출된 50000여 점 이상의 가사들 중 돗토리현에 거주하는 인쇄업자 모리카와 유키오(森川幸雄)의 것이 선택되었다. 그리고 사용될 곡조에는 군함행진곡의 작곡자였던 세키구치 토키치(瀬戸口藤吉)의 곡이 선정되었다. 그래서 당시에는 젊은이의 기백으로 써낸 가사와 노익장의 역작인 곡조의 조화 등의 미사여구가 넘쳤지만 현실은 시궁창.
우선 가사가 모리카와의 원안대로 쓰이지 않고 심사위원들이 높으신 분들의 입맛에 맞게 마구 뜯어고쳐 희대의 괴작이 되었다는 데에 문제가 있었다. 심사위원 중 키타하라 하쿠슈(北原白秋)와 사사키 노부츠나(佐佐木信綱)가 가사 개작 과정에서 심각하게 대립하여 1942년 키타하라가 죽을 때까지 전혀 화해하지 않았다.
그리고 개작된 가사가 심하게 병맛이었다. 문제는 이것이 전체주의가 일소된 현대의 시각에서도 그렇지만 당대에조차 가루가 되도록 까였다는 사실이다. 한문어투가 많은 당대의 일본어 환경에서조차 알아듣기 힘든 어려운 용어가 난무하는 병맛 가사 때문에 정작 판매고는 높았지만 당시 일본인들의 마음 속에 파고들지는 못했다. 새로 만든 군가로서는 기껏 노영의 노래 정도의 극소수의 곡만 애창되었을 따름이고 대부분은 메이지, 다이쇼 시대에 만들어진 군가를 열창하는 분위기였다. 게다가 작자미상의, 당시 군부 인사들을 조롱하는 개사가 돌기도 하였다.
가사는 다음과 같다.
1.
見よ東海の空明けて 보라 동해[1]의 하늘 밝으며
旭日高く輝けば 욱일(아침해) 드높이 빛나면
天地の正気溌溂と 천지의 정기가 발랄하게도
希望は踊る大八洲 희망이 춤추도다 오오야시마[2]
おお晴朗の朝雲に 오오 맑고 낭랑한 아침 구름에
聳ゆる富士の姿こそ 솟아오른 후지의 자태야말로
金甌無欠揺るぎなき 흔들림없는 금구무결[3]
わが日本の誇りなれ 우리 일본의 자랑이어라
2.
起て一系の大君を 일어나라 만세일계의 임금님을
光と永久に頂きて 빛으로서 영원히 받들고서
臣民我等皆共に 신민 우리는 모두 다함께
御稜威に副はん大使命 천황의 위광을 따르자 대사명이다
往け八紘を宇となし 가라 팔굉을 하나로 하여[4]
四海の人を導きて 사해의 사람들을 이끌어
正しき平和打ち立てん 올바른 평화를 세워보자
理想は花と咲き薫る 이상은 꽃으로 피어나며 향기 내도다
3.
今幾度か我が上に 지금 몇 번인가 우리의 위에
試練の嵐哮るとも 시련의 폭풍이 몰아치더라도
断乎と守れその正義 단호히 지켜라 그 정의
進まん道は一つのみ 나아가자 길은 오직 하나뿐
嗚呼悠遠の神代より 아아 머나먼 신의 시대로부터
轟く歩調受け継ぎて 우렁찬 발걸음을 이어나가며
大行進の行く彼方 대행진을 가는 그 쪽에
皇国常に栄えあれ 황국엔 언제나 영광 있으라
아래의 영상은 1943년에 제작된 선전 영화 '음악대진군(音楽大進軍)'에 수록된 가창 영상이다. 추축국 일원이었으니 당연한 것이겠지만, 나치 독일의 선전 영화와 비슷한 구도와 연출을 사용하고 있다. 독창을 맡은 가수들은 타키타 키쿠에(소프라노)와 후지와라 요시에(테너)로, 선전 영화 답게 당시 일본에서 날리던 1급 성악가들을 섭외했다. 하지만 관현악단의 연주 퀄리티는 시망.
1941년 3월 독일 주간 전시뉴스. 일본제국 외무상 마츠오카 요스케가 독일 베를린 방문했을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