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세계의 방패
정복왕을 가로막은 희대의 명장, 백색의 기사
1 개요
Hunyadi János[1]
트란실바니아 총독, 헝가리왕 섭정 (1407? ~ 1456.8.11)
헝가리의 장군으로서 당대 유럽에서 오스만 제국에 대항한 가장 대표적인 인물 중 한 명.
2 행적
본래 왈라키아 지방 출신으로서 헝가리왕 지기스문트를 섬기던 그의 아버지 보이크가 루마니아의 후냐디 성을 하사받게 되면서 후냐디의 성을 쓰게 되었다. 비록 하급의 귀족에 불과하였으나 비슷한 계층에서는 가장 높은 지위였으며 다른 영주들에 비교하여 재산도 그렇게 꿀리지 않았다고 한다.
후냐디가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계기는 오스만 제국의 무라드 2세가 세르비아에 침공을 결행한 사건이었다. 당시 헝가리와 가신관계에 있던 세르비아왕 주라지를 돕기 위해 폴란드왕 겸 헝가리왕이던 블라디슬라프 1세는 트란실바니아 지역의 총독이던(1446~1452) 야노슈 후냐디를 지휘관으로 원정군을 일으켰다(1443. 9).
후냐디의 군대는 오스만군을 밀어붙여 소피아까지 진출하는 쾌거를 올리지만 오스만군의 저항과 보급선 유지의 어려움으로 인해 퇴각했다. 그 와중에도 추격해오는 오스만군을 격파하고 무라드 2세의 처남을 포로로 잡아 휴전을 이끌어냈다. 결국 퇴각하기는 하였으나 이 전쟁으로 헝가리와 후냐디의 위신은 크게 상승했고 무라드 2세는 세르비아의 중립을 조건으로 세르비아의 영토를 반환했다.
이듬해 추기경 체자레니는 대오스만 동맹결성을 촉구하였고 여기에 호응한 교황령, 헝가리, 폴란드, 부르고뉴, 베네치아, 제노바의 연합군이 결성되었고 여기에 왈라키아 공국도 참전하게 되었다.[2] 드디어 연합군은 다뉴브 강을 넘어 공격을 개시하였다(1444. 9. 20). 그러나 전 원정이 끝난지 채 1년도 지나지 않아 재개된 원정은 예전의 규모에 미치지 못하였고 바르나까지 진격한 연합군은 이곳에서 오스만군에게 포위당한 채 혈투 끝에 퇴각했다(바르나 전투).
이 전투 뒤에 왈라키아를 통해 퇴각하던 후냐디는 블라드 드라쿨과 그의 아들 미르체아에 의해 투옥되었다가 풀려나는데 그 이유는 확실치 않다. 단지 바르나 전투에서 오스만군에 대한 공격을 주장하고 직접 지휘를 맡았던 것이 후냐디였기 때문에 블라드가 후냐디의 책임을 물으려 했던 것이라고 생각될 뿐이다. 여담으로 이 사건이 후일 블라드 가시공의 인생을 질곡으로 밀어넣는 계기가 되고 말았다.
바르나 전투에서 블라디슬라프 1세가 사망하면서 후냐디는 당분간 섭정으로서 헝가리를 통치했다. 후냐디는 바르나의 치욕을 갚기 위하여 군대를 재정비하였고 , 1448년 알바니아의 스칸데르베그를 진압하기위해 무라드 2세가 출병하자 다시 한번 원정길에 나선다. 이때 주라지는 후냐디가 세르비아 영토를 통과하는 것을 허가하지 않았으나 후냐디는 이 경고를 무시하고 그대로 세르비아에 대한 침공을 개시했다. 이에 무라드 2세는 곧장 후냐디를 맞이하기 위한 병력을 나눠 세르비아로 파견하였다.
10월 17일 양군은 코소보 벌판에서 마주쳐 치열한 접전을 벌였으나 후냐디는 이 전투에서 다시 한번 패배하고 후퇴하던 와중에 세르비아인들에게 붙잡혀 다시는 세르비아를 침공하지 않겠다는 서약과 함께 그의 아들인 마티아스 코르비누스가 주라지의 조카딸과 결혼을 하기로 약조하였다(마티아스 코르비누스는 헝가리의 현군으로 유명한 마차시이다).
코소보의 패배로 이미 실각한 것과 다름 없던 후냐디를 되살려준 것은 메흐메트 2세의 세르비아 침공이었다. 콘스탄티노플 함락 -동로마 제국 멸망으로 기세가 오른 메흐메트 2세는 헝가리와 오스만 사이에서 이중가신 관계를 맺은 세르비아를 직접 통치하기로 마음먹고 1454년 침공을 개시하였다. 주라지는 헝가리로 도피하였고 코소보 일대는 완전히 오스만의 수중에 들어갔다.
1456년 드디어 메흐메트 2세가 10만의 대군과 300문에 달하는 대포를 이끌고 베오그라드를 향해 진격을 개시하였다. 겁에 질린 헝가리 국왕은 사냥을 핑계로 빈으로 도망쳐 버렸고, 후냐디는 다시 한번 무대로 복귀하였다. 후냐디는 직접 발칸반도 전역에서 지원병을 모집하기 시작하였고 오스만의 동맹이던 왈라키아의 블라디슬라프 2세를 견제하기 위해 드라쿨의 아들이던 블라드 가시공을 지원하였다.[3] 그러나 정작 헝가리의 귀족들 중 상당수는 국왕의 부재를 핑계로 참전을 꺼리고 있었다. 오히려 당시 교황이던 칼릭투스 3세가 후냐디를 가리켜 '기독교 세계의 방패'라 칭송하며 후냐디의 모병을 돕고 나섰다. 이렇게 후냐디는 오합지졸이긴 했으나 4만의 병사들을 모을 수 있었고 여기에 1만의 정예병을 모아 오스만군에게 포위된 베오그라드로 진격하였다.
7월 14일 베오그라드 포위망에 도달한 후냐디의 군대는 도나우 강을 막고 있던 오스만 함대를 격파하고 베오그라드에 진입하는데 성공했다. 그럼에도 오스만군의 우세는 변함이 없었다. 계속되는 전투 끝에 21일 무너진 성벽을 향해 오스만군의 야간 기습이 시작되면서 상황은 급박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이미 예니체리 부대가 성벽 내부로 쏟아져 들어오는 위기상황에서 후냐디는 돌파된 성벽 주변에 불을 질러 적의 허리를 끊고 내부에 고립된 적들을 역포위하여 섬멸시켰다.
더 놀라운 일은 다음날 아침에 일어났는데 징집된 농민군 중 일부가 멋대로 성 밖으로 나가 오스만군 진지를 기습한 것이다. 이른 아침 넋을 놓고 있던 오스만군은 이 공격에 당황하기 시작했고 후냐디는 기회를 포착하자 전 병력을 이끌고 총공격에 나섰다. 이에 오스만군은 순식간에 전의를 잃고 무질서하게 패주하기 시작했다. 여기서 오스만군은 7만 5천에 달하는 병력과 중화기를 전부 잃는 엄청난 참패를 당했고 메흐메트 2세는 예니체리 부대의 몸을 던진 희생으로 겨우 탈출하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이 전투의 충격으로 메흐메트 2세는 음독자살을 시도할 정도로 한동안 폐인으로 지내게 되었다.
베오그라드 전투는 후냐디의 가장 빛나는 승리였지만, 허무하게도 곧바로 찾아온 전염병으로 인해 야노슈는 가장 빛나는 순간에 생을 마감하고 만다. 그의 후계자로써 첫째 아들 후냐디 라즐로가 세력을 이어가지만, 헝가리의 기성 귀족들과의 권력다툼 속에 반역죄를 선고받아 1년만에 처형당하고, 함께 갇혀있던 둘째 아들 마차시가 반란으로 풀려난 뒤에 외숙부 미할리 쉴라지[4]에게 옹립되어 마차시 1세(마티아스 코르비누스)로 즉위하게 된다.
3 기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1944년 창설된 헝가리인으로 구성된 무장 친위대의 제25SS척탄병사단은 바로 이 야노슈 후냐디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잘도 이런 미치광이 고인능욕을!!
4 대중메체에서
징기스칸 4에서 메흐메트 2세과 블라드 가시공과 달리 등장한다. 능력치는 78/86/84이다.
유로파 4에서 헝가리의 장군으로 등장하며 능력치는 4/4/4/1. 이벤트를 통해 플레이어 혹은 AI 의 선택에 따라서 섭정이 될 수 있으며 능력치는 4/5/5. 아들 마챠슈 후녀디는 이후 진행에 따라 이벤트를 통해 플레이어 혹은 AI 의 선택에 따라 왕위에 오를 수 있으며 능력치는 4/5/5, 장군으로서의 능력치는 3/4/3/1(이벤트로 즉위한 경우 적용되지 않음). 이들 부자의 활약을 반영하듯 매우 높은 능력치가 책정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