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기스문트

  • Warhammer 40,000의 등장인물은 지기스문트(Warhammer 40,000) 항목으로.
역대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루페르투스지기스문트알브레히트 2세

1368~1437

신성 로마 제국 룩셈부르크 왕조의 마지막 황제. 룩셈부르크 왕가로서는 유일하게 헝가리의 왕위에 오르기도 했다[1].

1 젊은 시절

지기스문트는 뉘른베르크에서 태어났다. 카를 4세와 포메라니안의 엘리자베트 사이의 아들이었다. 헝가리폴란드의 왕 러요시 1세는 카를 4세와 좋은 관계를 맺으려고 했다. 그래서 지기스문트는 어린 나이에 헝가리로 보내져 헝가리어와 그 밖의 교육을 받았다. 러요시 1세는 지기스문트를 헝가리 왕위 계승자로 내정해 두고 있었다. 그래서 자신의 장녀인 메리 공주와 결혼시키기도 했다. 그래서 지기스문트는 1374년에 메리와 약혼했으며 1378년에는 브란덴부르크 변경백이 되었다. 1381년에 13살이 된 지기스문트는 형인 로마 왕 벤체슬라스에 의해 폴란드 크라코프로 보내져 그곳에서 폴란드 어를 배우며 사람들과 안면을 익혔다. 벤체슬라스는 또 그에게 브란덴부르크와 폴란드 사이에 있는 노이마르크를 주었다. 노이마르크는 교통이 상당히 편리한 곳이었다. 그의 음모 때문에 지기스문트는 폴란드에서 쫓겨났다. 헝가리의 왕을 노리는 다른 후보가 나타나자 지기스문트는 아내와 함께 탈출했다.

2 헝가리의 왕

1382년에 그의 아내인 메리가 헝가리 여왕이 되었고, 지기스문트는 그녀와 1385년에 즈볼렌에서 결혼했다. 그러나 메리는 그녀의 어머니와 함께 붙잡혔다. 그들을 붙잡은 자는 헝가리의 섭정 행세를 하는 반역자 마크바의 폴 주교였다. 17살의 지기스문트는 치밀한 계획을 세웠고 그의 장모가 1387년 1월에 교살당했다. 메리는 베네치아 인들의 지원을 통해 6월에 구출되었다. 그녀는 사랑하는 어머니의 죽음을 방조한 지기스문트를 절대 용서하지 않았으며 살인자들을 끝내라는 그의 요구를 경멸했다. 그녀와 지기스문트는 별거했으며 메리는 1395년에 만삭일 때 에서 떨어져 죽었다. 귀족들의 지원에 힘입어 지기스문트는 1387년 세케슈페헤르바르에서 헝가리 왕이 되었다.

사촌인 모라비아의 변경백 요프스트가 많은 돈을 보내주었고 브란덴부르크를 저당잡혔다. 지기스문트는 이후 9년 동안 불안했던 왕위를 지키기 위해서 끊임없는 투쟁을 벌였다. 귀족들의 지원에 대한 대가로 그는 왕가의 재산을 값으로 치러야 했다. 중앙 행정의 권한 복원에 10년이 걸렸다. 나라의 대부분은 거대한 가라이 가문이 지기스문트와 함께 운영했다. 그러나 사바와 드라바 사이에 있는 남부의 주들은 보스니아의 왕 트브르트코 1세의 통치를 받고 있었다. 1395년에 니콜라스 2세 가라이가 이들을 진압하고 문제를 해결했다. 다수의 행사로 인해, 지기스문트는 귀족들에 의해 감금되었지만 능숙하게 뇌물을 써 탈출했다.

1396년에 오스만 제국의 확장에 대항하기 위해 교황 보니파시오 9세가 선포한 십자군의 총 지휘관이 되었으나, 니코폴리스 전투에서 술탄 바예지드 1세에게 패하고 간신히 탈출했다.

3 후스 전쟁

1419년 벤체슬라스가 죽자 지기스문트는 명목상의 보헤미아 왕이 되어버렸으나 체코인들이 그를 인정하기 전에 17년이나 기다려야 했다. 독일 왕과 보헤미아 왕의 위엄이 지기스문트의 중요성을 많이 덧붙였고 그를 기독교도들의 명목상 속세 지도자로 만들어줬지만 힘을 증대시켜주지는 않았고 그를 파산하게 만들었다. 오직 헝가리의 왕만이 그의 권위를 확고히 하고 명령으로 무엇이든 할 수 있고 강력한 정부를 가지게 했다. 벤체슬라스의 미망인인 바이에른의 소피아가 보헤미아의 정권을 맡게 되자 그는 헝가리로 서둘러 갔다. 보헤미아 인들은 지기스문트를 얀 후스를 배신한 자로 여겨 불신하고 있었다. 그들은 곧 무장했고 지기스문트가 이단자들에 대한 전쟁을 추진하고 이를 위한 십자군을 결성하고 있음을 선언할 때 불길이 퍼져나갔다. 후스 파들과의 전쟁은 재앙으로 끝났다. 오스만 제국이 다시 헝가리를 공격하고 독일 제후들의 지원을 얻을 수 없는 왕은 보헤미아에서 힘을 잃었다. 특히 이 당시 불패의 명장으로 이름높았던 얀 지슈카가 제창한 새로운 전술의 덕이 높았는데 이 전술은 전투 마차#s-1.2[2]를 진영 구축에 이용하고 핸드 캐논석궁 등 효율적이고 진영을 무너트리는데 높은 효과를 보이는 발사무기의 적극적 배치, 평소 농사일로 자주 하던 도리깨 질에 숙달되고 종교적 신념으로 군기가 높았던 농민군의 대거 배치[3]기사들의 기마 돌격을 본격적으로 무력화시키는 전술이었다. 그러한 고로 주로 기사들로 구성되었던 당시 십자군은 이 작정하고 구축한 상성 앞에 처절하게 복날 개 맞듯 얻어맞고 녹아내렸다.
  1. '지기스문트' 라는 독일어 이름을 헝가리어로 발음하면 '지그몬드' 가 된다. 여담으로 아무래도 왕보다는 황제가 격이 높아서인지 주로 '신성로마제국 황제' 로 알려져 있는 사람이지만, 그의 헝가리 왕으로서의 재위기간은 1387년부터 1437년까지 50년이나 된다.
  2. 바겐부르크Wagenburg라는 이름을 가진 접이식 목제 방벽 마차
  3. 물론 사용 무기는 기마병에게 높은 상성을 자랑하는 도리깨를 무기로 만든 풋멘즈 플레일이라는 긴 철퇴와 장창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