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희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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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양희승(梁熙勝)
생년월일1974년 3월 1일
국적한국
출신지광주광역시
출신학교광주고 - 고려대학교
포지션포워드
신체 사이즈192Cm, Kg
프로입단1997년 창원 LG 세이커스 입단
소속팀창원 LG 세이커스(1997~2000)
대전 현대 걸리버스/전주 KCC 이지스(2000~2002)
안양 SBS 스타즈/KT&G 카이츠(2002~2007)
부산 kt 소닉붐(2007~2009)
국가대표 경력1996 애틀랜타 올림픽 12위/총 12팀 [1]
1997 리야드 ABC - 우승
2003 하얼빈 ABC - 2위
2005 도하 ABC - 4위

1 소개

한국의 농구 선수. 2012년 현재 펄하우스스토리 이사.

2 선수 시절

광주고를 졸업하고, 고려대학교에 진학하면서 농구대잔치의 최전성기에 고려대의 주축 포워드로 활약하면서 이름을 알렸다. 당시 고려대의 막강 라인업의 주전으로 외곽 슈팅력을 바탕으로 한 플레이가 인상적인 선수였다. 하지만 고려대는 끝내 마지막 고비를 넘지 못하고 농구대잔치 PO에서 4강까지 밖에 오르지 못했다. 어쨌든 이런 대학 시절의 활약 때문에 1997년에 창단한 LG 농구단에 계약금 4억 5천만원을 받고 입단하면서 대학 시절의 명성을 보상 받았다.

그런데 그의 발목을 잡은 것은 부상이었다. 일단 프로 두 번째 시즌에 연봉 협상 문제로 팀과 갈등을 빚으면서 훈련량이 줄었는데, 우여곡절 끝에 연봉 협상을 끝내고 팀에 복귀해서 얼마 뛰지 못하고 아킬레스 건이 끊어지는 중상을 입으며 시즌 아웃 된 것. 이 때 부상은 심각해서 거진 두 시즌을 다 날리고 말았다. 우여곡절 끝에 1998-99 시즌 후반에 복귀하면서 재기에 성공했고, 1999-2000 시즌에 45경기 전 경기 출전하며 평균 13점을 넣으면서 비로소 완벽하게 부상을 이겨내는데 성공했다.

마침 토털 바스켓볼을 표방하며 전 포지션의 장신화를 추구하던 현대의 신선우 감독과 새롭게 감독에 부임해 팀을 갈아엎던 LG의 김태환 감독의 이해관계가 맞아 떨어지면서 양희승은 조성원과 맞트레이드되면서 현대로 이적하게 되었다. 현대-KCC에서 양희승은 준수한 활약을 보이면서 특급은 아니어도 정상급 포워드로서 자신의 가치를 증명했고, 두 시즌을 뛴 후, 2억 6천만원의 연봉을 받고 FA 계약을 맺으며 SBS로 이적했다.

SBS에서는 김성철과 함께 팀의 쌍포로 활약하면서 나쁘지 않은 활약을 이어갔다. 평균 15점 가량은 꾸준하게 기록하면서 FA의 모범 사례로 평가받을 수 있는 활약을 보여줬다. 팀도 꾸준히 전력이 강해지면서 2004-05 시즌에는 단테 존스의 합류와 함께 15연승을 기록하면서 정말 잘 나갔다. 하지만 결국 챔프전 진출에는 실패하면서 준수한 활약에도 불구하고 우승 반지와는 연을 맺지 못했다.

2006-07 시즌 종료 시점에 평균 15.8점을 넣으면서 팀의 주포로서 활약하고 다시 FA를 맞았지만, 그 사이 바뀐 새 모기업인 KT&G는 양희승의 나이를 들어 재계약을 주저했다. 마침 이를 노린 것이 외곽 슈터가 부재로 2006-07 시즌 챔프전에서 졌다고 판단한 추일승 감독의 kt였고, 결국 양희승은 사인 & 트레이드의 형식으로 kt로 가게 되었다. 하지만 이는 결과적으로 kt의 실패였다.

양희승이 정말 노쇠해진 것이었다. 어깨 부상과 발목 부상이 겹치면서 슈터로서의 능력은 곤두박질쳤고, 팀의 전력을 일으키기에는 양희승의 능력은 그리 뛰어나지 않았다. 말 그대로 노장으로서 한계에 조금씩 봉착하기 시작한 것. 반대로 kt가 내준 황진원은 준수한 활약을 보이면서 KT&G에 보탬이 되었다. 여기에 다시 무릎까지 다치면서 양희승의 가치는 급락했고, 팀은 최하위로 떨어졌다.

새롭게 부임한 전창진 감독은 양희승을 단칼에 웨이버로 방출하는 결정을 내렸고, 양희승은 방출된 후, 아무도 자기를 찾지 않게 되자 그렇게 은퇴하게 되었다. 한 시대를 주름잡던 선수치고는 다소 허망한 은퇴였다. 그리고 그가 은퇴한 후, kt의 성적이 부진했다면 잘못된 결정이라고 할 수도 있었을텐데, 하필이면 은퇴 후에 다른 포워드들의 포텐이 다 터지면서 우승을 다투는 팀이 돼버리면서 더 안습한 상황이 되고 말았다.

3 은퇴 후

다른 선수들과 달리 지도자가 아니라 사업가의 길을 걷고 있다. 2012년 현재 펄하우스스토리 이사. 이 때문에 농구 팬들은 은근히 떨떠름해 하고 있다. 자세한 내용은 이진주 항목 참고. 참고로 이 때문인지는 몰라도 예전에 골드미스가 간다에 나와 현영과 커플로 엮이기도 했다. 이때 윤동식에게 팔씨름에서 완패했다(...) 그나마 윤동식은 같은 프로에 격투기 선수니까 완력에서 밀리는건 그러려니 하는데... 옆에있던 노홍철에게도 졌다. 지못미[2].
  1. 부상당한 김영만의 대체인원으로 고려대 4학년때 처음 발탁되었다.
  2. 물론 노홍철도 완력 좋은걸로 유명하긴 했다. 그래서 그게 위안이 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