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성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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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VP를 받았던 창원 LG의 조성원


전주 KCC의 조성원

이름조성원(趙成遠)
생년월일1971년 8월 24일
국적대한민국
출신학교배재중학교 - 홍대부고 - 명지대학교
포지션스몰포워드
신체 사이즈180㎝ [1], 80Kg
프로입단1994년 현대전자 농구단 입단
소속팀현대전자/대전 현대 다이넷/전주 KCC 이지스(1994~2000, 2003~2006)
창원 LG 세이커스(2000~2002)
서울 SK 나이츠(2002~2003)
감독천안 KB국민은행 세이버스(2008.4~2008.12)
수원대학교(2015.11.2.~)
2000~2001 한국프로농구 정규리그 MVP
서장훈(청주 SK 나이츠)조성원(창원 LG 세이커스)김승현(대구 동양 오리온스)
1997~1998 한국프로농구 모범선수상
김병철(대구 동양 오리온스)조성원(대전 현대 걸리버스)김훈(인천 대우 제우스)
1998~1999 한국프로농구 챔피언결정전 MVP
허재(부산 기아 엔터프라이즈)조성원(대전 현대 다이넷)서장훈(청주 SK 나이츠)

1 개요

전주 KCC 이지스의 프랜차이즈 스타. 현대/KCC에서 총 3번의 우승을 이끌었으며, 2000-01 시즌 창원 LG 세이커스의 공격 농구를 주도했다. 별명은 '캥거루 슈터'.

2 선수 생활

2.1 아마추어 시절

남들보다 늦게 중학교 3학년 때 농구를 시작한데다가, 키도 작아서 어느 고등학교에서도 받아주지 않던 선수였다. 친구 따라서 꼽사리로 껴서 간신히 고교 진학에 성공했던 정말 무명의 선수. 중학시절 1년은 물론, 고교진학 후에도 1년간은 주전자와 수건 들고 다니던 말 그대로 후보선수였다. 첫 시합 출전도 2학년 때부터였다고... 더구나 같은 학교 1년 후배에는 이상민도 있었던 악조건. 그러나 고교 시절 부단한 노력으로 기량이 일취월장하면서 고교 졸업 무렵에는 상당한 유망주로 주목받았다.[2]

고교 3학년때 대학진학을 앞두고 크게 주목받게 되는 계기가 있었는데, 89년 여름에 열린 메이저급 대회인 제44회 종별농구선수권대회 8강전에서, 당시 18연승을 달리며 그해 고교농구 3관왕을 자랑하던 무적의 용산고를 맞아 만년 약체로 꼽히던 홍대부고가 경기종료 3초전에 터진 결승골로 102대 100으로 이기는 대파란을 일으켰고, 그 게임에서 조성원 혼자 40점을 몰아 넣으며 승리의 주인공이 되었다. 당시의 용산고 농구부 멤버는 3학년의 김승기, 김재훈, 1학년의 슈퍼신인 김병철, 양경민 등의 호화멤버로 가장 강력한 우승후보였는데, 이날 경기에서 홍대부고 5명, 용산고 4명 등 총 9명이 5반칙 퇴장당하는 치열한 접전을 치뤘다. 홍대부고도 노기석 등 주전 대부분이 퇴장당한 위기에서 조성원이 3점슛 8개 포함 40점이라는 경이적인 스코어를 올린 것. [3] [4] [5] [6]

이 대활약으로 이후 고려대학교의 스카우트 제의를 받았지만, 고교 진학 당시 자신을 도와준 친구 2명이 대학 진학이 어렵게 되자, 고교 때 은혜를 갚기 위해 친구들과 함께 명지대학교로 진학한다. [7] [8]

명지대학교 시절에는 동기생 고상준, 특히 양조,쌍조 콤비로 불리던 2년 후배 조성훈 선수와 함께 슈터로서 명성이 높았지만, 아쉽게도 팀 전력이 강하지 않아서 결승에 올라가지는 못했다. 그래도 졸업전 93~94 시즌에는 당시 명지대가 85년 이후로 한번도 이겨보지 못했던 중앙대 [9]를 꺽기도 하고, 고려대 [10]를 격파하기도 하는 등 나름 언더독으로 팀을 이끌며 주목을 받았고, 이후 현대전자에 스카우트되어 실업 무대에 데뷔했다.

2.2 현대 왕조의 주역

현대전자에 입단은 했지만, 이 당시 현대전자는 과거의 명성만 높았던 팀이었던 데다가, 본인도 신인으로서 큰 두각을 나타내지는 못했다. 그러나 국군체육부대에 입대한 후 이상민 등과 함께 1996-97 농구대잔치에서 대단히 인상적인 활약을 보여주었다. 농구팬들 사이에서 조성원의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한게 이때부터이다.

제대 후 한국프로농구가 출범한 1997-98 시즌부터 뛰기 시작하는데, 이상민, 추승균, 조니 맥도웰과 함께 막강 현대를 이루면서 맹활약했다. 특히 4쿼터에 강해 별명이 "4쿼터의 사나이"로 불렸을 정도. 빠른 움직임과 외곽슛을 겸비한 선수로서 많은 운동량을 통해 활로를 찾고, 과감한 돌파를 통해 상대를 헤집거나, 정확한 3점슛으로 고비마다 상대를 침몰시켰다.

이 때의 주 공격패턴이
1. 상대팀의 공격이 막히고 속공 상황이 되었다.
2. 이상민이 공을 드리블하며 달려간다.
3. 이상민에게 수비가 붙는다.
4. 어느새 따라온 조성원에게 볼을 주면 그가 3점슛을 던진다.
5. 3점슛 성공에 환호하는 관객들의 함성과 작전타임을 알리는 부저소리가 겹쳐진다.

이것은 부산 기아 엔터프라이즈가 조성원 전담 수비수를 둬서 성공적으로 막아낸 몇 차례 빼고는 거의 알고도 못 막는 수준이었다. 그것도 이상민강동희가 막아내고 김영만추승균을 제압할 수 있어서 가능했지 다른 팀은 짤없이 털렸다. 일명 "이조추 라인"의 등장이었고, 이상민의 볼 배급, 추승균의 안정적인 활약, 조성원의 폭발력이 결합한 당대 최고의 조합이었다. 당시 기아팬들에게 조성원은 4쿼터의 악마 그 자체였다.

특히 큰 경기에 강한 강심장이었는데, 1998-99 시즌에는 챔피언 결정전에서 평균 16.4점을 쏟아부으며 팀 우승의 주역이자, 자신은 챔피언 결정전 MVP가 되었다. 그리고 비록 SK나이츠에게 졌지만, 1999-2000 시즌에도 역시 17.5점을 쏟아부었다. 다만, 이 챔프전을 계기로 신선우 감독은 팀 재편을 결심하는데, 이유는 조성원의 작은 키였다. 키가 작기 때문에 SK의 장신 라인업에 밀렸다고 판단한 것. 하지만 이 결심은 결과적으로 팀에 별 도움이 되지 않았다.

2.3 MVP

2000-01 시즌 개막을 앞두고 조성원은 전격적으로 양희승과 맞트레이드되면서 창원 LG 세이커스로 이적하게 된다. 그리고 여기서 김태환 감독과 조우하면서 조성원 생애 최고의 영광을 맞이하게 되었다. 김태환 감독은 LG를 완벽한 런앤건팀으로 재편해서 평균득점 100점에 이르는 공격농구의 끝을 보여줬고, 그 중심에 바로 조성원이 있었다.

조성원은 2000-01 시즌 정규시즌에서 평균 100점이 넘은 팀 공격의 최전선에 섰고, 자기 자신은 평균 득점 25.7점을 기록하면서 맹활약했다. 팀은 정규시즌 2위를 기록했고, 챔피언결정전에서도 조성원은 평균 20점이 넘는 분전을 했지만, 결국 삼성에게 무릎을 꿇으며 준우승을 차지했다.

비록 우승에는 실패했지만, 국내 선수 중에서 으뜸가는 공격력을 선보인 조성원은 2000-01 시즌 MVP를 차지하는데 성공했다. 이 때만 해도 조성원을 가로막을 것은 아무 것도 없는 것처럼 보였다.

2.4 몰락

그러나 조성원의 작은 키는 분명 수비에 있어서 부담이었고, 창원 LG의 달리는 농구는 팬들에게 재미는 있었지만 마지막 고비를 넘지는 못했다. 그리고 창원 LG의 불운은 그들이 우승할 타이밍에 우승을 못했다는 것에 있었고, 조성원의 작은 키는 분명 수비력에 큰 도움이 되는 것은 아니었다. 이 한계는 잘 나갈 때는 표면화되지는 않았지만, 그들이 어려움에 봉착할 때는 표면화되었다.

여기에 조성원은 그간 달리고, 또 달린 후유증을 겪게 되었다. 무릎 부상에 시달리면서 출전 시간이 점차 줄어든 것. 평균 득점도 비록 다른 국내 선수와 비교하면 준수한 편이지만, 팀의 핵심 공격 자원이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2001-02 시즌에는 다소 부족한 평균 16점으로 감소했고, 무릎 부상이 더 심해진 2002-03 시즌에는 평균 12점으로 줄어들었다. 이러면서 자연히 수비력 문제도 또 다시 대두되었다.

결국 더 많은 출전을 원하던 조성원은 트레이드를 요구, 마침내 김영만과 맞트레이드되는 형식으로 서울 SK 나이츠로 이적했다. 하지만 SK에 와서도 그다지 좋은 활약은 보여주지 못했다. 조성원이 뭘 하기에는 이미 조성원은 점점 한계에 다다른 것처럼 보였고, 실제로 활약도 두드러진 것은 아니었다.

2.5 유종의 미

조성원의 이적 이후, 장신 포워드 라인업과 토털 바스켓볼을 추구했던 신선우 감독의 전략은 잠시 반짝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한계에 점차 봉착하기 시작했다. 결국 신선우 감독은 다시 예전 잘 나갈 때의 라인업으로 돌아가기로 마음 먹고, 팀 적응에 애를 먹던 전희철을 조성원과 맞트레이드시키면서 조성원을 팀에 다시 복귀시킨다.

돌아온 조성원은 전성기의 폭발력은 아니었지만, 평균 15점을 넣으면서 팀에 큰 기여를 했고, 2003-04 시즌 우승에 성공했다. 그리고 그 이듬해인 2004-05 시즌에는 전성기처럼 챔피언결정전에서 평균 17.2점을 넣으면서 분전했지만, 팀은 결국 졌다. 그리고 이 시즌을 기점으로 조성원의 정규시즌 성적은 떨어지기 시작했고, 롤도 자연히 식스맨으로 바뀌었다.

결국 2005-06 시즌을 끝으로 조성원은 은퇴했다. 우승 세 차례를 팀에 안겼고, 우여곡절은 있었지만, KCC의 프랜차이즈 스타로 은퇴할 수 있었다. 2006년 8월 29일 은퇴 경기를 가지고 공식적으로 은퇴했다.

3 지도자 생활

과거 팀 동료였던 최병식 감독의 부름을 받아 은퇴와 함께 여자농구 국민은행의 코치로 부임하게 되었다. 약 2년간 코치로 활동하다가, 최병식 감독이 물러난 후, 2008년 감독으로 승격해서 한국여자프로농구 감독으로 데뷔했다. 하지만, 최악의 성적을 찍으며 한 시즌도 다 채우지 못하고 자진 사임하는 흑역사을 만들었다.

그 뒤, 해설위원 일을 하다가 2011-12 시즌 개막부터 서울 삼성 썬더스의 코치로 부임했다. 하지만 한 시즌만에 김상준 감독이 짤리면서 같이 짤려서 다시 야인 신세...는 오래 가지 않았고 SBS ESPN 해설위원으로 복귀했다. 2013-14 시즌이 끝난 뒤 KBS 해설위원으로 자리를 옮겼으며, KBS N 스포츠에서도 해설을 하고 있다.

2015년 10월 27일 수원대학교 여자 농구부 감독으로 선임되었다. 감독으로서의 공식 임무는 11월 2일부터 시작했으며 농구 해설도 병행한다.
  1. 대외적으로 180㎝ 이지만 실제로는 179㎝ 정도라고 한다
  2. 남들보다 농구를 늦게 시작한 조성원은 부족한 개인기를 보충하기 위해 당시 강동구의 집에서 먼 학교까지 등교하기 전 새벽에 인근 빠이롯트 농구단 (대웅제약 농구단의 전신) 연습장에서 여자 실업팀 선수들과 같이 연습했다고...
  3. 경기종료 12초를 남기고 100대 100 의 동점이 된 상황에서 종료 3초전 극적인 결승골을 넣은 전휘 선수 역시 조성원과 같은 배재중 동기로 둘다 친구따라 꼽사리껴서 진학한 같은 신세의 선수였다. 정말 만화같은 일...
  4.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 대학특기자 입학을 위해서는 전국대회 4강이상의 성적이 입학요건이 되기 때문에, 그 경기로 조성원의 대학진학이 가능했다고 봐도 될 것이다. 당시의 홍대부고는 용산고, 경복고 등의 강호들이 빠진 마이너급 대회인 동국대 총장기대회에서 준우승을 하기도 했지만 메이저급 대회 4강에 오른 것이 더 큰 성과.
  5. 동국대 총장기 준우승은 이후 조성원이 현대에 입단해서 우승을 경험하기 이전에 경험한 가장 좋은 성적이다. 고교와 대학을 모두 약체팀으로 다녔기에...
  6. 최강팀 용산고를 꺽고 올라간 4강에서는 용산고 다음으로 강했던 경복고를 만나 88-82로 석패했다. 당시 경복고에는 1학년 슈퍼신인 전희철우지원이 버티고 있었던...경복고는 그 대회에서 결국 우승...
  7. 연세대, 고려대, 중앙대 등의 농구명문이 아닌 명지대를 택한 이유 중에, 동기들 동반진학 문제외에도 농구 입문초기에 2년 넘게 겪었던, 만년 후보선수의 경험도 한 요인이었다고 볼 수 있다. 선수층이 두터운 팀에서 주전자리를 차지하지 못할 위험성보다는 중위권팀에서 에이스로서 많은 출전시간을 보장받기 위한...단신으로서 느끼는 핸디캡도 컸을 것이고..
  8. 같이 운동한 동기생들의 동반진학이 선수들의 학교선택에 영향을 끼치는 경우는 흔하다. 조성원과 비슷한 연배의 마산고 출신 김영만도 원래 고려대에서 스카우트 했지만, 고려대는 동기생 동반진학을 4명까지만 받아주겠다 했고, 중앙대측이 김영만의 동기생 6명을 모두 받아준다고 해서 중앙대로 입학했다고...
  9. 당시 중앙대 멤버는 김승기, 홍사붕, 김희선, 김영만, 조동기 등
  10. 당시 멤버 전희철김병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