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윤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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魚允中
1848(헌종 14) ~ 1896(건양 1년)

개화기 조선의 정치가. 본관은 함종. 자는 성집. 호는 일재. 시호는 충숙. 충북 보은 출신.
온건개화파로 국사책에 잠깐 이름이 오르는 존재이다.

20세에 지방 유생 50명을 뽑아 전시 자격을 주는 칠석제에서 장원, 그 후 1869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한다.

정 7품 승정원 주서(서기)에서 시작하여 8년만에 정3품 암행어사(파견지는 전라우도(全羅右道))까지 올라간 후 9개월간 전라도의 탐관오리를 부지런히 징벌하고 돌아와서 매우 파격적인 개혁안을 내놓는다.[1] 개혁의 중심 내용은 세금 개혁이었다(후에 본인이 직접 해먹는다).

고종은 이 내용을 심도깊게 보았고 어윤중과 많은 이야기를 나눴고, 당연히 채택 안했다.(...)

이후 1881년, 일본 조사시찰단의 일원으로 간다. 담당 파트는 일본 대장성.[2] 그 후 일본에서 나라로 가서 미리 영선사로 가있던 김윤식을 만나고 중국의 정책을 견문한 후 이홍장과 회담을 하고 왔다.

그 후, 조미수호조규, 조독수호조규 등에 합의하였고, 급기야는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까지 조인을 하였다. 다만 이때 이홍장이 증서 다 만들어놨으니까 도장만 찍어에 화가 나 그 후로 청나라에 냉담한 시선을 가지게 된다. 회담 내내 청나라는 종주국과 속국이라는 관계를 들어 각종 무리한 요구를 하였다. 어윤중은 그나마 끈질기게 요구하여 청나라 상인들이 상품을 쌓아놓고 장사를 하는 곳을 양화진으로 제한하는 등의 어느정도 방어에 성공했다. 물론 그렇게 해서 완성된 장장도 썩 공평하진 않았지만(...) 1882년 임오군란이 발발했다는 것을 알고, 김윤식과 함께 청군의 파병을 요청한 것도 이 시기에 있었던 일이다.

그 후 서북경략사로 임명, 경제 담당답게 북방무역의 중요성을 알고 조선의 이익을 증진시키기 위해 중강무역장정, 회령통상장정을 협정했다. 이때 그의 활동중 중요한 것은 그 지역 국경지대를 조사한 것인데, 국경을 보다 확고히 하였다. 이때의 공로로 그는 종2품 병조참판, 호조 참판을 역임하게 된다..

1883년엔 역시 대담한 개혁안을 제출하고, 역시 씹혔다. 갑신정변에 참가하진 않았으나 개화파였던 탓에(급진이 아니라 온건파) 명성황후 아래서 중용되지는 못하고 있었다.

1893년 보은에서 집회가 열리자(보은은 어윤중의 고향이다)순무사로 파견되었다.

당시 그가 집회에 참가한 군중들의 성격을 기술해놓은 것은 한번쯤 봐두자. 당시 조선 농민들의 모든 모습이 그 안에 담겨있다. 하여간에 그렇게 군중들을 달래서 집으로 돌려보냈다.

이후 어윤중은 당시 대신들중 이례적으로 동학도들을 민당(民黨)으로 지칭해서[3] 많은 대신들의 빈축을 샀다.

1894년, 김홍집 내각이 수립되자 그토록 자신이 원하던 탁지부의 대신(지금으로 따지면 재무부장관 되겠다.)이 되어서 자신이 그렇게 건의하던 조세 개혁안을 자신의 손으로 행한다. 그것도 더욱 강하게.

당시에 얼마나 어윤중이 긴축정책을 강행하고 조세개혁을 갈아엎어버렸냐면 당시 사람들이 어윤중을 '전(田)조림이라고 불렀다. 성인 魚의 중간인 田를 따서 만든건데, 이런 별명이 붙어있는걸 보면 얼마나 이 사람이 조세를 짜게 줄여버렸는지 알 수 있다.

이 당시 잡세, 무토궁방세를 혁파하고 엄격한 조세법정주의에 의거한 수금은 많은 민중들이 어윤중에게 호감을 가지게 만들었다.

춘생문 사건이 터졌을 때 군사를 이끌고 고종을 탈출시키려던 친위대장들과 주모자들을 체포한 것이 다름아닌 어윤중이었다.

그러다 1896년, 아관파천 사건이 터지고 김홍집, 정병하 등이 광화문 네거리에서 성난 군중에게 구타 후 몸이 찢겨나가는 와중에, 그는 망명을 하지 않고 고향인 보은으로 피신한다.[4] 그 와중에 용인에서 과거 산송(묘지)문제로 원한을 품던 향반 무리가 머슴을 동원하여 결국 49세의 나이에 살해당한다. 아이러니하게도 피살당했던 장소가 어비울이(魚肥里, 물고기가 살이 찌는 동네. 다시 말하지만 어윤중의 성은 魚다. 그런데 저게 또다른 뜻으로 해석하면 '물고기 성씨가 슬피 운다'라는 뜻으로도 해석이 된다...)였다.

성격은 두번째 사진에서도 얼추 알 수 있듯이 엄청난 법칙주의자인데다 본성이 강직하고 담대하여서 조금이라도 법률에 어긋나면 고종이고 명성황후고 모두 NO라고 말했던 양반이다. 심지어는 일본이 제안한 300만원의 차관을 "은이 아니면 안받는다."라고 말해버렸던 인물.

의외로 개화기 시절에 동분서주하며 활약했던 인물로, 결국에는 자신의 소원이었던 조세개혁도 재무부의 으뜸이 되어 성취하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국사책에서의 비중은 좀 낮다.

교육자 겸 계몽운동가이자 친일파로 유명한 그리고 일기로도 유명한 윤치호가 그의 제자였다. 저서로는 종정연표 등이 있다.
  1. 당시의 문제를 매우 정확히 체계적으로 짚고 있다. 무서울 정도로...
  2. 지금으로 따지면 재무부 되겠다. 위에서 말한 어윤중의 개혁은 이미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3. 모든 대신들은 동학도들을 비도라고 탄압했다. 당연하지만...
  4. 어윤중은 민중들이 자신을 지지하고 있으니 괜찮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불안했는지 여자용 가마를 타서 사람들의 시선을 따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