壬午軍亂
목차
1 사건의 전말
조선판 방산비리, 군인들의 분노 폭발이자, 열정페이가 국가 단위로 발생된 최악의 사례.
한반도 역사상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한 나라의 군주가 살고 있는 궁궐이 백성들에게 직접 습격당한 사례[1]
조선 왕조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된 멸망의 시발점이라고 볼 수 있는 일대의 대사건.
1882년(고종 19년) 음력 6월 별기군(일본식 신식군대)과의 차별대우에 항의하여 구식군대가 조선왕조에 대해 집단으로 군란(軍亂)을 일으킨 사건.
1.1 군란 이전의 상황
1876년 일본과의 불평등조약 강화도 조약을 맺은 조선왕조는 이후로 미국, 대영제국, 프랑스, 독일제국, 이탈리아 등과 각각 수호통상조약을 맺으며 문호를 개방하게 되었고 그로 인해 급진적 성향의 개화파와 보수적인 위정척사파간의 갈등은 더욱 심해지게 되었다. 이에 맞춰서 조선왕조는 일본의 후원하에 '별기군(別技軍)'이라 불리는 신식 군대를 창설하여 일본인 교관(일본 육군 소위 호리모토 레이조(堀本禮造))과 조교의 지도하에 훈련을 실시했다. 그로 인해 흥선 대원군 시절까지 우대를 받아왔던 구식계통 군인들은 오히려 별기군에 밀려서 차별대우를 받게 되었으며, 급기야는 급료 지급이나 혜택 등도 원활하지 못하는 등 불만이 고조되었다. 그나마 훈련도감을 비롯하여 특정 군영에 소속된 구식군인(무위영과 장어영의 군사)들은 별기군만큼 후한 대우는 받지 못해도 꼬박꼬박 급료를 지불하여 불만이 심하지 않았지만 어느 군영에도 소속되지 못한 잉여 군인들은 그야말로 방치되고 만다. 이에 그 배후로 일본의 후원을 등에 업은 별기군과 그들을 적극적으로 우대하는 조정에 대해 증오감을 품게 된다.
1.2 쌀의 전쟁
때마침 1882년 선혜청[2](宣惠廳)에서 전라도조미(全羅道漕米)가 도착하게 되어서 음력 6월 5일 구식계통 군인들에게 분배해주고 밀렸던 늠료(급료)도 지급하게 되었는데, 이 조미(漕米)가 선혜청 관리들간의 농간으로 인해 불씨가 되었다.
이유인즉 그 조미에는 식용 쌀이 아닌 겨와 모래가 섞여 있고[3] 양도 기준에 맞지 않는 것으로 알려지자, 구식 군인들은 집단으로 조미 수령을 거부한 뒤 선혜청으로 가서 불만을 따졌다. 여기에 지급 담당자가 병조판서이자 선혜청 당상(堂上)인 민겸호의 직계하인으로 알려졌고 이 하인이 군인들에게 자극을 주는 언동까지 하자, 결국에는 군인들의 분노가 폭발하여 선혜청 관리들을 폭행하는 사건을 일으켰다.
사실 사태는 이렇게 악화되지 않을 수 있었다. 맨 처음 구식 군인들이 선혜청 관료들을 두들겨 팼단 말을 듣고 음력 6월 9일 고종이 보인 반응이다.
차대(次對)를 행하였다. 영의정(領議政) 홍순목(洪淳穆)[4]이 아뢰기를, “추수 후의 농사 형편을 물론 미리 예견할 수 없습니다만 대체로 기전(畿甸)은 틀림없이 흉년을 면치 못할 것 같습니다. 앞으로 도하(都下) 백성들의 우환이 실로 심할 것입니다. 그런데 종전에는 이러한 때면 매달 양곡을 발매(發賣)하여 기근을 구제하였습니다만, 지금 선혜청(宣惠廳)에 무슨 저축된 곡식이 있습니까? 다만 전날 군자감(軍資監)에서 급료를 내줄 때의 일을 가지고 말하더라도, 도감(都監)의 군졸들이 받은 곡식이 섬이 차지 않는다면서 두 손으로 각각 1섬씩 들고 하는 말이 ‘13개월 동안 급료를 주지 않다가 지금 겨우 한 달분을 분급(分給)한 것이 바로 이와 같은가? [5] ’라고 하면서 해당 고지기를 구타하여 현재 생사를 분간하기 어렵습니다. 이어 대청 위에 돌을 마구 던져 해당 낭관(郞官)이 도피하기까지 하였으니 이 어찌 작은 문제이겠습니까?” 하니, 하교하기를, “13개월이나 급료를 내주지 못한 것도 이미 민망스러운 일인데 게다가 섬이 차지 않은 것은 또한 무슨 까닭인가?” 하니, 홍순목이 아뢰기를, “도봉소(都捧所)에서 획송(劃送)하면 중간에서 축나는 일이 없을 수 없다고 합니다. 비록 그러하나 이는 크게 기율에 관계되는 일이므로 즉시 무위영 대장(武衛營大將)에게 말은 전하여 엄하게 조사한 다음 법률을 적용하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아마 군사들의 가슴속에 억울함이 쌓인 데에 연유한 듯합니다. 신이 궁중(宮中)과 부중(府中)이 함께 일체(一體)라는 뜻으로 지난날에 진술을 올린 바가 있습니다. 그런데 무위소의 군사가 받는 것은 완전하고 훈련 도감의 군사가 받는 것은 이처럼 완전하지 않았으니, 어찌 천장을 쳐다보면서 한탄하는 일이 없겠습니까? 10년을 양성하여 하루 동안에 쓰는 것은 마찬가지인데 만약 그 사이에 후함과 박함의 차이가 없지 않아 평일에 원망이 쌓였다면 어찌 우려할 바가 없겠습니까? 근래에 전하께서 행차할 때마다 군사들에게 건호궤(乾犒饋)[6]하라는 명이 있었으나 해영(該營)[7]에서 돈이 모자라서 나누어주지 못하였으니, 이는 유명무실한 문서일 뿐 혜택이 아래에 미치지 못한 것입니다. 그들이 먹여줄 것을 바라는 식량은 아홉 말의 쌀에 불과한데 이것조차도 일년이 지나도록 충분히 주지 않아서, 스스로 의식(衣食)을 마련하여 분주히 복역하면서도 감히 군령을 어기지 않았으니 오히려 기율이 있다고 충분히 말할 수 있습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그렇다. 군졸들이 군령을 어기지 않는 것은 역시 가상한 일이다.” 하였다. 홍순목이 이어서 수령(守令)을 신중히 선발하고 상납(上納)을 엄하게 감독하며 반의(班儀)를 신칙(申飭)할 것을 진주(陳奏)하고, 또 증 도승지(贈都承旨) 강항(姜沆)과 증 좌승지(贈左承旨) 권길(權吉)은 충절이 남달리 뛰어나니 모두 순차를 뛰어넘어 이조 판서(吏曹判書)로 추증하며, 한산 부원군(漢山府院君) 조영무(趙英茂)의 봉사손(奉祀孫)을 조용(調用)할 것을 청하니, 모두 윤허하였다. |
좀 더 쉽게 풀어보자면...
홍순목: 올해는 흉년인데, 나라 곳간도 다 비었어요. 당장 어제만 해도 군인들이 월급 때문에 고지기를 두들겨 팼답니다. 월급이 13개월이나 밀렸고 1개월치 월급을 줬는데 그 양조차도 개판이랍니다. 고종: 월급 13개월을 안준것도 쪽팔린 일인데 그나마 준 한달치도 제대로 못 주었다니 이게 말이 되냐? 홍순목: 군인은 하루를 위해 10년 훈련하는 애들이잖아요. 월급 1년이나 넘게 안 받고 스스로 의식 해결하면서 군령을 안 어겼으니 오히려 군기가 제대로 잡혀있습니다. 고종: 그러게나 말이야. (그동안 반란 안 일으킨게 신기하구만.) |
그런데 이후 별다른 조치가 없었거나, 아니면 전달 되지 않은 것 같다(!). 선혜청 제조 민겸호가 고종의 말을 처듣지 않고 주동자들을 구속해버리면서 사건이 커져 버렸다.(...) 다만 이 대목에서도 위에서 "해당 군영(해영/該營)에서 돈이 모자라서 나누어주지 못하였다"는 대목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정말로 줄 쌀이 없었을 수가 있다!
1.3 군란(軍亂)의 격화
폭행사건을 일으킨 군인들은 잡혀가서 뭇매질을 당하게 됐는데, 그들이 사형을 당한다거나 흥선 대원군의 형인 이최응이 고종에게 군란(軍亂) 진압을 요청했다는 소문을 듣게 된다. 투옥된 군인들이 모두 죽을 것이란 소문에 구식 군인들은 폭발했다.
이에 구식계통 군인들과 이에 동조한 시민들은 마침내 민겸호의 자택을 습격하고 운현궁에 있는 흥선 대원군을 찾아가 협조를 요청했다. 흥선 대원군은 사태를 휘어잡기 위해 성난 군중에게 해산할 것을 명했고, 그의 심복 허욱(許煜)을 군인으로 변장시켜 비밀리에 구식 군인들의 지휘를 맡게 하였다.
음력 6월 9일, 허욱의 지휘하에 구식 군인들은 무기고를 부수고 무기를 탈취하여 포도청과 관가를 습격하여 위정척사파 및 흥선 대원군 지지파 인물들을 석방시키고 일부는 민 왕후(명성황후)의 오빠인 민겸호, 민태호 등 명성황후의 일가 친척과 개화파 인물 자택을 습격/파괴하였다. 하루 사이 벌어진 일이었다.
이들은 경기감영을 장악하여 감영의 무기고를 부순 후, 일반 백성들까지 무장시키고 개화파 인물에 이어 원흉과 혐오의 대상이었다는 주(駐) 조선 일본 공사관과 하도감까지 습격하여 별기군 교관이었던 호리모토 소위를 비롯한 별기군 조교들을 습격 살해하고, 별기군 부대까지 급습하여 별기군 일부를 살해하는 등[8]으로 사태가 끝나는 듯 싶었다.
1.4 궁궐 기습 및 민 왕후의 피신
구식군대는 이에 그치지 않고 다음날인 6월 10일, 대원군의 지원하에 폭동을 일으킨 군민들과도 합세하였다. 이들은 우선 대원군의 형이었지만 고종과 민 왕후를 지지하였던 전 영의정 흥인군 이최응[9]과 민창식의 집을 습격해 현장에서 이들을 살해했다.
그리고 단숨에 창덕궁 돈화문으로 들이닥쳤으며 막아서는 병사들은 아무도 없었다!
궁성으로 들어선 군인들은 더 이상 거칠 것이 없었으며 민겸호[10]와 김보현을 붙잡아 살해하고 중전 민씨를 찾아내는데 혈안이 되어있었다.
이 때 중전 민씨(명성황후)는 궁녀옷을 입고 궁녀로 변장하여 궁궐을 빠져나가려고 했는데 뜻밖에도 구식 군인과 마주치게 되어서 위기를 맞기도 하였지만 무예별감으로 있던 홍계훈이 자신의 누이동생 홍 상궁이라고 속이면서 그의 도움으로 궁궐을 탈출하여 충주 장호원(長湖院)에 있는 충주목사 민응식의 자택으로 피신하였다.
1.5 대원군의 섭정과 청군 파병
사태를 겪게 된 고종은 사태 진화를 위해 결국 흥선 대원군의 입궐을 요청하게 되었고 대원군은 구식 군대의 호위하에 부대부인 민씨, 장남 이재면과 함께 입궐하게 되었으며 고종은 대원군의 장남이자 형인 이재면을 무위대장으로 임명하고 대원군을 섭정시키게 됨으로서 다시 흥선대원군의 섭정 통치가 시작되기도 하였다.
대원군은 섭정 통치를 하면서 왕후 민씨 지지자들을 모두 귀양보내거나 처벌을 시키고 구식군대에 대한 우대를 강화하기로 하였으며 이전에 자신을 지지했던 인물들을 대거 기용하여 조정 관료로 격상시키는 등 고종이 시행했던 부분을 전면 개정하게 되었다. 영의정 홍순목은 원래부터 대원군의 핵심 인사였으므로 자리를 유지하였다.
한편 일부 구식 군인들이 왕후의 시신을 공개해달라는 요청이 빗발치자 대원군은 왕후 실종을 '사망'으로 공식 선포하여 왕후에 대한 국상(國喪)을 선포하였다.
2 사건의 결말
이후 청나라는 자국 병력을 조선에 파견하여 흥선 대원군이 청군의 군영을 방문한 틈을 타서 그를 텐진(天津)으로 납치 감금함에 따라 섭정 통치는 끝나게 되었고 명성황후는 다시 궁궐로 돌아오게 되었다.
흥선 대원군을 납치한 3일 뒤인 음력7월16일, 청군은 또한 구식 군인들이 많이 사는 왕십리와 이태원을 습격하여 170명을 체포하고 11명을 참수하였다.
한편 임오군란으로 자국 공사관과 국민이 피해를 입게 된 일본은 조선에 즉각적인 배상책임과 보상을 요청하게 되었고 결국 조선은 일본과 제물포 조약을 체결하여 모든 피해를 보상하게 되었고 일본은 이를 계기로 조선에 있는 자국 공사관에 경비병을 주둔시켜 경계를 강화하였다.
결국 임오군란은 구식군대의 반란으로 시작하게 되었지만 그 끝은 결국 청과 일본이 조선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하는 국제문제로 비화되었으며,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과 조일수호조규 속약, 제물포 조약 등 청과 일본의 이중 외압의 심화를 불러왔으므로 본격적인 조선의 식민지화의 시작으로 보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2년 후인 1884년 갑신정변의 바탕을 마련해 주기도 하였다.
그리고 고종은 대 백성 사과문[11]과 함께 개화 의지를 천명하였고 이 사건을 끝으로 기존의 개화 반대세력은 중앙 정계에서 더 이상 주도권을 가질 수 없게 되었다. 유림들은 이후 대세를 바꿀수는 없다고 느꼈는지, 문묘 종사 운동을 벌이기 시작했는데 고종도 유림들을 달래주기 위해서 문묘 종사를 받아들여 김집, 조헌 등이 문묘에 이름을 올리게 된다.
결국, 이 사건 이후 조선왕조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는 멸망의 길을 걷게 된다.
2.1 대원군의 행보?
사건의 전개 및 수습과정에서 흥선 대원군의 행보에 대해 의혹이 있다. 우선 구식 군대 장병들이 봉기를 일으킨 것 자체는 봉급 문제와 민겸호 등의 잘못된 일처리에서 나온 것이므로 대원군과는 관련이 없다. 하지만 대원군이 사건의 전면에 나서게 된 계기가 다소 의심스럽다. 대원군의 정계 복귀는 봉기를 일으킨 군민들이 대원군을 찾아가서 일을 처리해달라고 요청했고 이를 대원군이 받아들였기 때문에 이루어졌다. 이 때 군민들이 '그래도 왕실의 큰어른이니 일을 해결해 주시겠지'라는 생각에 먼저 자발적으로 대원군을 찾아간 것인지, 아니면 마침 기회를 잡으려던 대원군이 먼저 사람을 보내서 자신에게 오게 했는지는 불확실하다.
2.2 누가 청군을 불렀는가?
군란의 과정에서 민 왕후가 은신처를 제공한 윤태준을 통해 고종에게 밀서를 넣어 청에 군대를 파병해줄 것을 요청해서 대원군이 청으로 끌려갔고, 이 때문에 조선에 외국군대가 진입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는 것이 교과서를 포함해 공식 정설로 박혀 있다. 그러나 그것은 실제 사실과는 거리가 멀다.
그에 대한 가장 확실한 증거가 2006년 발견된 임오유월일기이다. 이 일기는 음력 6월 10일 궁에서 탈출한 이후 6월 13일부터 환궁하기 직전인 8월 1일까지의 날씨와 동정, 주변 인물들의 행보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다. 이에 따르면 명성왕후는 2달이 되지 않는 짧은 기간동안 정신없는 루트로 이동하였다.
창덕궁 → 서울 종로구 관훈동 → 경기도 광주부 적취리[12] → 광주부 조현리(새오개)[13] → 경기도 이천군 이천읍 → 경기도 여주군 단현리 → 충청도 충주진영 음성현 감곡면(장호원)[14] → 충청도 충주진영 노은면[15] → 충청도 음성현 감곡면 → 경기도 지평현 상동면[16] → 충청도 음성현 감곡면 → 경기도 안성군 → 경기도 용인현 양지면 → 경기도 용인현 용인읍 → 경기도 용인현 포곡읍 신원리 → 창덕궁 환궁
왕후가 대원군의 나포를 알게 된 것은 청의 포고문을 본 다음이다. 더구나 경기 감영에 자신의 생존을 알린 것이 음력 7월 4일, 한양의 상황을 알아 보게 사람을 보낸 것이 7월 15일인데 흥선대원군이 청군에 억류된 것이 7월 13일, 끌려 간 것이 7월 15일이다. 홍계훈은 충주진영까지 동행하여 양주 군수에 입명되었으며, 여비 500궤미를 내놓은 조충희는 전라남도 영광군수에 임명되었다. 서울과 충주를 계속 왕래하며 정보를 수집하던 북청 물장수(보부상) 이용익이 바로 이때의 공로로 천거 된 인물.
흔히 청군에 파병을 요청한 날짜로 언급되는 음력 6월 19일과 청군이 도착한 6월 27일, 일본군이 인천에 상륙한 6월 29일의 기간동안에는 공식적으로 왕후는 죽은 사람이었다는 이야기다. 즉, 왕비는 청군을 부르긴 커녕 자신이 대원군에 의해 국장이 선포되어 죽은 사람이었다는 사실 조차도 몰랐을 가능성이 높다!
흔히 청군은 왕후 민씨, 혹은 민씨 일파가 요청하여 파견되었다고 알려져있다. 당장 박시백 화백은 자신의 만화 조선왕조실록에서 "어떠한 통보도 없이 영선사 김윤식만이 중차대한 파병을 홀로 요청할 수 있는가?"하면서 민씨와의 소통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한다. 그러나 쫓겨다니며 한성의 정보를 알아보기에도 급급했던 민씨가 김윤식과 소통이 가능했다는 것은 희박한 일이다. 따지고 보면 고종이야말로 청에 밀서를 보낼만한 위치에 있는 인물이 아닌가. 실질적으로 청에 파병을 요청한 주도자로 그나마 가장 유력한 후보는 고종이다. [17]
무엇보다 파병을 부탁한 김윤식과 어윤중은 사건이 일어날 당시에 이미 영선사로 청에 체류중이었다.[18] 이들이 체류 중에 임오군란의 발발을 전해듣고는 청군파병을 요청한 것이다. 이들이 온건개화파이자 친청파로 꼽히는 것은 맞으나, 그렇다고 확실한 왕비의 측근세력이라고 볼 수는 없는 일이다. 그들은 어디까지나 근왕파였다.
김윤식이 근왕의 목적으로 청에 파병을 청한 것은 확실하다. 그는 대원군의 위험성과 함께 난당(亂黨, 주동자)의 소탕, 조선과 일본과의 사이에 청국이 조정해줄 것을 요청하였고, 청국정부는 김윤식의 의견에 따라 조선을 간접 지배하기 위해 군대를 파견할 필요성을 느끼고 오장경(吳長慶) 등으로 하여금 4,500명의 군대를 거느리고 곧 출동하게 하였다.
3 참고
김주영의 대하소설 객주 8권부터 임오군란에 대한 자세한 묘사가 나오니 참조하면 좋다. 그리고 이 작품을 드라마화 한 장사의 신 - 객주 2015과 명성황후(드라마)도 임오군란에 대한 묘사를 적절히 하고 있다.
- ↑ 임진왜란 시기 경복궁이 불탄 것은 그 주체가 한양 백성들인지, 왜군인지 논란이 있어 일단 배제한다. 더구나 선조와 만조백관이속이 모두 도망가 텅빈 궁성이었다.
- ↑ 조선왕조 때 대동법 시행에 따라 쌀, 포(布), 전(錢) 등을 출납했던 관청. 1894년 갑오개혁 때 폐지.
- ↑ 당시 민씨척족은 조창과 경창을 장악해서 막대한 양의 쌀을 빼돌렸다. 지방에서 수도로 쌀을 올릴 때 쌀은 빼돌리고 대신 겨와 모래를 채워 수량만 맞춘 것이다. 이 방법을 화식이라 한다.
- ↑ 2년 후 갑신정변의 주역이 된 개화파 홍영식의 아버지로 갑신정변에 죄책감을 느끼고 음독자살한다.
- ↑ 13개월이나 급료를 안줬으면 구식군인들이 어떻게 생활을 유지할수 있었을까하는 의문이 있을수 있는데, 당시 구식군인들은 평소에는 각자의 생업에 종사하면서 한달에 며칠정도 근무하는 시스템이었으며 따라서 급료의 지불여부에 생계가 달려있지는 않았다.
- ↑ 군사들에게 음식을 주어 위로하는 일을 호궤(犒饋)라고 한다. 건호궤란 음식대신 돈을 주어 위로하는 일을 뜻한다.
- ↑ 군졸들이 소속된 해당 병영
- ↑ 일본 공사관 직원 세 명이 이들에게 살해되었고, 하나부사 요시모토 공사는 기밀 문서를 소각하고 남은 직원들과 도망갔다.
- ↑ 1815~1882. 욕심이 많기로 유명했다. 재물을 넣어둔 곳간(창고) 열쇠를 찾느라고 미처 달아나지 못해 구군인들에게 걸려서 그 자리에서 난도질당해 끔살되었다. 당연히 목숨걸고 지키려던 곳간 열쇠는 구군인들이 가져가서 재물을 싹 다 긁어가져갔다.
- ↑ 민영환의 아버지로 내시로 위장하고 궁궐에서 튈려고 했으나 수염을 깎지 않은 까닭에(...) (수염을 깎는 대신 손으로 입을 가리며 다녔다고 한다.(...)) 그의 최후 때 궁궐에서 쫓기다가 대원군이 입궁하는 걸 보고 살려달라고 애원했으나, 대원군은 나같은 늙은이를 우습게 보던 분이 이제와서 그 늙은이에게 목숨을 구걸하냐며 냉소를 비쳤다. 사실 위에서 보듯 군란을 일으키게 한 원흉인 만큼 죽을만 하긴 하다.
- ↑ 조선왕조 사상 가장 절절한 대백성 사과문이라고 할 수 있다.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에서는 드물게 한페이지를 가득 체워 수록했다.
- ↑ 현 경기도 성남시 수정구 상적동. 노상동과 적취리가 합쳐져서 상적동이 되었다.
- ↑ 경기도 광주시 목현동 새오개
- ↑ 현 충청북도 음성군 감곡성당 부근. 감곡성당은 군란 14년 뒤인 1896년 조선 땅에서 18번째, 충북에서 최초로 생긴 성당이다. 당시에는 현재 이천시에 있는 장호원까지 모두 충주에 속했다.
- ↑ 충북 충주시 노은면 가신3리
- ↑ 현 경기도 양평군 양동면 석곡리. 양근군과 지평현이 합쳐져서 생긴게 양평군이고, 상동면은 양동면으로 개칭되었다.
- ↑ 하지만 이 가설 역시 물증은 없는 것은 마찬가지다. 대원군이 그렇게 놀고 있을리도 없고...
- ↑ 민씨 일파가 임오군란의 발발을 청에 있는 김윤식 등에게 전해서 파병을 요청하게 할 수도 있지 않느냐고 하겠지만, 그 단계까지 나가면 그냥 소설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