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모토 타케노리


현역 시절.


국회의원 출마 당시 포스터.

江本 孟紀

일본프로야구 선수, 해설가, 정치가.
1947년 7월 22일 일본 고치현 태생.

아버지가 경찰이어서 전근이 잦았던 탓에 그만큼 전학도 많았지만, 어릴 적부터 나가시마 시게오를 동경하여 전학가는 학교에서도 야구를 계속 하였다. 고치 상업고교 시절 학교의 고시엔 선발대회 본선 진출이 결정되었는데, 동료 부원이 불상사를 일으켜 출장권을 반납하는 바람에 마음의 상처를 입은 적도 있다.

고교 졸업 후 니시테츠 라이온즈의 지명을 받았으나 거부[1]하고 호세이 대학에 진학하였지만 출장 기회를 안주는 감독에게 반발하여 1년만에 중퇴, 사회인 야구 쿠마가이구미 팀에서 뛰었다.

이후 1970년 드래프트에 참가하여 도에이 플라이어즈의 지명을 받고 비로소 프로 무대에 발을 들였지만 데뷔 첫 시즌 만에 1972년 트레이드로 난카이 호크스 유니폼으로 갈아입게 되었다.[2] 그리고 이적 첫해 선발중간계투를 오가며 16승을 거두었고 이듬해인 73년에도 12승을 기록, 난카이의 퍼시픽리그 우승에 공헌하는 등 매년 두자릿수 승수를 거두며 주축 투수로 나름 활약을 보였다.

1975년 시즌 종료 후 에모토는 에나츠 유타카의 트레이드 상대로 한신 타이거즈에 이적하게 되었는데, 에나츠가 "왜 내가 에모토 따위 녀석이랑 트레이드 되어야 하는건가?" 라고 불평한 것을 들은 에모토가 발끈하여 "너 지금 말 다했냐?" 라고 맞대응하며 한바탕 설전을 벌였다. 그러나 이 사건을 계기로 오히려 에모토와 에나츠는 서로 오해를 풀고 사과한 후 둘도 없는 막역지우로 발전했다.[3] 싸우고 나서 정든 케이스

어찌됐든 한신의 일원이 된 에모토는 1979년 까지 매년 10승 이상은 찍었지만 이후 기량이 쇠퇴하며 에모토의 입지는 점접 좁아지고 있었다.



선수시절 말년의 모습. 어디 중남미에서 오셨수?

그러던 중 1981년 8월 26일, 야쿠르트 스왈로즈와의 경기에 등판했다가 된통 털리고 내려온 에모토는 덕아웃에서 라커룸으로 가는 복도에서 혼잣말로 "벤치가 밥통들이라 야구 못해먹겠네" 라면서 당시 한신 감독인 나카니시 후토시를 씹었는데 이게 하필 근처에 있던 눈치없는 기자들 귀에 들어가며 크게 기사화 돼버렸고, 논란의 중심에 선 에모토는 본의가 아니라고 강하게 해명했지만 주변의 비난을 이기지 못하고 결국 그 해 시즌 종료후 유니폼을 벗고 말았다. 에모토의 프로 11시즌 통산 성적은 395경기 등판, 113승 126패 19세이브, 평균자책 3.52.

은퇴 후 에모토는 후지 테레비, 니혼 TV 야구 해설가로 활동했는데, 1982년 출간한 "프로야구 10배 재미있게 보는 법" 이란 책이 [4] 무려 200만부나 팔리며 베스트셀러 작가에 등극했고, 해설가 활동 외에도 탤런트, 가수로도 명성을 날리며 오히려 현역 시절보다 높은 인기를 누리게 되었다.


가수 에모토의 음반 표지. 오우 간디작살

이 인기를 바탕으로 에모토는 1992년 총선거에 스포츠 평화당[5] 비례대표로 출마하여 참의원에 당선, 정치계로 진출하였고 이후 당적을 민주당으로 옮겨 2선 의원으로 2004년 까지 국회의원으로 활동하였다. 2004년 1월 민주당을 탈당하여 오사카부 지사 선거에 출마했으나 현직 부지사이던 오타 후사에 에게 떡실신 당하며 완패, 그 길로 에모토는 정계에서 은퇴하였다.

현재 에모토는 사업가로 일하고 있으며, 한편으로 태국 국가대표 야구팀의 총감독을 맡고 있다.

  1. 하위권인 4위 지명이었다.
  2. 당시 감독인 노무라 카츠야의 눈에 들어 영입된 것이었다.
  3. 1993년 에나츠가 각성제 소지 혐의로 체포당하자 국회의원 신분이던 에모토가 직접 법정에 출두하여 증인으로 나서기도 했고, 법정구속 당하여 교도소에 수감된 에나츠에 구명 운동에 누구보다도 열을 올리며 결국 에나츠가 가석방 되는데 큰 역할을 했다.
  4. 이 책은 정식출간인지 해적판으로 출간된거지는 알 수는 없으나 출간된지 얼마 안되어 국내에서도 번역되어 시중에 팔린 출판물이다. 일본에서는 영화화까지 되었다!
  5. 안토니오 이노키가 이끌던 정당. 2007년 해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