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라 카츠야

nomura.jpg
이렇게 호남인 시절도 있었다.


라쿠텐 감독 시절. 지금은 할배

이름노무라 카츠야 (野村克也)
생년월일1935년 6월 29일
국적일본
출신지교토
포지션포수
투타우투우타
프로입단1953년
소속팀난카이 호크스 (1954~1977)
롯데 오리온즈 (1978)
세이부 라이온즈 (1979~1980)
지도자난카이 호크스 플레잉코치 (1968~1969)
난카이 호크스 플레잉매니저 (1970~1977)
야쿠르트 스왈로즈 감독 (1990~1998)
한신 타이거스 감독 (1999~2001)
시닥스[1] 감독 겸 GM(2003~2005)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 감독 (2006~2009)
1961년 일본프로야구 퍼시픽리그 MVP
야마우치 가즈히로
(다이마이 오리온즈)
노무라 카츠야
(난카이 호크스)
장훈
(도에이 플라이어스)
1963년 일본프로야구 퍼시픽리그 MVP
장훈
(도에이 플라이어스)
노무라 카츠야
(난카이 호크스
)
조 스탠카
(난카이 호크스)
1965,66년 일본프로야구 퍼시픽리그 MVP
조 스탠카
(난카이 호크스)
노무라 카츠야
(난카이 호크스
)
아다치 미츠히로
(한큐 브레이브스)
1973년 일본프로야구 퍼시픽리그 MVP
후쿠모토 유타카
(한큐 브레이브스)
노무라 카츠야
(난카이 호크스
)
야마다 히사시
(한큐 브레이브스)
난카이/후쿠오카 다이에/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 역대 감독
이이다 도쿠지
(1969)
노무라 카츠야
(1970 - 1977)[2]
히로세 요시노리
(1978 - 19880)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즈 역대 감독
세키네 준조
(1987 - 1989)
노무라 카츠야
(1990 - 1998)
와카마쓰 쓰토무
(1999 - 2005)
한신 타이거스 역대 감독
요시다 요시오
(1997 - 1998)
노무라 카츠야
(1999 - 2001)
호시노 센이치
(2002 - 2003)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 역대 감독
다오 야스시
(2005)
노무라 카츠야
(2006-2009)
마티 브라운
(2010)

1 소개

전 일본 야구 선수 겸 감독. 포지션은 포수.

일본프로야구 역사상 전설적인 명포수. 그리고 명선수는 명감독이 될 수 없다란 징크스를 깨고 감독으로써도 특유의 ID야구로 약팀을 강팀으로 만들며 뛰어난 성적을 기록한 명감독.

2 선수 시절

홈런 기록에서 왕정치와 함께 신으로 불리는 선수. 그것도 포수라는 포지션을 딛고 기록한 것이다. NPB의 원조 공격형 포수.

총 3017경기 출장에 10472타수 2901안타 657홈런[3] 1988타점을 기록하여 NPB 최다 경기 출장 1위, 최다 타수 1위, 최다 안타 2위, 최다 홈런 2위, 최다 타점 2위를 기록하였다. 딱 봐도 콩라인
그 외에도 도루 117개, 볼넷 1374개, 삼진 1478개, 통산 타율 0.277을 기록하였다. 그 대신 희생플라이 역대 1위, 병살타 역대 1위 란 뭔가 불명예스런 성적도 기록(...) 이런 걸 쓸데없이 NPB 1위를 하다니

17년 연속 20홈런 이상, 퍼시픽리그 역대 최다인 21차례의 올스타전 출전 및 통산 끝내기 홈런 1위(11차례)와 끝내기 안타 1위(19차례) 기록도 가지고 있다.

야구를 하고 싶어도 야구용품이 없어 하지 못했던 가난했던 어린시절을 보냈다. 아버지가 태평양 전쟁전사했다고 알려져 있으나, 일본 위키의 노무라 문서에서는 아버지의 사망원인을 다르게 기술하고 있다. 홀어머니 밑에서 노무라는 신문배달 등의 잡일을 하면서 집의 생계를 책임져야 한 고달픈 어린 시절을 보냈다. 무명학교인 교토 미네야마고교 시절, 여러 프로팀에 테스트 신청을 했으나 1954년 츠루오카 카즈토 감독이 있는 난카이 호크스에서만 연락이 왔고, 테스트를 받아 합격해 입단했으나 계약금은 0엔. 그리고 초기 2년 동안은 주전으로 발탁되지 못한 채 불펜 포수만 하다가, 전력 외 통보를 받기까지 했으나, 이때 전력외통보를 받고 "이대로 돌아갈 순 없다. 난카이 전철에 뛰어들어 자살해버리겠다.(!!) 라고 말해서 협박이잖아 이거 겨우 난카이에 남을 수 있었다.. 생각해봐라. 당장 손님이 자기 회사 열차에 뛰어들어 자살하는 것도 곤란한데 자기네 산하 야구단 선수가 그렇게 하면 얼마나 곤란하겠나 주전 포수의 교통사고, 백업 포수의 트레이드, 벤치 포수가 부상을 당하는 등의 안 좋은 일로 인해 난카이 호크스가 2009년 당시의 삼성 라이온즈를 연상케 하는 포수난에 시달리게 되자, 1956년부터 주전으로 발탁하여 맹활약했다. 약점인 약한 어깨를 보완하기 위한 노력에도 공을 기울였고 타격에도 눈을 떴다.

이후 1957년 30홈런으로 호크스의 불구대천 라이벌 니시테츠 라이온즈나카니시 후토시를 누르고 홈런왕이 된 그는 1961년, 그리고 1968~1975년까지 8년 연속 홈런왕을 기록하였는데, 이는 퍼시픽리그 최다 시즌 연속 홈런왕 기록이다. 그 외에도 1963년에는 52홈런을 기록하며 2001년 터피 로즈가 55홈런을 칠 때까지 퍼시픽리그 단일 시즌 최다 홈런 기록을 세웠고, 1965년에는 156안타, 42홈런, 110타점, 0.320의 타율로 제2차 세계대전 후 사상 처음으로 타격 트리플 크라운을 차지하였다. [4]

그렇다고 홈런만 친 타자일 뿐만 아니라 포수로서도 리드능력이 뛰어났는데, 투수를 이끄는 능력은 말할 것도 없고, 그 외에도 작은 소리로 옆의 타자에게 속삭이는 일종의 트래쉬 토크 스킬을 사용하여 타자의 심리 상태를 흔들어 놓는다든가[5], 혹은 상대 팀의 스탯을 집요하게 분석하여 이에 맞추어 야구를 한다든지... 이러한 포수로서의 경험은 후에 감독 시절 데이터 야구(ID=Import Data)를 만드는 귀중한 토대가 된다.

본인의 말에 따르면 트래쉬 토크가 통하지 않던 선수가 3명 있었는데, 그 선수들이 바로 왕정치, 나가시마 시게오, 장훈이라고 한다. 왕정치는 처음부터 끝까지 들은 척도 하지 않았고, 나가시마는 웃으면서 더 심한 음담패설로 맞받아쳐서 되려 자기를 질리게 했고[6]], 장훈은 눈을 크게 부릅뜨며 욕설을 퍼부었다. 그런데 어느날 참지 못한 장훈이 결국에는 헛스윙을 하는 척하면서 노무라의 뒤통수를 갈겨버렸고(!) 크게 혼이 난 노무라는 결국 장훈에게 더는 트래쉬 토크를 걸지 못했다(...) 참고로 학생 시절 축구부 주장과 말싸움하던 중 축구부 주장이 자신을 조센징 이라고 모욕을 주자 곧장 빠따로 머리를 참교육을 시켜준 것이 장훈 옹이시다.[7] 그러니까 사람 잘못 골랐다

이 트래쉬 토킹이 통하지 않았던 상대로는 노무라가 직접 말한 셋(왕정치, 나가시마 시게오, 장훈) 말고도 한 명이 더 있다. 에노모토 키하치라는 롯데 오리온즈의 레전드 좌타자인데 이 타자는 172cm의 작은 체구로 1루수를 봤으며 통산 볼넷 대 삼진 비율이 1 : 0.6에 달할 정도로 극강의 선구안을 가진 선수로, 검객에 가까운 이미지를 지녔다고 한다. 노무라 본인도 선구안만큼은 왕정치보다 위라고 인정했으며, 그 아우라에 눌려 트래쉬 토크를 할 엄두도 못 냈다고 고백했다.

하지만 당시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V9(9년 연속 센트럴리그-일본시리즈 우승)의 주역인 나가시마 시게오왕정치보다 대중적인 인기를 얻지는 못했다. 그래서 그는 나가시마와 오 사다하루가 해바라기라면, 나는 쥐 죽은듯이 일본해에 피는 달맞이꽃이다라는 말을 남기며 그의 처지를 안타까워했다. 특히 NPB 통산 최다 안타는 장훈에게, 최다 홈런과 타점은 왕정치에게 타이틀을 뺏기며 더더욱...

이후 1970년부터는 감독을 겸임하며 4번타자, 포수, 감독이라는 3가지 중책을 맡으면서 팀을 이끌었으며, 1973년에는 난카이의 마지막 퍼시픽리그 우승을 안겨주었고,[8][9] 1976년 한신에서 난카이로 1973년 퍼시픽리그 우승의 주역 에모토 타케노리와 트레이드되어 이적한 에나츠 유타카가 이적 첫해 지병으로 좋지 않은 성적을 기록하자 마무리투수로 전향해 볼 것을 권유해 에나츠가 후일 대스타가 되는 계기가 되기도 했으나, 이후 1977년 시즌 2경기를 남겨둔 상황에서 애인[10] 노무라 사치요의 막장행각[11]으로 인해 감독직에서 해임당했다.[12] 이후 롯데 오리온즈에서 1978년 1년간 뛰고, 그 뒤 세이부 라이온즈의 창립 멤버로서 1979~1980년까지 뛰며 최다 연속 시즌 출장 기록인 26시즌[13]과 전인미답의 3000경기 출장 기록을 달성하고 1980년 은퇴하게 된다.

노무라는 난카이 출신이지만 난카이 구단과는 아주 사이가 나빴다. 거의 불구대천의 원수 수준. 팀을 대표하는 스타였고 난카이 역사상 최다홈런, 최다타점에 선수로 감독으로 우승에 공헌했음에도 불구하고 지금도 난카이 전기철도가 세운 난카이 호크스 기념관[14]에는 노무라에 관한 자료는 하나도 없다…. 좀더 이해하기 쉽게 한국프로야구로 비유하자면 삼성이만수에 대한 대우나 롯데최동원에 대한 대우 정도는 저리가라고 할 정도로 완전히 등을 돌렸다. 하지만 난카이 프런트와의 사이가 나빴을 뿐이라 구단이 다이에에게 팔린 이후로는 호크스 구단에게는 난카이에 대해 느끼는 감정 같은 것은 없는 모양. 그 예로 2013년 시즌 중 오사카에서 열린 경기도 하면서 옛날 팀을 추억하는 행사인 레전드 시리즈[15] 난카이 OB 측으로 참석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난카이와의 사이에 에피소드가 하나 있는데, 09년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고도 시즌 이후 퇴출이 결정되자, 내 차라리 난카이에서 결번을 받으면 받았지 라쿠텐에서 결번을 왜 받냐? 라쿠텐 따위에 무슨 자부심을 느끼라고? 라는 발언을 한 적이 있다. 난카이랑은 사이도 험악했고 거기다 난카이가 이미 구단을 팔아버렸으니, 난카이로부터는 결번을 받을래야 받을 수가 없다. 받는다면 소프트뱅크에서 해줘야 되는데, 이미 팀이 후쿠오카로 이전하고도 20년이 넘어서 예전 난카이 색채는 완전히 없어졌다. 이제와서 영구결번으로 지정해도 후쿠오카의 팬들에게는 뭔가 와닿지 않을 건 자명한 사실.(당장 이나오 가즈히사가 영구결번 되었을 때도 후쿠오카 시절 선수에게 사이타마에서 영구결번 줘도 괜찮은 거냐며 얘기가 있었단 걸 생각해보자)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런 표현을 쓸 정도로 라쿠텐 프런트의 막장행위에 대한 분노가 하늘을 찔렀다. 그리고 난카이 구단에 대해서도 이정도의 생각을 가지고 있다라는 점을 엿 볼수 있다.

3 은퇴 후

야구 해설자로 활동하다가 1989년 야쿠르트 스왈로즈의 감독에 임명되면서 그 유명한 데이터 야구를 구사하면서 후루타 아츠야 같은 명포수를 발굴해내며 팀의 일본시리즈 우승 3번(1993,1995,1997년)과 센트럴리그 우승 4번을(1992,[16]1993,1995,1997년) 기록하는 등 최전성기를 누렸다. 이로 인해 야쿠르트팬들이 노무라 감독을 선호할 정도.

이후 1999년 롯데 자이언츠8888577와 맞먹는 암흑기를 지내던 한신 타이거즈의 감독이 되나 결과는 처참했다. 3년 연속 꼴찌라는 기록을 남기게 되었고 게다가 아내 사치요가 탈세 혐의로 구속크리까지 겹치면서 노무라 감독에 있어서는 최악의 흑역사가 되었다. 하지만 이때 한신이 말그대로 개막장 시기였고, 이후 한신 타이거즈의 강팀 도약에 있어 노무라 한신의 선수육성이나 운영이 밑바탕이 되었다는 재평가도 존재하여 최근 들어서는 한신 감독 시절의 평가도 크게 나쁘지는 않은편. 사실 원래부터 강팀을 맡았던 적이 드물기에 감독으로서 승률은 좋은 편은 아니다. 하지만 난카이 시절을 제외하면[17] 야쿠르트, 한신, 라쿠텐 등 약체팀의 토대를 만드는 능력은 가히 최고수준이라 할 수 있다.

그 뒤 2003년 일본의 사회인야구단 시택스의 감독 겸 GM으로 부임해 2005년까지 활동하기도 했다. 특히 2003년엔 팀을 사회인 야구리그 준우승으로 이끌며 그가 괜히 명감독으로 불리는 게 아니란 걸 증명했다. 결론 : 한신은 그냥 개노답 신이었던 거다.

2006년 71세의 고령에도 불구하고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의 감독으로 취임.[18] 그 후, 2008년 7월 15일 세계 최초 선수-감독 3000경기 출장이라는 대기록을 달성하였으며, 2009년 팀을 창단 후 첫 A클래스와 포스트시즌에 올려 놓았지만 시즌 종료 뒤 그 라쿠텐 병신 프런트에게 해임되었다. 감독 통산 성적은 1565승 1563패 1무로 1500승과 1500패를 모두 넘겼다. 자세한 내용은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즈 항목을 참조할 것.

현재는 산케이 신문의 전속 평론가로 일하고 있다.

4 여담

  • 현재 일본 프로야구에서 퀵모션이라고 하는 개념을 만들어낸 사람이다. 난카이 시절 감독에 재임하던 당시 리그 베이스를 탈탈 털던 후쿠모토 유타카를 막기위한 대책으로 당시 투구폼이 작은데다가 셋 포지션에 능숙했던 호리우치 츠네오를 보고 만들어 낸 것 이였는데 캐치까지 1.1초 2루로 송구까지 1.8초 도합 3초 이내면 육상선수가 와도 아웃 시킬 수 있다는 지론[19]으로 퀵 모션이라고 하는 동작을 개발해냈다.[20] 당시 투수진은 주자를 못 잡는건 포수 탓 이라고 굉장히 반발이 심했으나 포수 겸 감독이였던 노무라는 권력으로 찍어눌렀으며 까라면 까 퀵모션을 최초로 도입한 난카이 호크스는 1973년 그 해 퍼시픽리그 우승을 거머쥐었다. 후쿠모토 유타카와 노무라 카츠야 시대 이후부터 일본 주자들은 투수의 쿠세를 찾아 어떻게든 베이스 하나 더 가려고 기를 쓰게 되었고 투수와 포수는 어떻게든 준비시간을 줄이고 쿠세를 없애 그 주자들을 잡는 방향으로 발전하여 현재의 일본야구의 기반이 되는 플레이를 하게 되었다는 걸 생각해보면 일본 야구 역사에서 꽤 굵직한 사건이라 할 수 있다.
  • 야쿠르트 감독 시절에 음반을 발매 한 적이 있다. 장르는 엔카. 한신 감독시절 재발매 되었으며 이후 2009년 라쿠텐에서 앨범을 또 한장 발매하는데 가사를 부인이 써 주었다고 한다.
  • 부인이 막장으로 유명하긴 하지만 공처가로서 가계부 관리는 부인이 하고 본인은 신용카드를 사용하는데 신용카드의 결제 시스템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 해서 "사인을 할 뿐 인데 어째서 물건을 주는걸까?"라고 고민을 하긴 했지만 일단 주니까 쓰자 걱정없이 쓰다가 신용카드 명세서가 부인에게 전달이 된다는 사실을 몰랐기에 나중에 부인이 추궁하자 "나를 미행하는거야? 징그러운 여자네"라며 부인과 부부싸움을 한 적이 있다고 한다.
  • 어린시절 가난하게 자랐기에 그에 대한 반발심으로 명품수집을 취미로 하고 있다. 주로 수집하는 품목은 베르사체의 넥타이와 시계로 넥타이가 약 400개 시계가 수십개에 다다랐지만 야쿠르트 감독시절 도둑을 맞아 시계를 모두 잃어버렸다. 하지만 그 이후로도 꾸준히 모으고 있다는 듯. [21]
  • 현역시절 소문난 골초였다. 하루에 3~4갑 정도를 아무렇지않게 피웠다는 듯. 하지만 야쿠르트 감독 재임 이후 건강이 악화되었기에 현재는 금연을 하고 있다.
  • 라이벌들의 동태를 파악하기 위해 도쿄의 긴자, 오사카의 기타신치 술집들을 활용했다고 한다.

5 대중문화

  1. 일본의 사회인야구단, 2006년 해체.
  2. 시즌 도중 마지막 2경기를 남겨놓고 해임당했다. 나머지 경기는 당시 난카이 2군감독 아나부키 요시오가 감독대행을 맡음.
  3. 참고로 메이저리그에서 포수로서 가장 많은 홈런을 때린 선수인 마이크 피아자의 다른 포지션 홈런 기록까지 합한 것이 427홈런이다. 이 657홈런은 일본에서는 왕정치가 넘사벽이지만 메이저리그 랭킹에 넣어본다면 역대 홈런왕들 중 4위 윌리 메이스에 불과 3개 뒤진 5위다.
  4. 노무라 때문에 홈런,타점 부문에서 계속 콩라인에 머물렀던 선수가 있었다. 바로 장훈
  5. 초창기에는 다음 공은 머리, 맞으면 아플텐데 이런 식의 토크였으나, 나중에는 타격폼이 이상한데? 이런 식으로 폼을 흐뜨러뜨리는 말로 바뀌었다.
  6. 타격폼이 이상하다고 노무라가 말하자 나가시마는 폼을 다시 가다듬고 홈런으로 노무라에게 보답했다. "고마워"말에 노무라는 기절 직전.
  7. 당시 장훈은 머리를 쥐고 고통스러워 하는 축구부 주장을 일으키고서는 차가운 목소리로 한마디만 했다고 한다. "이 대목에서 조센징이 왜 나오나?" 그리고 점잖게 조언했다고 한다. "자네는 말이 너무 많아."라고...
  8. 정확히는, 전기리그 1위/후기리그 3위를 기록 후 플레이오프에서 후기리그 1위인 한큐 브레이브스와 싸워 우승. 이 시기에 1973~1982년까지 퍼시픽리그 단독으로 플레이오프가 시행되어 전기/후기 리그로 나뉘어 진행되어 전기/후기 1위 팀이 싸워 이기는 팀이 일본시리즈에 진출하는 제도로 시행했다.(전후기리그 전부 1위팀은 일본시리즈 직행.) 이 제도는 한국프로야구의 초창기 운영과 매우 비슷하다.
  9. 그러나 일본시리즈에서 만난 상대는 하필이면 V9 시대의 요미우리 자이언츠. 1승4패로 깨졌다. 참고로 이게 V9 시대의 마지막 일본시리즈 우승. 그 뒤 1981년에야 요미우리는 다시 일본시리즈 우승을 달성했다.
  10. 수정 전 아내라고 되어있었으나 사실 이 당시엔 애인불륜관계였다. 노무라는 이듬해인 1978년 전처랑 이혼 후 사치요와 결혼했다.
  11. 선수 부인들을 갈군다든가, 선수 기용에 간섭한다든가 등등
  12. 잔여 경기는 당시 난카이 2군감독을 맡고 있던 아나부키 요시오가 감독대행을 맡았다. 그리고 아나부키는 후에 1983~1985년 난카이 감독을 맡게 되지만.. 그 당시는 20년간 비밀번호 찍던 시대였고 당연히 성적에 관해선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13. 이 기록은 후에 쿠도 키미야스가 경신한다. 쿠도 옹이 2010 시즌까지 뛰어 29시즌 출장기록을 세웠다. 과연 굇수.
  14. 오사카 난바의 옛 오사카 구장 자리에 마련돼 있다.
  15. 예전에 오사카에 있던 팀 난카이 호크스(현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와 오사카 긴테쓰 버팔로즈(2004년 오릭스 블루웨이브와 합병하며 해산)을 추억하는 행사다.
  16. 일본시리즈에서 3승4패로 아쉽게 세이부 라이온즈에게 패배했다. 그러나 1년후 다시 만나 똑같이 4승3패로 그 수모를 갚았다.
  17. 노무라가 떠난 후 호크스는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를 거치며 1998년 리그 A클래스(1~3위권)에 오르기 전까지 단 한번도 리그 우승은 커녕 A클래스에도 오르지 못하며 무려 20년간(1978~1997년) 리그 하위권인 B클래스(4~6위권)에만 머물렀다. 일명 노무라의 저주라 불리는 호크스의 암흑기.
  18. 이것으로 2005년 시즌 종료 후 폐암으로 사망한 故 오기 아키라오릭스 버팔로즈 초대 감독으로써 기록한 최고령 감독 기록 을 갱신했다.
  19. 상당히 일리가 있는 얘기이긴 하다 송구가 아무리 빨라봐야 시간상으로는 그렇게 큰 차이가 나지 않기에 되도록이면 공을 던질 때 까지의 준비시간을 줄이는게 투수와 포수 모두에게 이득이지만 메이저리그의 경우 도루를 그렇게 많이 하는 주자도 없는데다가 타자를 우선적으로 잡고 본다는 시각이 있어서 퀵모션을 안하는 경우도 종종 있으며 드물게 아예 안가르치는 경우도 있다.
  20. 원래 셋 포지션에서 투구폼을 더 줄인다라는 발상은 미하라 오사무 감독이 이미 주장하긴 했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었다
  21. 현역 시절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모리 마사아키가 한큐 브레이브스와의 일본시리즈를 앞두고 전력 분석 차, 한큐와 같은 퍼시픽 리그 소속인 난카이의 노무라를 찾아와 밤새 야구를 이야기를 나눈 뒤 노무라의 양복을 꼭 한 벌씩 가져갔다고..
  22. 연재 시작인 1973년부터 2009년까지 카게우라는 은퇴도 못하고 무려 63세(!)까지 현역 선수로 뛴다는 설정이다(...) 사실 현실에도 있다. 카게우라보다 기간은 조금 짧고 나이도 아주 적지만 작가 미즈시마 신지도 이렇게 길게 끄는 건 좀 그랬는지 노무라가 라쿠텐 감독에서 해임된 해에 같이 카게우라를 은퇴시켰다.. 그러나 연재는 그 이후로도 계속 하다가 2013년 완결. 그건 그렇고 카게우라 저 인간, 아무리 만화라지만 난카이부터 시작해 다이에-소프트뱅크 시절까지 현역선수로 뛴 무서운 인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