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토니오 이노키

레슬링 옵저버 명예의 전당 헌액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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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WWE 명예의 전당 헌액자
현역 시절 턱이 참 크고 아름답다현재
"사람은 걸음을 멈추었을 때, 도전을 그만두었을 때 늙어가는 겁니다.

이 길로 나아가면 어떻게 될까, 걱정하지 마십시오.
걱정하면 길은 없습니다. 일단 한 발 내디디면, 그 한 걸음 한 걸음이 길이 될 것입니다."

일본 프로레슬링 사상 가장 성공한 선수로 예명은 불타는 투혼

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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링네임안토니오 이노키(アントニオ猪木)[1]
생년월일1943년 2월 20일
피니쉬 무브마성의 슬리퍼
법인 설립1972년 1월 26일 신일본 프로레슬링 출범

프로레슬링을 통해 부와 명예, 인맥, 권력을 모두 쥐고 참의원(한국의 국회의원에 해당)까지 했던 사람. 한마디로 인생의 승리자.

탄광산업을 경영하는 유복한 집안에 태어났으나, 이노키가 5살이라는 어린 나이 때 아버지가 사망.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제2차 세계대전 뒤 가업이 도산하여 브라질로 이주하게 되고 이후 농장에서 가혹한 노동을 하는 동시에 투포환 선수로 활동하다가, 마침 브라질을 방문한 역도산의 눈에 띄어 제자가 된다. 당시 역도산의 지시로 귀국자녀가 아닌 일본계 브라질인이라는 컨셉으로 활동하게 된다. '안토니오'라는 링네임도 브라질인 이미지를 위해서 붙인 것이다.

데뷔전은 1960년 9월. 상대는 오오키 긴타로라는 이름으로 일본에서 활동하던 김일로, 시합은 김일의 완승으로 끝났다. 이노키는 풋내기 시절이었으니 당연한 결과겠지만.

아무튼, 연습생 시절 역도산에게 늘 구박받던 이노키에게 김일은 선배로서 자상하게 대해줬다고 하며 이후 이노키와 김일, 자이언트 바바는 역도산의 3대제자로 꼽히며, 이 세 명은 각각 신일본 프로레슬링, 일본 프로레슬링, 전일본 프로레슬링의 주역으로 활동. 일본 레슬링계의 전성기를 이끄는 공로자가 된다.

일본 프로레슬링 시절, 이 당시 일본 프로레슬링은 니혼TV와 TV아사히에서 중계를 하고 있었다. 니혼TV가 먼저 방송을 시작했기 때문에 니혼TV쪽에 좀 더 공을 기울여 바바는 니혼TV에서만 나오고 TV아사히 쪽에는 안토니오 이노키 등이 출연했다. 하지만 1971년, 일본 프로레슬링 경영진과 대립을 했는데 당초 이노키와 함께 나서기로 했던 프로레슬러들이 모두 이탈하는 바람에(…) 이노키 혼자 반기를 든 꼴이 되어 해고당하고 말았다. 이 때문에 독자노선으로 나가서 1972년 1월 13일 신일본 프로레슬링을 개양하게 된다. 라이벌 자이언트 바바전일본 프로레슬링은 10월 개양했다.

1973년 4월 1일에는 양대 단체에 인기가 모두 빠져나가 경영난에 빠진 일본 프로레슬링은 신일본과의 합병을 추진했지만, 김일 등의 반대로 실패하고 몇몇 선수를 뽑아오는 데 그쳤다. 4월 6일에는 TV 아사히와 방영 계약을 맺는 데 성공하여 단체를 반석에 올려놓았다.

2 전성기 시절

전성기 시절의 안토니오 이노키는 범접할 수 없는 카리스마적 프로레슬러였다.

가운을 걸치고 목에 수건을 두른 채 원기왕성하게 달려와 링에 올라, 항상 강조한 투혼을 그림으로 그린 듯한 경기를 보여준 뒤 폴을 따내고는 벌떡 일어나, 하늘을 향해 번쩍 주먹을 들어 올리며 "다아-!"라고 외쳤는데, 이 제스처는 이노키의 트레이드마크가 되어 엄청나게 많이 패러디 된다. 예를 들어 일본의 영상매체든 활자매체든 간에, 뭔가의 매체에서 왠지 엄청 뜨거운 표정으로 주먹을 들어 올리며 괴성을 지르는 장면이 있다면, 십중팔구 이것의 패러디라고 보면 될 정도다. 그러나 국내 정발되는 만화 등에서는 이 특유의 기합성이 다른 것으로 대체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약간은 아쉬운 면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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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수베기(延髄斬り 엔즈이기리)를 창시했으며, 이 밖에도 업도미널 스트렛치의 강화판인 만자 굳히기(卍固め. Octopus hold)가 트레이드마크로 꼽힌다. 여담으로 기술개발 비화가 있는데, 뭔가 시각적으로도 충분히 위력적으로 보이고, 자이언트 바바의 노텐 챱이나, 김일의 원폭 박치기 같은 큰 상징성을 지니는 기술을 고안하겠다고 해서 만든 게 지금의 연수베기라고. 아래에서 후술하겠지만, 드롭킥을 굉장히 볼품없이 써서 이런 약점을 어느 정도 커버하려고 만들었다는 설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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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안토니오 이노키는 슬리퍼 홀드라는, 격투기나 실전에선 사람 잡는 기술이지만 프로레슬링에서 시간 때우기 및 경기 조율용으로 사용하는 서브미션 홀드를 마성의 슬리퍼 홀드라는 이름을 붙여 최고급의 피니쉬 무브로 쓴다. 좀 우습게 보이지만, 저래 보여도 단 한 번도 깨진 적이 없다. 심지어 급속으로 상대를 실신시켜 서브미션승도 아닌 핀폴승을 따내며 초살시킨 적이 있을 정도. 거기다 일단 걸리면 어지간한 선수들은 3초 내에 힘이 빠지면서 그대로 실신한다.(…) 그도 그럴 것이 조르는 걸 보면 진짜 진심으로 죽일 듯이 조르는데 가히 공포스러울 정도. 그의 이노키즘을 확인할 수 있는 기술이라고 할 수 있다.

프로레슬링에서 위상이 그다지 높지 않은 슬리퍼홀드를 최종살인기 수준으로 쓰다보니까, 경기가 맥이 빠진다는 이유로 비난도 많이 받는 기술이지만, 판크라스 출신의 스즈키 미노루나 이이즈카 타카시 등 이노키를 따라 슬리퍼 홀드를 피니시로 쓰는 선수가 아직도 남아있다. 그러나 이노키처럼 엄청나게 짧은 시간 안에 상대를 실신, 또는 실신 직전으로 몰고 가는 수준으로 사용한 선수는 프로레슬링 역사상 없다.

이런 전설적인 내용들에 반해 추문도 제법 많은 편이다. 그 중 가장 큰 사건으로는 '신일본 횡령사건'으로, 신일본의 회사 자금을 빼돌려 브라질에서 벌이는 사업에 투자했다는 사실이 들통 나면서, 단체의 일부 중진들이 이노키의 퇴진을 요구하는 쿠데타를 벌인 적도 있다. 그러나 당시 신일본의 방영권을 쥐고 있던 TV 아사히이노키 없는 신일본은 중계하지 않겠다는 폭탄선언을 하여 유야무야되기도 했다. 안토니오 이노키라는 레슬러가 얼마나 카리스마적인 인물인지 잘 알 수 있는 대목.

70년대에 이노키가 거물이 된 뒤에도 한국, 일본을 오가며 김일과 여러 차례 대전을 벌였는데 하나같이 명승부로 회자되었고, 덕분에 한국 팬들에게도 깊은 인상을 남겼다. 한국 경기에서 일본인인 이노키는 물론 악역을 맡았지만, 김일의 필살기였던 박치기를 맞아도 버티고 일어나기도 하는 '강력한 악역'으로 깊은 인상을 심어주었다고 한다.

김일이 말년에 무관심 속에서 병마로 고통스러워할 때, 이따금씩 김일을 찾아와 여러 가지로 도움을 줘서 '의리파'라는 인상까지 남겼다. 거의 1년에 1번은 찾아왔다고 한다.

은퇴는 1998년 4월 4일. 도쿄돔파이널 이노키 토너먼트흥행에서 하였는데, 이날 모인 관객은 약 7만 명으로, 역대 도쿄돔 일본 프로레슬링 사상 최다관중 동원이었다. 메인 이벤트에서 벌인 은퇴시합은 격투가로도 유명한 돈 프라이를 상대로 대결을 펼쳤고, 코브라 트위스트로 승리를 거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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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시간으로 2010년 2월 1일. 아시아인 최초로 WWE 명예의 전당에 입성하는 게 발표되었고, 동년 3월 27일 헌액되었다.

이때 미리 써온 연설문을 영어로 더듬더듬 읽고는 마지막에 "다아-!"를 외치고 갔다.

3 이노키 VS 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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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6년 무하마드 알리와 지금으로 치면 이종격투기 격인 대결을 가졌다 이때는 아직 종합격투기에 대한 인식이 없던 시절이라 룰이 엉망이었다. 때문에 이노키는 링에 누워서 킥 위주로 방어하는 방식으로 지루하게 경기를 펼친 나머지 혹평을 받았다. 얼마나 졸전이었냐면 이 경기 때문에 이노키 알리 포지션이라는 말까지 생겨날 정도였다.

룰은 다음과 같았다.

  • 알리 : 킥 금지, 허리 아래 타격 금지, 쓰러진 상대한테 펀칭 및 그래플링 허용 복서한테 그래플링을 허용하면 뭐 어쩌라고
  • 이노키 : 로프 터치 금지, 그래플링 금지, 태클 금지

루머가 많은 경기[2]였지만 이노키가 허리 위 타격 금지였다는 건 사실이 아니다. 그러나 룰이 개판인건 맞는게, 이노키는 프로레슬러임에도 불구하고, 클린치를 비롯한 그래플링 일체 금지라는 엄청난 페널티를 안고 있었고, 알리는 누운 이노키에 달려들어 펀치를 날리려다 심판에게 제지를 당하는 등 총체적 난국이었다. 알리 킥의 탄생에는 이런 비화가 있는 것이다. 영상을 보면 클린치가 발생할 때마다 심판이 와서 뜯어말리는 걸 볼 수 있다.

알리 왈 "누워서 돈 버는 놈은 창녀하고 이노키밖에 없다"라고….. 이노키 역시 "넌 누워있는 창녀 앞에서 아무것도 못하는 고자냐?" 라고 받아쳤다. 이후 무하마드 알리 방한 당시, 알리의 팬이었던 박정희 대통령도 같이 이노키를 욕했다고 한다. 그러나 당시 알리가 이노키에게 폭언을 날린 건 경기 내용 때문보다는, 며칠 전 벌어졌던 사건의 영향이 큰 듯하다. 내용인즉슨, 경기 며칠 전 분위기를 돋우기 위해 기자들과 카메라맨들이 동석한 가운데 둘이 간단한 스파링을 펼쳤는데, 이때 흥행을 위한 퍼포먼스용이겠거니… 싶어 설렁설렁하는 알리의 뒤통수에 이노키는 느닷없이 진짜로 엔즈이기리를 날렸고, 공격을 받고 순간 멍한 표정으로 쓰러진 알리에게 연이어 팔십자꺾기까지 해 버린 것이다…. 이노키의 강함을 어필하기 위한 퍼포먼스용으로는 최고의 명장면이었지만, 알리의 기분이 좋았을 리 없다.[3]

그러나 훗날 종합격투기가 성행하면서, 입식타격가와 그래플러가 싸울 때 누워서 싸우는 이노키의 전법이 다시 등장하고, '이노키알리 상태'란 용어까지 생겼다. 덕분인지 일본에서는 누운 채로 상대의 정강이를 차는 기술을 알리 킥이라고 하며, 철권의 킹이 사용하기도 한다. 사실 모션으로 보면 킹의 것은 원조와는 조금 거리가 있으며, KOF의 세스가 사용하는 초필살기 몸 넣기 탄월의 모션이 오리지널에 많이 근접한 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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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알리의 사망 후, TV에서 이노키와 알리의 경기를 다시 방영을 했는데, 당시와는 다르게 많은 반향을 일으켰다. 그도 그럴 것이 그때는 팬들이 종합격투기와 권투의 룰에 무지하고, 경기영상도 흑백 TV로밖에 볼 수 없었지만, 현재는 팬들의 지식 수준도 높아지고 큰 화면으로 영상을 보자 과거와는 약간 다른 평가를 내리게 된 것.

4 이노키 VS 파르완

알리 전에 가려진, 진짜로 이노키를 벌벌 떨게 한 종합격투대회
이노키가 합의된 싸움이 아닌 진짜 실전승부이기에 마지막까지 포기하려했던 대회

사람들이 잘 모르는 대결이지만, 사실 이 대결이야말로 이노키가 벌벌 떨 정도로 과격하고 실제로 치고 박고 싸운 경기다.

현대에는 알리 전(戰)만이 널리 알려져 있지만, 이노키의 종합격투기 노선은 일회적인 이벤트는 아니었으며, 70년대에 지속적으로 1~2번씩 경기를 가졌는데, 그중 같은 해 12월 12일에 절대 잊을 수 없는 경기가 있었다. 그게 바로 파키스탄의 프로레슬러 아크람 파르완(Akram Pahalwan)과의 완전 무규칙 경기였다.

1976년 12월 12일, 파키스탄의 카라치 내셔널 스타디움에서의 대결이 잡힌 이 경기는, 놀랍게도 파키스탄의 프로모터가 먼저 이노키 측에 대결을 제안한 경기였다.

일단 이노키와 싸울 선수인 파르완이 나이가 이노키보다 14살이 많았고, 이미 전성기가 오래전에 지난 프로레슬러였고 낮선 곳에서의 경기이기도 하기에, 큰 협의 없이 경기를 가졌는데… 이것이 큰 화를 불러일으킬 줄은 몰랐다.

이노키는 알리 전 같이 어느 정도의 협의를 해 놓은 상태에서의 경기를 생각했지만, 이 대회는 그냥 말 그대로 두 선수가 링 위에서 무규칙으로 싸우는 대회였다.

이노키의 세컨 측은 이런 상황을 모르고 출전한 이노키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상황에 당황해하는 모습이 아직까지 기억이 난다고 한다.

"내가 이기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기던 오만방자하던 프로레슬러의 모습에서, 정말로 싸워야 되는 상황에 놓이자 인간미적인 모습이 나왔다는 것이다.

그렇게 시합은 시작되었고, 말 그래도 피 튀기는 혈전이 시작됐다.

완력에서 밀리는 이노키가 파르완의 두 눈을 찌르기 시작했고, 이에 파르완은 이노키를 깨물어 버리는 식의 장렬한 혈투 끝에 이노키가 암록으로 인대골절을 시키며 승리를 거뒀다. 경기가 끝나고 이노키의 더러운 플레이에 야유가 쏟아지기도 했지만, 경기는 그럭저럭 좋게 마무리가 되었다.

하지만 이 경기 이후에도 이노키는 공포심이 없어지지 않았고, 오죽하면 이노키는 경기가 끝나고 대기실에 들어가 세컨에게 "신마, 너 이 새끼야!!! 나에게 이런 대결을 하게 하다니!!!"라고 고함칠 정도였다고 하니….

어느 정도인가 하면, 파키스탄 측의 세컨들은 "한 쪽 눈이 없거나, 한 쪽 귀가 없거나, 손가락이 없는 사람들이 즐비했기 때문"이다. 이들에게 싸움과 격투기란, 말 그대로 무규칙으로 "뒈질 때까지 싸우는 그런 터프하고 원시적인 모습"이었다. 이건 뭐 투견도 아니고….

이후 1977년에는 미국 펜실베니아 주의 가라데 / 킥복싱 선수 더 몬스터맨(The Monsterman, 본명 : Everett Eddie)을 전미 가라데 챔피언(…)으로 소개하면서 대결해서 승리했고, 무하마드 알리에게 딱 1번 다운을 빼앗은 것으로 유명한 척 웨프너(Chuck Wepner)와도 경기를 가져 승리했다. 이러한 종합격투기 흥행은 1979년까지 매년 1, 2차례 열었다.

5 이노키즘

프로레슬링이야말로 모든 격투기의 교합점이다, 라는 스트롱 스타일을 제창했던 만큼 실전 격투기에도 관심이 많아 이종격투기 시합을 여럿 치렀고, 링스, 슈토. 판크라스, UFO[4], PRIDE[5]등에 관여하여 초창기 이종격투기 붐을 조성했으며, '이노키 봄바예(INOKI BOM-BA-YE)'란 종합격투기 이벤트를 열기도 했다.

이 당시 봄바예가 PRIDE로부터 에밀리아넨코 효도르를 빼돌리는 바람에, 봄바예 프로모터가 야쿠자들로부터 협박을 받은 적도 있으며, 효도르 외에도 봄바예를 거쳐 간 선수들 중에는 료토 마치다, 리치 프랭클린 등 쟁쟁한 인물들이 많다.

하지만 프로레슬러를 격투기 시합에 보낸 것이 원인이 되어, 이후 일본 프로레슬링계의 몰락을 불러왔단 점 때문에 안티도 많이 있으며, 실제로 프로레슬러 중에서도 이노키를 싫어하는 사람이 꽤 있다. 이긴다면야 문제가 없었겠지만, 이노키가 이종격투기 시합에 내보낸 프로레슬러가 대부분 개발살 당했기 때문이다. 안토니오 이노키가 횡령 혐의로 실각한 후에도 그의 단체인 신일본은 이러한 노선을 어느 정도 유지했다. 이노키와 대척점에 있는 프로레스 러브 무토 케이지는 신일본의 이런 노선에 회의를 느끼고 전일본으로 이적했을 정도.

예를 들어 사쿠라바 카즈시가 프라이드에서 승승장구하자, 신일본은 자기 단체의 레슬러들을 종합 및 입식 격투 무대로 대거 유입시켰는데, 이 격투무대에서의 실적으로 신일본의 벨트가 수여되는 암흑기가 도래하게 된다. 사실 웃기게도 사쿠라바 카즈시는 순수 프로레슬링이 아니라 캐치 레슬링으로 어느 정도 효과를 본 선수였지만, 애당초 오로지 프로레슬링으로 나온 선수들은 그냥 말 그대로 쳐맞고 퇴출당했다. 어쩌다 격투무대에서 승리를 챙긴 야스다 타다오 같은, 절대로 챔피언감이 아닌 레슬러가 신일본 챔피언이 되기도 했고, 밥 샙에게 챔피언 벨트를 쥐어 주지를 않나, 후지타 카즈유키가 정통 프로레슬러인 텐잔 히로요시를 5분여 만에 초살시키고 챔피언이 되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그 중 정점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 종합격투에서 꽤 괜찮은 성적을 올린 나가타 유지가 신일본 IWGP 헤비급 최다방어기록을 수립한 것. 야스다 타다오의 레슬링적 기량은 꽤 문제가 있는 수준이었으나, 나가타 유지는 레슬링 센스와 기량 자체는 출중했지만, 하필이면 효도르와 대전이 잡혀 1분 만에 떡이 되는 바람에 이미지를 된통 구기고 말았다.

어쨌든 초창기 MMA계에도 상당한 영향을 끼친 인물이다. 조쉬 바넷 등 프로레슬링 제일주의를 외치는 MMA 파이터들을 프로레슬링 링으로 불러들이기도 했고, 그의 50주년 기념행사에서 바넷을 비롯하여 팀 실비아, 돈 프라이, 밥 샙 등의 파이터들이 대거 참가해 프로레슬링 시합을 벌이기도 했다.

6 트리비아

일본에서 턱의 상징.

턱이 매우 커서 턱에 대한 비화가 상당히 많은데, 부인이 너무 궁금해서 자는 이노키의 턱 아래에 손가락을 넣어봤는데, 집게손가락이 다 들어가더라… 라는 카더라도 있다. 가도쿠라 겐, 우치카와 세이이치 등이 종종 방송에서 흉내를 낼 정도지만, 정작 이노키 자신은 "내 턱은 사람의 급소인 목 안쪽을 보호한다" 라고 했다는 말이 있다.

심지어 유희왕 내부에서 유명한 AGO의 유래이기도 한데, 공식 작화감독 중 하나였던 카가미 타카히로의 언급에 따르면 "작화 감독을 담당하는 회는 원작을 읽고 성격이나 배경을 생각해 그 장소의 상황같은걸 고려해서 캐릭터에게 연기를 덧붙입니다. 제가 느낀 죠노우치의 이미지는 열혈한이고 솔직하고 쾌활한 형님(+좀 바보)이라는 느낌이었습니다. 거기에 열혈→프로레슬링 좋아함→안토니오 이노키 팬일 게 분명→AGO☆ 가 되었습니다(웃음)"라고. 다만 이 안토니오 이노키의 AGO는 죠노우치 카츠야의 AGO에만 영감을 주었으며, 팬들 사이에서 죠노우치의 AGO보다도 유명한 이노우에 요시카츠의 AGO는 그냥 작붕인 듯.

역도산이 살아있던 시절 자이언트 바바와 16번 대전했으나, 단 한 번도 이기질 못했다.

이노키가 드롭킥 구사를 너무너무 못해서 이에 대해 고심하다가, 결국 드롭킥 대용으로 만든 기술이 바로 연수베기라는 소문이 있다. 하지만 일본 위키에 따르면, 그의 기술 중에 드롭킥이 당당히 올라가 있으며, 도움닫기 없이, 배 쪽 혹은 등 쪽으로 착지하는 등 자유롭게 구사한 것으로 나온다. 또 전성기 때에는 한번에 3연속으로 드롭킥을 사용했다고 한다.

레슬링 경기 도중 너무 힘들어서 중간에 팬티에 대변을 지린 에피소드 때문에, 만화 《괴짜가족》에서는 엄청나게 많은 대변을 보는 국회의원으로 패러디 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괴짜가족》 연재 10주년이 되자 축전을 보내주었다. 오오 대인배.

연예 프로그램에서 투혼빈타(闘魂ビンタ)라 하여 연예인들 뺨을 때리는데, 그 유래는 이렇다.

의원 시절 와세다 대학에서 강연 중 이노키의 복부를 주먹으로 때리는 이벤트를 했었는데, 응모자가 하필이면 소림사 권법 유단자였고, 복부에 맞은 순간 대략 정신이 멍해진 이노키는 반사적으로 응모자의 따귀를 때렸다.
폭행죄로 의원 생명이 위태로운 순간이었지만, 오히려 맞은 학생은 "감사합니다" 라고 인사했으며, 그 후 '저 따귀에 뭔가 있어 보인다' 싶던 재수생들이 자청해서 따귀를 맞았고, 맞은 재수생 전원이 도쿄대학을 갔다는 전설이…

이후 정월이 되면 이노키에게 따귀를 맞겠다는 사람이 줄을 선다고 하는데, 정작 이노키 자신은 거북하게 여긴다고 한다. 이야기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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낫토를 엄청나게 좋아하여 일본 낫토 협회로부터 표창도 받았다고 한다.

카리브해에 개인전용 무인도를 소유하고 있으며, 휴가 때 가끔 사용한다.

1995년에는 평양에서 릭 플레어와 경기를 펼친 일도 있다! #

만화그래플러 바키》에서는 이노키를 모티브로 한 '안토니오 이가리'라는 캐릭터가 나온다. 포지션은 당연히 프로레슬러이며, 이 만화의 특성상 첫 등장시점을 제외하면 취급은 별로 좋지 못한 편. 다만 프로레슬링은 강하다, 라고 피력하는 듯한 전형적인 일본 미디어물 스테레오타입의 프로레슬러 마운트 도바와는 달리, 어디까지나 현실적인 강함의 한계를 지닌 프로레슬러의 모습과, 그것을 기반으로 좋은 쪽이든 나쁜 쪽이든 인간적 면모를 보여주기 때문에 상당히 와 닿는 면이 있다. 대신 저자의 다른 작품인 《아랑전》에서는 이노키를 모티브로 한 '그레이트 타츠미'라는 인물이 나오는데, 이쪽은 최영의를 모티브로 하는 또 다른 극중 인물 '마츠오 쇼잔'과 더불어 작중 최강급의 면모를 보인다.

고교철권 터프》에서도 아이언 키바라는 이름으로 등장한다. 시작은 비열한 악역의 이미지였지만, 주인공 키이치와의 대결 후 마지막까지 최고로 간지나고 감동적인 인물로 탈바꿈했다. 하지만 후속작의 외전에서 등장했을 땐 과거를 다룬 이야기라 그런지 굉장히 치졸했다.[6] 위의 여러 일화 때문인지, 매체에서 그를 오마쥬한 캐릭터들은 대부분 목적을 위해 수단방법 안 가리는 비정한 면이 부각된다.

1989년 스포츠평화당(スポーツ平和党)을 만들고 그해 있었던 참의원 선거에서 비례대표로 당선, 정치인이 된다.[7]

'92년 참의원 비례 대표구 정견 방송' 당시 "세상이 혼란스러울 때가 내가 나설 때다(世の中が乱れ、混乱したときに、俺の出番という)"라는 말을 했다. 그래서인지 이노키의 안티 중에는, 계속 국회의원만 하고 다시는 프로레슬링 업계로 안 돌아왔으면 하는 사람들도 있다.

98년에 현역은퇴와 함께 정계은퇴도 했지만, 2013년 다시 참의원 선거에 출마했다. 그것도 일본 유신회 소속으로#. 그리고 당선되었다. 당선된 지 얼마 안 돼 북한을 방문하여 장성택을 만나고, 원산에 일본 자본 투자를 이끌고, 납북 일본인 문제 해결을 한다고 큰소리도 쳤지만, 장성택이 숙청당하는 통에 헛짓거리 했다는 소리만 듣고 있다.

그러나 이후에도 북한과 접촉을 계속 한 것인지, 이런 결과물을 이끌어 내었다.#

일본 연예인들이 성대모사를 할 때 가장 많이 하는 사람. 성대모사를 한다면 반드시 겐키데스까(元気ですか)!를 해줘야 한다. 러브레터와는 별 관계없다. 성대모사 할때 장난으로 "현금입니까 (現金ですか)!"[8] 라는 바리에이션도 있다. 본인도 이걸 하는중. 곁으로 따라오는건 질문을 받을때 "응?"이라면서 못 알아듣는 척 하는 성대모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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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겡끼데스까!"와 셋트로 이노키 흉내를 낼 때 단골로 쓰이기도 하는 그의 대명사로, "1, 2, 3, 다(ダー)ㅅ!!" 가 있다. 이노키가 간닷!!(行くぞ!!)로 신호를 보내면, 관객들과 함께 "1, 2, 3"의 카운트를 하고, 마지막엔 다함께 주먹을 치켜 올리며 "다----!!"를 외치는 퍼포먼스.

본래 이노키는 승리했을 때 등 기분이 고조되었을 때 "다--!!" 를 외치곤 했는데, 이때는 아직 관객과 함께 외치는 식의 퍼포먼스는 아니었다.

그러던 것이 1990년 2월 10일, 도쿄 돔에서 사카구치 세이지(배우 사카구치 켄지의 부친)와 태그 팀을 짜고, 쵸노 마사히로 & 하시모토 신야 태그에게 승리한 후에 처음으로 관객과 함께 "1! 2! 3! 다-!"를 외치는 퍼포먼스가 탄생했다. 이때 이노키는 "1, 2, 3을 세고 '다!'를 하겠습니다" 라며 몸소 관객과 함께 퍼포먼스의 리허설을 하였다. 리허설을 한 후에 이노키가 이찌~ 니~ 싼~ (하이~) 다!!!~ 중간에 (하이~)넣어 관중들이 리듬에 맞출 수 있도록 했다

그 후로도 이 "1, 2, 3, 다-!!"는 이노키의 대명사가 되어, 시합 후의 마이크 퍼포먼스는 물론 은퇴 후에도 이노키가 등장만 했다 하면, 때와 장소를 불문하고 마무리는 어디서나 1, 2, 3, 다-!! 를 외치는 것이 약속처럼 되었고, 이노키를 상징하는 프레이즈가 되었다.

참고로, 이 "1, 2, 3, 다-!!"는 상표등록마저 되어 있다. 심지어 소문에 의하면, 이 "1, 2, 3, 다-!!"를 외치는 것만으로도 300만엔 상당의 개런티가 발생한다고 한다. 믿거나 말거나.

테마곡으로 《불꽃의 파이터 이노키 봄바예~》라는 곡을 쓰는데, 이건 사실 무하마드 알리가 자신의 전기 영화 "THE GREATEST"의 테마곡인 ALI BOM-BA-YE를 이노키에게 준 것이다.

정치 성향을 말하자면 전형적인 일본 우익. 물론 위안부 문제 등을 대놓고 걸고 넘어지는 하세 히로시[9] 정도는 아니지만 자민당 소속의 우익.

지금은 일본을 건강하게 하는 모임 소속 이었으나 당 대표가 되었다. 그리고 2016년 9월에 다시 방북을 하였다. #

현 IGF의 자금을 이용해 투자를 하기도 한다는데 그 중 하나가 바로 무한 동력이라고 한다.
  1. 본명은 이노키 칸지(猪木 寛至).
  2. 저 룰 조차도 이노키가 자신을 포장하기 위해 자서전에서 주장한 게 사실처럼 받아들여졌다는 말이 있다.
  3. 실제로 당시 통역상의 문제로 알리는 시합 자체를 흥행용 쇼라고 알고 있었고, 시합 6일전의 공개 스파링 날에 이노키 측에게 리허설은 언제 하냐고 물어봤는데, 이노키 측에서는 실전 시합인데 리허설이 어디 있냐고 했고, 그제서야 실전 시합인 걸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고 한다. 알리측은 공개스파링 당일 아침까지 워크시합이라고만 알고 있었던 것.
  4. 초기 종합격투기 단체들 중 하나. wiki:"UFC" 와는 관련 없다.
  5. 그런데 이 경기들은 프로레슬링 거품이 꺼지면서 자연스레 지금의 종합격투기의 모습으로 변화하였다. 초창기에는 프로레슬링과 이종격투기의 사이 정도 되는 모습이었다. 아무래도 프로레슬러들을 위한 경기라서.
  6. 과거를 다룬 이야기때문에 그런 것도 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이노키에 대한 평가가 하락했기 때문에 이렇게 그려졌을 가능성도 있다. 앞서 언급했듯이, 2000년대 중반 이후 이노키는 프로레슬링 몰락의 주범으로 위상이 많이 낮아졌기 때문. 90년대에 연재한 1부에선 비열하지만 강력한 캐릭터로 나오는 데 반해 2000년대에 연재한 외전에선 프로레슬러 최강론을 외치다가 전직 군인인 엑스트라 격투가에게 맞는 역할로 나오는 등 너프를 먹었다.
  7. 당시 이 당에 대해 설명하자면, 스포츠 정신을 정치에 집어넣어 국민이 건강하게 함으로써 세계평화를 이룩한다는 신념의 당이다.
  8. 현금을 일본어로 말하면 "겐킨"이기 때문에 생긴 말장난
  9. 파일 드라이버 항목에 스타이너 스크류 드라이버를 맞는 인간. 2016년 현재 일본 장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