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파(삼국지)

1 후한 말과 삼국시대 촉나라의 인물

촉서 「동류마진동여전(董劉馬陳董呂傳)」
동화유파마량마속진진동윤여예

劉巴
(? ~ 222)

후한조조, 유장 휘하의 인물이자 삼국시대 촉나라의 인물. 자는 자초(子初). 유상의 아들.

그의 일생을 보면 허정에 버금가는 망명객으로 유비를 피해 열심히 도망친 도망자.

본래 형주 사람으로 유표의 객으로서 신야에서 머물던 시절의 유비가 신동으로 유명한 주불의의 스승으로 초빙하려 했으나 거절했다. 이후 유비가 유표 사후 남하할 때 여러 신하들과 백성들이 뒤를 따랐으나 그는 가지 않고 대신 조조의 휘하로 들어갔다. 이후 조조에게 형주 남부 4군을 복속시키라는 명을 받았다. 유파는 "거기 가다가 유비 만나면 어쩌나염, 전 싫음"이라고 하자 조조는 "그럼 내가 군대(원문은 육군, 즉 천자가 이끄는 군대를 친히 보내준다고 되어 있다.) 보내 보호해줄께"해서 겨우 남하했다. 유비가 적벽대전 이후 형주 4군을 공략하여 점령하였고 이때 유파는 영릉에 거주하고 있었으나 유비가 초빙하려 하자 그대로 교지 땅으로 피신해서 성씨를 장(張)씨로 고쳤다. 하지만 교지 태수 사섭과는 뭔가 맞지 않았고 그래서 다시 망명했는데 하필 망명한 곳이 촉 땅이었다(...). 안될 놈은 뭘 해도 안된다 그땐 유비가 촉 먹을 줄 몰랐겠지 촉으로 들어가서도 목숨의 위기를 겪으나 촉의 관리가 그를 예사롭지 않게 보아 추천, 유장의 막하로 들어갔다.[1]

이후 유장의 밑에서 일을 하고 있었으나, 유비가 익주로 침공을 감행하여 점령하였을 때 다시 도피하려고 했으나 붙잡혔고, 제갈량이 "너 님 이제 튈 데도 없음, 걍 따르시죠?"라고 설득하자 별 수 없이 유비에게 사과하면서 굽히고 들어갔고 유비도 매우 기뻐하며 받아들여 그야말로 삼고초려에 필적하는 쫓고 쫓기기 끝에 유비의 밑에서 일하게 되었다.그때 촉으로 가는게 아니었어 이후 유비가 익주 함락 후 국고가 부실한 것을 걱정하자[2][3] "걱정마셈, 백 전 어치 값을 하는 동판을 유통시키고, 물가를 통일하며, 공매제를 시행하면 됨"이라고 조언을 하여, 화폐개혁 정책으로 단 몇 개월만에 부고를 충실하게 하여 자신의 능력을 입증했다. 해낸 사람도 대단하지만 이런 사람일 줄 알아보고 집요하게 쫓아다닌 유비도 대단하다. 그리고 그 어렵다던 화폐개혁을 껌씹듯이 해결해버린 유파의 정치력은... 단, 이는 결국 유파가 소위 충의지사는 절대 아니라는걸 일러주는 일화이기도 하다. 유비 밑에 출사하기 전의 이력을 보면 유표, 조조, 사섭, 유장으로 계속 말을 바꿔탔고 그들의 녹을 받아먹었으며 그렇게 싫어하는 유비 밑에서도 끝까지 뜻을 관철시켜 죽음을 불사하는게 아니라 각종 중임을 수행하며 녹은 잘 받아먹었다.

유비의 황제 즉위를 명분없는 즉위로 비꼬았으면서도 촉한의 건국 후 공문서는 그가 전담하다시피 했고, 국호와 연호도 그가 만들었으나, 여러 사료 등을 살펴보면 그가 여전히 유비에게 충심으로 사관하였던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이쯤되면 도대체 왜 이렇게 유비를 싫어하는지 궁금할 정도인데 기록이 없어 알 수는 없다. 한 마디로 미스테리한 인물.

제갈량, 이적, 법정, 이엄과 함께 촉한의 법률인 '촉과'를 만든 사람이기도 하다. 유비에게 비우호적인 그에게 법 제정을 맡긴 이유는 단지 그가 뛰어난 학자였을 뿐만 아니라, 촉나라 내의 다양한 이해관계와 의견들을 수용해 편파적인 법 제정을 막기 위해서였다는 의견도 있다.[4]

유파가 유비에게 투항하자 평소 식자를 경애했던 장비는 이를 경축하기 위해 유파의 숙소로 찾아갔다. 그런데 유파는 장비가 일개 무인에 불과하므로 같이 이야기를 나눌 바가 못된다고 여겨 무시하였고 이는 장비를 격노시켰다. 이 일화는 오에게까지 전해져 손권과 장소가 이 일에 관해 의견을 주고받기도 했다. 정황을 알게 된 제갈량은 유파에게 글을 보내서 통일대업을 중히 여겨 단결해야 함을 강조했다. 또 상서 양의와도 사이가 좋지 못했다. 사이가 좋을 수가 없었던 게 둘 다 능력이야 좋았지만 유파는 유비에게 충성심이 없는 인물이었고 양의는 제갈량 사후에 드러나듯 성격이 심하게 모나서 그런 유파를 참고 넘길 도량이 없었다.근데 장비와의 일화를 보면 유파도 꽤 모난 성격이었긴 한 거 같다 어떻게든 유파를 안고가려 했던 유비는 양의를 좌천시키면서 유파를 계속 중용했다.

한 술 더 떠서, 유파는 유비의 제위에 반대하는 상소를 올리기도 했다. 상소 내용도 '크지 못함을 드러내는 꼴'이라며 신랄한 촌평. 그러나 유비는 유파의 재능을 아껴 같이 상소를 올린 옹무만 처형하고 따로 상소를 올린 비시는 좌천 보낸다. 이와 관련된 추리로 유파가 촉 내부에서 반 유비파의 우산 역할을 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건안 24년(219)에 유비는 결국 한중왕이 되었으며, 유파는 상서가 되었고, 후에는 법정을 대신하여 상서령이 되었다. 그는 몸소 청렴하고 질박한 생활을 하였으므로 재산을 증식시키지 않았다. 또 자신이 유비를 따르는 것은 본래의 마음이 아니었으므로 의심을 받게 될 것이 두려웠다.

그래서 공손하며 말없이 조용한 태도로 견지했으며, 집으로 돌아와서는 사사로이 사귀지 않고, 공적인 일이 아니면 말하지 않았다.

이릉대전 무렵인 222년(장무 2년)에 세상을 떠나 결국 죽음으로서 유비에게서 벗어나기는 했지만 1년 후 유비도 사망하여 저승으로 따라온다.어떻게 죽어서까지 벗어날 수가 없냐

밑의 정남장군 유파와는 엄연히 다른 인물이다.

1.1 미디어 믹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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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 11
삼국지 12,13

삼국지 시리즈에서는 위의 일화에 따라 내정 요원으로 나온다. 다만 유비까라는 특징 때문에 네임벨류가 별로 없어서 능력치는 별로 좋지 않은 편.

삼국지 3에서는 육지53 수지25 무력54 지력70 정치62 매력49로 등장한다. 상업투자를 통한 좋은 금공급원이다. 에디트로 손질해서 지력과 정치를 맞바꿔 놓으면 그야말로 최고의 금 공급원. 왜인지는 모르겠으나 수명이 길어서 시나리오 6에서도 66세의 나이로 등장한다.

삼국지 9에서의 능력치는 통솔력 19/무력 20/지력 72/정치력 80. 혼란과 매도가 있긴 하지만 내정 위주로 굴리는 게 낫다. 굳이 중용되는 때가 있다면 적벽대전 시나리오에서 형남4군 군주로 할 경우. 이 지역을 배회하는 재야장수가 유파 한명 뿐인데 이 지역의 지력 70을 넘기는(군사를 일단 할 수라도 있는) 무장 역시 유파 한명 뿐이라서 형남4군 어느 세력을 하든 최우선 등용 장수가 되어 버린다. 그런데 가끔 재수좋게도(?) 장완이 익주에서 이쪽으로 넘어오는 경우가 벌어지면 이마저도 빛이 바랜다.

삼국지 10에서는 통솔력 13/무력 22/지력 74/정치력 78/매력 56의 능력치로 등장. 명사 특기가 있는 걸 제외하면 변변치 않다.

정사의 기록과 달리 삼국지 11에선 유비와 혐오무장 관계가 아니다. 어쨌든 유비 밑에서 벼슬은 했으니까. 다만 장비, 양의하고는 혐오무장 관계이다.

2 삼국시대 촉나라의 인물

劉巴

생몰년도 미상

삼국시대 촉나라의 인물.

제갈량의 4차 북벌 중 벌어진 노성 전투에서 공명은 사마의를 이기고 후방을 기습한 장합 마저 패퇴시켰다. 그러나 수송 임무를 맡던 이엄이 장마비로 인해 군량 운반을 원활하게 못하게되자, 사람을 보내 제갈량에게 후퇴를 권고하였는데, 이엄은 딴마음을 품어 보급품이 충분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승상(제갈량)은 굳이 군사를 물렸다고 조정에 거짓 보고를 올려 제갈량을 모함했다. 제갈량은 편지를 공개하여 모든 사실이 드러나게 되었고 제갈량은 상서대에 이엄을 탄핵하는 공문을 올리게 되었다.

탄핵문의 내용은 이엄을 해임하고 그의 관록과 절전 그리고 인수와 부책 등을 없애고, 더불어 그에게 주어진 작위와 봉지 등을 박탈하기를 주청하는 것이였으며, 공명이 서명하였다. 더불어 이와 같은 탄핵문에 언급된 인물 중에서는 원침, 허윤, 정함, 상관옹, 염안, 두의, 성발, 번기 등도 있으나 그들에 대한 행적은 알려진 바가 없다. 상서대에 올린 공문에서 유파는 행전감군정남장군의 작위에 있었다

삼국지연의에서는 제갈량이 유선으로부터 북벌을 허락받아 유선의 조서를 받고 승상부로 돌아와 장수들을 불러 각자 맡게 될 작위와 임무를 부여하였는데, 유파는 전장군 정남대장군으로 임명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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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이때 유비는 이 소식을 듣고 매우 안타까워 했다고 한다. 인재 보는 눈이 있는 유비가 이럴 정도면 상당한 능력은 가지고 있던 것 같다.
  2. 이 부분에서 촉서 선주전과 유파전 주석 영릉선현전은 사실 세세한 부분에서 서로 충돌하고 있다. 영릉선현전에는 유비가 나는 성도의 부고를 안 건들겠다고 선언했지만 선주전 서술로는 유비가 성도의 항복을 받아내고 직접 촉성의 금은을 취해 제장들과 병사들에게 나누어주고 군졸들에게 크게 베풀었다라고 되어 있다. 사실 장비전이나 화양국지에 유비가 제갈량, 관우, 장비, 법정을 비롯한 제장들에게 물품을 하사했다는 직접적인 기록도 있기 때문에 실제로 부고를 연 주체는 익주의 행정을 장악하고 논공행상을 시행했을 유비일 가능성이 더 높다. 또 영릉선현전은 군용물자가 부족하다고 되어 있는데 선주전에선 곡식과 비단은 되돌려 보냈다는 기록이 있다. 한 마디로 정사 본전인 선주전에 따르면 익주의 창고가 무조건 고갈되었다고 보기엔 무리가 있다.
  3. 물론 자치통감에도 있는 에피소드고 중국어 위키백과에선 '유비 입촉이후 파촉 재정이 혼란하니 직백전 발행을 제안하며 물가를 평행하게 하여 문제를 해결했다. 이후에도 계속 화폐가 꾸준히 발행되어 위와 오에도 화폐가 통행되었다.'는 내용이 있으며 중국위진남북조경제사라는 책에선 '익주 평정후 직백전(直百錢)을 주조해 물가를 안정시키고 수개월만에 국고를 충실케 했는데 전시의 특수한 경우이긴 하지만 화폐의 작용을 잘 보여준 사례라 할 수 있다.'라고 쓰여 있고 바이두 백과 직백오수 문서에도 '오랜 정벌로 재정이 불안해졌는데 큰 값을 가지는 화폐로 간신히 유지시켰고 직백전 발행은 촉한의 경제 발전에 즉각적인 영향을 주었으며 이로서 부고가 충실해졌다.'라는 기술이 있는 등 직백오수를 발행한 것은 사실이다.
  4. 제갈량은 신야 시절부터, 이적은 유표 세력이었다가 유종조조에게 투항한 후, 법정은 입촉 직전, 이엄은 입촉 후에 유비군에 가담한 인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