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후한 말과 삼국시대 촉나라의 장수
『촉서』 「유팽요이위양유전(劉彭廖李劉魏楊傳)」 | ||||||
유봉 | 팽양 | 요립 | 이엄 | 위연 | 양의 | 유염 |
위연석소상
魏延
(? ~ 234)
1.1 개요
자는 문장(文長). 형주 북부 신야 의양 사람으로 등애, 등지와 동향이다.
진수의 정사 삼국지에서는 용맹하고 사졸을 잘 양성하여 많은 공적을 쌓았지만, 동료들과 화목하게 지내지 못해 분란을 조장한 위험인물로 기록되었다. 소설 삼국지연의에서도 등장부터 옛 주인을 배반하고 '반골의 상'으로서 제갈량의 죽음에도 책임이 있지만, 실질적으로는 나름대로 버프를 받은 캐릭터가 되었다.
양의와 매우 사이가 안좋았는데 위연도 성격이 좋은 사람은 아니었지만 다른 사람들은 그래도 똥이 무서워서 피하나 더러워서 피하지란 식으로 충돌을 피했는데 반해, 양의만은 위연 앞에서도 굽히지 않고 꼬장꼬장하게 나오는 바람에 사이가 최악이었다.
1.2 정사
1.2.1 초기 생애
위연은 유비의 부곡(部曲)이었다. 부곡이 노예나 노비와 같이 천한 출신이라는 의미로 보아 천민에서 출세한 인물로 오해할 수 있으나, 부곡이 노예나 노비 같이 천한 대우를 받는 시기는 남북조시대부터이고, 삼국지시대 부곡은 사병을 뜻한다. 물론, 일개 병졸에서 시작하여 장군의 지위까지 올랐으므로 밑바닥부터 고생을 하면서 자수성가를 해낸 입지적인 인물로 개천에서 용난다의 케이스라고 할 수 있다.
입촉한 이후 여러 차례 공을 세워 아문장군에 오르고, 장비를 제치고 한중방면을 수비하는 독한중(督漢中)으로 발탁되었다. 이 결정은 대소관료들은 물론이고 장비 자신도 스스로가 임명될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기에, 파격적인 인사로 받아들여졌다. 이에 의문을 표하는 사람들이 나타나자, 유비가 두말 않고 공식석상에서 위연에게 '이 중임을 그대는 어떻게 할 것인가?'라고 물었다. 위연은, "대왕을 위해 10만의 병사를 조련할 것이며, 적들이 공격해오면 대왕을 위해 그들을 집어삼킬 것입니다."라고 대답하여 좌중이 모두 감탄하였으며, 그 뒤로 다른 사람들은 아무런 불만이 없었다고 한다.
다만 이 시기 한중은 한중 공방전 직후로 사실상 유비의 본대가 주둔하고 있는 거나 다름없는 상태였음을 감안할 필요도 있다. 요컨대 실제로 위연이 한중에 전적인 책임을 질 일은 없었다는 것. 다만 이것이 위연에 대한 폄하가 될 수는 없다. 한중의 중요성은 이 시기에도 분명했고, 위연의 역할이 결코 작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문제는 위연이 한중 방어를 전적으로 책임졌다는 식의 해석인데, 유비 사후부터 제갈량의 북벌 이전까지는 그렇게 해석할 수 있지만, 최소한 유비 생전에 한중 방어는 유비가 직접 정한 대로 이루어졌지, 위연의 판단이 작용할 여지는 생각 외로 크다고 보기 어렵다.[1]
여기까지 위연의 모습은 '유비의 직속 부하'로서 유비의 눈에 띄어서 유비가 키워주는대로 착착 계급이 올라가면서 중임도 맡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221년에는 진북장군에 제수되었고, 223년에는 도정후의 작위에 올랐다.
1.2.2 제갈량의 북벌
유비 사후에는 북벌에 나선 제갈량을 수행하는 동안, 한신의 고사를 따라, 제갈량에게 1만의 군사를 청하여 자신의 군대가 제갈량의 본대와 동관에서 합류할 것을 제안했다고 한다.[2] 하지만 매번 받아들여지지 않았는데, 이 때문에 제갈량을 겁쟁이라고 말하며 한탄했다고 한다. 그러나 제갈량은 오히려 232년에 위연과 유염이 불화하자 유염을 질책하고 성도로 보내기까지 했다. 적어도 연의처럼 제갈량이 위연을 반골의 상으로 생각했다면 나올수 없는 행동이다. 촉서 양의전에 따르면 제갈량은 양의의 재간을 아끼고 위연의 용맹함에 의지하니 두 사람이 화목하지 못함을 늘 한스럽게 여기며 차마 어느 한 쪽을 폐하지 못했다고 한다.[3]
229년까지 연달아 촉군의 도전을 받은 위는 조진의 주도로 230년에 반격을 실시, 세 갈래 길로 공격해 왔으나 때마침 쏟아진 폭우로 아무것도 못해보고 퇴각한다. 그 직후 위연은 제갈량의 명을 받고 오의와 함께 강중으로 출진해 비요, 곽회 등의 군사를 대파하는 전공을 세운다. 이 공로로 전군사 정서대장군에 올랐으며 남정후에 봉해졌다.
231년에 이루어진 4차 북벌 때 제갈량은 농서로 진출하여, 상규의 보리를 두고 위군과 대치하다 노성에서 한차례 접전을 펼친다. 한진춘추의 기록에 의하면 제갈량의 명을 받은 위연이 오반, 고상과 함께 출진하여 사마의가 지휘하는 위군을 격파하고 3천의 수급을 얻는 승리를 거둔다.
이 전투의 결과는 진서 선제기와 한진춘추가 각기 전하는 바가 다른데, 진서 선제기는 위군이 대승을 거뒀다고 기술한 반면 한진춘추에는 촉군이 이겼다고 기록되었다. 같은 사건에 대해 두 사료가 정반대의 결론을 지니고 있는데, 삼국지, 위략, 한표전, 화양국지, 한진춘추 등이 모두 진서 선제기의 기록을 따르지 않고 있고 왕명성, 임국찬 등 진서에 각주를 단 사가들도 선제기 기록을 비판하고 있으며 4차 북벌의 전후 사정을 고려해 볼 때 한진춘추의 기록이 맞다고 보인다.[4] 진서와 한진춘추를 취합한 사마광의 자치통감도 승패 부분은 한진춘추를 따랐다.
1.2.3 제갈량 사후, 내분을 부르다
사진의 위연은 요코야마 미츠테루 삼국지를 패러디한 위연.
234년, 5차 북벌 중 위독해진 제갈량은 장사 양의, 사마 비의, 호군 강유를 불러 자신이 죽고 난후 철군할 것을 명했고, 위연에겐 후군을 맡아 추격하는 위나라의 군대를 요격하는 임무를 맡겼다. 양의는 비의를 보내 위연의 의중을 파악하게 했는데,
"승상은 비록 죽었지만 나는 건재하오. 승상부의 측근 관속들은 영구를 운구해 돌아가 장례를 치르고, 나는 직접 제군을 지휘해 적을 공격해야 마땅하오. 어찌 한 사람이 죽었다고 천하의 일을 내팽겨 칠수 있겠소? 더구나 나 위연이 어떤 사람인데, 양의의 지휘를 받아 뒤를 끊는 장수가 되란 말이오." - 위연전 |
죽은 승상과 동료들을 대하는 태도가 참으로 패기 넘친다.
품계기준으로 따진다면, 정서대장군인 위연이 양의나 비의보다 지위가 높다. 그러므로, 일반적인 상황에서는 총사령관 다음가는 위연이 군권을 대신할 수도 있다. 그러나 철수 작전은 제갈량이 죽음에 앞서 입안했으며, 양의와 비의는 그 실행을 대신하는 입장이었다. 즉, 위연은 군인으로서 판단을 내린 것이 아니라, 승상 제갈량(통수권자)의 명령에 꼬장, 항명을 부린 셈이다.[5] 제갈량도 이를 짐작했는지,위연에게 뒤를 끊게 하고 강유에게 그 다음에 있게 하며 혹 위연이 명을 따르지 않더라도 군이 곧바로 출발하도록 했다.
그 후, 촉군 본대가 제갈량의 유명에 따라 여러 군영들이 차례로 군사를 이끌고 퇴각하는 것을 보고, 격노하여 본대보다 한발 먼저 직속부대를 이끌고 남하해서 촉으로 돌아간 다음, 촉으로 통하는 잔도를 불태워버려 촉군 본대 7~8만을 적지에서 전멸시킬 뻔하는 사이코짓을 저질렀다.[6] 이렇게 본대의 퇴로를 끊은 후, 위연은 양의가 반역을 저질렀다고 모함하는 표까지 올렸다. 조금 늦게 촉땅에 들어선 양의 역시 촉 조정에 장계를 보내 위연이 반란을 일으켰다고 알렸다.
성도에서 유선은 동윤, 장완과 더불어 의논했고, 둘은 양의 편을 들고 위연을 의심하였다.[7] 장완은 직접 토벌군을 이끌고 출병했다. 왕평은 사리를 들어 감히 승상을 거역하는 점과 위연의 잘못을 들어 설득하자, 위연의 사졸들이 잘못이 위연에게 있음을 알고[8] 명을 받들지 않으니 군이 모두 달아났다.[9] 위연은 아들과 함께 마대의 군대에게 주살되었으며, 양의는 마대가 보내온 위연의 머리를 마구 발로 차며 욕을 하였다. 그리고 그의 일가족들은 주살당했다. 여담으로 양의도 위연을 제거한 후 높은 지위를 차지할 것으로 여겼으나, 생각보다 높은 자리에 오르지 못했다. 그는 비의에게 한탄하며, "차라리 승상이 사망했을 당시에 그냥 위씨[10]를 따르는 게 나을 뻔 했다."고 말하며 넘지 말아야할 선을 넘어버렸고, 결국 양의도 실각당해서 자결한다.
능력은 우수했지만 성격에 심각한 문제가 있었던 두 사람이 중재자였던 제갈량 사후에 충돌해 자멸해버린 것이다. 전쟁도 아니고 내분으로 우수한 인재 둘을 잃어버렸으니, 이미 제갈량을 떠나보낸 촉에게는 커다란 손해였다.
삼국지연의는 이 사건을 위연의 반란으로 기술했지만 실제 위연의 본심이 정말로 촉한 조정에 반역을 일으키려던 건 아닐 가능성이 높다. 일단 사료에서 반란이 언급되는 부분은 양의와 위연의 서로 고발을 제외하면 없기도 하고 당초 장완은 이 소식을 듣고 숙위(宿衛)하는 여러 영(營)들을 이끌고 북쪽으로 부난(赴難-국난을 구하기 위해 달려감)했는데 수십 리를 가다 위연이 죽어 돌아왔다고 되어 있다. 어디까지나 "의심"이었을 뿐 확정한 것은 아니었고, 위연이 죽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군사를 되돌린 것이다. 위연이 정말 촉에 반역하려 했다면 위나라로 도망갈수도 있었겠지만 아들들과 도망한 곳도 생전 유비가 그에게 보직을 맡겼던 한중이었다.
다만 어찌되었거나 위연이 저지른 행위가 나라에 큰 해를 끼칠수 있는 너무나 위험천만한 짓이었다는 점, 위연의 3족을 멸했다는 기록을 보건대, 적어도 이런 행위로 인해 반역자 취급까진 아니어도 반역에 준하는 처벌을 받은것은 사실인 듯 하다. 양의와 마찬가지로 그 역시 넘지 말아야할 선을 넘어버렸던 것이다. 또한 성격 문제에다가 대놓고 팀킬을 저지른 위연이 나중에 궁지에 몰려서 적국인 위에 투항하지 않았을 거라는 보장 역시 냉정히 말해 없다. 위연이 한중으로 도주에 성공해 반군 세력을 갖춘 후 여차하면 위에 투항했을 경우 촉의 멸망은 훨씬 앞당겨졌을지도 모른다.
1.3 평가
진수는 유팽요이위양유전(劉彭廖李劉魏楊傳)의 평에서 위연에 대해 이렇게 평한다.
(중략) 魏延以勇略任, (중략) 覽其擧措, 跡其規矩, 招禍取咎, 無不自己也 위연은 용략으로 임명되었다, (중략) 그들의 행동거지를 살펴보며 예법을 되짚어 보건대 화를 부르고 허물을 취함에 있어서 자기 자신에게서 비롯되지 않은 것이 없다. |
한 마디로 처형당한 것은 모두 위연의 자업자득이라는 얘기다. 또한 그 이전에도 위연전의 본문에서 그가 양의와 불화했음을 꼬집으며 운신의 결점을 지적했다.
延旣善養士卒, 勇猛過人, 又性矜高, 當時皆避下之. 唯楊儀不假借延, 延以爲至忿, 有如水火. 위연은 사졸을 잘 양성하고, 다른 이들보다 용맹하고, 성정이 교만했으므로, 당시 사람들이 모두 그를 피하고 양보했다. 오직 양의만이 위연에게 가차없어, 위연이 노하니, 마치 물과 불 같았다. |
다만 진수는 위연전 마지막 부분에서 이렇게 평한다.
원래 위연의 뜻은 북쪽으로 위나라에 항복하는 것이 아니고 남쪽으로 돌아오는 것으로 다만 양의 등을 제거하고자 한 것이다. 평소 제장들의 의견이 서로 같지 않았는데, 시론(時論)이 필히 자신이 제갈량을 대신해야 한다는 것이길 바란 것이다. 본 뜻이 이와 같았으니 배반하려는 것은 아니었다. |
진수의 평에 따르면 결국 제갈량 이후 그 후임은 자신이 되어야 한다는 지나친 자부심이 위연에게 화가 되어 돌아온 것이다. 일종의 츤데레? 그가 그토록 싫어했던 양의도 비슷한 생각으로 자멸했던걸 생각하면 두 사람의 관계는 일종의 동족혐오 였을수도 있겠다.
위연은 성정이 거셌고 다른 이들과 불화했는데 이는 높은 지위에 앉은 사람으로서 큰 결점으로 작용했고 결국 그를 파멸로 이끌었다. 따라서 위연에 대한 진수의 인물평은 매우 박하다. 그리고 이는 위연 뿐 아니라 같이 묶인 유봉, 팽양, 요립, 이엄, 양의, 유염 등도 모두 마찬가지. 이들은 모두 뛰어난 인재들이었으나 바르지 못한 처신과 행실로 인해 말로가 비참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1.3.1 장수로서
연의의 영향인지 돌격형 맹장으로 곧잘 묘사되나, 용략(勇略 - 용기와 지혜를 두루 갖춤)으로 임명되었다는 진수의 평처럼 지용을 겸비한 장수다. 부곡의 낮은 신분으로서 여러 차례 전공을 세워 장군이 된 인물로 난세 덕분에 신분상승의 기회를 얻은 케이스라고도 볼 수 있다. 이런 배경이 그의 유별난 성격과 관련 있을 수도 있는데, 밑바닥에서 시작해 자신의 능력만으로 고위직에 오른 자수성가형 인물들은 자부심과 고집이 남다른 경우가 많다.[11]
위연의 가장 큰 공으로는 230년 오의와 함께 양계에서 곽회와 비요를 격파한 일, 231년 노성에서 고상, 오반과 함께 사마의군을 대파한 일이 꼽힌다. 양계전투는 촉군이 위를 상대로 거둔 가장 큰 승리 중 하나였고, 이로 인해 정서대장군에 후작까지 받는다. 어지간히도 큰 공으로 여겨진 듯 하다. 제갈량의 생전 촉군이 위를 상대로 얻은 승리라면 강중전투와 노성전투를 들 수 있는데, 이 두 전투도 모두 위연의 주도하에 이루어졌다. 애초에 인재보는 눈이 남달랐던 유비가 그 장비를 제쳐두고 중임을 맡겼을 정도이니 능력면에선 의심의 여지가 없다.[12]
또한 사졸을 잘 양성했다(旣善養士卒)는 기록으로도 알 수 있듯이, 단순히 전투에서만 활약한 것이 아니라 한중 방면의 군대를 양성하는 업무에도 능했다. 제갈량의 북벌 시절 촉이 보여준 강성한 전력에서, 위연의 사병들이 정예부대로 활동했던 것도 무관하지 않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제갈량이 기산으로 출병할 때도 선봉으로 숙장인 위연, 오일(오의) 등이 추천되었다는 것을 봐도 나라의 내외적으로 능력은 인정받았던듯 하다.
하지만, 군인으로서의 충성심과 관료로서의 마음가짐 부분에서는 낙제다. 나관중이 (위연의 능력을 극찬하면서도) 괜히 위연을 반골이라고 깐 것이 아닌 것이, 통수권자가 죽든 말든 하고 싶은대로 하겠다 행태만 봐도 엄청난 위험인물이었다. 상관인 승상마저도 대놓고 무시했던 것으로 보이는 위연이 자멸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사실 유비한테는 충신이었다. 제갈량의 경우 같이 쳐맞던 주제에 이래라 저래라 하니 말을 안 듣는게 당연하다.
오나라 초대 황제 손권도 그를 소인배로 보았다.[13]
1.4 연의
연의에서는 수혜자로 보는 사람들도 있고,피해자로 보는 사람들도 있다. 다른 평면적인 인물들과 차별화되는 이른바 반골의 상으로 인하여, 고전소설 답지않게 세심하게 복선을 깔고 묘사에 신경을 많이 쓴 입체적인 캐릭터다. 2세대 촉장들은 오호대장군과 그 후손들에 밀려 묻혀버린 케이스가 많은데, 조조를 활로 쏴서 이빨 몇개를 부러뜨리고 낙마시킨 뒤 목을 베기 일보직전까지 갔다가 휘하장수들의 반격으로 물러나는 장면도 있고, 일기토 전력도 꽤 화려한 버프를 받았다. 왕쌍을 베어버리는 등, 전반적으로 보자면 굉장히 드라마틱한 인생을 보내다가 비극적인 최후를 맞는 인물.
정사에서는 본래 유비의 부곡 출신이었다는 것과는 달리, 왠지 다른 진영에 있는데 뜬금없이 엄청난 유비빠 짓을 반복하면서 상당히 인상적인 등장을 반복한다.
유표 사후 유비가 백성들을 이끌고 형주성 앞에 도달했을 때 유종군의 일원으로 첫 등장한다. 이때 채모, 문빙과 싸우며 유비에게 길을 열어주려고 하나 실패한다. 유비는 갈길이 급하고 형주성을 놓고 싸우고 싶지 않아 장판파 쪽으로 도망가버리고, 위연은 유비를 따라가려고 하니 뒤쳐저벼렸고 반란을 일으킨 만큼 형주에 남을 수도 없어서, 남쪽으로 달아나는 것을 선택한다.
여기서 장사태수 한현의 수하로 있다가, 유비가 형남 4군 평정에 나서자 관우와 황충의 대결이 벌어진다. 한현이 황충을 오해하여 처형하려 하자, 의로운 장군을 죽이려는 처사에 분개하여 상관을 죽이고 유비에게 투항한다.
관우군이 겨우 500명 이었던 점을 고려하면, 장사 함락에 가장 큰 공을 세운건 분명 위연이었다. 이렇게, 환대를 받으며 유비 진영에 합류하는 듯 했는데, 별안간 제갈량에게 "반골의 상이 있다."며 처형당할 위기에 놓인다. 제갈량은 위연의 불충불의한 배신행각(형주에 대한), 그리고 관상을 보니 훗날 반드시 반역을 꾀할 상이니, 후환을 없애야 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유비의 만류로 살아난다.
아무튼, 유비군의 일원이 되어서 입촉과 한중 공방전때 공을 세우고 오호대장군 다음 가는 위치가 된다. 하지만 공격적이고 전공 욕심이 강해서 냉포와 싸울때 황충과 공을놓고 살짝 마찰을 빚기도 했고, 가맹관 전투 때는 마대의 계략에 말려 부상을 입었다. 또 제갈량이 자오곡 계책을 받아들이지 않자 이걸 두고두고 마음에 담아두었다. 그래도 후기의 필두 명장으로 대접받아 공적도 많이 세운다.
그런데 제갈량이 오장원에서 자신의 목숨을 연장시키려고 북두칠성에 기도를 하는 가운데, 위군이 습격해오자 장막에 들어오지 말라는 지시를 무시하고 헐레벌떡 들어갔다가 그만 기도를 망쳐버린다. 제갈량은 의식이 실패했음을 알고 안타까움에 한탄하며, 다른 촉장들은 위연을 죽여버리자고 분노하는데 제갈량은 결국 위연이 들어온 것도 하늘의 뜻이었다며 위연을 용서해준다.그러면서 사실은 마대에게 제갈량 사후, 퇴각을 하다가 정사와 비슷하게 반란을 일으키는데 이 때 마대를 끌어들여서 일을 꾸민다.
최후도 굉장히 드라마틱한데, 제갈량은 죽기 전 "위연이 모반하거든 열어보라."며 주머니 하나를 양의에게 남겼다. 양의는 반란을 일으킨 위연을 만나러 가서, 주머니에 든 쪽지대로 위연에게 "누가 나를 죽이겠는가?"라고 세 번만 말하면 군권을 위연에게 넘겨주겠다는 제안을 한다. 위연은 코웃음을 치며 바로 "누가 감히 나를 죽이겠는가?"라고 소리치는데, 이때 제갈량의 밀명을 받고 위연의 부하인 척 위장잠입했던 마대가 "내가 너를 죽이겠다!"라며 득달같이 달려와서 죽여버린다.
게다가 오나라 군주 손권도 위연이 용맹하지만 마음은 바르지 못하다고 깐다. 너가 남한테 그러면 안되지...
여담으로 일기토로 사마의에게 패한 적이 있다. 물론 진짜 실력으로 패했다기보다는, 호로곡 전투 이전 사마의를 유인하려고 일부러 일기토를 건 뒤 달아난 것이지만, 연의 상에선 문관의 이미지로 나온 사마의가 일기토에 직접 응했다는 사실이 충격과 공포. 태사자와 칼춤추며 싸운 왕랑을 보는 것 같다. 게다가 사마의는 후반부 촉나라 무력 원탑인 위연이 거짓패배해서 도망가자, 추호의 의심도 없이 추격하였다는 사실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사마의는 자신의 무예에 자신이 있었던 걸까... 그냥 위연이 사마의의 목을 베어버리는 편이 간단했을 텐데
1.5 기타
의외로 위연, 오의, 왕평, 장억, 마충 등 후세대 장수들이 이전 세대보다 뒤떨어진다고 말할 근거는 없다. 오히려 후반기 장수들이 전과라는 측면에서 보면 생의 대부분을 유비따라 고난의 행군하며 보낸 관장조보다 뛰어났다. 연의의 부작용 때문에 촉장 2세대 이후는 평가가 안 좋지만, 그나마 위연은 반골의 상이란 캐릭터성을 감안해도, 아니 오히려 그것을 포함한 나관중의 버프 덕분에 무력에 대한 평가는 물론이고 인지도도 높은 편이다.
현재 중국에서도 위연의 평가는 그럭저럭 좋으며, 위연묘와 위연 사당까지도 만들어져 있다. 연의에서도 제갈량의 북벌 당시 가장 용맹을 보여주는 이는 위연으로 묘사된다. 다만 반역자의 이미지가 강한 건 본토인 중국도 마찬가지이긴 하다. 저지른 짓을 보면 너무나 당연하지만.
하지만 근래에는 이중톈의 영향으로 정사에 관심을 가지는 사람들이 많아졌고, 정사에서는 반란이 아니라는 점도 알려지면서 재평가받는 중. 이 과정에서 "반란이 아니다 → 잘못이 없었다" 는 식의 논리로 위연을 충신으로 포장, 제갈량이 위연의 계책을 따랐으면 북벌은 성공했을거라는 식의 위연의 능력에 대한 과대평가, 두 사람의 대립 문제에서 양의가 일방적인 나쁜 놈이라고 매도, 정사와 연의를 짬뽕하여 제갈량을 "애꿎은 위연을 반역분자로 모는 악덕상사"로 까는 등 문제점들을 보이고 있다. 이러한 설은 단순히 삼덕들 사이에서만 돌아다니는게 아니라 일부 창작물에서까지도 채용하고 있다. 대표적인 예가 진삼국무쌍 시리즈.
20세기 들어서 마오쩌둥은 군에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던 양상쿤을 "그는 위연이다!" 라고 하면서 숙청을 했고, 양상쿤은 실각했다가 덩샤오핑때 돌아와서 실권이 없는 국가주석을 맡는다. 여담이지만 덩샤오핑은 자신에게 버금갔던 군 영향력을 가지고 있던 양상쿤을 엄청나게 견제했다고 한다.
천지를 먹다 2에서는 적벽대전이라는 설정상 이유도 있지만 관우, 장비, 조운, 황충과 더불어 캐릭터로 나온다. 성능은 중간, 조운보다 파워가 세고 관우, 장비보다 기술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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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촨성의 신둥현에 있는 위연사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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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당 안에 있는 위연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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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당 안에 있는 위연의 상
일본 쪽 삼국지 관련 게임에서도 꽤나 높은 위상을 보인다. 대표적인 예는 오호장군 마초를 제치고 레귤러 캐릭터로 발탁된《천지를 먹다 2》. 박망파부터 적벽대전까지를 배경으로 하지만 역사속 연대에 크게 구애받지 않고 캐릭터들을 등장시켰다.
대만 IGS사에서 만든 삼국전기1에선 아이템으로 호출 가능한 무장으로 나중에 조조군에 붙어 보스로 나와 사망. 물론 위연과 싸울 때는 호출이 불가능하다. 하지만 쓰러뜨린 뒤에는 다시 호출 가능. 후속작에선 등장하지 않는다.
1.6 팬덤
삼국지의 경우 삼국지연의라는 걸출한 고전의 영향으로 25사 중에서 유독 아이돌 팬덤화된 경향이 강한데, 위연 역시 심각한 빠와 까가 공존하는 인물이다.
대표적인 빠질로는 한때 파성넷 등에서 "반평생 중원을 떠돌다 주공을 만났고 이제야 그를 위해 죽는다. 미망이 있고 여한이 있겠느냐만은, 다만 허도의 흙을 주공의 토봉에 뿌리지 못하고 가는 것이 한일 뿐이다."라는 위연의 유언이 떠돌았던 적이 있었다. 원래부터 출처가 불분명하다고 해서 논란이 일었는데, 꼬꼬마들이 사실 확인을 옳게 안하고 여기저기 퍼서 올리고 해서 네이버가 원조네, DC가 원조네...하는 일들이 있었다.
물론 사서에는 그런 말 없다. "반평생 중원을 떠돌다."라는 문구부터가 위연이 유비의 부곡이었다는 걸 생각하면 영 이상하다. 삼국지연의의 위연이나 할 법한 소리. 또한 저 거짓 유언을 작성했다는 인물은 나중에 자신이 만들고 조작했다는 걸 실토하면서도 "위연 정도면 저런 유언은 얼마든지 할 수 있고, 어울리잖아."라는 식으로 오히려 적반하장이었다고 한다.
여러 기록에서 알 수 있듯이, 그가 지용을 겸비한 우수한 군인이었다는 것은 확실하다. 게다가 큰 실적으로 인하여, 앞세대의 무장들에 뒤지지 않는 전공을 남긴 것 또한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문제는 위연을 옹호하는 것이 너무나 지나쳐서, 위연이 살아있던 시대에 훌륭한 여건을 만들어준 촉군의 상황을 지나치게 무시한다는 점일 것이다. 실제 위연도 그러한 자만심과 통찰안의 부족으로 반역을 저질렀음을 생각해보면, 단순히 위연이 반역자로 몰려서 저평가 받은 사람이라고 생각할 것이 아니라, 그가 가졌던 공훈에 대한 자부심에 대한 비판도 반드시 곁들여져야할 것이다.[14]
반면 까들은 위연의 군공마저 물고 늘어지며, 유비와 제갈량을 따라다니며 주워 먹었다는 식의 왜곡하는 경향이 있다. 예를 들어 양계전투는 위연의 대표적인 공인데, 이것을 제갈량이 위연이 이길 판을 짜줬기 때문에 위연이 비로소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는 이야기다. 양계 전투는 제갈량이 본진에서 암약하며 적절한 시기에 그 임무에 맞는 위연과 오의를 파견하여 승리를 거둔것이니 만큼 이 전투에 대한 1차적인 공은 일선에서 군을 지휘한 위연과 오의에게 돌아가야 한다. 후주전에서는 '이 해, 위연이 양계에서 위의 옹주자사 곽회를 격파했다(是歲, 魏延破魏雍州刺史郭淮於陽谿)'며 오의의 이름마저 살짝 빼고 위연을 그 주체로 삼고 있는 만큼 위연이 양계에서의 승전의 공이 없다 하는 것은 상식에 어긋나는 논리다.[15] 또한 위연전의 '사졸을 잘 양성했다(旣善養士卒)'등의 기록으로 알수있듯이, 북벌 당시 촉군의 강성함에서 위연의 정예부대도 일익을 담당했다.
다만 그렇다고 해서 "위연에게 전권이 있었다면 북벌에 성공했을 것이다"라는 식의 주장이 통하는 것은 아니다. 바둑판을 움직이는 능력(전략)과 바둑알로서의 견고함(전술)을 동일시하는 오류만 봐도 위연빠들이 군사능력에 대하여 심각한 오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위에서도 보듯이, 제갈량은 위연 같은 정예부대를 공격부대로서, 나머지 병력들은 다른 전선이나 후방을 견제하는 병력으로서 썼다. 한마디로 말하면, '대위전쟁에서 촉의 전략이 성공하면 위연도 성공했지만, 판을 짜던 제갈량의 전략이 어긋나면 위연도 막혔다'는 것이다. 두 결과를 분리해서 생각하는 것 자체가 이상한 생각이라는 소리다.
결국 위연은 우수한 능력과 막장의 처세를 가진 장단점이 모두 큰 인물이었고, 결국 그 단점으로 인해 국가적인 위험을 몰고 왔다. 뛰어난 재능과 전공에도 불구하고 동료들과 불화하여 끝내 자신도 비극에 휘말렸기 때문에, 사서에도 그에 대한 시각은 매우 부정적이다. 그의 마지막 실책 하나가 그 이전의 공들을 모두 덮어버리고도 흘러 넘치기 때문이다.
1.7 미디어 믹스
- 위연/기타 창작물 항목 참조.
2 삼국시대의 인물
衛演
(? ~ 238?)
공손연 휘하에서 시중을 지냈고 238년에 위나라에서 사마의를 파견해 요동을 공격했고 공손연의 군사가 세 번 격파당하고 양평성이 포위당해 위험에 빠지자 왕건, 유보 등을 사신으로 파견했지만 모두 참수당했는데, 사마의가 사람을 다시 보내라고 하자 위연이 사신으로 파견되면서 기일을 정해 볼모를 보낼 것을 이야기했지만 사마의는 군사가 움직이는 것에 대해 다섯 가지를 말하면서 손을 뒤로 하지 않으려고 하니 이는 죽음을 각오한 것이라면서 볼모를 보내 어쩌겠냐면서 거절당했다.
공손연이 위군의 공격으로 멸망하자 공손연이 임명한 가짜 관원들을 사마의가 모두 처형했기에 238년에 사망한 것으로 보인다.
2.1 미디어 믹스
진삼국무쌍 6에서는 공손연의 난에서 등장해 공손연의 본진에 해당하는 양평성 내부에서 남서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양평성 바깥 동쪽의 진채에서 복병 부대로 있던 공손형이 격파되면 숙서와 함께 양평성을 나와 출격한다.
진삼국무쌍 7에서는 양평의 전투에서 등장해 서쪽에 위치하고 있다가 플레이어가 서쪽으로 진입하면 숨어있다가 복병으로 나타나는 공손형, 비연과 함께 플레이어를 공격한다.- ↑ 그런 의미에서 장비의 파서태수 임명도 달리 봐야 한다는 시각도 있다. 즉 유비가 위연을 독한중으로 뽑은 건, 위연의 역할을 최전방 사령관으로 제한했다는 의미라는 것이다. 독한중은 유비 생전엔 그의 휘하에서 유비가 정한 전략대로만 최전선인 한중을 지켜야 하는 입장이고, 파서태수는 여차하면 다른 전선으로 뛰어갈 수 있는 입장이다. 한 마디로 한중을 책임지는 책임자이긴 하지만, 그 본질은 유비의 직속으로서 실제로 그 역할의 범위는 차이가 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거기에 또 장비는 서주에서 조표와 불화하여 서주를 잃은적이 있던 만큼 최전방에 진득하게 진수하게 두는것을 무리라고 판단했을 공산도 있다.
- ↑ 이것이 훗날 자오곡 대책으로 알려지게 되는 떡밥이 되지만, 후술하듯 통상적으로 알려진 자오곡 계책과 진수의 본전에 나오는 위연의 제안은 일치한다고 보기 어렵다.
- ↑ 화양국지에 따르면 제갈량은 둘 중 어느 하나를 편들지 않고 이들이 화목하지 않은걸 한스럽게 여겨 감척론(甘戚論)이라는 글까지 지어 두 사람을 깨우쳐 보게 하려 했으나 둘은 그러지 못하였다 한다.
- ↑ 선제기의 기록에 의할 시, 촉군의 손실은 1만에 달한다는데, 이 시기 군의 규모나 다른 지역에서의 전투 기록을 볼 때 1만이 죽어나갈 정도면 촉군은 더 버틸 것도 없이 와해되거나 익주로 도망쳐야 한다. 그런데 이후에도 사마의는 지키기를 계속하고, 촉군은 적지에 계속 주둔하고 있다가 이엄의 태업으로 인한 군량부족으로 퇴각, 그 와중에 장합은 무리한 추격을 강요받고 전사한다.
- ↑ 반면 위략은 여기서 정반대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여기서는 오히려 제갈량이 위연에게 군권을 맡겼는데 이를 본 양의가 해를 입을 것을 두려워하여 위연을 모함하고 선수를 쳐 그를 살해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촉서의 기록과 완전히 모순되는 내용이기 때문에, 적국에서 전해들은 말인 듯 하다고 배송지에 의해 반박되고 있다.
- ↑ 연의 등에서는, 제갈량이 위연을 죽이려고 애쓰는 찌질한 모습이 보이기에, 위연이 이런 짓을 저지른 이유도 제갈량에 대한 복수라는 추측이 있다. 하지만 실제 기록상으로는 위연에게 촉군이나 군권에 대한 반역을 꾀할 명분이 전혀 제시되지 않는다. 단지, 위연 자신이 상관과 동료들에게 불만이 있었다는 사실만 제시되고 있고, 오히려 위의 기록처럼 유염과 위연이 불화했을 때 위연의 편을 들어준 일화에서 보이듯이 제갈량조차 위연의 성격이 어떻든 그의 용맹함과 군사적인 능력을 아꼈다. 그야말로 위험인물. 언제나 위연과 양의 사이에서 중재자 역을 맡던 비의조차 제갈량 사후의 위연 앞에서는 별다른 중재를 못하는 상황이었으니.
- ↑ 아마도 제갈량의 명령을 거역하고 잔도를 끊어 촉군의 퇴각을 막은 행적 때문일 공산이 크다.
- ↑ '사졸들을 잘 기른다'고 버젓이 기록된 위연의 휘하부대들 조차 위연의 행동을 그릇됐다고 판단해서 목숨을 건지기 위해 뿔뿔이 흩어졌다는 것이다. 위연의 주변평가와 당시 행동이 어떻게 인식되었는지 보여주는 장면.
- ↑ 여예전에 보면 제갈량 사후 달아났던 병사들이 군대에 가기 싫어 호적위조를 하다가 여예에게 적발되어 시정되는데 위연이 이끌던 군세의 규모가 상당했을것을 생각하면 이 병사들일 가능성이 있다.
- ↑ 이 위씨가 조위를 지칭하는지, 위연을 지칭하는지는 불명. 조위라고 주장하는 쪽은 두 사람의 사이가 나쁘기 때문에 양의가 위연을 따르려는 발상을 할 수가 없다고 보고, 위연이라고 주장하는 쪽은 조위를 위씨라고 지칭하는건 아무래도 맞지 않다고 생각한다.
- ↑ 이러한 성향을 보이는 사람이 촉에 한명 더 있는데 바로 관우다. 이쪽도 성격이 만만찮았는데, 특히 좋은 배경을 갖춘 상류층 인사들과 마찰이 심했다. 장비가 아니라서 의야해 하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지만 장비는 정사에서 명문가의 후손이라 암시하는 기록이 있고 능력과 인품이 있는 사람들은 신분이나 지위고하 막론하고 우대했다. 단, 밑줄에 언급되지만 관우의 군인으로서 충성심은 위연과 비교하는 것이 관우에 대한 실례. 또한 공손찬도 보잘것 없는 위치에서 하북의 강자가 된 점이나 사대부를 기피했다는 점에서 위연과 비슷한 기질이 있었다.
- ↑ 유비는 법정이나 양의(양의는 유비 시절 좌천되었으나 하필 유비가 어떻게 해서든 품고 가려 노력하던 유파와 마찰을 빚은 탓이지 단순히 성격탓이라고 보긴 힘들다.) 같은 사례처럼 능력만 있다면 성격이 모나도 가급적 쓰려고 노력하는 사람이었고 장비는 능력있는 사람은 출신이나 지위고하에 상관없이 우대했다.
- ↑ 양양기 동윤전에서 나온다. 이를 채택한 연의에서도 손권은 촉의 사신과 대화 때 위연 이야기만 듣고도 용맹하지만 마음은 바르지 못하다고 디스했다.
- ↑ 위연이 너무나 저평가 당했다고 생각하는 나머지, 위연빠들이 대표적으로 무시하는 분야가 전략과 보급에 대한 통찰인데, 위연에게 그러한 상황을 제공해준 동료들에게 보인 행위
대몰살 계획와 경멸하고 욕하는 짓거리 등을 보면, 도저히 훌륭한 군인이라고 볼 수가 없다. - ↑ 양계의 승전과 가정의 패전을 살펴보면 한 쪽은 제대로 된 장수를 선택해 얻은 승리이고, 다른 한 쪽은 잘못된 인선이 불러 일으킨 참사라고 볼 수 있다. 이런 요소를 보면, 위연은 분명히 촉군의 누구보다도 우수한 지휘력을 가진 정예군이었다. 물론, 가정 때는 위연도 곽회에게 막혔지만... 이건 제갈량이 배치한 장수가 곽회의 움직임에 제압당한 거라서, 제갈량의 인선미스와 곽회의 탁월한 기동전이 겹친 문제다. 결국 제갈량이 실수하면 위연도 제 기량을 발휘하기 어려웠던 것이고 이에 대한 책임은 제갈량 스스로도 마속을 처벌하면서 인정했다. 또 제갈량 역시 야전사령관으로서 위연이 필요했다. 이는 제갈량이 위연의 용맹을 아껴 다른 장수와의 불화가 있음에도 최대한 배려해주었던 사실에서도 드러난다.
다만 위연도 원정에서 위군의 기동전을 상대했을지는 의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