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헌성

淵獻誠

(659 ~ 701)

1 개요

고구려 말기의 귀족.

고구려 말기의 실권자였던 연개소문의 손자이자 연남생의 아들이다. 고구려가 멸망한 후에 당나라에서 귀족으로 지냈다. 형으로 연헌충, 아들로 연현은(淵玄隱), 연현정(淵玄靜), 연현일(淵玄逸), 손자인 연비(淵毖, 연현은의 아들)가 있다.

2 생애

2.1 고구려에서의 삶

659년(보장왕 18), 당시 고구려의 실권자였던 대막리지 연개소문의 맏아들 연남생의 아들로 태어났다.

665년, 고구려가 고구려-당 전쟁을 겪으며 나라가 피폐해진 상황에서 할아버지인 연개소문이 죽자 아버지인 연남생이 대막리지의 지위를 계승하게 되었다. 대막리지가 된 연남생은 이듬해에 지방의 여러 성을 순시하게 위해 수도를 비우게 되었다.

그러나 연남생은 수도에 남겨두고 온 동생들인 연남건, 연남산을 의심하여 수도에 밀정을 파견하였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연남건, 연남산은 형이 자신들을 해치려 한다고 생각하여 정변을 일으켰고, 곧 수도를 장악하였다. 이때 연헌성은 숙부들의 손에 형인 연헌충이 살해당하는 참변을 겪었다.

지방에 나가있던 연남생은 수도가 동생들에게 장악당했다는 소식을 듣자 고구려의 옛 수도인 국내성에 숨었다. 이때 연헌성은 아버지의 명에 따라 당나라에 사신으로 파견되어[1] 구원을 청하게 되었다. 당고종은 당나라에 도착한 연헌성을 우무위장군(右武衛將軍)에 임명하였으며, 수레와 말, 비단, 보도(寶刀) 등을 주어 국내성으로 돌려보냈다. 그리고 666년, 연헌성은 아버지 연남생과 함께 당나라에 투항하게 되었다.

당나라에 투항한 연남생 덕분에 당고종고구려 조정과 군사들의 허실을 효과적으로 알 수 있었고, 이후 연남생을 앞잡이로 삼아 고구려를 침략하였다. 결국 668년에 고구려는 평양성이 함락되어 멸망하였다.

2.2 당나라에서의 삶

고구려가 멸망한 이후로 연헌성은 아버지를 따라 당나라의 수도 장안으로 들어가서 당나라의 귀족이 되었으며, 천수 연간(天授 年間: 690∼691)에는 우위대장군(右衛大將軍) 겸 우림위(羽林衛) 벼슬을 지냈다.

그러던 어느날, 측천무후가 금과 예물을 상품으로 내걸고 문무관료들 중에서 활을 잘 쏘는 사람 5명을 고르도록 하였다. 이때 내사(內史) 장관보(張光輔)가 연헌성에게 먼저 쏘기를 양보하여 첫 번째로 활을 쏘게 되었다, 그러나 연헌성은 뒤에 있는 우옥검위대장군(右玉鈐衛大將軍) 설돌마지(薛咄摩支)에게 양보했고, 설돌마지는 다시 연헌성에게 양보하였다. 이렇게 엎치락 뒤치락 하며 순서를 미루다가(...) 연헌성이 측천무후에게 "활을 잘쏘는 사람 중에서 중국인이 아닌 사람이 많으니 당나라 관인들이 활쏘는 것을 수치로 여길 것 같아 두렵습니다."라며 활쏘기를 그만 둘 것을 청하였다. 측천무후는 연헌성의 의견을 기쁘게 받아들였다고 한다.

한편, 측천무후 시기에는 형옥(刑獄)[2] 벼슬을 지내며 위세를 떨치던 내준신(來俊臣)이라는 자가 있었다.[3] 하루는 내준신이 연헌성에게 뇌물을 요구하였으나, 연헌성은 응하지 않았다. 잔인한 성격의 내준신은 이에 앙심을 품고 연헌성이 모반을 꾀했다고 모함하였다.

701년, 결국 연헌성은 반역자라는 누명을 쓴채로 목이 매이는 형벌을 받아 끔살당하고 말았다. 이후에 연헌성에게 모함을 씌워 죽인 내준신이 그 죄가 드러나 죽게 되었고,[4] 이후에 측천무후가 연헌성이 억울하게 죽었음을 알고 우우림위대장군(右羽林衛大將軍)을 추증하였으며, 예를 갖추어 다시 장사지내도록 하였다.

3 평가

아버지 연남생과 마찬가지로 상당히 험난한 삶을 살다가 간 사람이었다. 고구려에서는 숙부들의 손에 형제가 죽었고[5] 당나라에 투항해서 잘먹고 잘사나 했더니 결국 반역자로 몰려 죽었으니 비록 나라를 버렸으나 개인적으로는 파란만장하게 살다가 죽었다.

측천무후 시기에 남긴 일화를 봐서는 이민족 출신의 사람으로서 당나라에 적응하고 중국인들로부터 인정을 받기 위해 부단히 노력한 흔적을 볼 수 있다. 이민족들 중에 활을 잘쏘는 사람이 워낙 많으니 중국인들의 신경을 건드리지 않기 위해(...) 자처해서 활쏘기 시합을 멈춘 것을 보면 제법 눈치가 있고 처세술에 밝았던 것 같다.[6] 그런데 정작 뇌물을 주지 않아서 죽었으니 어째 미묘하다(...).

한편 삼국사기에서는 나라를 버리고 당나라에서 귀족이 되어 살았다하여 김부식에게 반역자라고 호되게 까였다. 특히 함께 당나라에 투항한 아버지 연남생과 함께 "당나라 입장에서야 공신일지는 몰라도 우리 입장에서는 반역자가 아니면 무엇이겠느냐."고 세트로 혹평을 들었다.

다만 현대적 시각으로 보면 연남생과 함께 당에 투항할 당시 나이가 7~8세에 불과했고, 그 나이에 숙부들의 손에 형제가 죽는 참변까지 겪었다는 것을 감안하면 반역자, 매국노 취급은 할 수 없다는 의견도 있다. 애비야 어쨌든 매국노 확정이지만 초딩 1학년이 대체 뭘 안다고

  1. 그런데 연현성이 태어난 것은 659년. 정변으로 연남생이 쫓겨난 것은 666년이다. 즉 당시 나이 8살짜리 꼬마가 사신으로 갔다는 뜻이다... 제대로 된 사신이라기 보다는 연남생이 자신의 투항이 진실임을 증명하기 위해 사신과 아들을 함께 보낸 것일 확률이 높다.
  2. 오늘날로 말하자면 중앙정보부 책임자 쯤은 되는 사람이다.
  3. 내준신은 잔인한 성격으로 유명했던 관리로,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은 큰 죄를 뒤집어 씌워 죽이거나 집안을 망하게 하는 것으로 악명이 높았다.
  4. 내준신은 그동안 온갖 사람들에게 모함을 씌우다가 정작 자신도 밀고를 당해 몸이 찢겨 죽었다(...).
  5. 게다가 당시 연헌성의 나이는 불과 7세 정도에 불과하였다.
  6. 사실 타국에서 귀족으로 살려면 그 정도의 눈치는 필수일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