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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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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에서 제작된 영일동맹 풍자화 | 일본에서 제작된 영일동맹 풍자화 |
Anglo-Japanese Alliance.
1902년에 영국과 일본이 맺은 동맹. 일본 제국의 세력확대에 큰 도움을 준 동맹으로 20여년간 지속되었다.
크게 제1차 영일동맹과 제2차 영일동맹, 제3차 영일동맹이 있다.
2 제1차 영일동맹
2.1 배경
19세기 말 러시아 제국은 만주와 한반도로 세력을 넓혀오고 있었다. 만주에는 15만 대군을 파견하여 청나라 정부를 축출하고 만주에서 군사 점령 상태에 들어갔고, 요동 반도에서 다롄과 뤼순 항 및 동청철도(東淸鐵道 - 하얼빈 철도의 예전 이름)를 건설하여 실질적으로 남하하고 있었다. 또한 한국에서도 마산포를 조차(租借)하려 하거나 대한제국 정부에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는 등 노골적으로 세력을 침투시키고 있었다. 이 시기에 일본은 반대로 북진(北進)을 추진하고 있었는데, 이들은 한국 점령을 시작으로 만주에까지 진출하려는 야심이 있었다.
일본이 청일전쟁의 승리로 한반도에서 청의 세력을 축출하고 독자적인 개입을 심화시키는 시점에서 러시아의 도전이 예상되고 있었으며, 이미 삼국간섭으로 호되게 당한 일본제국은 조선을 식민지 함에 있어 서구열강의 지지가 필요함을 인식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일본은 '만주의 이권은 러시아가 차지하고 한국의 이권은 일본이 차지한다'는 기본 입장을 러시아에 표명하였다. 그러나 영국은 러시아가 만주 등 중국으로 진출하는 것을 용납하려 하지 않았다.
그리고 영국은 그 당시 러시아 제국의 팽창을 막기 위해 터키, 중앙아시아와 동아시아에 걸쳐서 대립하고 있었고, 이를 그레이트 게임이라고 한다. 그 때문에 러시아의 만주, 한반도 진출에 바로 빨간 불이 들어온 영국은 러시아의 견제를 위해 일본과 동맹을 맺게 된다.
한편, 1899년 미국의 헤이 국무장관 역시 문호개방을 주장하여 당시 열강 가운데 어느 한 나라가 만주와 중국에서 경제적 이권을 독점하려는 것을 저지하려고 했었다. 1902년 1차 영일동맹 뒤 러일 전쟁이 발생하여 1905년 일본이 승리를 거두자 일본은 미국과도 대러 협조를 위한 각서를 체결한다. 가쓰라-태프트 밀약이 이것이다. 그러나 1907년 일본이 끝내 감당하기 벅찬 러일전쟁 전쟁 비용[1]의 충당을 위해서 만주에서 철도, 광산 등의 이권을 독점하는 조치를 취하자, 미일 협력 관계는 무산되고 말았다.
2.2 내용
1901년 일본의 입장은 러시아의 만주에 대한 단독지배를 인정하지 않고, 여타 제국주의 열강과의 협조 하에 한반도 지배뿐만 아니라 중국의 이권 분할에도 참가하는 쪽으로 기울었다. 그리하여 영국과의 제휴를 모색하게 되었다. 두 나라의 이해가 결부되어, 그 해 12월 양국은 일본대표로는 주영 일본 공사 하야시(林董), 영국대표로는 외무대신 랜스다운이 협상 교섭을 하였고, 1902년 1월 30일 런던에서 영일동맹을 체결하였다. 동맹 협약문은 전문 6개조로 되어 있으며,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영·일 양국은 한(韓)·청(淸) 양국의 독립을 승인하고, 영국은 청에, 일본은 한국에 각각 특수한 이익을 갖고 있으므로, 제3국으로부터 그 이익이 침해될 때는 필요한 조치를 취한다. 2. 영·일 양국 중 한 나라가 전항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해 제3국과 개전할 때는 동맹국은 중립을 지킨다. 3. 위의 경우에서 제3국 혹은 여러 나라들이 일국에 대해 교전할 때는 동맹국은 참전하여 공동작전을 펴고 강화(講和)도 서로의 합의에 의해서 한다. 4. 본 협약의 유효기간은 5년으로 한다. |
영일동맹의 체결에 대항해 러시아는 '중국과 한국의 독립과 영토 보전'을 강조하면서 같은 해 3월 프랑스와 함께 러시아-프랑스 공동선언을 발표하였으나, 러일전쟁에서 입은 타격 덕분에 국제외교에서 크게 수세에 몰리는 입장이 되었다. 하지만 누구의 삽질로 인해 10년 후에는 대립이 가장 심했던 영미가 언제 그랬냐는 듯이 러시아와 같은 편이 된다.
2.3 결과
영일동맹의 결과, 영국은 러일전쟁 기간 동안 일본의 국채 등을 매입하는 등 전비를 간접적으로 지원했다. 이에 그치지 않고 전함 미카사를 비롯한 최신예 영국제 군함을 일본이 수령하도록 허용했다. 당시에는 자기 돈 내고도 군함을 제작하는 국가의 해군이 보유한 함선보다 더 좋은 군함을 구매하게 되면 당장 제작국의 해군이 태클을 넣는데, 이런 방해가 전혀 없었다.
이런 도움에 힘 입어서 일본은 러일전쟁(1904~05)을 시작하면서 만주 진출의 길목에 위치한 대한제국에서 안정적인 보급로 확보를 위해서 한일의정서를 강요했고, 결국 러일전쟁에서 승리하여 한반도와 만주로부터 러시아 세력을 축출하였고, 한반도에 독자적으로 침투할 수 있는 우선권을 갖게 되었다.
3 제2차 영일동맹
러일전쟁이 일본의 승리로 끝나고 열강 중의 일원으로 인정받은 일본은 영국과 제2차 영일동맹을 1905년 8월 12일에 체결하여 일본의 한국 지배를 외교적으로 보장받았다. 그 내용 중 중요한 것은 아래와 같다.
1. 영국은 일본이 한국에서 가지는 정치적·경제적·군사적 이익을 인정하며, 일본은 영국의 인도 지배 및 국경지역에서의 이익을 옹호하는 조치를 취할 것. 2. 타방이 제3국과 교전한 경우에는 즉시 참전의 의무를 진다는 공수(攻守)동맹을 강화하였으며 또한 그 적용범위도 당시 영국령이었던 인도까지 확대됨. 3. 협약의 유효기간을 10년으로 함. |
그 결과는 바로 앞에서 언급한 내용의 상호 동맹 조약을 겸하여 그 해 3월 봉천 회전과 5월 쓰시마 해전에서 최종 결정된 일본의 러일전쟁 승리의 과실을 확인하는 것이었다. 여기서 영국의 외교적 뻘짓이었던 인도 항목이 들어간 이유는 당시까지만 해도 러시아의 인도 침공 가능성을 영국 측에서 진지하게 고려 중이었기 때문이었다. 인도 조항은 2년 만에 러시아 제국이 외교 고립 타파를 위해 영국과 화해를 결정하며 그레이트 게임을 끝내면서, 영국의 순수한 외교적 뻘짓이 되고 말았다. [2]
4 제3차 영일동맹
미국은 처음에는 이 동맹을 대(對)중국 문호개방정책으로의 지지와 방어 또는 극동에서의 러시아의 남하에 대한 방벽이 된다고 생각하여 호의적인 태도를 보였지만, 러일전쟁 후 만주의 철도중립화 문제와 포츠머스 협정의 성립, 그리고 캘리포니아에서의 일본 이민제한 문제 등을 둘러싸고 미일간 관계가 점차 미묘해지자, 긴밀한 영미관계가 영일동맹과 모순되지 않도록 영국과 일본 양국에 강하게 요구했다. 간단히 말해서 영국과 일본이 편먹고 미국을 양면공격하는 사태를 불러오지 말라는 것이다.
따라서 6년 후에 영일 양국은 미국을 그 동맹협약에서 말하는 '제3국'에서 제외하는 내용을 골자로 하는 제3차 영일동맹을 1911년 7월 13일에 성립시켰다. 그리고 제1차 세계대전 직전인 상황에서 독일과의 관계가 나빠지고 러시아가 연합군으로 가담할 확률이 높아지자 동맹의 목표를 대러시아에서 대독일로 바꾼다.
이 조약으로 인해 제1차 세계대전 때 당시 일본은 연합국에 가담한다. 그러나 1차 대전 당시 일본의 참가 노력은 조약에 걸맞지 않게 너무나도 초라했다. 일본 자신의 이권 확보를 위해 독일의 칭다오 식민지와 마리아나 제도 등지를 점령하였을 뿐, 영국 등 연합국의 군사지원 요청[3]에도 불구하고 유럽의 지상전에는 전혀 가담하지 않았다. 오히려 일본은 제1차 세계대전을 절호의 기회로 삼아 유럽 열강에게 군수품을 공급하는 등 막대한 경제적 이득을 거두어 산업화 도약에 성공하고, 러일 전쟁에서 빚진 채무를 완전히 청산하는데 성공한다. 사실상 일본으로서는 명목상 동맹국인 영국을 지원하지 않고 막대한 이득만 챙긴 셈.
5 폐지
그러나 제3차 영일동맹 이후에도, 계속 미국과 일본간의 관계가 더 안 좋아지는 등 그 후의 아시아ㆍ태평양 지역을 둘러싼 국제정세의 변화에 따라 그로부터 10년 후인 워싱턴 해군 군축조약(1921~1922년)에서 조인된 영국ㆍ일본.ㆍ미국ㆍ프랑스간의 4국 조약에 의해 폐기가 결정되었다. 그리고 해당 비준서 기탁이 1923년 8월 17일에 이루어지면서 함께 실효되었다.
동맹이 폐지된 원인은 크게 아래와 같다.
1. 미국은 일본과 충돌할 경우, 영국이 일본의 동맹국이 되는 것을 가장 경계하고 있었음. 2. 러시아 제국이 붕괴되고 소련으로 국가가 바뀌었으며, 소련의 해군이 연안해군으로 축소됨에 따라 더 이상 영국과 이권을 가지고 충돌할 가능성이 적어짐. 3. 영국의 재정악화로 쓸데없는 전쟁에 강제개입되는 사태를 피하려 함. |
6 영향
결국에는 폐기가 되었다고는 하나 해당 동맹을 바탕으로 가장 중요한 시기에 세력균형이 일본쪽으로 기울어, 일본의 조선 점령이 공식적으로 인정되었고 그 이후 만주 장악까지도 일사천리로 진행하는 바탕을 마련하였다. 일본으로서는 득을 다 본 뒤, 1차대전에서 전시 호황을 통해 채무를 완전히 청산하는 행운까지 뒤따랐다. 아직 산업화의 기초가 부족했었던 일본에게는 지나칠 정도로 순조로운 사태전개는 제 2차 세계대전시 일본의 추축국 가담에 이르는 과도한 자만심을 낳았다.
여기에 더해서 일본군의 양대 축인 일본 해군을 세계 제3위의 해군으로 급성장시키는 원동력을 제공했다. 앞서 설명했듯이 러일전쟁에서 최신예 영국 군함을 판매한 것을 시작으로 해서 일본 해군의 하드웨어, 소프트웨어적 기반은 영국 해군이 기준이 되었으며, 이런 관계는 사실상 일본의 초드레드노트급 전함의 초석이 되는 공고급 순양전함의 판매와, 항공모함에 적용되는 많은 기술을 입수하는 것까지 진행되었다. 만일 영일동맹이 없었다면 이렇게 단시일내에 일본 해군이 급성장을 하기 어려웠을 정도다.
끝으로 일본은 1941년 12월 8일 진주만 기습 직후, 폭격을 퍼부은 뒤 홍콩 섬에 해군 육전대를 상륙시키고 구룡반도를 통해 5만 대군을 투입, 점령해 버린다.[4] 그리고 더 나아가 싱가포르, 말라카 등의 말레이 연방 식민지들도 모두 점령한다.- ↑ 일본 정부 예산이 2억5천만 엔에 불과했을 때, 전쟁 비용은 무려 8년치 예산에 달하는 20억 엔이었다.
- ↑ 한반도의 경우, 이후 1905년 9월 포츠머스 조약에 의해 일본의 한국 지배가 공식 승인받았으며, 11월 을사조약이 강제 체결된다.
- ↑ 영국 정부는 일본 육군 50만 명의 유럽 전선 투입을 거듭 요청했으나 일본 정부는 거부하고 끝내 단 1명의 육군도 보내지 않았다.
- ↑ 중일전쟁 때는 중국과 일본 양측 모두 전시물자의 원활한 공급을 위해 일부러 선전포고를 하지 않고 정식 전쟁이 아닌 사변으로써 진행하고 있었다. 이 때문에 전시 규제를 받지 않고 모든 물자가 중국에 자유롭게 수입될 수 있어서, 일본은 중국의 물자 보급 루트인 홍콩을 점령할 필요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