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식진

禰寔進
615년 ~ 672년

예식진의 묘지명 덮개

1 소개

백제장군. 백제 의자왕을 항복시킨 매국노라는 주장이 있는데, 현재 논란 중에 있다.

2007년 낙양의 골동품상에 나타난 중국 서안 출토의 묘지명에서 확인됐다. 묘지명에 의하면 할아버지 때부터 백제의 고위직인 좌평을 대대로 지낸 예씨 집안 출신이고 웅진의 유력자이자 장군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2 예식진은 누구인가?

660년, 나당연합군 18만 대군이 백제로 쳐들어와 사비성을 공격하자, 의자왕은 사비성에서 웅진성으로 옮겨간다. 당초에는 의자왕이 웅진성으로 도망친 것으로 알려졌지만 실은 나당연합군은 고대국가의 전쟁형태인 영토 획득 전쟁 스타일이 아닌, 철저히 백제 멸망을 목적으로 한(수도인 사비성을 집중 공략하는) 전쟁을 치루고 있었기 때문에 백제의 지방군들은 나당연합군에게 거의 피해를 입지 않은 상황이었다.[1]

의자왕의 당초 계획

의자왕은 백제의 모든 지방군들을 동원하여 사비성을 포위하려는 전략을 취하기 위해 사비성을 과감히 포기하고 웅진성으로 지휘부를 옮긴 것으로 보인다. 평지에 있던 사비성은 수비에 용이하지 않았기 때문에 산지에 있는 웅진성이 보다 수비에 용이했으며 더욱이 나당연합군은 무려 18만이라는 거대한 병력이었던 탓에 의자왕이 버티면 버틸수록 백제에겐 더 유리한 상황이었다. 그리고 사비성이 수비에 용이하지 않다는 말은 지방군을 동원해서 나당연합군을 포위해 손쉽게 붕괴시킬 수 있다는 말이기도 했다.

결국 지방군을 공략하지 않고 무작정 사비성으로 돌격한 나당연합군의 보급 문제가 심각해졌는데 나당연합군이 오직 사비성만 목표로 닥돌한 탓에 보급로를 차단할 가능성이 있는 지방군을 생각하지 못한 게 문제였던 것이다. 게다가 백제 귀족들이 비록 왕의 말을 잘 듣지 않을 만큼 독자성이 강했다고는 하지만 수백 년간 지켜 온 나라를 한 순간에 내던질 정도는 아니었다.[2]

이런 모든 계산하에서 의자왕은 웅진성으로 지휘부를 옮겨 버티기 작전, 혹은 지방군을 총결집한 사비 포위작전으로 나당연합군을 격파 혹은 퇴각시키게 하려는 작전을 구사하려 한 것으로 보인다.

다만 이 가설대로 백제군이 애초에 장기전을 노렸다면 성충의 간언대로 당군은 기벌포에서 막고 신라군은 탄현에서 막은 뒤 양군의 합류 자체를 저지한 뒤 시간을 끌었어야 한다. 하지만 백제는 당군이 금강 하구로 들어오고 신라가 황산벌에 이르기까지 피난 움직임은커녕 본격적인 전략적 행동을 보이지 않았다. 이 점에서 백제의 초기 대응은 완전히 실패였던 것은 확실하다. 결국 의자왕이 웅진성으로 피난했다면 급박한 상황을 일단 모면하기 위해 옮겨갔을 것이지, 처음부터 장기전을 노린다는 대국적 전략을 수행하려는 건 아닐 확률이 높다. 하지만 일단 백제본기에 따르면 당군이 상륙작전을 펼치면서 주둔하여 수비하고 있던 백제군 수천을 격퇴하였다는 언급이 있다. 기벌포가 금강 하류라고 해석한다면 합류지연을 노리고 요격하기는 했다는 의견도 있으나, 그보다는 요격 방식이 문제였다. 즉 1안은 당군이 상륙 자체를 못하게 막으면서 시간을 끌자는 안이었고, 2안은 당군을 백강 안으로 끌어들여 요격하여 큰 피해를 주어 물러가게 한다는 안이었다. 그 중 2안이 채택되었으나 현실은 당군의 수륙병진에 박살이 나서 기벌포의 방어선은 그대로 돌파되었고 어쩔 수 없이 남은 군대를 긁어모아 야전에서 당군과 맞섰으나 대패했다. 즉 백제의 방어 전략은 장기전을 고려하지 않고 있었다.

의자왕이 대국적인 전략을 위해서든, 급한 불을 끄기 위함이든 웅진성에 들어 가는데 성공한 이상 곤란한 것은 나당연합군 쪽이었다. 웅진성은 한때 백제의 수도였던 만큼 비축된 물자도 있었고, 벼랑과 강으로 삼면에 둘러싸여 있어 군사적으로 제대로 공략 가능한 곳은 사실상 한 면 뿐인 천혜의 요새로서 아무리 대군을 몰고 닥돌해도 하루아침에 점령될 성은 결코 아니었다. 게다가 의자왕이 웅진성에 들어간 시점에서 이미 나당연합군은 대군 닥돌 작전의 부작용으로 보급에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다. 즉 지방군을 이용한 전략을 제대로 구사하지 못하더라도 그저 웅진성에서 버티기만 하면 시간이 흐를수록 백제가 유리해지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또 고구려라는 변수도 있다. 당이 요동을 건드리는 양동작전을 제대로 펼치지 않는 이상 고구려 입장에선 바다를 건너온 당의 13만 대군을 그냥 두고보진 않았을 것이다. 실제로 고구려가 뭔가 하지못한건 백제가 너무 빨리 항복해서 뭘할 시간이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고구려도 오랜 전쟁에 지친 상태였고, 내부 상황만 따지면 오히려 백제가 더 양호한 처지에 놓여 있었다. 그 증거 중 하나가 백제 부흥군이 결성되고 660년 10월 뇌음신과 생해가 이끄는 고구려군은 신라 북변을 공격해 칠중성을 함락시켰지만 그것이 끝이었다는 점이다. 무열왕조차 인력이 다해 어쩔 수 없다는 상황인데도, 고구려는 이듬해 5월 북한산성을 공격했다가 격퇴되었다. 백제 부흥군이 세력을 확장하자 신라와 사비에 남은 1만의 당군은 대부분의 전력을 백제 전역에 투입했고 한강 유역에는 최소한의 병력만 남아 있는 상황에서 고구려는 백제 멸망 2달 후에 공세를 개시한 것이지만 무려 7개월이나 소모하고도 고구려군은 무열왕이 방치하다시피한 한강 유역을 돌파할 수 없었다.[3]

사실 고구려는 이미 원정군을 조직할 능력은 커녕 제대로 된 방어하기에도 급급한 상황이었다. 고당전쟁에서 당태종에게 주필산 전투에서 대패를 당한 후 삼국시대 최대 병력인 15만명이 한방에 증발한[4]데다가 이후에도 당이 지속적으로 고구려의 방어라인을 우회해서 공격을 가하는 상황인지라 이당시 쯤가면 방어선이 요하에서 압록강으로 변하였고 당군이 지속적으로 고구려 영내에서 분탕질을 하는지라 이쪽에 병력을 제대로 보낼 형편이 아니었다. 당장 고구려 말기에도 이쪽은 스케일이 달라서 3만 단위의 전투가 빈번했기 때문.

하지만 그 점을 감안하여 고구려를 배제한다고 쳐도 웅진성은 여전히 견고했고, 각 지역에서 부흥군이 결성되어 이미 나당연합군과 맞서 싸우기 시작하고 있었다. 즉 상황이 장기화될 경우 백제는 살아남을 가능성이 높았다. 신라 입장에서 보면 백제를 멸망시키지 못한다 해도 큰 타격을 준 이상 일단 숨통은 확보했고, 당은 고구려를 멸망시키는 게 최우선 과제였기 때문이다. 또한 고구려가 지지부진한 것도 뭘 어쩌려 하기전에 백제가 멸망해서 국내 방어에 집중했었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러나 웅진성에 들어간 지 5일만에 의자왕은 돌연 항복했다. 나당연합군이 웅진성에 들이 닥친 것도 아니었는데 말이다. 그 모든 의문을 해결하게 한 것이 바로 2007년에 발견된 백제 웅진의 장군 예식진의 묘지명이었다.

3 예식진? 예식?

예식진과 비슷한 이름의 예식(祢植)이란 인물이 구당서와 신당서에 등장하는데, 여기서는 예식이 의자왕을 데리고 소정방에게 항복했다고 언급된다. 예식은 예식진하고 동일인물인 것으로 보이는데, 식(植)이라는 이름이 예식진의 원래 본명이 어거나, 혹은 그의 자(字)로 추정할 수있다.[5]

예식진의 묘지명에는 "예식진의 공은 김일제보다 더 위대하다"라고 언급하고 있다. 김일제는 한무제에게 항복한 흉노족으로 이후의 중국역사에서 이민족 출신들의 공로는 김일제에 비교되곤 했다. 그런데 예식진이 세운 공이 김일제보다 더 위대하다라는 표현으로 결국 예식진이 세운 위대한 공은 의자왕을 사로잡아서 군에게 넘긴 것이라는 결론에 이르게 되었다(…). 더욱이 구당서와 신당서에 "데리고"라는 의미로 쓰인 한자 "將"은 강제로 끌고갔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어서 결국 예식진이 의자왕을 배신하고 당나라에 항복한 것이 큰 공의 정체였다는 주장이다.

논란이 있긴 하지만 신채호조선상고사에서도 웅진 수비대장이 왕을 잡아 항복하라 이르렀고 왕이 자살하려 했지만 동맥이 끊기지 않아서 실패했다고 한다. 신채호도 관련 야사를 토대로 글을 썼던 것이라면 이때 수비대장이 예식진일 것이다.[6]

가족으로 형제인 예군이 있다. 역시 매국노로 당에 항복하여 관직을 받고 백제를 팔아 넘겼다. 항목 참고.

4 반론

하지만 상기의 주장에 대한 반론도 있다.

우선 묘지명 어디에서도 의자왕에 대한 예식진의 반란 및 배신을 직접적으로 시사한 글은 찾기 어려우며, 단순히 '데리고 갔다'는 그 기록을 무조건 '생포해서 바쳤다'고 봐야 하는가에 대한 회의적인 분석이 있다.

또한 '將'에는 '데리고 가다' 말고도 무려 21개의 뜻이 더 담겨 있는데, 이 기록에서는 '데리고 가다'보다는 '행하다(行)', '곁붙다(扶持)', '잇다(承)', '함께 하다(伴也)' 등의 해석이 적합하며, 이 경우 "그 대장 예식이 또 의자와 함께 와서(將) 항복했다"가 되어, 《신당서》에서 "그 장군 예식이 의자와 더불어(與) 항복했다"는 기록과 부합한다는 것이다.

또 상기의 주장에는 결정적인 결함이 있는데, 삼국사기일본서기, 그리고 구당서와 신당서 등 중국측 역사서 어디에도 이러한 내용이 일절 없다는 것이다.[7]. 이들 기록에는 '於是 王及太子孝與諸城皆降'. 즉 '이에 이르러 왕과 태자 효, 여러 성이 항복하였다' 라고만 되어 있을 뿐 [8], 예식이라는 이름 자체가 보이지 않는 것. 물론 예식진 묘지명의 내용을 무시할 수는 없겠으나 이것을 달리 해석할 여지는 충분하며, 삼국사기 등의 역사서에는 왜 누락되었는지 하는 의문도 현재로서는 해결할 수 없다.

게다가 구당서와 신당서에 등장하는 예식이라는 인물과 묘비에 기록된 예식진이 동일인이라는 것도 추측일 뿐 이를 입증할 다른 증거는 없는 실정이다.

신채호의 조선상고사의 내용 역시 많은 논란이 있기 때문에 역사적 근거로 채택하기는 어럽다.

5 매국의 나비효과

백제의 한 장군인 예식진이 자신의 부귀와 영달을 위해서 의자왕을 배신한 결과는 한국 역사에 엄청난 파장을 일으켰다. 백제가 허망하게 멸망하면서 동북아의 힘의 균형이 무너졌고 결국 고구려도 멸망하는 원인이 된 것이다. 만약 백제가 그대로 버티기 작전으로 갔다면 나당연합군이 그리 쉽게 백제를 멸망시키진 못했을 것이고, 이 경우 전쟁에 지친 당은 백제와 적당히 협상을 하고 철수했을 가능성이 높으며 신라 역시 영토 일부를 빼앗는 선에서 마무리지었을 공산이 크며, 심지어 당의 야심을 당시부터 어느 정도 경계했던 만큼 백제와 다시 선을 연결했을 수도 있다. 또한 고구려가 지지부진한 것도 뭘 어쩌려 하기전에 백제가 멸망해서 국내 방어에 집중했었기 때문일 수도 있다.

물론 이는 가장 희망적인 예측이라고 반론할 수 있다. 예식진의 항복 당시 이미 백제 왕실의 주력군은 거의 소멸되었고, 백제 부흥군도 백제 멸망 후 한달 뒤에야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한다. 당과 신라의 기대와 달리 백제인들이 나당연합군에 굴복하지는 않았지만, 동시에 지방군의 동원 역시 효율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또한 의자왕의 둘째 왕자 태가 왕을 자칭했으며 태자의 아들 문사는 항복했고, 곧이어 태도 항복했다. 즉 백제 왕실부터가 분열되는 상황이었다.

물론 예식진의 항복이 없었다면 백제가 멸망하지 않았을 것인지를 떠나, 예식진은 한국사에 새롭게 쓰여질 매국노로 남을 것은 분명하다.
  1. 영화 황산벌의 초반부에서 의자왕계백에게 이와 비슷한 말을 한다.
  2. 일례로 백제가 멸망한 뒤 지방의 귀족들과 잔존 왕족들을 중심으로 치열한 부흥운동이 일어났으며, 부흥운동이 수포로 돌아가고 신라에 완전히 합병된뒤에도 옛 백제지역의 귀족유민들은 자신이 백제인 혹은 백제의 후손이라는 정체성을 유지하였다.
  3. 고구려의 실제전과는 별도로 의자왕이 웅진성에서 버티고 백제 지방군들이 나당연합군을 공격하는 가운데 고구려군이 백제를 돕기위해 남하한다는 사실만으로도 나당연합군을 심리적으로 더욱 압박할수 있다. 백제왕은 견고한 성에서 버티고 백제 지방군들이 각지에서 몰려들고 있고 보급사정은 악화되고 있는데 거기에 고구려군까지 움직이고 있다는 소식만으로도 이 전쟁에 그야말로 목숨건 신라는 그렇다쳐도 바다 건너온 당나라군(특히 사령관인 소정방)에겐 심각한 압박을 줄 것이다. 황산벌에서 지체한 신라군이 약속날짜를 지키지못했다고 난리치던 걸 보면 당나라군은 상황이 여의치 않으면 언제라도 발뺄수가 있었을 것이다. 육로로 이어진 고구려 침공이야 실패하면 그대로 후퇴하면 되지만 바다건너 백제 침공은 실패할 경우 자칫 후퇴도 못하고 백제땅에서 고립되어 몰살당할수도 있다.
  4. 해당항목을 보면 알수 있지만 15만명이 모두 몰살당한건 아니다. 대략 1/3정도인 5만 3천명+@정도가 죽거나 포로가 된 것이다. 문제는 이 병력이 정예 장교단과 핵심정예병력이라서 이후 고구려가 당군에게 정면으로 10만 단위의 대규모 야전을 벌일수 있는 능력을 상실한 것이다. 게다가 당군이 여기저기로 찔러들어오니 방어에만 주력할수밖에 없는 상황. 현대로 치자면 주력 지상군과 비행단들을 날려먹고 남은 정예 병력은 소방수 역할 외에는 다른 역할을 맡기가 힘들어 향토 보병사단들과 예비기로 구성된 비행단으로 어거지로 버티는 상황.
  5. 예식진의 형 예군(禰軍)의 자가 온(溫)으로 기록되어 있다.
  6. 2011년 공주 공산성에 대한 발굴 조사에서 불에 탄 기와편들과 다수의 화살촉이 발견되었다. 고고학적 발굴로 놓고본다면 예식진이 의자왕을 당에게 넘기려고 할때 공산성에서 전투가 벌어졌을 개연성이 높아보인다.
  7. 구당서 소정방 열전에는 기록되어 있다(其大將禰植 又將義慈來降)고 하나, 그 역시 달리 해석할 여지('그 대장 예식. 그리고 우두머리 의자왕이 와서 항복하였다')가 있다
  8. 삼국사기 백제본기 의자왕편의 내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