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에다 토시하루

일본프로야구 선수, 지도자, 해설가.
현역 시절 성적은 별 볼일 없었지만 지도자가 된 이후 1970년대 중후반 한큐 브레이브스의 황금기를 이끈 무명 선수출신 명 감독의 전형적 인물.

1 프로필

이름우에다 토시하루(上田 利治)
생년월일1937년 1월 18일
출생지일본 도쿠시마 현 카이요우 정
투타우투우타
포지션포수
학력도쿠시마 현립 카이난 고교-간사이 대학
프로경력히로시마 카프(1959~1961)
지도자 경력히로시마 카프 배터리 코치(1962~1969)
한큐 브레이브스 수석 코치(1971~1973)
한큐/오릭스 브레이브스 감독(1974~1978, 1981~1990)
닛폰햄 파이터즈 감독(1995~1999)
한큐 브레이브즈 역대 감독
니시모토 유키오
(1963 - 1973)
우에다 토시하루
(1973 - 1978)
가지모토 다카오
(1979 - 1980)
한큐 브레이브즈/오릭스 브레이브즈/오릭스 블루웨이브 역대 감독
가지모토 다카오
(1979 - 1980)
우에다 토시하루
(1981 - 1990)
도이 쇼조
(1991 - 1993)
닛폰햄 파이터즈 역대 감독
오사와 케이지
(1993 - 1994)
우에다 토시하루
(1995 - 1999)
오시마 야스노리
(2000 - 2002)

2 현역 시절

카이난 고교를 졸업하고 간사이대학 법학부에 진학해 무라야마 미노루와 배터리를 이루며 나름 활약을 보였다. 대학 졸업 후 1959년 도요공업에 입사했다가 파견근무 형식으로 히로시마 카프에 입단 하였지만 어깨 부상으로 인해 불과 3시즌 만에 현역생활을 접고 말았다. 통산성적은 121경기 출장, 타율 0.218, 2홈런, 17타점 으로 상당히 초라한 편이다.

3 히로시마 코치 시절

선수생활을 접은 우에다는 도요공업 복직을 원했으나, 구단주인 마쓰다 쓰네지의 요청으로 불과 25세라는 젊은 나이에 히로시마의 배터리 코치로 임명되었다.[1] 우에다는 1969년 시즌까지 배터리 코치로 재임했으나, 네모토 리쿠오 감독과 의견 충돌을 일으키면서 코치직을 내려놓고 히로시마를 떠났다.

4 한큐 코치, 감독 1기 시절

053.jpg

히로시마에서 퇴단한 후 주고쿠 방송 해설위원으로 일하던 1971년, 히로시마 시절 동료인 야마우치 가즈히로[2]의 추천으로 니시모토 유키오 감독이 지휘하던 한큐 브레이브스의 수석 코치로 부임했다. 1973년 시즌을 끝으로 니시모토가 콩라인 탈출에 실패한 채(...)킨테츠 버팔로즈 감독으로 옮겨가면서 감독직을 물려받았는데, 이 때 우에다의 나이는 노무라 카츠야, 나가시마 시게오 등의 일부 현역들보다도 어린 37세였다. 젊은 무명선수 출신의 감독이 니시모토 감독의 얼굴에 먹칠을 하는 것이 아닌가하는 주변의 우려가 많았으나, 우에다는 니시모토가 그동안 다져놓은 터전에 자신의 지도력을 자양분 삼아 선수단을 이끌었고, 취임 2년차인 1975년, 친정팀 히로시마를 제물로 일본시리즈 첫 우승을 달성하며 한큐의 진정한 황금기를 열었다.

이 후 한큐는 1977년까지 일본시리즈 3연패를 달성했고, 우에다의 주가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았다. 한큐는 1978년도에도 퍼시픽리그 우승을 달성하며 퍼시픽리그 4연패와 동시에 4년 연속 일본시리즈 진출에 성공했는데, 이 일본시리즈에서 사건이 터졌다.

1978년 10월 22일, 고라쿠엔 구장[3]에서 열린 센트럴리그 야쿠르트 스왈로즈 와의 시리즈 7차전, 한큐가 0대 1로 뒤지던 6회말 1사 후 주자없는 상황에서 야쿠르트의 타자 오스기 카츠오가 한큐 에이스 아다치 미츠히로의 3구를 공략해 좌측 폴대 위를 넘어가는 타구를 날렸는데 심판은 이를 홈런으로 판정하였고, 우에다는 이에 격분해 맹렬히 항의했지만 판정은 번복되지 않았다.

b0117729_1225182.jpg
오스기의 홈런 판정에 심판진에 맹렬히 항의하는 우에다.

우에다는 한큐 선수단을 덕아웃으로 불러들인 후 무려 1시간 19분 동안이나 항의를 계속했고, 보다못한 퍼시픽리그 회장이 직접 내려와 설득한 후에야 경기를 재개했다. 이후 한큐는 우에다 감독의 항의 때문에 어깨가 식어버린 아다치 대신 마츠모토 마사시가 구원투수로 올라왔으나 찰리 매뉴얼이 야쿠르트의 기세를 올리는 솔로포로 우에다 감독의 항의를 무색하게 만들었다. 8회말에는 야마다 히사시피꺼솟한 오스기에게 또 다시 솔로 홈런을 허용하며 0:4로 패했고, 그 해 시리즈 준우승에 그치며 쓴잔을 들었다. 결국 우에다는 시리즈 7차전에서 물의를 빚은 것에 대한 책임을 지며 감독직을 수석 코치 카지모토 타카오에게 물려주고 사임했다.
.

5 한큐, 오릭스 감독 2기 시절

이후 우에다는 1979~1980년 NHK의 해설가로 활동하였으나 후임 감독인 카지모토가 성적부진으로 2시즌 만에 사임하며 한큐 감독으로 복귀했고, 1984년 타격 삼관왕을 달성한 외국인 선수 부머 웰스의 활약을 앞세워 개인 통산 5번째 리그 우승에 성공하였다. 그러나 그해 일본시리즈에선 히로시마 카프에 3승 4패로 발렸다(...).

한큐의 구단 매각으로 팀명이 오릭스 브레이브스로 바뀐 1989년, 우에다가 이끄는 오릭스는 시즌 전반기까지 2위와 8.5게임 차이의 1위를 질주하며 창단 첫 해 우승이 유력했으나, 주전들의 부상과 롯데의 고춧가루 투척으로 인해 오기 아키라 감독이 이끄는 긴테쓰 버팔로즈에 불과 승률 1리 차이로 밀려 2위에 그쳤다. 1990년 감독 통산 1천승을 채운 뒤 구단 편성부장에 임명되면서 오릭스 감독에서 물러났다.

6 닛폰햄 감독 시절

524_ueda.jpg
닛폰햄 파이터즈 감독 시절

1992년 오릭스의 편성부장 직을 사퇴하고, 1995년 닛폰햄 파이터즈 감독에 취임 하였으나 1996, 1998년 시즌 팀을 리그 2위로 올린 것 외에는 큰 업적을 남기지 못한 채 1999년 시즌을 마지막으로 그라운드를 떠났다. 감독 생활 20년 동안 1322승 1136패 109무승부(승률 0.538)일본시리즈 우승 3회, 리그 우승 5회의 통산 성적을 남겼다.

7 이후

2000년 이 후로는 주로 간사이 지역 언론의 해설가와 평론가로 활동 중이다. 2003년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8 에피소드

  • 어릴 때는 도쿠시마현 변호사회장인 삼촌을 존경해 변호사를 꿈으로 삼았다. 어어?? 그래서 간사이대의 체육특기생 입학 제의를 뿌리치고 가산점 100점을 받는 조건으로 법대 입시에 응시했는데, 결과는 400점 만점에 398점으로 법대 수석이었다. 그러나 학점 메우기도 벅찬 혹독한 훈련과 선배들의 똥군기 등이 맞물려 사법고시를 포기했고, 결국 야구를 업으로 삼게 되었다고 한다.
  • 1988년 10월 22일 한큐 브레이브스 해단식에서 선수들을 소개하면서 "은퇴하는 야마다 히사시, 그리고 남아 있을 후쿠모토 유타카"라고 말하려다가 실수로 "은퇴하는 야마다, 그리고 후쿠모토"라고 말했다. 우에다 본인은 곧장 실언을 수습하려고 했으나 기자기레기들에 의해 스포츠 신문 1면에 후쿠모토 은퇴!라고 대서특필 되었고, 결국 후쿠모토는 본의 아니게 은퇴하고 말았다...
  1. 이는 2015년 현재까지 일본프로야구 사상 최연소 코치 취임 기록이다.
  2. 훗날 롯데 오리온즈와 주니치 드래곤즈 감독을 역임한.
  3. 당시 야쿠르트의 홈구장은 메이지진구 구장이었으나, 도쿄6대학리그와 일본시리즈 일정이 겹친다는 핑계로 고라쿠엔 구장을 임차해 사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