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프로야구) | |||
센트럴 리그(Central League) | 퍼시픽 리그(Pacific League) | |||
50px |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즈 (Tokyo Yakult Swallows) | 60px | 요미우리 자이언츠 (Yomiuri Giants) |
65px | 요코하마 디엔에이 베이스타즈 (Yokohama DeNA BayStars) | 65px | 주니치 드래곤즈 (Chunichi Dragons) |
55px | 한신 타이거스 (Hanshin Tigers) | 55px | 히로시마 도요 카프 (Hiroshima Toyo Carp) |
과거에 참가했던 팀들 → |
220px | 270px |
팀 엠블럼[1] | 마스코트[2] 자빗[3] |
요미우리 자이언츠 | |
Yomiuri Giants ジャイアンツ | |
구단 법인명 | ㈜요미우리 교진군 (株式会社読売巨人軍) |
창단 | 1934년 12월 26일 |
연고지 | 도쿄 도 |
구단 연고지 변천 | 도쿄 도(1952~) |
구단명 변천 | 대일본 동경 야구 클럽(1934) 도쿄 교진군(1935~1946) 요미우리 자이언츠(1947~) |
홈 구장 | 고라쿠엔 구장(1937~1987) 도쿄돔(1988~) |
2군 구장 | 요미우리 자이언츠 구장(1985~) |
모기업 | 요미우리신문 |
감독 | 다카하시 요시노부 |
킷 스폰서 | 언더 아머 |
일본시리즈 우승 (22회) | 1951, 1952, 1953, 1955, 1961, 1963, 1965, 1966, 1967, 1968, 1969, 1970, 1971, 1972, 1973, 1981, 1989, 1994, 2000, 2002, 2009, 2012 |
센트럴 리그 우승 (36회) | 1951, 1952, 1953, 1955, 1956, 1957, 1958, 1959, 1961, 1963, 1965, 1966, 1967, 1968, 1969, 1970, 1971, 1972, 1973, 1976, 1977, 1981, 1983, 1987, 1989, 1990, 1994, 1996, 2000, 2002, 2007, 2008, 2009, 2012, 2013, 2014 |
센트럴 리그 클라이맥스 시리즈 우승 (4회) | 2008, 2009, 2012, 2013 |
일본 야구 연맹 리그 우승[4] (9회) | 1936 추계, 1937 춘계, 1938 추계, 1939, 1940, 1941, 1942, 1943, 1949 |
아시아 시리즈 우승 (1회) | 2012 |
한일 클럽 챔피언십 우승 (1회) | 2009 |
세리그/파리그 교류전 우승 (2회) | 2012, 2014 |
공식 홈페이지 한국어 페이지[5] |
1951년, 1952년, 1953년 일본시리즈 우승 팀 | ||||
1950-마이니치 오리온스 | → | 요미우리 자이언츠 | → | 1954-주니치 드래곤즈 |
1955년 일본시리즈 우승 팀 | ||||
1954-주니치 드래곤즈 | → | 요미우리 자이언츠 | → | 1956-니시테츠 라이온즈 |
1961년 일본시리즈 우승 팀 | ||||
1960-다이요 웨일스 | → | 요미우리 자이언츠 | → | 1962-도에이 플라이어스 |
1963년 일본시리즈 우승 팀 | ||||
1962-도에이 플라이어스 | → | 요미우리 자이언츠 | → | 1964-난카이 호크스 |
1965년, 1966년, 1967년, 1968년, 1969년, 1970년, 1971년, 1972년, 1973년 일본시리즈 우승 팀 | ||||
1964-난카이 호크스 | → | 요미우리 자이언츠 | → | 1974-롯데 오리온즈 |
1981년 일본시리즈 우승 팀 | ||||
1980-히로시마 도요 카프 | → | 요미우리 자이언츠 | → | 1982-세이부 라이온즈 |
1989년 일본시리즈 우승 팀 | ||||
1988-세이부 라이온즈 | → | 요미우리 자이언츠 | → | 1990-세이부 라이온즈 |
1994년 일본시리즈 우승 팀 | ||||
1993-야쿠르트 스왈로즈 | → | 요미우리 자이언츠 | → | 1995-야쿠르트 스왈로즈 |
2000년 일본시리즈 우승 팀 | ||||
1999-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 | → | 요미우리 자이언츠 | → | 2001-야쿠르트 스왈로즈 |
2002년 일본시리즈 우승 팀 | ||||
2001-야쿠르트 스왈로즈 | → | 요미우리 자이언츠 | → | 2003-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 |
2009년 일본시리즈 우승 팀 | ||||
2008-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즈 | → | 요미우리 자이언츠 | → | 2010-치바 롯데 마린즈 |
2012년 일본시리즈 우승 팀 | ||||
2011-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 | → | 요미우리 자이언츠 | → | 2013-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 |
2012년 아시아 시리즈 우승 팀 | ||||
2011-삼성 라이온즈 | → | 요미우리 자이언츠 | → | 2013-캔버라 캐벌리 |
목차
1 구단에 대한 소개
GIANTS PRIDE |
일본 프로야구 최고 명문 구단이며, 종목을 불문하고 일본 전체를 대표하는 스포츠 클럽
일본프로야구 센트럴리그의 프로야구단. 연고지는 도쿄 도. 홈 구장은 일본 최초의 돔 구장인 도쿄돔. 팀 컬러는 주황색이다. 동방의 오렌지 군단
마스코트는 자비트(Giants+Rabbit)로 토끼를 소재로 한 마스코트이다. 롯데 자이언츠의 마스코트가 갈매기이듯.[6]
일본에서는 보통 요미우리 자이언츠라고 다 부르지 않고, 줄여서 일본식 애칭인 '거인(쿄진・巨人)'이라고 부를 때가 많다. 야구중계의 스코어 표기에서도 지역명이나 스폰서명의 축약이 아니라 거인의 앞글자인 '巨'를 사용한다. 모회사 이름인 요미우리로 부르는 일은 타 팀 팬들이 반쯤 멸시적으로 지칭할 때 빼면 거의 없다. 즉, 교진군, 혹시나 일본 잔재인 '군' 표기를 싫어한다면 자이언츠 B.C.(야구단)로 부르는 게 일본 현지 방식에 가깝지만, 아무래도 한국에도 자이언츠가 있다 보니 한국에선 요미우리로 부른다. 몇몇 한국 매체의 경우는 한자로 거인(巨人)이라 표시한다. 1990년대까지 미국의 보도 매체에서는 미국식으로 TOKYO GIANTS로 표기됐었다. 2000년대에 들어와서는 YOMIURI GIANTS로 표기하는 매체의 비중이 늘고 있다.
일본 주식 시장에 등록된 팀명은 '(株)読売巨人軍'. 그러나 말만 주식 회사지 모기업인 요미우리 신문으로부터 재정의 대부분을 지원받는다. 모기업이 요미우리 신문인 만큼 창립자 및 간부들이 조선 침략을 미화하는 등 극우적 발언을 한 사례들이 있었다. 다만 아래 항목을 보면 알 수 있듯 구단 역사의 여명기부터 지금까지를 빛낸 구단 OB 중에는 상당수의 재일 한국인이 있고, 지금까지 한국인 선수를 가장 많이 데려간 구단이기도 하다.
당연히(?) 요미우리 계열사인 니혼 TV가 전 경기를 중계하나, 몇 년 전에는 구단의 성적이 중하위권을 맴돌아 시청률 문제로 골머리를 앓은 적도 있었다. 전 경기 중계라고 해도 한국의 케이블 TV처럼 1회 초부터 9회 말까지 완전 중계도 아니었고 정규방송 편성에 따라 3~4회부터 중계를 시작하거나 7~8회에 방송을 끊는 경우가 비일비재했다. 대표적인 예가 왕정치가 756호 홈런을 친 경기. 경기가 중계는 됐지만 정작 홈런을 친 순간은 정규 편성 중이던 예능 프로 방송 때문에 묻혀버렸다(...). 중계 방송이 시작된 시점은 이미 왕정치가 홈런을 치고 나서 20분이나 지난 뒤였고(...), 전 일본의 야구 팬이 그해 시즌 시작부터 기다려온 그 순간을 생중계를 하지 않는 병크로 인해 시청자들의 항의 전화가 빗발친 건 당연한 수순. 잠깐 이거 한국에도 비슷한 예가 있는 거 같은데? 결국은 니혼 TV도 전 경기 중계를 포기하고 대부분의 경기 중계를 니혼TV 계열 위성 방송사인 G+로 옮겼으며, 라디오는 주요 3개 라디오국(TBS라디오, 닛폰방송, 분카방송) 외에 요코하마에 있는 라디오닛폰(간사이권에선 라디오칸사이)이 전경기 전담 중계를 담당한다. 대신 여기서는 1회부터 경기 끝날 때까지 완전 중계니까 팬들에게는 좋은 일일 수도 있다. 인터넷 중계의 경우 GIANTS Live Stream에서 담당하는데 월 1,500엔을 내면 도쿄돔 홈경기, 원정 한신전, 원정 교류전까지 다 볼 수 있다. 인터넷중계에 소극적인 야쿠르트, 요코하마, 히로시마, 주니치와는 대조적.
요미우리 계열 스포츠신문인 스포츠호치(スポーツ報知)가 사실상의 당기관지 자이언츠 전담 매체다. 스포츠신문에 '거인' 카테고리가 따로 있을 정도. 2000년대 이전에는 블록지를 제외한 다른 스포츠신문도 요미우리 위주의 보도를 했으나 현재는 지역밀착을 바탕으로 한 퍼시픽리그의 인기 상승으로 균형이 잡혀져 있는 상태.
2 선도 구단
일본 야구계의 독보적인 돈지랄 구단. 그러나 2016년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가 1인당 평균 연봉으로 요미우리를 이겼고, 퍼시픽리그 구단들이 공격적으로 투자를 진행하면서 자력생존을 목표로 흑자운영까지 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돈지랄 키워드의 독점은 옛 말이 되고 있다. 게다가 요미우리신문은 인터넷, N스크린 발달로 인해 주요 돈줄이었던 신문사업 및 방송사업이 위기를 맞고 있다.
한 예로, 요미우리 회장이 2014년에 메이저리그 뉴욕 양키스로 진출한 '다나카 마사히로'한테 '우리 팀 선수가 된다면 연봉 10억 엔을 주겠다'[7][8]라고 발언한 것이 있다. 때문에 일본 리그의 좋은 선수란 좋은 선수를 싹 쓸어가는 관계로[9] 타 구단 팬들 중 특히 안티가 많다.
요미우리 때문에 단일 리그였던 일본 프로야구가 양대 리그로 나뉘어졌을 정도이며[10], 한 일본 야구 팬은 '일본 야구는 요미우리와 안티 요미우리로 나뉘어진다'라고 말할 정도. 즉 일본 프로야구의 역사는 곧 '요미우리와 요미우리에 대항하는 나머지 5+6개 팀'의 역사로 점철될 정도로, 요미우리는 영원한 수장으로서 일본 야구를 이끌어가고 있다. 요미우리가 특유의 돈지랄을 통해 앞서 나가고 나머지 센트럴리그 5개 구단이 그에 반기를 들며 도전하는 양상이며 안티 요미우리의 수장이 일본의 뿌리 깊은 관동-관서 라이벌 의식[11]까지 곁들여져 있는 한신 타이거스, 그리고 신문사 라이벌[12]이기도 하며 주부 지역의 대표인 주니치 드래곤즈와의 라이벌 구도, 그리고 같은 도쿄 연고 팀임에도 교진의 기에 눌려서 변방 취급받는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즈와의 경쟁 구도 등이 주가 된다.
이에 비해 퍼시픽리그는 센트럴리그 자체에 반기를 들면서 '니네는 인기와 기믹으로 먹고 산다면 우리는 야구 실력으로 먹고 산다'라는 식으로 어필해 왔지만, 센트럴리그보다는 관중 동원 면에서 떨어지는 모습을 보였다. 이렇게 프로레슬링을 연상케 하는 '스토리성'이 그동안 일본 프로야구를 이끌어온 요인이였다. 그러다 보니 요미우리 구단, 혹은 요미우리 신문의 재정 상태가 나빠져서 특유의 돈지랄을 못 하든가, 아니면 어쩌다 리그 하위권에 오래 머문다든가 하는 경우 위에서 언급한 스토리라인이 깨지기 대문에 요미우리뿐만 아니라 NPB 자체의 인기가 크게 하락하는 현상이 나타날 정도이다. 안티 요미우리의 선봉에 선 팀들조차 결국은 거인의 인기로 인한 반사 이익을 얻기 때문에 프로야구의 판이 깨지는 극단적인 상황은 바라지 않는다. 특히 이 팀의 회장인 꼰대 영감 와타나베 츠네오의 경우 일본 야구 판도 자체를 좌지우지할 정도이며, 전술되어 있듯 다나카 마사히로가 메이저리그에 진출하기 전에 '우리 팀이었다면' 연봉 10억 엔을 주겠다고 발언할 정도로 일본 야구계에서 막강한 인사이다. 이렇기 때문에 일본야구기구라는 행정기구가 있고, 커미셔너가 따로 존재하지만 요미우리의 입김이 매우 강력해서 모든 정책이 요미우리의 눈치를 볼 수 밖에 없는 구조다.
요미우리의 인기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중 하나는 중계권료인데, 일본프로야구 중계권료는 약 150억엔이며 이중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중계권료가 전체 중계권료의 약 30%를 차지한다.
과거에는 자체적으로 유망주를 키워 V9[13]을 달성하였으나 90년대 초반부터 FA 제도가 시행된 이후 다른 팀에서 검증된 선수들을 많이 데려갔다.[14] 그런데 문제는 이 검증된 선수들이 이상하게 자이언츠에 입단하면 먹튀화하는 경우가 많다는 점이 미스테리이다. LG 트윈스도 그랬었지... 용병들도 싹쓸이 대상에서 예외가 아니며 로베르토 페타지니, 터피 로즈 등 많은 선수들이 요미우리에서 시련을 겪었다(알렉스 라미레스 등 예외는 있다).일본 내의 평가[15] 08 시즌 충격적인 일본 데뷔를 한 임창용도 결국 야쿠르트와 재계약을 했지만 그 전까지는 요미우리가 데려갈 거라는 말이 나돌기도 했다. 다만 하라 타츠노리 감독의 2차 집권기부터는 육성 선수 제도 등을 활용해 야마구치 테츠야, 마쓰모토 테츠야처럼 우수한 신인을 발굴하는 등 팀의 자원을 유망주 육성에 더 쓰고 있으며 이를 통해 2000년대 후반 좋은 성과를 거두고 있다.[16] 물론 미국의 LA 다저스가 보여주듯 유망주 수집도 돈이 있기에 가능한 것이다.
선수 스타팅 라인업 발표 시 타악기와 육성만 사용하는 두 구단 중 하나(다른 하나는 치바 롯데 마린즈)로 이쪽은 응원 구호도 타 구단과 크게 차이난다. 다른 구단이 일본 프로야구 범용 구호[17]를 사용하는 데 비해, 자이언츠는 축구 서포터즈의 응원 콜을 사용한다.[18] 또한 일본 야구 하면 생각나는 플라스틱 배트도 외야 서포터즈석으로 가면 잘 쓰지 않으며, 맨손 응원을 많이 하고 있다. 요즘 베르디가 못해 빡친 서포터즈가 여기로 왔나[19] 그 외에는 다른 구단과 응원 스타일 면에서 큰 차이는 없는 편. 여담으로 안티 팬들이 많다보니 자이언츠가 자기 팀의 응원을 베꼈다는 의혹이 자주 제기되기도 한다. 진실은 저 너머에... 굳이 다른 팀에서 볼 수 없는 문화를 꼽자면 적시타가 나올 때마다 머플러를 머리 위에서 돌리는 것이다.
3 명문 구단의 자부심
일본프로야구뿐 아니라 일본 스포츠 최고의 인기 구단으로 전국적인 팬덤을 보유하고 있다. 기사 2014년 기준으로 889만 명을 보유하고 있어서 608만 명을 보유하고 있는 한신 타이거스보다도 월등히 많다. 출처(일본어 원문)[20]
2군 경기장인 요미우리 자이언츠 구장의 경우에도 입장료를 1,100엔이라는 정신 나간 2군 입장료를 자랑하며 자사 방송사를 동원해 방송 중계를 하다 보니 경기장 펜스 광고도 판매하고 있다.
보다시피 일본 내에서 가장 많은 인기를 구가하고 있으며, 요미우리 신문이라는 언론사를 등에 업은 빅 마켓 구단이라는 특성상 국내, 외국 선수 막론하고 끓는점이 굉장히 낮다. 대부분의 초인기 빅마켓팀 선수들이 치르는 고역이긴 하지만, 요미우리는 그 정도가 심해서 10년을 잘하다 한달만 못해도 바로 역적으로 취급해 쫓아내기도 한다는 것. 본가인 요미우리 신문에서 물어뜯기 시작하면 외국인 용병은 금방금방 버림받기 쉽다. 이승엽 선수도 "요미우리가 나에게 모든 것을 줬고 또 나에게 빼앗아 갔다"라고 표현했을 정도. 심지어 요미우리신문, 니혼TV 외의 미디어에서도 2000년대 전까지 야구 관련 뉴스를 센트럴리그, 특히 요미우리 위주로 보도했던 경우가 많아서 이 '선수 때리기'는 일상이었다고 봐도 무방하다.
이렇듯 구단도 '요미우리는 일본 야구를 대표한다'라는, 명문 구단의 자부심이 강하다. 선수들에게 대접을 잘 해주는 대신 타 구단에는 없는 품위 유지 규정이 존재한다. 이승엽이 힐링캠프 기쁘지 아니한가에서 증언한 바에 따르면 "수염 못 길러.", "옆머리가 귀를 덮게 하지 마.", "껌 씹지 마.", "경기 중에 침 뱉지 마.", "귀걸이 하지 마.", "원정 경기 이동시에는 정장을 착용할 것." 등의 주의를 들었다고 한다. 오가사와라 미치히로나 알렉스 라미레스등 원래 팀에서 수염을 길렀던 선수들도 자이언츠에 들어간 이후에는 수염을 기른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21][22][23] 물론 야구 외적으로도 사생활에 잡음이 없어야 한다는 건 덤이다. 이러한 룰을 지키지 않을 경우엔 아무리 성적이 좋고 인기 스타라 해도 용서가 없다. 3할 타율에 20홈런을 때릴 수 있는 유격수에다 교진 성골 스타였던 니오카 토모히로(二岡智宏)가 불륜 스캔들 한 번에 내쫓기듯 닛폰햄으로 트레이드 당한 사례가 좋은 예.[24] 그러나 막상 2013년에 불륜으로 인해 난리가 났던 스기우치 도시야는 아직까지 트레이드 되지는 않았다 심지어 스기우치는 성골도 아니다
우승에 대한 기준도 남달라 다른 팀의 경우는 리그 우승만 해도 포스트시즌의 졸전 여부와 상관없이 시즌 종료 후 우승 기념 이벤트를 여는 경우가 많지만, 거인은 오로지 리그 우승+일본시리즈 우승의 경우에만 우승 이벤트를 개최한다고 한다.
4 역사
요미우리 자이언츠/역사 참조.
5 최근 5년간 관중수 추이
2012년 | 2013년 | 2014년 | 2015년 | 2016년 | |
연 평균 | 2,903,947명 (+6.9%) | 3,008,197명 (+3.6%) | 3,018,284명 (+0.3) | 3,001,187명 (-0.6%) | 3,004,108명 (-1.3%) |
일일 평균 | 40,333명 | 41,781명 | 41,921명 | 42,270명 | 41,724명 |
6 순수혈통주의
요미우리 자이언츠/순수혈통주의 참조.
7 유니폼
/유니폼 항목 참조.
8 트리비아
8.1 한국선수에 대한 인연
과거에는 이팔용, 장훈, 가네다 마사이치, 김일융, 이승엽, 조성민, 정민철, 정민태 등 많은 한국인, 재일 한국인 선수들을 두고 있었다.
여러모로 자매구단인 삼성 라이온즈와 인연이 많은 것으로 유명한데 재일동포인 김일융이 삼성에 발을 딛은게 시초. 프랜차이즈 스타였던 김종훈과 김한수, 김현욱은 연수코치에 다녀온 적이 있었고 이승엽도 한 때는 지바롯데에서 뛰다가 2006년 하라 감독 복귀와 요미우리 전력증강으로 영입하였다. 첫해는 잘해서 초대형 계약을 맺었지만 2008년이후로 하향세 요미우리는 울며 겨자먹기식으로 계약기간동안 이승엽 데리고 있다가 2011년 오릭스를 거쳐 2012년 지금은 삼성에 복귀했다. 삼성 출신은 아니지만 삼성에서 뛴 적이 있던 김기태와 김기태도 있다. 공교롭게도 사고치는 꼬라지도 자매구단과 같이 쌍으로 치고 다니는 중이다.
8.2 기요하라에게 고개숙인 감독 & 코치들의 굴욕
위에서 설명한 순혈주의를 완벽하게 무시한 사례가 있었는데 그게 바로 기요하라 카즈히로, 요미우리 시절 파리그의 다른 팀 출신임에도 자기 따르는 선수들을 모은 파벌을 결성했다. 이 파벌은 기요하라 군단으로 불릴 정도로 팀 내에서 위세가 높았으며 실제로 기요하라는 팀에서 왕노릇을 했다. 감독이고 코치고 그를 제지하기는 커녕 오히려 기요하라가 코치에게 자리비키라고 반 협박을 해도 코치가 알아서 비켜주기도 했을 정도니... 위계질서를 강조하는 요미우리에게 있어서는 타팀출신에게 아무것도 못하고 휘둘려버리는 감독 & 코치의 모습이 드러났으니 제대로 망신살. 더군다나 방송으로 찍던 말던 오다 코헤이를 대놓고 괴롭히는 기요하라를 아무도 제지하지 않아서 오다가 야구선수로써 기량발전을 못한 원인을 제공하기도 했다. 어찌보면 방관은 더 나쁜것일지도.
9 대표적인 선수들
/선수목록 참조.
10 역대 감독
역대 | 이름 | 활동 연도 | 년수 |
1대 | 미야케 다이스케 | 1934 - 1935 | 2년 |
2대 | 아사누마 요시오 | 1935 - 1936 | 2년 |
3대 | 후지모토 사다요시[25] | 1936 - 1942 | 6년 |
4대 | 나카지마 하루야스 | 1943 | 1년 |
5대 | 후지모토 히데오 | 1944 - 1946 | 3년 |
6대 | 나카지마 하루야스 | 1946 - 1947 | 2년 |
7대 | 미하라 오사무 | 1947 - 1949 | 3년 |
8대 | 미즈하라 시게루 | 1950 - 1960 | 11년 |
9대 | 카와카미 테츠하루 | 1961 - 1974 | 14년 |
10대 | 나가시마 시게오 | 1975 - 1980 | 6년 |
11대 | 후지타 모토시 | 1981 - 1983 | 3년 |
12대 | 오 사다하루 | 1984 - 1988 | 5년 |
13대 | 후지타 모토시 | 1989 - 1992 | 4년 |
14대 | 나가시마 시게오 | 1993 - 2001 | 9년 |
15대 | 하라 다쓰노리 | 2002 - 2003 | 2년 |
16대 | 호리우치 츠네오 | 2004 - 2005 | 2년 |
17대 | 하라 다쓰노리 | 2006 - 2015 | 10년 |
18대 | 다카하시 요시노부 | 2016 - |
보면 알겠지만 양대리그 분리 후에는 깔끔하게 한번도 시즌 도중에 감독이 교체되거나 한 적이 없으며 2015년까지 65년동안 10대에 걸쳐 단 7명만이 감독에 재임하여 감독 임기도 평균 6.5년으로 수명도 길다. 물론 나가시마, 후지타, 하라의 경우에는 중간에 한번 물러났다가 다시 지휘봉을 잡은 케이스이기는 했지만 이들 감독들도 중간의 어떤 흑역사를 제외하곤 장기간 감독자리에 앉으면서 팀을 안정되게 이끌었다.
11 관련 항목
- ↑ 2006년에 공개되었으나 옆의 2011년형 엠블럼의 등장으로 거의 볼 수 없게 되었다.
- ↑ 이 엠블럼은 2011년에 공개된 것으로 왼쪽의 '공식 엠블럼'보다 더 자주 쓴다. (자빗 자체는 예전부터 있던 마스코트다.)
- ↑ 자이언츠(Giants)+토끼(Rabbit)
- ↑ 양대 리그 출범 이전.
- ↑ 2016년 기준으로 한국인 선수가 없지만 한국어 홈페이지가 상당히 충실하다. 심지어 한국어, 영어, 중국어로 티켓 구매 절차가 설명되어 있고 리다이렉트되는 영어 페이지에서 구매가 가능하다.
- ↑ 100px 이 자비트 마스코트는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모자에 있는 YG 교차 로고의 형상에서 토끼 모양을 착안해낸 것에서 비롯됐다. Y자의 갈라진 부분이 귀가 되고 G와 교차되면서 얼굴 모양을 형성하고 Y의 받침 부분이 몸통과 발의 형태를 하는 형식으로 디자인되었으며 1992년부터 채택되었다. 1970년대에는 미스터 자이언츠라는 자이언츠의 유니폼을 입은 아저씨(...)가 마스코트였고 1980년대에는 쌍방울 레이더스 비슷하게 팔다리가 달린 야구공이 헬멧을 쓰고 마녀 빗자루처럼 야구 배트를 타고 있는 모양이 마스코트 로고였다.
- ↑ 당시 엔 시세를 감안하면 못해도 90억 원 이상이라는 천문학적인 금액이요, 달러로 환산해도 800만 달러는 그냥 넘어가는 큰 금액이다.
- ↑ 그러나 디나카는 그 2배가 넘는 연봉, 그것도 7년이나 보장받고 양키스로 갔다.(...) 아무리 교진군이라도 미국 메이저리그에는 상대가 안된다늗 적절한 예시.
- ↑ 사실 이것이 이들 구단 탓만 할 것이 아닌 게 선수들 입장에서 보면 우승 가능한 구단, 여기에 누구나 알고 있는 명문 구단에서 뛴다는 것은 프로 선수 인생에 있어서 희망 사항 중 하나이다. 당장 야구만이 아닌 타 구기 종목 프로 구단만 봐도 그렇다. 괜히 칼 말론이나 게리 페이튼 같은 명선수들이 단기 계약을 감수하고서라도 LA 레이커스에 입단했던 것이 아니다. 메이저리그에서 뉴욕 양키스는 메이저리거라면 한 번쯤 뛰어보고 싶은 명문 구단이라는 점 역시 좋은 예라 할 수 있다. 우승 후보에 명문이란 두 가지 장점이 존재하는 것이다.
- ↑ 요미우리가 난카이 호크스의 벳쇼 다케히코를 영입하면서 생긴 일명 '벳쇼 빼내기 사건'을 저질렀으며, 또한 위시한 양대리그 출범 반대파가
2부리그센트럴 리그를, 찬성파가1부리그퍼시픽 리그를 출범하게 만들어버린 것도 바로 요미우리가 단초를 제공했다. - ↑ 특히 요미우리-한신과의 대결은 전통의 일전으로 불리며, 2016년 시즌부터 양팀의 레전드인 타카하시 요시노부와 가네모토 도모아키가 감독으로 취임하면서 양 구단이 '전통의 일전'을 공식적으로 더비매치의 명칭으로 사용하며 공동 마케팅을 통해 이 라이벌리를 다시 띄우는 중이다.
그러나 퍼시픽리그에선 엘꼴라시코 취급중 - ↑ 신문 및 방송사업에서 라이벌이기도 하지만 주니치와는 지방방송국 지분을 가진 동업자이기도 하다.
- ↑ 9년 연속 우승
- ↑ 90년대부터 2000년대 초까지 오치아이 히로미츠를 필두로 히로사와 카츠미(야쿠르트), 이시이 히로오(긴테쓰), 키요하라 카즈히로(세이부), 에토 아키라(히로시마), 고쿠보 히로키(다이에) 등 각 팀에서도 4번 타자를 맡았던 프랜차이즈 스타 들을 대거 대려왔다. 투수 영입은 상대적으로는 소박했지만 역시 쿠도 키미야스등 빅네임들이 있었다.
- ↑ 준수한 활약을 펼친 선수라도 워낙 투자한 액수가 커서 적자로 평가한 사례들도 있다.
- ↑ 하지만 쵸노 히사요시, 사와무라 히로카즈, 스가노 도모유키 등의 사례에서 볼 수 있듯 여전히 자금력과 명성, 뒷공작 등을 이용해 드래프트 최대어를 미리 확보해 놓는 등 과거와 같은 패악질을 일삼고 있기도 하다. 물론 스가노의 경우는 자기 외삼촌이 당시 감독이던 하라여서 교진을 가고 싶어했던 면도 있었지만...
- ↑ 범용 구호는 "오~ Go! ○○○(선수명)". 참고로 치바 롯데 역시 범용 구호 사용하지 않고 한국 야구에서 쓰는 콜을 주로 쓴다.
- ↑ "(짝짝짝) ○○○!(선수명)". K리그이 경우를 들면 한 선수당 두세 번 사용하는데, 자이언츠는 이들 중 세 번을 외친다.
- ↑ 응원 도구를 적극적으로 쓰는
철천지 원수한신과는 크게 대조적인 부분이다. - ↑ 참고로 팬덤 수에서 3위~5위까지는 히로시마 도요 카프(292만 명), 주니치 드래곤즈(288만 명),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279만 명) 순이다.
- ↑ 오가사와라는 자이언츠가 수염 길러도 좋다고 한 엄청나게 드문 사람인데 자기가 알아서 깎고 다닌다.
로마에 가면 로마의 법을 따라야죠이러한 규정은 메이저리그 뉴욕 양키스에도 비슷하게 존재한다. 예를 들면 조니 데이먼은 보스턴에서 뛸 때에 길렀던 수염을 양키스 이적 후에 밀어버렸다.사실 이 규정은 조지 스타인브레너의 괴팍함 때문에 생겨났지만... - ↑ 거의 유일하게 거인에서 수염을 길렀던 선수가 있었는데 요코하마 다이요 훼일즈의 프랜차이즈 스타였던 야시키 카나메라는 선수가 있다. 요코하마 시절 골글 5회, 도루왕 3회의 실적을 갖췄던 외야수로 말년에 잠시 요미우리에서 뛰었다.
- ↑ 마무리 투수 사와무라 히로카즈는 모히칸 머리를 했는데 팀 관계자들의 불평이 거셌다.
- ↑ 니오카는 야마모토 모나와의 불륜 하나로 문책성 트레이드가 된 건 아니고, 그 전에 후배 선수인 야노 겐지와 동석한 술자리에서 영 좋지 않은 곳의 털을 라이터로 태우면서 그 후배 선수는 고통스러워하는데 낄낄 웃으면서 병신짓한 게 걸려서 구단이 발칵 뒤집어진 후 2연타로 터진 것이었다. 쫒겨날 만했다. 그 전까지 모범적인 이미지가 강한 선수였기에 이 2연타 병크로 두 얼굴의 사나이 & 모나오카 등등으로 불리며 엄청나게 까였다. 니혼햄으로 하야시 마사노리와 같이 트레이드됐을 때 마지막 기자 회견에서 울먹거리면서 인터뷰를 했다. 요미우리 자이언츠에 대한 애정만큼은 남달랐던 듯...
그러게 왜 그런 변태짓에다 불륜짓해서 쫒겨나니 ㅉㅉ그리고 니오카는 닛폰햄에서 그저 그런 활약을 펼치다가 은퇴 후 2016년 요미우리에 2군 타격코치로 복귀했다. 정작 그 다음에 3순위로 뽑혔던 카토 켄이 백업포수로 2군과 1군을 왔다갔다하며 요미우리에서 지금까지 뛰고 있는 중. 참고로 니오카의 동기 중 1순위로 뽑혔던 건 우에하라 코지다. - ↑ 후에 퍼시픽-쇼치쿠 로빈스, 킨세이-다이에이 스타즈, 한큐 브레이브스, 한신 타이거스의 감독을 맡았으며 한신 시절인 1962년엔 한신을 양대리그제 실시 이후 최초의 센트럴리그 우승으로 이끌었고 그 뒤 1964년에도 또다시 우승을 안겨주었다. 그러나 일본시리즈에서 62년엔 토에이 플라이어즈에게, 64년엔 난카이 호크스에게 패배한 콩라인이기도 했다(...)
- ↑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마스코트였던, 사람 얼굴 같은 공이 배트에 탄 모양새인 '배트에 탄 소년(バットに乗った少年)'을 표절한 "방울이" 를 본인들 마스코트로 사용했다. 쌍방울 레이더스 항목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