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페이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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吳佩孚, Wú Pèifú, 오패부
(1874년 4월 22일 산둥, - 1939년 12월 4일 베이핑)

1 소개

중화민국군벌. 장쭤린과 중국 천하의 지배자 자리를 놓고 자웅을 겨루었으며 한때 장쭤린을 꺾고 1인자의 자리에 오를 뻔 했으나 라이벌인 장쭤린과 사이좋게 남방에서 올라온 장제스의 북벌에 밀려 초라하게 몰락하고 만다. 별명은 '유교 장군'이었다.

2 생애

2.1 군문에 들다

1874년 산둥의 봉래에서 부유한 상인의 아들로 태어났다. 대개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서 군사교육 외엔 변변한 교육을 받지 못한 다른 군벌들과 달리, 우페이푸는 유교를 비롯한 전통적인 교육이긴 해도 어린 시절에 상당한 교육을 받았고 과거 시험에 응시하여 최종 시험까지 통과해 22세에 수재가 되기도 했다. 이 때문에 군벌 중엔 가장 머리가 좋은 사람이었다는 평가가 있다. 하지만 관료의 길이 아니라 군인의 길을 걷기로 하여 1898년에 회군에 입대하였고 위안스카이의 북양무비학당 보병과를 거쳐 훗날 북양군대라 불리게 되는 신군에 속하게 되었으며 1902년 바오딩 군관학교 측량과를 졸업했다. 배운 사람이어서 그랬는지 그는 젊어서 두각을 드러냈고 상관들의 눈에 들어 빠른 승진을 거쳤다. 1904년에 러일전쟁 와중에 차오쿤과 인연을 맺게 되고 1906년에 그의 휘하에 들게 되어 북양육군 3진의 포병 3연대 1대대장이 되었다. 1911년 신해혁명이 발생하고 1912년의 청나라 멸망을 거쳐 우페이푸의 상관인 위안스카이가 중국의 지배자가 되었다. 황제병에 걸린 그가 중화제국을 선포하고 칭제하자 그를 몰아내기 위해서 전국 각지에서 봉기가 일어났는데 이를 호국전쟁이라 한다. 우페이푸는 호국전쟁에서 봉기군을 차례로 진압하여 6연대장까지 승진했다. 하지만 위안스카이는 압력을 견디지 못하고 1916년 하야했고 머지 않아 사망했는데 그의 휘하의 북양군은 돤치루이의 환계와 펑궈장의 직계로 분열되었다. 우페이푸는 직계에 속해 있었다.

2.2 직환전쟁

분열 초기엔 돤치루이의 환계가 베이징을 점령하고 대리총통 리위안훙, 허수아비 총통 쉬스창을 내세워 떵떵거렸다. 돤치루이는 1차 세계대전 참전과 남정 문제로 펑궈장과 크게 충돌했지만 막무가내로 자신의 의사를 관철했고 봉계의 장쭤린까지 끌어들였으나 장쭤린과 돤치루이는 돈문제로 금방 틀어져버렸다. 이 난장판 와중에 우페이푸는 1917년 장쉰의 복벽운동을 진압하는 등 계속 군공을 세워서 직계 내부에서 차근차근 승진해나갔고 후베이를 근거지로 삼아서 후난 쪽으로 차차 세력을 확장해나갔다. 호법전쟁 때는 3사단장으로 후난에서 공을 세웠다. 1919년 펑궈장은 죽었고 직예독군 차오쿤이 직계의 수장이 되었는데 그 시점에 가면 직계 최고 실세가 되어 있었다. 1920년 우페이푸는 돤치루이의 명령을 거부하고 윈난의 탕지야오, 광시의 루룽팅, 쑨원의 광둥정부와 멋대로 휴전한 다음에 직계군벌들을 규합하는 한편 장쭤린까지 끌어들여 환계에 대한 반기를 들었다. 당황한 돤치루이는 1920년 7월 8일 직군 토벌을 선포하고 우페이푸를 진압하려 했지만 일본과 지나친 협력으로 민심을 잃은 돤치루이는 환계와 봉계의 연합공세에 허망하게 무너져버렸고 그의 천하는 4년 만에 끝나버렸다. 이것이 직환전쟁이다.

2.3 1차 직봉전쟁

돤치루이가 물러난 이후 천하는 직계와 봉계가 나누어 가졌지만 이 시기가 다 그렇듯이 당연히 둘은 서로를 적대하기 시작했다. 장쭤린의 야심은 끝이 없었고 정통 엘리트 출신인 차오쿤과 우페이푸는 마적단 출신의 장쭤린을 하찮게 보았으며 그들의 약탈 행위에 그들을 더욱 경멸했다. 봉계의 수장 장쭤린은 우페이푸를 차오쿤의 졸개 정도로 여겨 신경쓰지 않았지만 우페이푸가 즈리, 허난, 후베이, 후난을 점령하고 양호순열사가 되어 위세를 부리자 뒤늦게 그의 존재를 깨닫고 크게 경계하게 되었다. 직환전쟁이 끝난 후에 벌어진 회의에서 우페이푸가 직계의 실세임을 모르는 장쭤린은 우페이푸에게 일개 사단장 주제에 어디서 입을 여느냐고 마구 호통을 친 적도 있었다. 이 때문에 우페이푸는 장쭤린을 싫어했고 차오쿤이 또 다시 장쭤린과 싸울 수도 없지 않느냐고 달랬음에도 뤄양에서 병사들을 조련하며 장쭤린과의 일전을 준비했다.

이에 자극받은 장쭤린은 러허를 점령하면서 자신의 세력을 확장했고 다시 천하를 두고 일본의 지원을 받으며 직계와 대립했다. 반면 우페이푸는 영미의 지원을 받으며 세력을 늘렸고 산시 성과 허난, 후베이로 세력을 확장했다. 장쭤린은 반직예파 동맹을 결성하여 직예파를 섬멸하려는 음모를 꾸몄다. 이런 수면 밑의 충돌 외에서도 수면 위에서도 갈등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는데 당시 열악한 중국의 재정 문제 때문에 봉천과 직예가 강력히 충돌한 것이다. 거기다 운게른 슈테른베르크가 외몽골을 점령한 일 등도 겹쳤지만 북양정부는 속수무책이었고 무능한 정부 사이에서 양자는 정부가 편향적이라고 비판을 해댔다. 1921년 12월 14일 장쭤린은 북양정부의 군운붕 내각을 양사이 내각으로 갈아치웠고 환계를 끌어들이기 위해 돤치루이 계 인물들을 대거 사면해주었는데 이 때문에 직계는 배신이라고 길길이 날뛰었다. 거기에 양사이가 위안스카이 시절 친일행위로 대중의 분노를 산 바가 있는 각료들을 등용하자 이에 우페이푸는 양사이를 이완용 같은 자라고 맹렬히 비난했다. 사스가 대표 매국노 클라스

결국 봉천 파벌과 직예 파벌은 1922년 4월 28일에 충돌하는 데 이것이 바로 1차 직봉전쟁이다.(봉직전쟁이라고도 한다.) 기량이 형편없던 봉천 군대는 장쉐량과 궈쑹링이 지휘하던 2개 부대만 제외하곤 모조리 참패를 면치 못했고 장쭤린은 자신의 부하들에 대한 실망을 금치 못하면서 만주로 퇴각할 수밖에 없었다. 우페이푸는 산해관까지 장쭤린 군대를 밀어붙였으나 일본의 눈치를 봐서 더 이상 진군하진 않았다. 이로써 우페이푸가 중국 천하의 1인자로 등극한 것이다. 이때 쑨원은 북벌을 외치며 우페이푸의 후방을 찔러보려 했으나 군벌 천중밍의 반란으로 광저우에서 오히려 축출되었고 천중밍은 대가로 우페이푸에게 광둥 성의 지배권을 공식적으로 인정받았다.

2.4 2차 직봉전쟁

파일:오패부.jpg
그의 리즈 시절.jpg 그는 중국인 중에서 타임지에 실린 첫 인물이었으며 중국에서 가장 강력한 인물로 소개되었다. 공교롭게도 타임지 모델로 실린지 1주일이 못되어 2차 직봉전쟁이 터지면서 그는 몰락한다.

우페이푸는 휘하에 무려 50만 대군을 거느렸고 그 위세가 하늘을 찌를 듯 했다. 우페이푸는 총통 쉬스창을 축출하고 리위안훙을 잠시 세웠다가 그도 곧 축출하고 자신의 보스인 차오쿤을 대총통으로 옹립하였고 자신의 말을 듣지 않는 군벌들에겐 푸대접과 응징을, 자신의 계열 인사들에겐 불합리한 지원과 옹호를 일삼았다. 그의 막무가내적인 행동에 직계 내부에선 차차 우페이푸에 대한 불만이 쌓여갔다. 게다가 우페이푸는 직계의 리더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실세로 다른 직계 인물들의 눈에는 그는 그저 차오쿤을 믿고 설치는 놈 정도로 보였던 것이다. 직계 내부에서 우페이푸와 적대하던 인물로 대표적인 것이 훗날 북경정변을 일으켜 장쭤린과 손을 잡아버리는 펑위샹이다. 한편 만주에 쫓겨났던 장쭤린은 펑톈에 거대한 무기공장을 세우는 등 만주를 매우 근대화시켰고 이를 바탕으로 자신의 군사력을 크게 강화시켜 이전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힘을 가지게 되었다. 그는 돤치루이의 잔여 세력과 쑨원에까지 손을 내밀어 우페이푸를 고립시켰고 이러한 힘과 정세를 바탕으로 1924년 9월 13일 1차 직봉전쟁의 설욕을 하기 위해 우페이푸를 쳤고 펑위샹이 내통하여 북경정변을 일으켜 차오쿤 정권을 전복시키고 내친 김에 핍궁사건을 일으켜 청나라 황족들을 자금성에서 축출했다. 우페이푸는 토역군총사령관의 자리에 올라 자신의 세력을 전부 동원하여 장쭤린에 맞섰지만 결국 우페이푸는 내분과 훨씬 강력해진 봉천 군대의 힘에 밀려서 참패할 수밖에 없었고 후베이와 후난을 제외한 모든 영토를 잃고 겨우 2천명의 병사만 거느린채 패주했다. 우페이푸의 몰락을 지켜보던 쑨촨팡 등은 즉각 그의 세력에서 이탈하여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하였다. 이때 우페이푸가 하도 고생을 했는지 그의 머리가 모두 새어버렸다고 한다.

하지만 장쭤린의 천하도 오래 가지 않았다. 아니나다를까 이번엔 장쭤린을 노리고 군벌들이 들고 일어난 것이다. 이때 선봉에 선 것이 산둥, 저장 등을 다스리던 쑨촨팡이었는데 그는 우페이푸에게 그를 여전히 상관으로 섬기고 있다면서 장시와 후난의 군벌들과 연명으로 편지를 보냈고 펑위샹 등 다시 장쭤린과 틀어진 군벌들을 규합, 1925년 10월 16일 반봉전쟁을 일으키고 저장, 장쑤, 안후이, 장시, 푸젠 이렇게 남방의 다섯개 성의 세력을 규합한 오성연군을 일으켜 장쭤린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한때 중국천하의 반을 지배했던 장쭤린은 패하여 다시 북방으로 밀리기 시작했다. 설상가상으로 휘하의 궈쑹린이 반봉사건을 일으키며 반란을 일으키기까지 했다. 이때 우페이푸는 1926년 5월 장쭤린, 옌시산과 손을 잡고 공적이 된 펑위샹을 두들기는 직봉풍 전쟁에 가담하여 쑤이위안 등을 점령하는 등 다시 기반을 잡아 재기하는가 했지만... 그가 한창 펑위샹을 두들기는 와중에 남방에서 생각지도 못한 역습이 들어오게 된다.

2.5 몰락과 말년

1926년 7월 1일 국민당의 장제스가 광저우에서 북벌을 선포, 7월 9일에 북벌군 총사령관에 취임하여 10만의 병사들을 이끌고 북상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숫자는 적어도 혁명정신과 소련 교관들의 훈련으로 인해 전투력이 군벌군에 비할 바가 아니었고 엄정한 규율 때문에 가는 곳마다 민심을 얻었다. 펑위샹을 밀어붙히던 쑨촨팡과 우페이푸는 결국 장제스의 역습에 잇달아 패했고 자신의 중심지인 우한을 장제스에게 내주고 맥없이 패퇴했다. 그는 마지막 순간까지 우한을 사수할 것이라고 외신기자들에게 외쳤지만 그의 부하들은 앞다퉈 탈영하고 장제스의 매수에 넘어가고 있었다. 결국 그는 완전히 낭인 신세로 전락하여 쓰촨 군벌들에게 "나는 더 이상 갈 곳이 없다."라며 몸을 의탁했고 4년을 쓰촨에서 지내게 된다. 1930년 반장전쟁이 발생하자 그는 재기를 노리지만 장제스가 제때에 쓰촨 군벌들을 매수함으로 처참하게 실패했고 간쑤에서도 실패했다. 1931년, 반장전쟁을 진압하고 중국의 지배자 자리를 공고히 한 장제스는 옛 적인 우페이푸에게 은혜를 베풀어 그가 쓰촨 밖으로 나오는 것을 허용했고 그는 장쉐량의 초청을 받아 베이핑으로 이주하여 그와 숙질 관계를 맺고 장쉐량에게 사부 대접을 받게 된다. 그는 이제 완전히 실권한 상태였으므로 장제스의 눈에도 그는 더 이상 위협이 되지 않았던 것이다.

이후 그는 베이핑에서 장쉐량이 주는 용돈을 받으며 살았고 공산당을 토벌하던 장제스와 같이 밥을 먹기도 했다. 그는 사실상 잊혀진 인물이었다. 그가 다시 주목을 받게 된 것은 일본이 중국을 침략하면서부터였는데 일본은 1935년부터 화북자치운동이란 것을 함으로 만주에 이어 화북을 식민지화하려 했고 우페이푸를 구슬리며 그를 꼭두각시로 내세우려 했지만 젊어서부터 반일성향이 강했던 우페이푸는 이를 단호히 거부했다. 1937년 중일전쟁이 발생하자 우페이푸가 거주하던 베이핑도 일본군에게 점령되었다. 우페이푸는 피난을 거부하고 자신의 집에 관우와 악비의 초상화를 걸고 일본에 굴복하지 않겠다는 뜻을 드러냈다. 일본은 우페이푸를 포섭하여 괴뢰정부의 수장으로 삼으려고 한간들을 보내 그를 유혹했으나 우페이푸는 한간들을 어찌 일본인의 주구가 되려 하냐며 크게 욕하며 그들과 절교를 선언했다. 일본은 협조한다면 산포 200문, 소총 10만정, 기관총 2천정, 100만위안의 군자금을 제공하겠다고 러브콜을 보냈고 일본에 붙은 왕징웨이도 그를 회유했으나 우페이푸는 단호했다. 그러던 중 1939년 12월 1일 양고기와 만두를 먹던 우페이푸의 치통이 갑자기 심해져 고열에 시달렸고 치료를 위해 일본인 치과병원을 찾았는데 12월 4일 거기서 급사하고 만다. 이에 대해 일본의 암살설이 떠돌고 있다.

3 여담

그의 반일정신을 높이 평가한 장제스는 1940년 그에게 일급상장 자리를 추서했으며 장제스와 쑹메이링 부부가 각각 유가족에게 조전을 보내고 20만 위안을 하사했다.

군벌임에도 개인적 축재를 하지 않고 매우 검소한 삶을 살았다 한다. 그의 옷이라곤 군복 몇벌 외엔 없었다고. 첩을 수두룩하게 거느리고 아편과 부귀영화에 허우적거리던 다른 군벌들과 대비되는 부분이다. 또한 허구한날 홍콩이다 상하이 조계지다 안전한 곳에 달아나던 다른 군벌들과 달리 중국 밖을 나가려 하지 않았으며 일본군의 침략에도 베이핑에 꿋꿋하게 남은 모습은 확실히 돋보이는 모습이다. 결혼은 살면서 총 3번 했는데 자식은 단 하나 뿐이었다 한다.

유교교육을 받아서인지 편지를 쓸때 간결하면서도 무게 있는 한자 4자만을 적어서 회신하곤 했는데 이것이 정곡을 찌르는 명문들이었다 한다. 어떤 평판 좋지 않은 자가 허난 성에 자리를 달라하자 우페이푸는 허난 백성들이 무슨 죄가 있어 자네와 같은 나쁜 관리를 맞아야 한단 말인가?라는 뜻의 '예민하고(豫民何辜)'란 뜻의 글만 돌려보냈으며 여단장 청탁 요구에 '차선종수(且先種樹)'라는 글을 보내며 뜻만 있고 능력없는 당신은 나무라도 심어서 백성들에게 도움이나 되라고 거절했다. 그런가하면 주중 독일공사의 딸이 우페이푸에게 반해 구혼을 한 일이 있었는데 웬 독일어 편지에 의아한 우페이푸는 이를 비서를 시켜 번역하게하여 그 뜻을 알곤 '노처상재(老妻尙在)'라고 자신이 기혼자라는 글을 보내어 거절했다 한다. 그외에도 정곡을 찌르는 문장을 잘 쓰곤 했는데 그의 동창이 군부대의 군수 소장 자리를 요구하자 이렇게 글을 서서 보냈다고 한다.

소장필유소장(所長必有所長)=소장은 무릇 뛰어난 능력이 있어야 한다.
형지소장하재(兄之所長何在)=형의 뛰어난 점은 무엇인가?

이 편지를 받은 동창은 포기하고 말았다 한다.

4 참고문헌

  • 장제스 평전, 조너선 펜비, 민음사
  • 중국근현대사 2: 근대국가의 모색 1894~1925, 가와시마 신, 삼천리
  • 오사시기 군벌체제의 재편, 박준수, 춘천교육대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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