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규

1 고려 초의 인물

왕규(함규(咸規,) ?~945). 고려 초기의 정치인이자 권력자로 함씨의 중시조이다.

경기도 광주의 성주출신 함규(咸規,)로 태조에게 사성 받아 왕씨가 되었다. 외교 부분에서 수완을 보여 통일 직후인 태조 20년(937)에 오대십국시대 후진(後晉) 석경당의 즉위 축하 사절로 중국에 다녀온 기록이 있다. 이후 벼슬이 대광에 이르렀고, 자신의 두 딸을 태조에게 시집보내 15번째, 16번째 왕비가 되게 했다.

고려사 반역전에선 왕건 사후 왕규의 행적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요와 소에 비해 기반이 약한 권왕 혜종이 등극하자 칼 들고 야습한 자객을 자다 깨서 맨 주먹으로 때려잡을 정도로 병약하여 정무를 보기 어려운 병약의 기준이 의심스러운 혜종을 대신해 권력을 틀어쥐고 태조의 유지를 받은 박술희를 유배시켰다. 외가쪽 기반이 강력한 요(후의 정종), 소(후의 광종)도 혜종의 병약함을 틈타 왕위를 노리자 왕규와 요, 소의 대립이 심해져갔다.

왕규는 요와 소를 제거할 심산으로 혜종에게 요와 소가 반역을 꾀하고 있다고 고했으나, 혜종은 오히려 소에게 자신의 딸을 시집보냈다.

이렇게 되자 왕규는 혜종을 제거하고 자신의 외손자인 태조의 아들 광주원군을 왕으로 올리려고 획책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뛰어난 무장이었던 혜종은 자객을 맨손으로 제압하여 암살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다.

결국 혜종이 병사하고, 그 뒤를 요가 이어받아 정종으로 즉위하자 난을 일으켰지만 태조의 사촌동생인 왕식렴이 이를 진압해 결국 참수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기록은 정황상 앞뒤가 안맞는 내용이 굉장히 많아 고려시대 정치사 전공하는 학자들 사이에선 곡필이 심한 부분으로 추정되고 있다. 즉 정종일파의 조작일 가능성이 높다.

왕규가 두 딸을 태조에게 시집보내 광주원군을 얻었다곤 하지만 위의 형들이 워낙 많아 왕위를 노릴 명분이 부족했다. 무엇보다 왕규는 다른 딸을 혜종에게 시집보냈다.

한강 물목을 움켜진 광주 일대의 유력 성주 출신으로 일찍이 왕건에게 사성을 받고 대중외교 등 중책을 수행했으며 왕건이 승하하기전 그의 유조를 받든 신하 중 한명이다. 즉, 왕건 생전에 대단한 신임을 받고 있었던 중신이다. 고려사 기록을 그대로 믿으면 그런 중신이 갑자기 서열이 한참 떨어지는 자기 손자를 왕으로 만들기 위해 자기 사위를 죽이려 들었다는 이해할 수 없는 그림이 나온다.[1]

오히려 왕규는 박술희와 함께 혜종의 친위세력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태조는, 무력기반은 탄탄하지만 한미한 무관 출신으로 강력한 지지기반이 없는 박술희를 돕기 위해 광주의 유력자였던 왕규를 선택했다고 생각할 수 있다. 혜종이 경쟁자인 왕소에게 딸을 시집보낸 것도 왕요와 왕소 사이를 이간질하기 위한 정략으로 보면 자연스럽다. 그러다 서경의 왕식렴 세력을 끌어들인 왕요 일파에게 제거당했고 명분을 마련하기 위해 왕규에게 역적 혐의를 뒤집어 씌웠을 가능성이 높다.

왕규는 유력 호족 출신에 세력이 크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문신이다. 만약 왕규가 박술희와 함께 혜종의 친위세력이었다는 사실을 전제조건으로 한다면, 혜종의 측근 문신은 왕규가, 측근 무신은 박술희가 담당했을 것이다. 안그래도 건국 초기의 불안정적인 정국에서 왕위계승 암투가 치열한 마당에 왕규가 혜종의 무력기반인 동시에 자신의 무력기반이기도 한 박술희를 제거했다는 것은 쉽사리 납득이 가지 않는다.

또한 가장 이해가 안가는 부분이 바로 '왕규의 난' 이라 기록된, 혜종이 죽고 정종(왕요)이 즉위하자 왕규가 군사를 일으켜 개경으로 쳐들어왔다가 잡히는 과정인데, 기록에는 서경의 왕식렴이 왕규가 반란을 일으켰다는 말을 듣고 서경수비대를 이끌고 개경에 먼저 들어와 왕규의 군대를 맞이했다고 되어있다.

기본적으로, 광주-개성의 직선거리는 약 80km, 개성-평양의 직선거리는 약 140km 정도이다. (실제 거리와 길어야 2-30km정도 차이가 난다.) 저 서술대로라면, 왕규가 군사를 일으켜 80km를 행군해 이동하는 동안,
1) 광주에서 왕규가 봉기했을 때 '왕규가 난을 일으켰다'는 첩보를 가진 전령이 80km를 달려 개경에 도착한 뒤,
2) 다시 그 첩보를 갖고 서경으로 140km를 달려가서 왕식렴에게 전달하고,
3) 그 소식을 들은 왕식렴이 군사들을 준비시켜 서경에서 출발해 140km를 행군해 개경에 도착해서 왕규의 군대를 맞았다. 는 말이 된다.

즉, 왕규가 군사를 일으켜 80km를 이동하는동안, 정종-왕식렴 측이 (첩보를 가진 전령의 이동거리까지 합쳐서) 360km를 이동하고도 개경에 먼저 도착해 왕규의 군대를 맞이해 왕규를 궤멸시켰다는 말이 된다는 것이다. 상식적으로 납득하기 힘든 부분이다.[2][3][4]

게다가, 왕규 일당의 처벌기록에서 왕규가 왕으로 옹립했다고 전해지는 왕규의 외존자인 '광주원군'에 대한 언급이 없다. 원래 반란이 일어나면 그 수괴는 물론 그들이 왕으로 옹립했던 인물까지도(설령 자기가 왕으로 올립된지 조차 몰랐다 하더라도) 철저하게 제거당하는 것이 전근대사회의 법이자 관례였음을 감안할 때, 광주원군의 기록이 빠졌다는것은 납득하기 힘들다. 일반 잔당이나 단순가담자라면 몰라도 옹립된 인물이자 반란수괴의 외손자인데도 말이다. 이러한 것들이 왕규의 난 조작설에 더욱 힘을 실어준다.

만약, 혜종이 병으로 승하한 뒤(혹은 암살당한 뒤) 태자인 '왕제'를 대신해 동생인 '왕요'가 서경의 왕식렴과 함께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잡고, 이 소식을 듣고 막으러 온 왕규의 군대를 궤멸시켰다고 가정한다면 오히려 이야기가 자연스럽다. 비록 기록으로 입증된 사실은 없지만, 쿠데타를 일으킨것은 오히려 왕식렴과 연합한 3대 임금 정종이고, 그에 반대한 혜종의 측근인 박술희와 왕규를 차례로 제거한 뒤 기록을 조작해 왕규에게 모든 누명을 뒤집어 씌웠다는 '시나리오'가 오히려 정황상 자연스럽다고 보여진다.[5]

참고로 왕건의 사촌동생이자 개국공신인 왕식렴왕건이 생전에 본인이 중시여겼던 서경의 경영을 맡았을 정도로 왕건의 신임을 받는 인물이었는데, 그 서경병력을 기반으로 한 탄탄한 무력 때문에 왕요가 박술희의 무력을 기반으로 한 형 혜종의 세력에 대항하기 위해 포섭했을 가능성이 높다.

한가지 재밌는 사실은 왕식렴의 사망년도가 949년인데, 3대임금 정종의 승하 역시 949년이다. 그리고, 정종 역시 '경춘원군'이라는 왕자가 있었음에도 정종의 동생이자 왕건의 셋째 아들인 '왕소'가 왕위에 오른다. 바로 왕권강화를 이룩한 고려 4대 임금 광종이다.

덧붙이자면, 혜종의 무력기반은 개국공신박술희 이고, 정종의 무력기반은 역시 개국공신왕식렴이다. 그리고 박술희가 제거당한 그 해(945년)에 혜종이 승하했고, 왕식렴이 사망한 그 해(949년)에 정종이 승하했다.본격 역순장 고려는 왕이 신하를 따라 죽습니다 그리고 이후 광종은 왕위에 오른 뒤, 서서히 신하들을 압박하면서 힘을 키우다가 어느순간 아버지인 왕건을 도와 고려를 건국하는데 공을 세운 개국공신들을 철저하게 숙청했다.[6]

왕규의 난일 가능성이 없는 것은 아니다. 일단 혜종의 기록을 보면 왕규는 혜종과 달리 왕소와 왕요를 제거하려 했지만, 실패했다. 박술희 역시 왕규와 대립하여 서로 호위병을 두었다는 말은 사실상 왕소와 왕요 제거에 찬성하지 않았다는 말이 될 것 이다. 만약 왕규가 왕소와 왕요를 제거하려 했다는 것이 사실이라면 왕규로써는 반역 외에는 길이 없다고 할 수 있다.[7]
이미 혜종이 병이 들어 오늘, 내일 하는 상황에서 무력적 기반이 되어 있는 박술희는 자신과 척을 지니 미칠 노릇이었을 것 이다. 결국 왕요가 즉위해버리자[8] 정종은 박술희를 역모가 의심되어 귀양을 보내버린다. 이는 왕규에게는 사형선고나 마찬가지 였을 것이고,[9] 박술희 열전에는 왕명을 사칭했다고 하는데 이는 왕규가 정종이 박술희를 죽인 것으로 꾸미고 그의 세력을 흡수 마지막 반항을 했을 확률이 있다. 그러나 기록에도 나와있듯 정종과 왕식렴은 이미 이를 예측해 준비해 있었고,[10] 만약 왕규가 전쟁으로 세운 공으로 세력을 확장한 것이 아니라 단순 문관 즉 관료였다면 군사를 다루거나 전쟁의 익숙하지 못했을 것 이다.
그래서 국토를 개척해 왔던 왕식렴의 상대가 되지 못했을 것이고 혈연 관계로 광대한 세력[11]을 가진 왕요에게 밀리는 것은 필연이었을 것 이다. 결국 왕규의 마지막 발악은 실패로 끝났고 이의 연류 된 이들이 모조리 숙청당한다. 이로 인해 왕식렴의 위세를 올라가고 정종은 왕식렴을 더욱 믿었다.
그리고 이는 서경천도의 빌미가 되는 동시에 동생 왕소와 척을 지는 일이 만들어진다.

사극 태조 왕건에서 등장했고(배우 : 김명수) 이후 제국의 아침에서는 故 김무생이 연기했는데, 왕권 강화를 위해 왕족들을 견제하다가 박술희를 귀양보낸 사이 결국 요, 소와 연합한 왕식렴에 의해 최후를 맞이한다는 식으로 나온다. 그리고 사람을 보내 박술희를 죽이고는 그 주변에 있던 사람들에게 "왕규가 시킨거다"라고 말하게 해 누명을 씌운다.

작가의 전작인 용의 눈물과 비교해보면 재밌는 점이 나타난다. 왕의 측근이라던가 정권 교체 과정에서 사망 등의 측면에서 흡사 정도전(용의 눈물)을 연상케한다. 전작에서 해당 배우는 조선 왕조의 태조였고 또 왕식렴 역할을 맡은 배우가 故 김흥기, 즉 정도전의 배우인 점을 감안하면 훌륭한 배우개그다.

2 고려 중기의 문신

왕규(王珪, 1142년 ~ 1228년) 정중부의 사위.

  1. 혜종이 병약했다는 부분도 그 병약한 사람이 맨손으로 자객을 때려죽였다는 대목을 보면 의심의 여지가 있다. 정말 병약해서 정사를 돌보지 못하다 죽었을 수도 있지만 왕요, 왕소 일파의 위협과 반란 탓으로 죽음을 당했을 수도 있다.
  2. 왕규의 이동거리인 80km면 당시 보병 행군속도로 2-3일, 기병이었다면 하루 반이면 주파할 수 있는 거리다. 이동수단이 고려 초와 별다를 것 없는 조선 임진왜란 당시 파발마의 하루이동거리가 약 100km였던 것을 감안해도, 광주-개경-서경까지 빨라도 3일, 서경에서 군사들을 무장시키고 행군할 준비를 한 다음출발해서 개경까지 오는 시간 3-4일, 미친 진격속도를 자랑했던 고구려 개마무사 기병의 속도로 계산해도 이틀 이상 걸린다. 정종-왕식렴 측의 이동시간은 아무리 빨리 잡아도 최소 5일은 넘긴다는 뜻이다. 군대를 준비시키는 기간, 명령 처리에 걸린 시간 등등은 덤.
  3. 물론 왕식렴이 왕규의 난에 미리 대비하고 있었다고 할 수도 있으나, 명색의 반란을 일으킨다는 양반이 반대세력인 왕식렴 서경수비대의 정황도 모른 채 무작정 들고일어났다고 생각하기도 또 힘들다. 당시 서경수비대라면 왕건이 중시여겨 키워준 서경에 주둔하는 최정예부대였다.
  4. 전쟁의 잔뼈가 굵은 왕식렴이라면 어는 정도 눈 속임이 가능했을 것 이다.
  5. 만약 둘이 쿠데타를 일으켰다면 제일 먼저 충돌해야 될 사람이 박술희인데 박술희 열전에는 귀양을 보낸 사람이 정종으로 되어 있다. 그렇다면 정종은 이미 즉위한 상태에서 혜종의 세력이 숙청 당하고 있었다는 결론이 나오는데 그렇다면 혜종 - 정종으로 넘어가는 기간이 상당히 의문이 들 수 밖에 없다. 혜종이 실제 병으로 정사를 돌 볼 수 없자 정종이 대신 정사를 돌보면서 박술희를 귀양 보낸 것 인지 그렇지만 왕규 열전에 나오는 것 처럼 이미 정종은 즉위한 상태이다. 그렇다면 쿠데타가 일어나 박술희는 패해 귀양을 가고 왕규는 모든 죄를 뒤집어 쓰고 사망했다는 결론이 나온다. 하지만 그렇다면 왕규, 박술희의 난이어야 하는데 왕규만이 반란의 주체로 나온다.
  6. 그러니까 광종이 정종을 제거하고 왕위에 오른 뒤 자신의 왕권을 위협할 수도 있는, 즉 다른 배다른형제들의 무력기반이 될 수도 있는 '개국공신' 세력을 숙청했다는 말이다. 둘째형인 정종이 큰형 혜종에게 그랬고, 자신이 정종에게 그랬던 것 처럼 자기의 동생들이 공신세력을 무력기반으로 자기를 제거할 수도 있으니. 물론, 광종이 정종을 제거했다는건 전적으로 일부 학자의 개인적 견해이다. 애초부터 기록이 아닌 가정에서 출발한 것. 그러나 사실 공신세력 숙청은 공식적으로나 실제적으로나 왕권강화가 그 첫번째 목적이기 때문에 상당한 개연성은 있을 듯. 한국이나 중국 역대 왕조의 개국공신들은 체제가 어느정도 잡힌 뒤 건국자, 혹은 그 아들에게 대부분 숙청당한다.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유방, 주원장, 이방원 등.그리고 윗동네 어느분들도. 개연성이 없지는 않지만 '설' 임을 감안하자.
  7. 혜종은 오히려 왕소에게 딸을 시집 보내었다. 이게 계책인지 우호적 행동인지 알 길은 없다.
  8. 후대 까지 고려는 형제가 세습하는 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이의 배경이 된 것이 바로 훈요 10조일 것이다. 세번째 조항에 장자가 왕위를 잇데 자질이 안 되면 다른 자가 왕위를 이르라고 했으니.
  9. 애당초 왕요, 왕소를 죽이려한 사람이 왕규라고 한다. 그렇다면 왕이 될 왕요로써는 어떻게 해서든 왕규를 죽이는 수 밖에 없다. 결국 둘 중 하나는 죽어야 끝이 나는 상황이다. 아니라면 언제 폭발 할지 모르는 상태일 뿐이다.
  10. 왕식렴과 왕규 열전에 왕요와 왕식렴이 왕규의 반란을 대비하고 있었다고 되어 있다. 즉 왕규의 반란을 갑작스럽게 맞이한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오히려 왕규가 정종과 왕식렴의 덫에 빠진 것 일 수 있다.
  11. 어미나가 유력 호족인 충주 유씨, 그의 장인이 후백제의 박영규(견휜의 사위) 누이 혹은 여동생 낙랑공주가 신라 경순왕의 부인 이것만 봐도 왕요가 얼마나 막강한 세력을 갖추었는지 알 수 있다. 사실상 경기도, 강원도, 패서 일대를 제외하고는 모든 세력이 왕요를 지지 했을 것 이다. 다만 이는 왕소도 마찬가지라는 아이러니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