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중부

연립정권의 집권자
고려 18대 의종 / 정권 성립이고무신정권 성립
이의방
이의방
정중부
무신정권의 집권자
1대 이의방2대 정중부3대 경대승

정중부
鄭仲夫, (1106 ~ 1179)
고려무신. 무신정권의 두 번째 집권자.[1]

1 개요

고려시대의 무인으로, 무신정변을 주도하여 무신정권 시대를 열게 한 인물이다. 역사적으로도 중요한 인물이지만, 그와 무신들이 문신들에게 당한 굴욕적인 일화 등도 널리 알려져 있다.

2 성장

해주(海州) 사람으로 용모가 우람하고 눈동자가 모지고 이마가 넓으며, 얼굴 빛이 백옥 같고 수염이 아름다우면서 키가 7척이라 위풍이 늠름하였다고 한다. 처음에 고을에서 그를 군적에 올려 그의 팔을 매어 수도인 개성으로 보냈는데[2] 재상인 최홍재가 군사들을 가리다가 그의 풍채를 보고 비범하여 여겨 팔을 맨 것을 풀어주고 공학금군에 편입시켰다고 한다.

3 무신들에 대한 차별

3.1 정중부 개인의 원한

인종(재위 1122~1146) 때 처음으로 초급장교 정도의 직책인 견룡대정(牽龍隊正)이 되었으며, 이 때 정중부가 평생의 원한을 가지게 되는 사건이 일어난다. 고려사에는 섣달 그믐(제석; 除夕)에는 역귀를 쫓는 의식을 했는데, 각 신하들이 각자 일종의 장기자랑을 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 장기자랑은 잡기(雜技)라고만 되어 있는데, 일반적으로는 귀신쫓는 춤 같은 것을 췄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서로 날뛰고 즐기는 중에 김부식의 젊은 아들인 내시(內侍)[3] 김돈중이 놀고 있던 무신들을 만만히 보고는, 당시 견룡대정이었던 무신 정중부의 수염을 촛불로 태워먹는 사건이 발생한다. 야사에 따르면 정중부의 수염이 길고 멋지게 생긴 것을 보고 '무신 따위에게 저렇게 멋진 수염은 어울리지 않는다.'라며 질투하여 태웠다는 이야기도 있다. 알다시피 잘 키운 털이라도 그슬리면 그냥 말려버린다. 당연히 빡친 정중부는 겁대가리를 상실하고 수염을 불태운 김돈중을 때리고 욕했는데 문제는 김부식이 왕한테 정중부를 때려야 한다고 주장했고, 당시 왕이었던 인종은 그걸 허락했다.(...)

아무리 문신이 무신보다 위인 사회였다지만 김부식과 김돈중이 해도 너무했던 것. 다만 인종은 정중부를 아끼는 사람이었고, 은밀하게 도망다니게 해줘서 실제로 때리지는 않았다.

이 때부터 정중부는 수십년 동안 김부식 부자에게 원한을 가지게 되었고, 그 후 정중부는 다시 벼슬하여 1146년에 교위가 되었으며, 이 때 어사대에서 왕의 명령으로 수창궁 북문을 봉쇄하고 사람들의 출입을 금지하였다. 그런데 정중부와 산원인 사직재가 마음대로 열고 드나들자 어사대에서 처벌하라고 청했으나 왕이 허락하지 않았으며, 게다가 이후 무신 최고직인 상장군이 되었다.[4]

어떻게 보면 상당히 다혈질이고, 막나가는 경향이 없진 않은데도 인종과 의종 모두 정중부를 좋아했던 것을 보면 상당히 매력적인 인물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참고로 정중부의 오랜 원수 중 한 명인 김부식은 1151년에 사망한다.

3.2 무신들의 쌓이는 불만

이후로도 문신들은 계속 무신들을 얕봤고 멸시하였는데 특히 좌부승선인 임종식과 기거주 한뢰가 왕의 총애만 믿고 무관들을 업신여기자 더욱더 분노하였다.

한편 임금인 의종은 젊은 나이에 왕위에 올랐는데, 점점 주색에 빠져서 정사를 돌보지 않고 놀러 다니게 되었고, 주로 불교‧음양설‧선풍(仙風)등 실재 통치하는 것과는 연관이 먼 것들에 심취하게 되었다. 이에 대해 의종이 강대한 개경 문신들의 힘에 짓눌려서 현실도피적으로 변했다는 해석도 있다. 사실, 의종은 왕이라기보다는 예술가적인 기질이 더 많았던 왕이다.

그래서 의종은 놀러다니는 것도 좋아해서 1164년에는 인지제(仁智齊)라는 곳에 간다. 그런데 법천사의 승려인 각예가 대접하겠다고 해서 의종은 달령원(獺嶺院)까지 또 다시 가서 술 대접을 하였으며, 1166년에는 왕이 성수원(聖壽院)에서 각예와 함께 연회를 베풀었는데, 성수원은 각예가 창건한 절이다. 의종은 각예와 죽이 잘 맞았던 모양으로 이 때 의종은 여러 학사들과 놀러다니며 끝없이 시를 짓고 화창하였는데, 정중부를 포함한 호위군이었던 여러 무신들은 먼 길을 질질질 끌려다니며 피곤하게 호위나 서게 되었다. 이에 들러리가 된 무신들은 불만이 쌓여서 비로소 군사를 일으킬 생각을 품게 되었으며, 왕이랑 문신은 시나 지으면서 노는데 무신들은 거기에 끼지도, 먹지도 못하니 무신들의 불만이 절로 쌓일 수밖에 없었다.

1170년 8월에는 왕이 연복정에서 출발에 흥왕사에 놀러갔고, 결국 무신들이 폭발했다. 정중부가 이의방과 이고에게 "다음에 왕이 연복정에서 궁으로 돌아가거든 그만 참기로 하고 만약 또 보현원(普賢院)으로 옮겨가거든 기회를 놓치리 말자"고 했다. 그러나 의종은 다음날 보현원으로 출발하려고 했다.(...)

그런데 의종도 무신들의 불만을 어렴풋하게 느낀 모양인지 보현원으로 출발하려던 오문(五門)에서 갑자기 멈추고 훈련하기 좋은 날씨라며 일종의 씨름인 수박 대회를 열자고 했다. 이를 통해 무신들끼리 즐기게 하고 상을 나눠줄려는 의도였다. 그런데 이 때 결정적인 계기가 일어난다. 나이 든 대장군 이소응수박 경기에 참여했다가 지쳐서 도망가는데, 한뢰가 튀어나와 이소응의 뺨을 때린 사건이 일어난다. 이때 왕과 문신들은 손뼉을 치면서 크게 웃었으며 임종식(林宗植)과 이복기(李福基)도 이소응을 욕했다.

이 때 정중부가 한뢰에게 '네가 비록 문관이나고는 하나 이소응은 3품 벼슬을 지내고 있는데 너 따위가 이런 짓을 할 수 있느냐'라고 분노했으며, 대장군은 무신이 올라갈 수 있는 두번째로 높은 품계며 한뢰의 직책 기거주는 종5품으로 이후의 사관에 가까운 직책이므로 대장군인 이소응보다 당연히 품계가 낮다. 하극상을 일으켰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나이 든 무신이 백주 대낮에 젊은 문신에게 맞는다는 것은 정중부를 비롯한 무신들에게 있어서 크나큰 모욕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다만, 문신들이 이렇게 오만방자하게 구는 것은 어느 정도는 밑에 계산을 깔고 하는 행위로 볼 수 있다. 문신들은 무신들의 권력 강화를 견제할 필요가 있었고, 왕의 입장에서는 무신을 키우고 무신의 불만을 해소해 줄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의종이 수박 대회를 연 것인데, 갑자기 문신이 끼어들어 판을 파토낸 것이다. 이러한 정치적인 문제와 그 과정에서 생긴 차별 의식 및 문신들의 오만 등이 불러낸 사건이라 할 수 있겠다. 물론, 무신들의 불만 자체에 의종이 부채질한 측면이 크며, 이소응이 맞자 박장대소한 것 등을 보면 의종은 어리석은 인물이었다. 애초에 수박 한 번 재밌게 한다고 풀릴만한 원한도 아니었기 때문에 이미 너무 늦었던 것이다.

4 무신정변

이소응이 맞은 자리에서 이고는 칼을 뽑고 정중부에게 눈치를 줬지만, 정중부는 기다리라고 했으며 날이 저물 때쯤 왕의 일행이 보현원에 접근하였을 때 이고와 이의방은 먼저 가서 왕의 명령이라 속이고 순검 군사들을 모아 두었다. 그리고는 왕이 문으로 들어가고 문신들만 나오자 무신들은 그자리에서 문신 임종식과 이복기를 죽이고 들어갔다. 한뢰는 왕이 앉는 어상 밑에 숨기도 하고 왕의 옷자락을 붙들고 늘어졌지만, 처음에는 왕 앞에서 자제하던 이고가 칼을 빼들자 나와 죽을 수 밖에 없었다.

이후 무신들은 개성에 들어가서 사졸들을 풀어 문신 수십 명을 죽였다. 이 과정에서 정중부 일파는 원래 자신들의 원수는 문신 몇 명이라고 생각했지만 결과적으로 훨씬 많은 문신과 찬동하지 않는 무신들까지도 죽였다. 심지어 거기서 끝나지 않고 그들의 집까지도 허물 정도였으니 얼마나 분노가 극에 달했을 지를 짐작할 수 있는 부분이다. 개성에 있던 김부식의 아들인 김돈중은 도망쳤지만 이후 시종의 밀고로 인해 자신의 동생과 함께 같이 잡혀 죽은 것으로 볼 때 인망이 없긴 없는 인물이었던 것 같다. 의종은 정중부에게 그만하라고 만류했지만, 정중부는 건성으로 예 거릴 뿐 일을 계속 진행했다. 이후 살아남은 문신들을 모두 모았을 때 이고가 문신들을 모두 죽여버리자고 하기도 했지만 정중부가 이를 만류한 적도 있다.

이 사건을 보현원의 난, 무신정변, 무신의 난, 정중부의 난 등으로 부르며, 고려시대의 역사를 크게 가르는 무신정권의 시작이 바로 이 사건이다. 정중부의 입장에서는 수십년 묵은 원한을 이 때 풀게된 것으로 이 때 정중부의 나이는 60대 중반이었다.

9월에 의종을 폐위하여 거제현으로 쫓아내고 태자를 진도현에 쫓아내고 태손을 죽인 후에 명종을 즉위시켰다. 서해도 군현을 자신의 고향인 해주에 편입시켰다. 이후 참지정사(參知政事), 중서시랑 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 등을 거쳐 문하평장(門下平章)으로 승진하였다가 10월에 이고, 이의방과 함께 벽상공신으로서 공신각 위에 초상이 그려졌다.

1172년에 북면 병마 판행영병마 겸 중군 병마 판사에 임명되었으며, 김보당의 난이 일어나면서 장순석, 유인준 등 거제도의 의종을 데려와 옹립하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장군 이의민, 장군 산원, 장군 박존위 등을 시켜 군사를 거느리고 남로로 가게 하면서 또다른 군사를 서해도로 보내어 김보당의 난을 진압한다. 1173년에는 문하시중에 임명되었다.

5 갑오정변과 집권

이의방이 조위총의 난에 진압에 실패하면서 이를 이용하여 1174년 12월에 아들인 정균이 이의방을 암살하고 마침내 정권을 잡게 되며, 그의 아들인 정균이 조위총의 난에 대한 처리를 할 때 11월 임자일에 어떤 이가 중방에 허위보고를 하여 문관들이 남적들과 변란을 일으킬 음모를 꾸민다는 허위보고를 한 도교승 김윤승 등 7명을 섬으로 귀양보내고 병부상서인 이윤수를 거제현령으로 강직시켰다.

또한 이 때, 보제사(普濟寺)를 중수하고 낙성식을 거행하여 낙성식에 왕이 참여하기를 청원했지만 해당 관원들의 간언에 따라 가지 않았다. 비밀히 승록사(僧錄司)를 시켜서 임금의 거동을 청하고 갖은 성찬을 차렸으나 왕은 이에 응하지 않고 관원들이 대신하여 갔다고 한다.

그는 권세있는 직위에 떠나려 하지 않았는데 12월에 낭중인 장충의가 그의 뜻을 맞추어 왕이 재상에게 궤장을 주면 나이 70세가 되어서도 그만두지 않는다라고 하여 왕이 궤장을 주도록 만들어 국사를 일체 자신에게 고하여 결재를 받았다. 때로는 중방(重房)에 앉아서 남의 죄에 대하여 발언하였으며 백관은 그 집에 가서 축하를 드렸다 할 정도로 권세가 높았다.

6 권력 다툼과 처참한 말로

1176년 8월에 그는 당시 직책이 시중으로 그 때 각 영의 군사가 익명으로 붙여진 방을 불러 이르기를 정중부와 그의 아들인 정균, 사위인 송유인이 권력을 희롱하면서 방자하게 횡포한 짓을 한다고 상소한다. 또한 남적(망이, 망소이 등 남부 지방에서 일어난 반란)들을 치려면 그들을 제거해야 가능할 것이라는 내용이 있어서 그의 아들인 정균이 이를 듣고 두려워하여 해직을 청하면서 여러 날 동안 출사하지 않았다.

9월에 이의방의 문객들인 장군 이영령, 별장 고득시, 대정 돈장 등이 그를 암살하기 위한 음모를 시도하고 이를 알아채자 그들을 체포하고 먼 섬으로 추방하였다. 1178년 7월에 기두 녹상이 대장군 장박인, 전 장군 조존부 등이 자신을 죽이려고 한 사실을 고하자 이들을 조사했지만 죄상이 없었으며, 또한 기두 80인이 장박인을 옥에 내보내는 것을 꾀했다는 사실을 고하지만 이들도 죄상이 없었기 때문에 이들을 모두 유배하였다.

이후 1178년 정중부는 사직을 하게 되지만 권력을 이어받은 정균과 송유인[5]은 서로 권력다툼을 하며 부정부패를 일삼다가 결국엔 무인 세력들의 불만을 초래하게 되었다.

그리고 정균은 확고한 권력을 위해 공주를 자신의 둘째 아내로 삼으려했고, 정중부가 문하시중으로서 관직에 있을 동안은 오랫동안 눌려있었지만 정중부가 물러나자 정2품의 문하시랑평장사에 오르게 된 송유인은 한문준과 문극겸을 탄핵하는 등의 행동으로 민심을 잃어버렸다. 이 때 보면 장인인 정중부로부터 송유인이 정균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은 권세를 물려받았음을 알 수 있다. 아마도 정균이 공주를 아내로 삼으려는 것은 매부에게 밀리고 있기에 매부를 누를 수 있을 보다 확고한 권력을 얻으려는 행동이었던 듯하다. 혹은 이 때 정균이 모든 권력을 송유인에게 밀려서 잃었다는 말도 있지만 궁녀들을 가지고 놀고, 공주까지 노골적으로 요구할 정도의 권세를 지녔던 것을 보면 아닌듯 싶다. 적어도 명종을 우습게 여기며 누를 정도의 권력은 있었다[6].

그로인해 1179년 9월에 공주를 아내로 삼으려는 정균의 행태에 분노한 26살의 청년 장군 경대승이 결사대를 꾸려 거병하였고, 아들과 사위에 이어서 그에게 살해된다 .

7 여담

고려사에는 반역열전에 실려있고 오늘날에도 무신정변을 주도한 주동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 반역자 취급. 부정적인 이미지가 강하지만, 의외로 당시 무신들에게는 인망이 대단했던 인물이었던 듯 하다.[7] 애당초 이의방이나 이고 등이 정중부를 끌어들인 것 자체가 하급 장교인 자신들이 전면에 나서면 곤란하다고 판단하여 이른바 '얼굴마담' 이 필요했기 때문.[8] 그리고 이 말을 뒤집어보면, 그만큼 정중부라는 인물이 무인들에게 미치고 있는 영향력이 대단했다는 말이 된다.

그리고 고려사에서 경대승 열전을 찾아 보면, 이의민과 같은 용장도 경대승을 두려워하여 경주로 낙향해 있는 와중에도 일부 무신들은 정중부가 무신정변을 일으켜 그간 문신들에게 억눌렸던 설움을 풀어 주었는데 새파란 어린 놈(경대승)이 그분을 해쳤으니 들고 일어나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9]

또한 경대승이 도방을 결성한 것도 이러한 일부 무신들의 움직임 때문이었고, 역시 고려사에 보면 몰래 첩자들을 내보내어 항상 정황을 살폈다고 한다.[10] 그만큼 정중부라는 인물이 당시 무신들에게 미친 영향력이 막대했다는 뜻이며, 경대승이 죽기 얼마 전에 꿈에서 정중부를 봤다는 것도, 이러한 긴장감과 무관하지 않았을 것이다.

한편으로는, 평민 출신으로 최고 집권자의 자리까지 오른 인물이기도 하다. 애초에 잘 나가는 집안 출신이 아니라 군적에 올라 개경으로 보내졌고, 그 곳에서 눈에 띄어 출세한 경우이기 때문. 하지만 천민 출신으로 최고 집권자까지 오른 이의민 때문에, 묻히는 감이 있다.

여담으로 조선 중기 정치, 사회 전반을 뒤흔든 사건인 정여립의 난의 주도자로 알려진 정여립의 태생 설화에서는 태몽에서 정중부가 여러번 나왔다는 기록이 연려실기술에 존재하나 이는 정여립을 폄하하기 위하여 날조된 설화일 가능성이 높다.

8 무인시대에서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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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무인시대에서는 김흥기 씨가 열연을 펼쳤다. 노회한 노장군다운 노련함과 간교함을 동시에 갖춘 정중부의 모습을 완벽하게 그려냈다. 주무기는 의종으로부터 하사받은 장검. 다만 노회한 지휘관이란 컨셉 때문인지 칼보다는 위 스틸컷에도 나오는 전투지휘용 부채를 들고 다니는 모습이 더 자주 보인다. 이의방을 대표로 하는 소장파 장교들과 대립할 때 이 검을 빼들며 이의방과 대치하는 모습은 카리스마가 넘친다. 이의방의 저돌적인 행동력에 밀려 겉으로 볼때 별다른 활약은 없었지만, 물밑으로 아들 정균과 함께 이의방이고, 채원을 이간질하고 이의방의 기반을 무너뜨리는 무서운 술수를 보인다. 집권 후 실권은 주로 정균이 행사하지만, 중요한 순간에는 아들이 혈기를 앞세워 급히 일을 하려 하면 몇 수 앞을 내다보고 치밀하게 술책을 쓰는 노회함을 보인다.

보통 다른 무인집권자들은 거사를 일으키는 순간에는 나름의 대의를 가졌다가 권력의 단 맛에 취해 타락하는 모습을 보인 반면, 정중부 일가는 처음부터 그냥 탐욕스러운 권력자로 그려진다. 이는 그가 무신정변 당시 이미 노인이었던 점도 한 몫한 듯 하며, 정중부와 김돈중의 수염 태우기 일화나 정중부의 최후 이전 태후와의 대담에선 그도 젊은 시절에는 나름 왕실에 충성하는 혈기왕성한 장수였다는 점을 드러낸다.

이의방 사후 절대권력을 차지한 권신으로서의 모습은 대체로 역사와 비슷하다.[11] 단, 최후가 각색되었는데 여기서는 우선 경대승의 난을 피해 황도를 탈출했으나 아들과 사위가 모두 참살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모든 것을 체념한 후 호랑이굴이나 다름없는 황궁으로 다시 돌아간다. 그는 명종에게 무인으로서 마지막 자존심을 지킬 수 있도록 자결하는 것을 윤허해달라고 청하나 명종은 그것을 거절한다. 이 때 정중부를 따르던 모든 사람들은 그를 모함하기 바빴지만, 유일하게 정중부의 편을 들어준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정중부와 정적에 속하던 문극겸 정도였다. [12] 그리고 반역죄를 저지른 것이 없어 문극겸의 변호가 통하나 싶었지만 토사구팽 했던 순주[13]의 복수로[14] 반역자의 누명을 써버리게 되어 결국 '난신적자'라고 써붙인 패를 가슴에 단 체 조리돌림을 당하고 참수된다. 작중에서 공예태후 임씨와는 정중부가 '천추태후처럼 나라를 망치고 싶은가'라고 폭언할만큼 계속 대립해온 관계였지만 정중부가 인종의 총애를 받았던 사서의 기록을 반영한 듯, 끝에서는 태후가 감옥에 있는 정중부를 찾아가 죽음을 앞둔 그를 위로하기도 했다.

그렇게 76화에서 퇴장했다가, 98화에서 사경을 헤매는 경대승의 환상 속에서 재등장했다. 왜 자신을 불렀느냐는 경대승의 질문에 정중부는 정변 이전으로 고려를 되돌리려는 노력이 물거품이 되어버린 "자네를 위로하고자" 왔다고 웃으며 말한다. 이에 경대승이 자신의 대의를 피력하며 강변하자, 정중부는 파안대소하면서 그러고자했다면 저 유약하고 의심많은 황제를 시해하고 자네가 황제가 되었어야했다고 조롱한다. 그리고 그렇게 백성들이 나라의 주인이라고 한다면, 왜 백성들을 왕위에 올리지 않았느냐며 너 또한 천하를 쥐려는 난신적자에 불과하다고 일갈하고 칼을 휘둘러 경대승을 내리친다. 그 순간 꿈에서 깨어난 경대승은 나는 무인일 뿐이라고 되뇌이면서 오열한다...

명장면이었지만 안타깝게도 이 장면은 김흥기 씨에게 마지막 TV 출연작이 되었다. 해당 장면이 촬영된 것이 2004년 1월 초였고 방영된 것이 1월 11일이었으며 이후 김흥기 씨는 연극 에쿠우스에 출연 중 1월 30일 뇌출혈로 쓰러져 의식을 회복하지 못한 채 투병 5년 만에 별세하였다.[15]
  1. 하지만 사실상 무신정변 당시 무신들의 실질적인 리더였고 가장 중심적인 인물이기 때문에 이의방의 집권 기간을 정중부의 집권으로 보아 정중부를 첫 번째 집권자로 말하기도 한다. 정확히는 이고를 제거한 후에는 이의방과 정중부, 둘이 서로 견제하던 기간이라고 볼 수 있다.
  2. 이 부분에서 '팔을 매어' 라는 부분을 두고 팔을 묶었다. 즉, 강제로 끌고 갔다고 보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이걸 '말도 안 된다' 라고 단정하기도 뭣한 것이, 애초에 '군적에 올려'. 즉 '군역의 의무' 를 수행해야만 하는 상황이었기 때문.
  3. 내시직을 환관이 차지하게 된건 고려 후기 원나라의 영향을 받으면서로, 무신집권이전까지의 내시는 유력인사의 자제들이 거쳐가는 엘리트 코스의 필수직이었다. 그러므로 고려 중기까지의 내시는 고자가 아니다. 때문에 고려 초중기를 배경으로 하는 사극을 보면 수염달린 내시를 볼 수 있다.
  4. 무신정변 당시 정중부의 계급은 상장군이었다
  5. 송유인은 정중부가 문하시중의 자리에 있을 때는 재상이 되지 못해서 정중부의 딸인 자신의 처에게 의지하다가 정중부가 치사를 하여 문하시중 자리에서 물러난 후에야 문하시랑 평장사의 자리에 올랐다. 이 때도 아내에게 부탁을 했던 것이 효과를 본듯 보인다.
  6. 아니면 조선 후기, 그리고 그 영향을 받은 오늘날과는 다른 고려 시대의 외가에 대한 인식을 생각해볼 수도 있다. 고등학교 국사 시간에 가르치는 것과 같이, 고려에서는 사위도 아들과 다를 바 없다고 여겼고 딸도 아버지의 제사를 지냈다. 또 족보에도 사위, 외손자 등이 기록되었고 장인이나 외할아버지가 고관인 경우에도 음서제가 적용되었는데, 이 말인즉 외가로도 혈통이 이어지는 것으로 보았다는 것. 즉 공주를 아내로 맞이한다는 건 그 자체만으로도 왕위에 오를 자격이 주어지는 것이었고, 그래서였는지 하고많은 고려의 공주들 가운데 왕씨 이외의 남자를 남편으로 맞은 예는 단 하나밖에 발견되지 않는다고 한다.
  7. 이하의 내용은, 어디까지나 ' 당시 무신들 ' 의 입장에서 서술된 내용이다. 정중부를 긍정적으로 평가하려는 것은 아니므로, 오해하지 말자.
  8. 그렇지만 정중부는 문신들을 다 쳐죽이자는 이의방, 이고 등과는 달리 문신들을 살려두고 훗날 정권을 잡을 생각을 하고 있었다. 울분에 차 복수에 눈이 먼 이의방과 이고와는 달리 훗날을 일까지 계획하던 셈.
  9. 원문은 다음과 같다: '정 시중(鄭侍中, 정중부)께서 앞장서 대의를 부르짖고 문신들을 억눌러 여러 해 쌓인 우리들의 울분을 씻어 줌으로써, 무반의 위세를 펼친 공이 막대하다. 이제 경대승이 하루 아침에 네 분의 대신을 죽였으니 누가 그를 토벌할 것이냐?(鄭侍中首唱大義 沮抑文士 雪吾曹累年之憤 以張武威 功莫大焉. 今大升一朝而尸四公 孰討之耶.)'
  10. 원문은 다음과 같다: '경대승이 정중부와 송유인을 제거한 이후부터 마음이 불안하여 항상 몇 사람을 큰 거리로 보내 몰래 정황을 살피게 하였다. 어쩌다가 유언비어를 들기만 하면 즉시 잡아 가두고 국문했기 때문에 큰 옥사가 여러 차례 일어났으며, 매우 혹독한 형벌이 가해졌다.(大升自去鄭 宋以來 心不自保 常令數人 潛伺里巷. 偶聞飛語 輒拘囚鞫問 累起大獄 用刑深峻.)'
  11. 역사를 따라가는 만큼 실제 정중부 집권시 아들 정균이 정중부보다 더 권세를 탐한 점때문에 권력의 정점에 선 이후 극중 비중도 정중부보다 아들 정균에게 더 쏠리게 된다.
  12. 옹호가 아니라 원칙주의. 권신인 것은 맞지만 반역을 저지른 증거가 없으니 반역자는 아니라는 주장을 했다. 즉 반역을 저지른 증거가 없으니 반역죄만은 면하게 해달라고 하는 말이었다. 오랜 동료들과 수하들에게 배신감을 느끼던(대본에도 그렇게 적혀있다.) 정중부도 정작 자신을 옹호해주는 사람이 문극겸 뿐이라는 사실에 황당하게 생각하는 모습을 보였다.
  13. 가공인물은 아니고 실존인물이다. 그러나 무인시대에서는 정중부가 해주 가문에서 불러왔다는 설정이 추가되었다. 권력이 극한으로 치닫자 쓸모없어져 내치려고 하고 있었고 무릎꿇고 사정해도 무시했었던 상황.
  14. 아이러니하게도 이전에 순주가 자신을 토사구팽한 정중부를 향해 복수하겠다고 할 때 정중부는 "너 따위가?"하면서 코웃음을 쳤지만 그것이 현실로 이루어졌다.
  15. 때문에 무인시대 마지막화 에필로그 겸 총집편에서 무신집권자들이 모두 출연하지만 정중부만은 나오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