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width=50 고려의 역대 국왕 | ||||
초대 태조 왕건 | ← | 2대 혜종 왕무 | → | 3대 정종 왕요 |
묘호 | 혜종(惠宗) | |
시호 | 인덕명효선현의공대왕 (仁德明孝宣顯義恭大王) | |
능묘 | 순릉(順陵) | |
성 | 왕(王) | |
휘 | 무(武) | |
자 | 승건(承乾) | |
배우자 | 의화왕후(義和王后) 임씨 | |
아버지 | 고려 태조 왕건(王建) | |
어머니 | 장화왕후(莊和王后) | |
생몰년도 | 음력 | 912년(유일하게 생일을 알 수 없는 고려국왕) ~ 945년 9월 15일 |
양력 | 912년 ~ 945년 10월 23일(약 34세) | |
재위기간 | 음력 | 943년 5월 30일 ~ 945년 9월 15일 |
양력 | 943년 7월 5일 ~ 945년 10월 23일(2년 3개월) | |
출생지 | 나주 | |
사망지 | 고려 개경 정궁 중광전 |
1 소개
惠宗仁德明孝宣顯義恭大王 諱武 字承乾 太祖長子 母曰莊和王后吳氏。後梁乾化二年壬申生 太祖四年 立爲正胤 從討百濟 奮勇先登 功爲第一 二十六年 五月 丙午 太祖薨 奉遺命卽位。혜종 인덕명효선현의공대왕은 이름이 왕무(王武)이고 자가 승건(承乾)이며, 태조의 장남으로 어머니는 장화왕후(莊和王后) 오씨(吳氏)이다. 후량(後梁) 건화(乾化) 2년 임신년(912)에 탄생하여 태조 4년(921) 정윤(正胤 : 태자)으로 책봉되고 종군하여 후백제를 토벌할 때 용맹을 떨치며 선봉에 섰으므로 일등공신이 되었다. 태조 26년 5월 병오일에 태조가 죽자 유명을 받들어 즉위했다.
《고려사》 혜종 총서
고려의 제2대 왕. 나주 출신인 장화왕후 오씨의 소생으로 태조 왕건의 장남이다. 후삼국 통일의 최후 전투인 일리천 전투에서 무공을 세울 정도로 녹록치 않은 인물이었으나, 외가인 나주 오씨가 왕건의 다른 외가들보다 비교적 한미한 집안이었다. 29명의 왕후들 가운데에는 신성왕후 김씨같은 신라 왕족들도 있었다. 왕건은 경순왕에게 딸을 시집 보내면서 동시에 경순왕의 딸을 아내로 맞으려 했는데 본인들은 서로가 서로에게 장인이자 사위, 딸들은 서로가 서로에게 의붓어머니인 동시에 의붓딸이 되는 막장 족보가 출현할 뻔..., 마땅한 딸이 없어 그의 큰아버지인 김억렴의 딸과 혼인했던 것.
결국 혜종의 권력은 그의 태생적인 한계로 인하여 불안정할 수 밖에 없었다.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그는 능력있는 인물이었지만, 뒷배경이 약했던 사람이라 할 수 있겠다.[1]
다행히 재위 초기에는 왕건의 부탁을 받은 공신 박술희으로부터 도움을 받을 수 있었으나, 박술희는 군사적인 기반은 지녔었지만 정치적으로 실세를 쥐고 있던 정치인은 아니었다. 박술희는 드라마 태조 왕건에 등장하는 바와 마찬가지로 왕건의 친위무장 정도 되는 지위를 가졌던 인물이었다. 결국 왕건의 후견인 선정이 완벽하지 못했던 셈으로, 결국 박술희는 혜종의 적으로부터 왕을 지켜내지 못했고 왕규(혹은 정종)에 의해 살해당했다.
여러 모로 아버지인 왕건의 예리하지 못한 판단으로 인하여 큰 피해를 겪은 인물이다. 상기했듯 호족 세력이 강했던 시기에서 왕무의 외가의 실세가 강하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왕건은 그를 위해 적절한 후견인을 지정해주지 못했다.[2] 왕식렴으로 대표되는 서경 세력이나 개경 및 황주 호족들 혹은 경주의 구 신라 왕가 세력 등 마음만 먹으면 쟁쟁한 후견인을 얼마든지 설정해 줄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왕건은 박술희 한 명만 달랑 그에게 붙여줬을 뿐이었다. 정작 제대로 후견인을 둔 고려 왕조의 왕은 정종이었다. 왕건은 그의 둘째 아들 정종을 경순왕의 백부 김억렴의 둘째 딸과 결혼시켰다. 따라서 왕건이 혜종을 정말로 후계자로 여겼는지 의문스럽다.[3]
혜종의 부인 임씨(의화왕후)도 대광(大匡) 임희(林曦)의 딸이자 진주(晉州) 출신으로 나쁜 가문은 아니었지만 실세와는 거리가 멀었다.
'무(武)'라는 이름대로 대단한 무골이었는지, 자신을 살해하려고 잠입한 자객을 맨손으로 때려잡기도 했고 젊었을 시절에는 왕건을 따라 여러 전장을 누비기도 했다. 이는 조선 정종과 닮은 점이기도 하다. 본인의 성품은 인자하고 부드러웠으며 지혜로웠다고 하지만 암살 시도 후 불안감이 절정에 달해 조울증 증세도 보였다고 한다.
1.1 탄생설화
조선 세종 때에 서술된 고려사에 따르면, 어머니 오씨는 시냇가 빨래터 설화의 시조가 된 인물이다.
왕건이 나주를 점령한 뒤 시냇가를 지나게되었는데, 마침 오씨가 빨래를 하고 있었다. 그런 그녀의 뒤에는 무지개가 펼쳐져 있었다고 한다. 우연히 보게된 이 처자가 맘에 든 왕건은 그날 밤 그녀와 동침을 하였다. 그녀의 아름다운 모습에 반해 그녀를 단순한 쾌락의 대상으로 여겼는지 아니면 수태를 시킬 것을 두려워하였는지 모르겠으나, 왕건은 깔고 누운 돗자리에 질외사정을 하였다. 하지만 왕건의 됨됨이를 살핀 오씨는 그가 돗자리 위에 사정한 정액을 손으로 쓸어 모아 그것을 음부에 넣었다. 그렇게 해서 낳은 아들이 혜종이었다.
이는 야사가 아닌 비교적 객관적이라고 여겨지는 정사 고려사에 존재하는 기록이다. 현실적으로 이런 일이 가능했을 수도 있지만 혜종의 정통성을 폄하하려는 목적으로 서술된 이야기로도 추측된다. 왕건과 오씨 부인을 제외한 그 누구도 그날 밤에 있었던 일을 보지 못했겠지만, 이러한 일화가 조선 세종시대에 활동하던 학자들이 고려사를 편찬할 때 저본으로 삼았던 사료에 있었던 점을 감안하면, 고려시대에는 이러한 이야기가 입에서 입을 통해 주변에 널리 알려져 있던 이야기였던 싶다. 혹은 왕건이나 오씨 부인이 아 그날 밤 그리하여 혜종이 태어난 것이지라며 주변에 말을 했을지도 모르겠다. 어쩼던 중요한 점은 이러한 일이 정말로 태조와 오씨 부인이 동침했던 그날 밤에 일어났는지 아니면 일어나지 않았는지가 역사라기 보다는 민중들 사이에서 이러한 일이 회자되었다는 사실이 역사라는 점이다.
태몽이 용꿈이었기 때문에 물을 좋아하는 용을 성격을 참조하여 수태기를 느낀 오씨 부인은 잠자리 곁에 한 바가지의 물을 떠 놓고 항상 손을 적신 채 잤다. 왕건이 돗자리에 사정한 정액을 오씨가 그것을 음부에 도로 넣음으로써 그를 수태하였으므로, 혜종의 얼굴은 돗자리처럼 자글자글 하게 주름살이 져서 주름살 대왕이 그의 별칭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 역시 혜종을 비하하기 위한 표현으로 여기는 견해가 있다.
2 사망 원인에 대한 의문
秋九月 王疾篤 群臣不得入見 憸小常侍側。가을 9월 왕의 병환이 위독했지만 신하들은 들어가 볼 수 없었고 간사한 아첨배들이 항상 곁에서 시중들고 있었다.
《고려사》 혜종 2년의 기사
조선의 정종과 비슷한 예다. 그는 선왕의 창업에 전공을 세웠던 무인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재위기간이 짧았고 실권이 약했기 때문에 나약한 왕이었다는 오해를 샀다.
그는 늘상 주름살을 펼 겨를이 없었던 듯한데, 결국 그는 왕의 자리에 머무른지 2년만에 사망했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조선 문종의 경우처럼 매우 병약했던 왕으로 알려져 있으나, 실제로 그는 태조의 후삼국통일에 공을 세웠던 만큼 강인한 무골이었다. 자치통감에는 혜종을 두고 "용력이 강해서 쇠도 구부릴 수 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실제로 그는 자객을 맨주먹으로 때려잡기까지 하였다.
왕규가 혜종을 암살하기 위해 자객을 보냈는데, 자객은 왕의 침실에 구멍을 내어 침입하였고, 시위하고 있던 내시를 칼등으로 내리쳐 기절시켰다. 자객은 혜종이 덮고 있던 이불을 찔렀는데 그것은 지푸라기였다. 이러한 사태를 예상하였던 혜종은 이미 낌새를 차리고 피해있었는데, 목표를 상실하여 당황해 하던 자객에게 "무엇을 찾느냐(!)"며 천연덕스럽게 물었다. 정신을 차린 자객은 칼을 들고 혜종을 시해하려 했으나, 혜종은 칼끝을 날렵하게 피하며 맨주먹으로 자객의 인중을 가격했다. 왕을 시해하려는 자객이었던 만큼 무예가 특출했을 터인데 혜종은 무장을 하지 않은 상태에서 자객을 맨손으로 때려잡은 것이다. 이렇듯 그는 선왕의 창업에 전공을 세웠고 자신을 시해하려던 자객까지 맨손으로 잡을 정도의 무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재위기간이 짧았고 실권이 약했기 때문에 후대에 들어 나약한 왕이었다는 오해를 샀다. 진정한 의미의 권왕
그러나 그는 이 사건에 대한 조사를 하지 않은채 묻어 두었는데, 이는 그의 왕권이 매우 불안정했음을 시사한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왕이 시해당할 뻔 했는데 이를 그냥 넘기는 나라가 어디에 있었는가? 이는 즉, 조사를 시작하면 시해를 노렸던 호족들이 불안해져 반란을 일으킬 공산이 컸고, 이를 알고 있던 혜종은 호족들의 반란을 제압할 힘을 지니지 못했던 셈이다. 결국 그에 대한 암살시도가 두번에 걸쳐 행해지자, 극히 불안해진 혜종은 조울증 증세를 보였다고 한다.
이와 더불어 그가 후백제와의 전투 중에 그만 정신을 놓아버렸는데, 이로 인해 공황장애를 앓은 것이 아니냐는 분석이 있다. 또한 후백제에 나주가 함락되면서 그의 외가의 힘이 더욱 약화되었다는 점도 혜종이 불안감을 느꼈던 원인으로 추측된다. 나주 오씨 집안은 탈출하여 전 집안이 몰살되는 끔찍한 일은 피했다는 기록이 있고 실제로 나주 오씨 가문은 아직까지 존속되고 있다. 교과서에 나오다시피 왕건은 각지의 호족들과 정략결혼을 하였는데, 외가가 몰락한 혜종은 상대적으로 동생들에 비하여 외척 세력이 강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는 신체는 강건했지만 심성이 선하고 유약한 탓에 정적들을 제거하지 못하였으며, 공신이자 외척인 왕규의 음모에 휘둘렸고, 동생들의 권력다툼을 외면하고 방치한채 공포와 불안에 떨다가 병사하고 말았다. 하지만 앞서 설명하였듯, 그는 두번에 걸쳐 암살될 뻔한 전력이 있었으며 또한 건강하였던 그가 갑자기 승하했기에 그의 죽음을 호족들에 의한 암살로 보기도 한다.
사후 왕위는 이복아우 정종과 광종에게 각각 돌아갔다. 그의 아들 흥화군은 정종의 아들 경춘원군과 함께 광종 연간에 죽었고 딸 경화군부인은 광종의 후궁이 되었다. 하지만 다른 후손들은 모두 요절했는지 뚜렷한 기록이 없고 경화군부인은 광종과의 사이에서 후손이 없는 관계로 혜종의 후대는 여기서 단절되었다.
3 무덤과 피휘, 불천지주의 위세
개성에 있는 혜종의 순릉(順陵). 2009년의 모습으로 봉분이 깎여있었을 뿐더러 석물까지 사라졌다고 한다.[4] 고종 때 거란이 개경 인근까지 침입하였는데, 이때 순릉이 도굴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재위 내내 불안한 왕위에 있었고, 사후 묘호로 썩 좋지 않은 '혜'를 받았던 혜종이지만, 그의 사후 왕위 계승이 몇 차례에 거듭된 격변을 거치면서 처지가 달라지게 되었다. 바로 후사를 보지 못한 정종, 광종과 성종의 후계가 모두 끊기다가[5] 왕위가 현종으로 양도되었던 것이다. 이후 고려 왕계는 현종의 후손들이 잇게 되었는데, 혜종은 태조의 맏이, 즉 현종의 큰아버지 뻘로 취급되면서 무신정변까지는 혜종이 종묘의 불천지주에 있게 되었다. 이를 조선 왕조와 비교하면, 현종이 세종대왕이라면 혜종은 태종의 위치에 있게 된 셈이다. 혜종 오오 현종의 친아버지 왕욱(王郁)은 안종으로 추숭되었으나, 주요한 신주에 오르지 못했다. 그보다는 성종의 아버지 왕욱(王旭)이 대종으로 추숭되어 신주에 올랐다. 이 대종의 문제로 인하여 덕종 사후, 정종(靖宗) 때 한국 역사상 첫 예송논쟁이 벌어졌다. 이 직계보는 고려 문종, 고려 숙종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혜종의 휘인 무(武)는 고려 내내 피휘되었는데, 모든 무라는 글자는 범 호(虎)로 대체되었다. 즉, 고려 시대에 무신은 호신이라고 불렸다. 호신정변 호신정권 호인시대 호신(드라마) 이런 면에서 혜종은 살아 생전에는 누구도 감당하지 못할 불안함에 가득 차 있었으나, 정작 사후에는 태조의 첫 계승자로서의 대접을 톡톡히 받았다.
4 대중매체에서의 모습
태조 왕건에서는 안정훈이 맡았다. (안정훈은) 1969년 생으로 극중 어머니인 염정아(1972년 생)보다 나이가 많아 다소 어울리지 않는 캐스팅이었다는 평이 있었다. 제국의 아침에서는 노영국이 역을 맡았는데 캐릭터가 확 바뀌어 버린 사례로 꼽힌다. 태조 왕건에서는 고려 건국에 공을 세울 정도로 활발하게 활동한 정력적인 무인 스타일의 태자로 묘사되는데 반해서 제국의 아침에는 몇 년사이에 심신이 상하기라도 한 건지 나약한 모습을 보인다.
다만 제국의 아침에서는 이 이유로 백제와의 마지막 전투인 일리천 전투에서 난전 도중 수많은 시체와 피로 인한 공포로 인해 몸과 마음이 피폐해진 것으로 묘사하였다. 하지만 제국의 아침 시절에도 동생들인 정종, 광종 보다도 왕으로서의 위엄을 보인다는 평가가 있는 것을 보면 꼭 나약하게만 묘사되진 않은 듯.
사실 이건 배우빨도 큰게 노영국이 이렇게 입지가 약한 왕을 연기하면서도 연기 자체가 카리스마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는 후일 대왕 세종에서 정종 역을 맡을 때도 그대로 재현되었다. 나약한 연기 조차도 엄청난 프로 정신이 발휘된 예인데, 정말로 병약한 모습을 보이기 위해서 녹화전 밥을 굶고 매운 고추만을 먹으며 몸을 떨었다고 한다.#
드라마 빛나거나 미치거나에서도 혜종이 등장하였다. 하지만 혜종은 왕관을 쓰는 장면만 몇초 나오고 그 이후로는 나오지 않았다. 이 드라마에서 중심이 되는 시대는 정종 시대이기 때문에 혜종은 태조에서 정종으로 넘어가는 중간 과정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혜종은 몇초만 나온 엑스트라이기 때문에 등장인물 설명에도 안 나온다.[6]
드라마 달의 연인 - 보보경심 려에서는 김산호가 맡았다. 힘없고 신분이 미천한 외가때문에 출신의 컴플렉스를 가지고 있었고 아버지인 태조 왕건이 아들중 가장 그를 많이 사랑하였고 아꼈지만 왕이 되고 나서 불안정한 왕권과 대정으로 맡긴 동생 왕욱에게 그는 수은으로 점점 중독된채 독이 퍼져 몸과 정신이 약해졌고.. 광종이 되는 왕소에게 딸을 시집보내고 선위를 하고 의지해 자신과 가족들을 살리려는 계획을 하였지만.. 쿠데타가 일어나 정종이 되는 왕요에게 다미원에서 비참하게 피를 토하며 물에 빠져 허우적대다가 죽게된다..
- ↑ 고려사 열전에 그의 어머니에 대해서 말할 때 혜종을 참으로 용의 아들(당연히 용은 왕건.)이라고 찬양하면서 어머니 집안이 미천해서 다음 왕위에 오르지 못할까 염려했다고 한다. 이는 단적으로 혜종의 한계를 잘 보여준다.
- ↑ 나름 혜종이 장자이기 때문인지 청주, 진천, 경주 일대 호족과 결혼했다. 하지만 아무래도 충주와 경순왕과 결혼한 낙랑공주의 영향력을 이기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 ↑ 이는 역으로 왕요만 왕무의 충성하면 왕권이 안정되는 아이러니가 있다. 왕건으로써는 왕요가 왕무에게 충성하기를 바란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인지 왕무와 왕요의 청주 출신 부인들은 서로 자매지간이다. 아무래도 둘의 싸움을 막기 위한 비책으로 보인다.
- ↑ 조선유물고적도보를 보면 일제시기까지는 묘지 난간은 있었다.
- ↑ 최승로는 시무 28조 서두에서 고려 태조 이래 경종까지의 다섯 왕의 치적을 평가하면서 혜종을 "종족을 보존"한 공로가 있다고 평가했다.
- ↑ 조금만 파고들면 굉장히 복잡하다. 일단 혜종의 죽음이 굉장히 의문이 가득한데다 왕소는 혜종의 사위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를 표현하려면 원래 드라마의 이야기가 망가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정종은 왕식렴의 휘둘리지 않고 개경 일대를 피바다를 만든 사람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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