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파티아


<찰스 윌리엄 미첼>의 그림인 히파티아. 현대 영어식 발음은 하이페이시아.

Ὑπατία/Hypatia
(355년? ~ 415년)

고대 로마사서[1], 수학자, 철학자, 천문학자

1

기원후 355년경에 태어났다. 그녀의 아버지 테온(Theon; 330~405; 75세)은 알렉산드리아 대학 수학과의 저명한 교수였고, 후에 그 대학의 책임자가 되었다. 히파티아는 유년기를 무사이움(Musaeum)이라는 연구소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성장했다. 그녀는 유년기부터 학습, 질문, 탐구의 분위기에 싸여 있었다. 알렉산드리아는 세계적인 학문의 중심지였고 서로의 학문을 나누기 위해서 모든 문명국으로부터 학자들이 모여드는 세계의 중심부였다. 테온의 딸로서 히파티아는 이런 자극적이고 도전적인 환경에 둘러싸여 있었다. 더욱이 그녀는 예술, 문학 , 자연과학, 철학에 이르기까지 상당히 균형잡힌 교육을 받았다. 그 당시, 수학은 어떤 행성에 태어난 한 개인의 자취같은 불명료한 문제를 계산하는 데 주로 이용되었다. 수학적인 계산을 통해 한 인간이 어느 날 정확히 어떤 위치에 있을 것인지를 결정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였다. 천문학과 점성술을 하나의 과학으로 간주하였으며, 수학은 과학과 종교를 결합한 것으로 생각하였다.

이런 원리는 히파티아가 일찍이 교육을 받은 바 있었고, 더욱이 테온은 문명화된 세계에 알려진 모든 종교체계를 그녀에게 가르쳐 주었다. 테온은 선생으로서 보기드문 재능을 가지고 있어 히파티아에게 축적된 지식을 전해주는 것뿐만 아니라 이러한 지식을 형성하고 받아들이는 데 필요한 식별력도 가르쳐 주었다. 이러한 목적을 위하여 그는 종교에 대한 분별력을 가질 수 있도록 각별히 배려하였으며, 새로운 진리를 배척하는 어떠한 완고한 신앙도 그녀의 삶을 지배하지 못하도록 가르쳤다. 그는 그녀에게 "무릇 모든 형식적이고 독단적인 종교는 사람을 현혹시키는 것이어서 자존심 있는 사람이라면 절대로 받아들여서는 안된다"라고 가르쳤다. "네가 생각하는 권리를 비축하여라. 왜냐하면 틀리게 생각하는 것이 오히려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는 것보다 낫기 때문이다." 기독교에서 왜 그녀에게 테러를 가했는지 알 수 있는 부분

히파티아의 정신은 놀랍고 신속하며 잘 단련되어 있었다. 테온은 이러한 그녀의 정신에 어울리는 건강한 육체를 가질 수 있도록 식이요법을 개발하였다. 그는 히파티아가 규칙적으로 연습할 수 있도록 일종의 부드러운 미용체조도 고안해냈다. 그녀는 노 젓는 법, 수영, 승마, 등산 등을 배웠고 하루 일과 중 일정한 시간을 이러한 운동을 하는 데 할애하였다. 로마인에게 우변술, 수사법 같은 예술은 사회적 품위를 드러내는 것이었다. 한 개인의 성향을 드러냄으로써 타인을 감명시킬 수 있는 이 능력은 신으로부터 인간이 부여받은 위대한 재능으로 생각되었다.

테온은 딸 히파티아가 자신이 이미 규정해 놓은 '완전한 인간'이 되기를 원하였다. 그러기 위한 하나의 준비 단계로 히파티아는 연설에 필요한 정규교육을 받았다. 미사여구를 시도하는 방법, 언어의 힘과 최면을 유도하는 힘, 음성을 적당하게 조절하는 법, 상대방의 기분을 좋게 만들 정도의 부드러운 음성을 내는 방법에 관련된 수업이었다.

테온은 히파티아가 환경의 변화에 좌우되지 않기 위해 매 순간마다 아주 정확하게 그녀의 생활을 감독하였다. 그러나 타인에 대해 지녀야 할 책임감조차 도외시하는 강력한 인간으로 만들려고 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쉽게 영향받고 감수성이 예민한 젊은이의 마음은 쉽게 상처받을 수 있다는 것을 경고하였다. 그리고 미사여구를 사용하는 것은 단지 화장을 하는 효과가 있을 뿐이며, 타인에게 영향을 미쳐 타인을 조종하는 것을 경계하도록 하였다. 그의 교육은 감수성이 강하고 타고난 재능을 발휘하여 언변이 뛰어난 스승이 될 수 있도록 하였다.

고등교육을 받기 위해 외국을 여행하였으며 가는 곳마다 왕족처럼 대우를 받았다고 한다. 그녀의 여행은 오랫동안 계속되긴 하였으나 연속적이지는 않았던 것 같다. 한동안 그녀는 젊은 플루타르코스와 그의 딸 아셀피제니아가 운영하는 아테네의 한 학교의 학생이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바로 여기서 수학자로서의 명성이 시작되었다. 알렉산드리아로 돌아왔을 때, 그곳의 행정장관이 수학과 철학을 가르치도록 대학으로 초빙하였고 암모니우스, 히에로클레스, 그 외의 훌륭한 학자들이 가르쳤던 그 곳에서 강의를 하며 여생을 보냈다. 그녀는 인기있는 선생이었다. 그 시대의 가장 훌륭한 학자들이 그녀의 강의실은 물론이거니와 집에도 종종 방문하였는데, 그곳은 도서관, 뮤지엄과 더불어 위대한 한문의 도시에 있는 가장 확실한 지성의 중심지; 중 하나였다고 역사학자 소크라테스는 쓰고 있다.

그녀는 마치 제사장처럼 여겨졌다. 유럽, 아시아, 아프리카로부터 온 열정적인 학생들이 히파티아의 강의를 듣기 위해 몰려들었다. 그녀는 디오판토스의 산술과 디오판토스가 고안한 기호에 관하여 강의하였다. 그녀의 강의는 수학 자체로서, 그리고 호기심이 많은 그녀의 마음을 자극한 순수하고 예민한 기쁨으로 사랑하였기 때문이다.

1.1 학자로서의 삶

수학에 관한 몇 권의 책을 저술하였다. 10세기 말경의 그리스 문학사전 편찬자인 수이다스(Suidas)는 몇 권의 책이 그녀의 것이라 썼으나 불행하게도 이런 책들의 대부분은 알렉산드리아의 톨레미 도서관과 함께 완전히 파손되었거나 폭도들이 세라피스 신전을 약탈할 때 없어졌다. 그녀의 연구는 단편적인 부분만 남아 있을 뿐이다. 디오판토스의 천문학적 계산에 관하여라고 하는 그녀의 저서 일부분이 15세기경 바티칸 도서관에서 발견되었다.

디오판토스의 대수는 일차와 이차방정식을 주로 다루고 있다. 히파티아가 단 주석은 몇 가지의 다른 풀이과정과 그녀가 최초로 시도한 상당수의 새로운 문제를 포함하고 있다. 이것들은 히파티아의 연구업적이라 평가되고 있다. 이러한 연구 외에도 그녀는 디오판토스의 책을 대중화시킨 아폴로니우스의 원추곡선에 관하여라는 책을 집필했다. 그리스 시대가 막을 내림에 따라서 원추곡선에 대한 흥미는 점점 시들해졌다. 수학자들은 히파티아 이후부터 17세기 중반에 이르기까지 이러한 곡선들에 대해서는 무관심하였다.

별에 관련된 많은 연구자료가 들어있는 톨레미의 천체관측 규범인 알마게스트에 관한 해설서도 집필하였다. 그 뿐 아니라 아버지 테온과 함께 유클리드에 관하여 최소한 한권 이상의 책을 썼다. 이러한 연구 활동의 대부분은 학생들을 가르치기 위한 교재로 준비된 것이었다. 원추곡선에 대해 히파티아가 주석을 쓰고 난 후 수세기가 지나 데카르트나 뉴턴 그리고 라이프니츠 등의 연구가 나올 때까지는 수리과학에서의 발전은 더 이상 없었다.

1.2 평가

동시대 사람들은 그녀의 천재성에 대하여 대부분 서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소크라테스, 니세포르스, 필로스토르기우스 등은 모두 히파티아와 다른 교파의 역사학자였으나 그녀의 성품이나 학문을 찬양하는 데 인색한 법이 없었다. 그녀의 명성은 널리 알려져 있었고, 왕자들이나 철학자로부터 여러 차례 구혼을 받았으나 그녀는 그러한 청혼에 대하여 "나는 진리와 결혼하였다"고 대답하였다 한다.

그녀는 수학자로서 유명한 것만큼이나 철학자로서도 잘 알려져 있으며 '무사(Musa) 여신에게' 또는 '철학자에게'라고 주소가 쓰인 편지는 당연히 그녀에게 배달되었다는 전설적인 이야기가 전해온다. 그녀는 '신플라톤학파'라고 불리는 그리스 사상을 추구하는 학교에 소속되어 있었다.

2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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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기 412년 알렉산드리아의 키릴로스(치릴로)가 알렉산드리아의 주교가 되었을 때 키릴로스의 유일한 반대세력으로 보이는 오레스테스와 맺은 우정과 신뢰로 인하여 히파티아는 두 파벌 사이에서 정치적 보복을 위한 인질로 붙잡혔다. 키릴로스는 대중의 광기에 불을 질렀고, 그를 비방하는 사람들을 제거하기 위해 폭도를 구성하였으며 유대교 회당을 뒤엎고 행정장관의 지위와 권한을 대부분 장악하였다. 키릴로스의 지시를 받은 광신자 폭도들은 대학으로 강의하러 가는 히파티아를 도중에 마차에서 끌어내어 머리카락을 다 뽑고 벌거 벗긴 후 날카롭게 간 굴 껍데기로 피부를 벗겨내는 고문을 하였고 화형에 처했다.

그녀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많은 학자들이 국외로 망명하였다.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의 파괴와 함께 히파티아의 죽음은 사실상 수 백년을 이어온 그리스의 철학과 과학의 종언을 의미하였다. 헬레니즘의 유산은 대부분 소실되었고, 기독교의 교리와 기독교적 사상에 반대되는 어떠한 사상 및 철학도 용납되지 않는 시대에 접어든다.

...라는게 근대 계몽주의 시절까지 일반적인 평가였으나 현대에 들어 재평가됐다. 실상은 전혀 다르다.

히파티아의 죽음은 단지 '사악한 주교의 선동으로 무고한 철학자가 살해당한' 사건은 아니다. 그녀의 죽음에 대해서는 두 가지 사료가 남아있는데, 기독교 측에 편향되어 있는 사료 하나를 제외하고 중립적인 사료를 통해 복원하자면 다음과 같다. 당시 알렉산드리아는 서로 대립하는 두 파벌로 갈라져 있었다. 하나는 성장하는 기독교 세력이었고, 다른 하나는 비그리스도인들과 유대인들의 세력이었다. 여기에서 총대주교 키릴로스는 기독교 세력의 대표자였고, 비기독교인 세력은 기독교인이던 총독 오레스테스가 대변하고 있었다. 히파티아는 오레스테스의 조언자로서 큰 정치적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2]

이런 배경 아래 서기 415년, 유대교 축제 기간에 사건이 일어났다. 이 축제는 매우 성대한 규모의 행사였기 때문에 혼란이 빚어질 가능성이 있었다. 이에 오레스테스는 알렉산드리아 시민들의 통행을 제한하는 포고령을 내렸다. 유대교 축제에 반감을 가지고 있던 기독교 시민들은 총독의 포고령을 읽고 불만을 토로했고, 그 무리 중에는 키릴로스의 추종자인 히에락스가 있었다. 이런 상황을 지켜보던 오레스테스는 그 자리에서 히에락스를 체포해 알렉산드리아 극장에서 공개적으로 고문했다. 이 일을 전해들은 키릴로스는 격노하여 총독과 유대인들에게 기독교인을 위협하지 말 것을 명했다. 하지만 유대인들 또한 기독교 주교의 명령을 들을 생각이 없었다. 또한 유대인들은 이에 대한 보복으로 한밤중에 성 알렉산드로스 성당을 불태우고 길거리에 나와있던 그리스도인들을 학살했다.

이 사건이 있은 뒤 결국 키릴로스는 도시의 모든 유대인들을 추방할 것을 명했다. 수많은 유대인들이 재산을 압수당한 채 도시 밖으로 추방되었다. 이 사건으로 인해 오레스테스와 키릴로스는 돌이킬 수 없는 불화에 빠지게 되었고, 그리스도인들과 비그리스도인들 또한 극도의 대립을 겪게 되었다. 히파티아는 오레스테스의 측근이자 조언자였는데, 오레스테스가 키릴로스와 계속해서 대립하도록 영향력을 발휘했다. 그리고 이번에는 그리스도인들이 폭동을 일으켰다. 분노한 그리스도인들은 총독을 몰아세워 그를 이교도라고 비난했다. 이 때 총독은 자신이 콘스탄티노플 대주교로부터 셰례를 받은 사실을 밝혔지만 키릴로스를 지지하려고 온 수도사 중 암모니우스라는 자가 오레스테스의 머리를 때려 피를 흘리게 했다. 격분한 오레스테스는 그를 고문시켜 죽음에 이르게 하자 키릴로스는 그를 순교자로 추켜세웠다. 그와 동시에 오레스테스와 키릴로스는 각자 당시 동로마 황제[3]였던 테오도시우스 2세에게 자신의 입장이 담긴 서신을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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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상황에서 그리스도인들의 분노는 곧 히파티아에게 향했다. 그녀는 유명한 비그리스도인 세력의 철학자였고, 알렉산드리아의 명사이자 오레스테스의 조언자였기 때문이다. 상술했듯이 히파티아는 오레스테스로 하여금 기독교 세력과 키릴로스와의 대립 구도를 만들라고 부추긴 자다. 결국 한 무리의 그리스도인들의 무리가 귀가하는 그녀를 납치했고, 위에 묘사된대로 잔인하게 살해하고 말았다. 이 사건으로 오레스테스는 완전히 정치적인 영향력을 상실하지만 알렉산드리아인들은 키릴로스를 비롯한 알렉산드리아 기독교 공동체들을 비난했다. 비록 국교화되었다고 하나 아직까지는 소수였으니까.(물론 유대인들보단 훨씬 많았다.)

여기서 "키릴로스는 히파티아를 살해하라는 지시를 내린 적이 없다. 또한 알려진대로 신자들을 선동한 것도 아니기에 그가 직접적으로 히파티아의 죽음에 관여된 것은 아니다." 라고 기독교 측은 주장하지만 상당수의 자료들에 그가 계획을 알고서도 일부러 모른척했다는 정황증거가 있다. 그런 관계로 히파티아의 죽음에 대한 사실상의 책임자이며 알렉산드리아 지역 기독교의 수장으로서 그는 관용과 화합의 정신을 보여주지 못했다는 비판은 충분히 들을 수 있다.(물론 시대적 배경이 있으니 키릴로스 입장에서는 억울할 수 있겠지만. 당시는 2016년 현재로부터 1600여 년 전이었다.) 총대주교는 그리스도인들과 비그리스도인 간의 대립을 중재하기보다는 오히려 대립을 극한으로 몰아갔다.(또한 히파티아는 오레스테스의 판단력을 흐리게 하고 끝없이 선동했다는 점에서 폭동과 대립, 학살에 대한 책임을 일정 부분 지닌다. 그녀의 태도는 지식인,학자적인 모습이라고 보기 어렵다.) 한편 총대주교가 유대인들을 추방시킨 사건은 결국 폭동으로 이어지고 말았고, 기독교 무리들이 히파티아를 살해하는 계기가 되었다(물론 고문과 학살을 반복한 오레스테스와 비기독교 세력에게도 그 책임이 있다).

이 사건은 근대의 기독교 바로보기 운동의 열풍에 힘입어 '기독교의 이교 문화 탄압'의 대표적인 일화인 것으로 퍼져나갔고 히피티아의 죽음은 곧 고대 그리스-로마 문명의 종말이라는 소리까지 나오게 된다. 아우구스티누스 :??[4]

물론 히파티아 역시도 유대인들의 폭동이라는 사건으로부터 책임이 자유로울 수는 없으니 키릴로스와 히파티아에 대하여 한쪽을 일방적으로 나쁜 놈이라고 몰아가기는 어려울 것이다. 게다가 비잔티움 제국의 경우 심지어 유스티니아누스 대제 역시도 시민들의 폭동 때문에 생명의 위협을 받아보았을 정도로, 시민들이 빡치면 폭동을 일으켜서 높으신 분들에게 자신들의 의견을 피력하는 문화가 있었고. 따라서 그리스도인의 폭동이든 비그리스도인의 폭동이든 행위 그 자체를 부도덕하다고 비판할 수는 있어도, 현대의 테러리스트와 같은 죗값을 당사들에게 묻기는 어려울 것이다.

3 기타

영화 아고라가 바로 그녀의 이야기. 물론 영화인 만큼 각색이 제법 많지만[5] 영화에 대한 평가는 제법 좋은 편이었다. 할머니로 하면 흥행이 안되잖아

그리고 아테네 학당에 그려져 있는, 흰 옷을 입은 유일한 여성이 바로 히파티아이다. 속설에는 라파엘로가 그녀를 정중앙에 그리려고 했으나 그녀의 죽음에 키릴루스 성인이 관여된 탓에 교황이 반대해서 옆으로 밀려났다고 하는데, 카더라 통신이니 혹 근거를 아는 분은 추가바람.
  1. 아버지 테온이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의 마지막 관장이었다. 그리고 히파티아도 도서관에서 일한 적 있다.
  2. 참고로 키릴로스는 삼위일체를 정립시킨 교부로서 가톨릭정교회의 성인이다. 그는 현재 기독교 교리에 있어 떼놓을 수 없는 성인이고, 가장 중요한 성인 중 한 명이지만 이교도와 유대인에 대한 강경한 모습으로 많은 적을 만들기도 했다. 이러한 문제 때문에 가톨릭 온라인이라는 사이트의 성인 소개문에 키릴로스는 많지도 않은 댓글에 부정적인 댓글들이 상당히 달려있다. # 심지어 천하의 개쌍놈, 괴물 취급하며 성인에서 박탈해버리자는 의견도 보인다. 성인위 박탈? 그런 거 안된다
  3. 알렉산드리아는 이집트에 속했고 이집트는 동로마 제국 관할이었으니까.
  4. 칼 세이건의 저서인 코스모스에서도 이러한 관점을 취하고 있다. 그러나 이를 그리스-로마 문명의 종말이라고 하기는 어려운데, 그리스도교 신학자들이 가장 사랑하던 철학자가 플라톤이었고, 아리스토텔레스는 서방에서 <논리학>을 제외하고는 한동안 잊혀졌다지만 비잔티움에는 잘만 보존되어 있었다.
  5. 상술했듯 히파티아가 죽을 땐 60대의 노학자였지만 영화에서는 많아 봤자 30대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