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산연합

1 개요

NL(정파)의 한 그룹. 1991년 출범한 NL계열 운동단체 '전국연합'(민주주의민족통일전국연합)의 각 지역 연합 중 울산지부였기 때문에 '울산연합'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민주노동당, 통합진보당을 거치면서 전국연합의 또 다른 지부인 '부산연합'과 함께 의견그룹을 형성하여 울산을 중심으로 부산, 경남지역에 영향을 미쳤다.[1]

2 정파의 역사

NL은 1987년 이후 선거국면마다 제도권 정치인 중에서 상대적으로 진보적인 김대중 계열을 일관되게 비판적 지지해왔다. 그러나 1990년대 중반 NL혁신 논쟁 속에서 일부가 독자 후보 및 정당론으로 돌아섰다. 이런 경향을 보인 것이 바로 경기동부연합과 울산연합이다. 그래서 2001년 9월 전국연합의 군자산의 결의(소위 9월테제) 때에야 민주노동당에 합류한 인천연합과는 달리 울산연합과 경기동부연합은 민주노동당의 창당 과정부터 함께했다.[2]

1998년 제2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는 무소속으로 울산연합의 리더격인 김창현 후보가 출마해 28,436표(37.59%)를 받아 26,528표(35.07)를 받은 무소속 변재규 후보를 누르고 당선됐다. 같은 선거에서 울산 북구청장에 당선된 무소속 조승수와 함께 최초로 진보성향 기초단체장이 나온 것이다. 하지만 김창현은 당선 23일 만에 민족민주혁명당 영남위원회 사건에 연루되어 1999년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2년을 선고받으면서 구속되어 직위를 박탈당하고, 1999년 재보궐선거가 열렸다. 울산연합에서는 울산여성회 대표이자 김창현의 부인인 이영순을 후보로 내세워서 선거에서 승리한다.

2000년 제1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울산연합에서 최용규 후보가 울산 북구 국회의원 후보로 출마하지만 18,867표(41.78%)로 19,430표(43.03%)를 얻은 한나라당 윤두환 후보에게 근소하게 패했다.

2004년 제1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울산 동구에서 김창현 후보가 정몽준의 벽을 넘지 못하고 30%가 넘는 차이로 패배한다. 이에 비해 같은 민주노동당 내 평등파 소속인 조승수 후보는 울산 북구에서 윤두환 후보를 큰 차이로 꺾고 당선되어 울산연합 입장에서는 체면을 구겼다. 하지만 비례대표로 울산연합 소속인 이영순 후보가 당선되어 울산연합 소속 국회의원을 만드는 것에는 성공한다.

이후 울산연합은 자주파의 일원으로서 평등파와 당내 선거 패권주의 문제로 이런저런 갈등을 빚었는데, 2007년 제17대 대통령 선거에서 자주파의 지지에 힘입어 민주노동당의 후보로 선출된 권영길이 저조한 성적을 거두고, 일심회 사건까지 일어나자 이전부터 쌓여있던 자주파의 패권적, 친북적 정치행위에 대한 불만이 폭발한 평등파는 책임론을 주장하며 비대위 구성을 요구했다. 이 국면에서 리더격인 김창현이 기자회견을 열어 자신이 총선에서 비례대표 후보에 불출마할 것을 발표했다.강력한 울산연합의 세력때문에 비례대표가 쉽게 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기득권을 포기할 것이라고 이야기한 것이다. 이처럼 울산연합은 분당국면에서 인천연합과 함께 온건 자주파의 입장에 서나 끝내 분당을 막지 못했다.

2009년에는 울산 북구에서 당선된 한나라당 윤두환 의원이 의원직을 상실하는 일이 벌어진다. 총선 당시 공약으로 건설교통부장관으로부터 울산~언양고속도로 통행료 폐지를 약속받았다는 내용의 보도자료를 배포하는 등 허위사실을 유포한 혐의로 기소돼 1·2심에서 벌금 150만원을 선고받았고, 100만원 이상의 형을 받았기에 의원직을 상실하게 된 것. 그래서 열린 2009년 재보궐선거에서 민주노동당의 후보로 울산연합 김창현과 민주노총 국민파로 범NL성향이라고 분류할 수 있는 이영희가 경합하게 된다. 이영희는 바로 1년 전 제1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울산 북구 선거에 출마했지만 윤두환에게 밀려 낙선한 후보였고 김창현 후보는 울산 동구청장을 지냈지만 울산 북구에서 더 가능성이 있다는 판단 하에 지역구를 옮긴 것으로 보인다.

결국 민주노동당의 후보는 김창현 합의추대 형식으로 정리가 되고 한나라당 박대동, 민주당 김태선, 민주노동당 김창현, 진보신당 조승수, 무소속 김수현의 5파전의 구도가 되었다. 진보정당의 후보가 둘이나 나왔기에 당연히 안팎으로 단일화 요구가 거셌고, 여러 사정으로 단일화가 교착된 상황에서 민주당 김태선 후보가 김창현과 조승수의 단일화를 촉구하며 사퇴하기도 했다. 결국 투표 3일 전인 26일 여론조사를 통해 조승수 후보로 단일화가 되어 김창현 후보는 사퇴헸고 본선에서 조승수 후보가 당선되는 것을 지켜봐야만 했다.

2010년 제5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는 김창현 후보가 민주노동당의 울산시장 후보로 나왔으나 133,437표(29.25%)를 얻는데 그쳐 279,421표(61.26%)를 득표한 한나라당 박맹우 후보에게 패배했으며 남구청장과 동구청장 선거에서도 한나라당 후보에 각각 1%와 3% 차이로 석패하는 등 선전했다.

2011년에는 울산 동구청장이었던 한나라당 정천석 구청장이 지역언론사가 벌이는 여론조사와 관련해 금품을 건넨 죄로 구청장 직위를 상실해서 보궐선거가 열렸고, 김종훈 후보가 2만9561표(47.30%)를 얻어 2만6887표(43.02%)를 얻는데 그친 한나라당 임명숙 후보를 누르고 울산 동구청장에 당선된다.

통합진보당 출범 과정에서는 처음에는 국민참여당과의 통합에 반대하는 듯 했으나 결국 경기동부연합과 함께 국민참여당과의 통합을 찬성하는 입장으로 돌아섰다. 결국 통합진보당은 민주노동당, 국민참여당, 통합연대(진보신당 탈당파)가 함께 통합하는 형태로 출범했다.

제1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2009년 재보궐선거 때 울산 북구에서 단일화로 공방을 벌였던 조승수와 김창현이 같은 통합진보당에 같은 지역구인 울산 북구이기 때문에 계파간 정면충돌이 일어나는 것이 아니냐하는 우려가 있었으나 조승수 의원이 알아서 기어서 남구갑으로 옮기면서 기우가 되었다. 조승수 입장에서는 울산연합의 거두인 김창현과 대립해서 계파갈등을 겪는 것이 부담스러운데다가, 경선에서 울산연합의 강력한 조직력에 맞설 수 없다고 생각했던 모양.[3] 하지만 야권단일후보로 나온 김창현 후보는 36,482표(47.62%)를 득표하는데 그쳐 40,116표(52.37%)를 받은 새누리당 박대동 후보에게 패했다. 본선경쟁력이 더 강한 현역의원을 밀어내는 모양새로 유리한 지역구에 출마했는데 패배했기 때문에 체면을 구긴 상황. 이 외에도 노동자 밀집지역 중 하나인 울산 동구에서는 울산연합계열 이은주 후보가 통합연대계열 노옥희 후보를 경선에서 이겼으나 본선에서는 약 8% 차이로 새누리당 안효대 후보에게 패배해 울산연합은 결국 당선자를 내지 못했다.

통합진보당 비례대표 후보 부정경선 사건에서 울산연합은 처음에는 국민참여당계열, 인천연합, 통합연대(진보신당 탈당파)와 함께 진상조사위 결과를 수용하며 경기동부연합 이석기와 김재연의 사퇴를 압박했으나, 신당권파과 함께 하지는 않고 중도파의 입장에 있었다. 그러다가 당 지도부 선거에서 경기동부연합이 주축이 된 구당권파와 연합해 강병기 후보[4]를 지지함으로서 강기갑 후보를 낸 신당권파와 경쟁한다. 하지만 울산연합의 이러한 노력에도 결국 신당권파가 승리해 강기갑이 대표로 당선되고, 울산연합은 구당권파인 경기동부연합의 전횡에도 반대하지만 참여계와 통합연대(진보신당 탈당파)가 주도하는 분당 프로젝트에도 제동을 걸겠다는 애매한 입장에 서지만 끝내 분당을 막지는 못했고 울산연합은 통합진보당에 남는다.

2014년 제6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는 울산연합 소속이며 울산시장 후보로 나온 통합진보당 이영순 후보가 정의당 조승수 후보, 새정치민주연합 이상범 후보와 단일화에 합의했으나 통합진보당와의 연대를 금지한다는 새정치민주연합의 방침에 따라 무위에 돌아가고 이영순 후보는 결국 사퇴를 하고 만다. 그 외에도 울산 동구청장 선거에서도 현 구청장이었던 통합진보당 김종훈 후보가 새누리당에게 4% 차이로 패배하는데, 새정치민주연합과의 단일화 실패가 큰 영향을 미쳤기에 부정경선 사태 이후 왕따신세가 된 통합진보당의 씁쓸한 위상을 재확인하게 되었다.

2014년 상반기 재보궐선거가 끝나고 난 다음 진보대통합에 대한 논의가 진행되자 김창현 전 사무총장이 오마이뉴스에 이런을 기고하기도 했다. 이 기사에서는 크게 두 가지를 다루고 있는데 첫번째는 부정경선 사건에서 탈당파에 책임이 있다는 것이고,[5] 두번째는 내란음모 사건이 조작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김창현은 중앙위원회 폭력사태에 대해서는 비판적인 태도를 취하기도 하나 대체적으로 경기동부연합와 비슷한 현실 인식을 보여주고 있다.

2014년 12월 19일 통합진보당 해산심사 청구 국면에서 헌법재판소가 통합진보당에 대한 위헌정당해산심판 청구소송에서 '인용' 결정을 내려 울산연합이 소속된 통합진보당이 해산되었다. 인용 결정을 내린 건 8명, 기각 결정을 내린 건 1명으로 예상보다 큰 차이. 다소 무리한 법리 해석이 개입되었다는 전문가들의 분석이 있으나 여론은 해산에 우호적이다. 통합진보당의 이념을 옹호하는 집회와 시위는 금지되고 채무를 제외한 정당 재산은 몰수되며 앞으로 통합진보당과 명칭 및 강령이 유사한 정당은 등록이 금지된다. 울산연합의 입장에서는 여러모로 참혹한 상황. 통합진보당 소속 국회의원은 모두 의원직이 박탈되었으나 울산연합의 경우 현재 국회의원이 없으므로 의원직이 박탈된 의원은 없다. 이후의 행보로써는 정당을 등록하지 않고 활동하는 방안, 민주노동당에서 그랬던 것 처럼 다른 정당에 가입해 장악하는 방안, 유사정당 금지 범위에 해당하지 않는 새로운 정당을 만드는 방안 등이 논의되고 있는 모양.

제2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따로 정당을 만들지 않고, 경기동부연합이 주축이 되어 결성한 민중연합당에도 참여하지 않고 '민주와 노동'이라는 단체를 만들어 무소속으로 각 지역에 출마하였다. 각 지역에서 진보성향 후보들과 단일화를 했는데, 창원 성산에서 정의당 노회찬 후보와 붙은 손석형 후보만이 탈락했을 뿐 울산 동구에서는 김종훈 후보가 노동당 이갑용 후보를 이겼고 울산 북구에서는 윤종오 후보가 두 번이나 울산 북구에서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었던 정의당 조승수 후보를 이겼다. 주로 민주노총 조합원 투표로 이루어진 경선 과정에서 자주파 특유의 조직력이 빛을 발했다는 평가. 이 조직력은 본선에서도 이어져 윤종오, 김종훈 후보 모두 여유있게 새누리당 후보를 따돌리고 원내 입성에 성공했다. 통합진보당이 해산되었지만 아직도 울산연합이 울산, 경남 지방에서 확고한 지지기반을 가지고 있으며, 정부의 노동 개혁 정책에 반발한 울산의 야당성향 지지자와 노동자들도 결집했다는 평가. 이후에는 '민중의 꿈'이라는 조직을 결성하여 진보정당 대통합 운동을 진행하고 있다.

3 성격

임미리의 책 <경기동부>[6]에서는 자주파의 3대 정파 인천연합, 경기동부연합, 울산연합을 각각 기업 조직, 군사 조직, 정치 조직에 비유하는데, 강력한 내부 규율을 가진 경기동부연합이나 세련된 방식의 운동을 하는 인천연합과는 달리 수많은 정파들의 각축장이었던 울산의 지역적 특성 상 울산연합은 정치적 감각이 남달랐으며, 따라서 NL 내 다른 정파들하고 대립하기보다는 인천연합과 경기동부연합 사이를 오가며 세력을 유지했다.

일례로 울산연합은 통합진보당 비례대표 후보 부정경선 사건에서 처음에는 이석기와 김재연의 사퇴를 압박했지만 강기갑과 강병기가 대결한 지도부 선출 과정에서 경기동부연합의 편에 섰고, 분당과정에서는 인천연합이 조직적으로 후퇴하는 가운데 중앙진출이 두드러지는 등 실리를 챙기는 등 캐스팅 보트 역할을 하면서 정치적으로 기민하게 움직이기도 했다.

또한 상대적으로 학출(대학생 출신)이 주축이 된 경기동부연합에 비해 울산연합은 지역의 특성상 노동자들과 함께 활동(울산지역에서 큰 영향을 미치는 현대그룹의 노동조합들에 깊게 관여했다)했기 때문에 대중운동 노선에 철저하고, 대중의 눈높이에 민감하다는 분석도 있다. 하지만 경기동부연합과 같이 민혁당의 영향을 받아 친북성향은 강한 편인데, 그 특유의 균형감각 때문에 대외적으로는 희석이 잘 되는 편이다.

4 사건사고

  • 울산 북구 기습 출마 사건 : 2000년 제16대 국회의원 선거에 나갈 울산북구 후보를 선출하는 과정에서, 경선에서 노동계 후보인 이상범의 당선이 유력해지자 울산연합에서 기습적으로 자기 세력의 후보인 최용규를 출마시키는 사건이 일어났다. 결국 본선에서 근소하게 패했다. 이 사건은 당기위원회에 제소되어 관련자 여섯 명이 징계를 받았다. 이 사건은 전국연합의 조직적 결합 이전에 일어난 일으로, 평등파가 주축이 되어 만들어진 민주노동당에서 최초로 자주파의 돌출행동이 문제가 된 사건이라고 할 수 있으며 본선 경쟁력에서 이상범 후보가 더욱 평가를 좋게 받고 있었기 때문에, 이 일이 없었다면 진보정당 국회 진출은 4년 앞당겨질 수도 있었다.
  • 경항신문 절독 운동 사건 : 2010년 민주노동당이 북한 삼대세습에 침묵하자 경향신문은 '민노당은 3대 세습을 인정하겠다는 것인가'란 제목의 사설에서 "북한의 3대 세습은 민주주의는 물론, 사회주의와 아무런 인연이 없다. 북한의 가족통치는 사회주의 이념을 배반하고, 사회주의적 가치를 훼손하는 것이기 때문"이라며 "그런 결정을 한 김정일 정권의 문제를 올바로 인식하고 바로 잡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한반도 민중의 고통을 덜기 위해 헌신해온 진보세력의 과제"라고 민주노동당을 비판한다. 그러자 민주노동당 울산시당은[7] 경향신문에 절독 통지문을 보내고 절독운동을 전개하는 등 강하게 반발했다. 이 사건에 대해 홍세화는 "북한의 세습체제를 그대로 둔 채 그리는 통일의 상은 어떤 것인가. 이 간단한 질문에도 '말하지 않는 게' 민주노동당과 당대표의 '판단이며 선택'일까"라며 강하게 비판했고#, 진중권은 "상식을 넘어선 그들의 과도한 대응. 그것은 아버지[8]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데에 대한 자식의 모욕감이라는 맥락에서 읽을 때 이해가 될 것이다."라고 하는 등 평등파 지식인들의 많은 비판을 받았다.
  1. 사실상 부산연합을 하위 조직으로 두고 있다.
  2. 조직적인 참여는 아니었고 개인적인 판단에 따른 개별적 참여였다.
  3. 하지만 조승수는 남구갑에 가서도 현대차 노조위원장 출신 이경훈 위원장과 경선에서 대결해야했고, 이 과정에서 이경훈 위원장 측에서 당비대납을 했다는 의혹이 불거지기도 했고 아무튼 경선 승리는 했으나 야권연대 과정에서 민주통합당 심규명 후보에게 패해 낙마하게 되었다.
  4. 강병기 후보는 정파색이 옅은 비주사 NL으로 분류된다.
  5. 김창현은 가해자가 피해자를 비난하며 사퇴를 촉구하다 받아들여지지 않자 떠난 것이 문제의 핵심이었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에 대해 이석기, 김재연 의원을 위해 표를 조직한 자들도 있었다는 것이 검찰 조사나 재판을 통해 밝혀졌고, 진상조사위는 경기동부계열을 표적으로 삼은 것이 아닌 일괄사퇴를 주문한 것이라는 비판도 가능하다.
  6. 이매진, 2014
  7. 당시 울산시당 위원장은 울산연합의 리더인 김창현이었다.
  8. 정신분석학적 용어이다. 칼럼링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