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회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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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노회찬(魯會燦)
출생일1956년 8월 31일
출생지부산광역시
본관강화 노씨
본적함경남도 함흥시
최종 학력고려대학교 정치외교학 학사
소속 정당정의당
선거구경남 창원 성산
의원 선수3
의원 대수17, 19, 20
소속 위원회국회운영위원회
법제사법위원회
현직정의당 원내대표
제20대 국회의원
약력진보정치연합 대표
국민승리21 정책기획홍보위원장
민주노동당 사무총장
진보신당 공동대표
진보정의당 공동대표
외부 링크블로그

1 개요

진보정당 최초이자 단 둘뿐한 3선의원[1]

한국의 정치인이자 노동운동가이다. 의 노.

2 생애

2.1 학창시절

경제적으로 넉넉하지는 않지만 문화적으로 풍부한 가정에서 성장했다. 중학교때부터 첼로를 배웠으며, 펜싱과 육상에 뛰어났다고 한다. 1972년 부산고등학교 입시에 실패하고 재수하여 경기고등학교에 입학했다.[2] 이 때부터 고향인 부산을 떠나 서울에서 생활했다.[3]

경기고 재학시절에는 10월 유신에 반대하여 반독재 투쟁에 참여했다. 유인물을 만들어서 배포하는 일을 하며 이 시기부터 민주화운동에 참여했다고 한다.[4][5] 이 시기 다양한 책을 접하며 함석헌, 선우휘, 백기완 등 재야인사들과 만나게 된다. 당시 경기고 동기 중에는 현재 국회의원인 이종걸. 박근혜정부의 국무총리인 황교안도 있었다. 1976년, 고등학교를 졸업했지만 대학 입시에 낙방했다. 그는 곧바로 군대에 지원해 입대한다. 군복무를 마친 뒤 1979년 고려대학교 정치외교학과에 입학했다.

대학에 입학 후 민주화운동을 계속 하던 중 광주 민주화 운동에 크게 충격을 받는다. 그는 조직화된 노동자가 앞장서야 근본적인 변혁이 가능하다는 판단하에, 본격적으로 노동운동에 뛰어든다. 그는 고려대학교 재학 중인 1982년 영등포 청소년 직업학교(현 서울산업정보학교)에서 용접기능공 자격증 등을 따서 현장 노동자들 틈으로 섞여들어가, 일명 '학출'로 노동운동을 시작했다.[6] 노회찬은 1980년대 초중반부터 시위를 조직하고 노조를 결성한 죄로 수배되었다. 그는 꽤 긴 시간 동안 수배자 신분으로 도망다녔다.

2.2 노동운동가 시절

1987년 6월 항쟁 이후, 노회찬은 인천, 부천의 노동조합과 노동운동 단체들을 연합하여 인천민주노동자연맹(약칭 인민노련)을 출범시키는데 핵심 멤버로 활동한다. 이 조직은 당시 노동자 계급의 정치세력화를 목표로 활동했으며, 사회주의를 표방했다. 인민노련은 당시 노동현장에 뿌리를 둔 조직 중 가장 전위적이고 가장 큰 조직이었다. 1989년, 인민노련 결성 관련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경찰에 검거된다. 인민노련 멤버들은 이 당시 법정에서 자신들을 사회주의자라고 떳떳히 밝혀 큰 파문이 일기도 했다.당시의 공판 자료를 엮은 "그렇소 우리는 사회주의자요" # 인민노련은 기존의 주체사상파제헌의회파가 너무 교조주의적이고 이상론에 머물러있다며 보다 실질적인 노동계급 운동을 표방했다. 이에 따라 인민노련은 현재 PD 계열의 원류로 평가된다.

3 정치 경력

사실 노회찬의 정계입문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이른 90년대 초반에 이루어졌다. 이는 그가 속한 인민노련의 노선 변화와도 관련이 있었다. 90년대에 들어 동구권의 붕괴와 소련 해체를 경험하면서, 이제는 제도권으로 나와서 활동해야 한다고 노선을 전환하게 된 것이다. 인민노련은 합법 정당 운동을 위해 한국 사회주의 노동당 창당위원회로 전환하게 되고, 노회찬은 진보정당추진위원회의 대표를 역임하게 된다. 진보정당추진위원회는 95년 9월 24일, 또다른 진보정당운동세력인 민중정치연합[7] 과 결합하여 '진보정치연합'으로 재편되었다.

그리고 95년에는 '반3김'을 구호로 내세운 개혁적국민정당[8] 창당준비위에 가담했다. 이 정당은 그해 10월 창당하여 꼬마민주당과 결합하여 통합민주당을 이루었다. 노회찬 역시 통합민주당에 합류하였고, 강서을을 지역구로 총선을 준비했지만 사면복권이 안되어서 실패. 매일노동뉴스의 발행인으로 활동하며, 원외인사로 남을 수 밖에 없었다.

여담으로 이당시 원외인사로 활동하던 노회찬은 <어, 그래? 조선왕조실록>이라는 대중역사서를 집필하여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기도 하였다. 유시민거꾸로 읽는 세계사와 같은 책들에 비하면 그 수명은 참으로 짧았지만, 이색적인 이력.

제도권 정치를 향한 노회찬의 발길은 진보정치연합의 대표로 권영길의 대선 출마를 지원하는 것으로 이어진다. 이 같은 흐름은 국민승리 21과 민주노동당을 거치며 성공적으로 안착. 이후 민주노동당의 비례대표 공천을 받고[9] 2004년 17대 총선에서 당선되었다. 여담으로 이때 노회찬 의원이 각종 토론 프로에 나오며 촌철살인과 함께 일명 대중을 웃기는 유머러스한 컨셉의 토론으로 인기를 끌게 되고 이후 대중적인 인지도의 진보 정치인으로 발돋움하게 된다. 그러나 이후 NL-PD 갈등이 심해지면서 민주노동당을 탈당하고, 진보신당 초기의 공동 당대표를 역임하였다.

2010년엔 서울시장선거에 진보신당 후보로 출마했는데, 이때 민주당 한명숙 후보와의 단일화를 거부하고 완주해서 오세훈이 당선한 것 때문에 일부 야권 지지자들에게 푸지게 욕많은 비판을 받기도 했다.[10] 그러나 민주당도 성의있게 단일화 협상을 하지 않았음이 훗날 나꼼수에서 밝혀지는데, 이때 노회찬 의원이 게스트로 출연해 밝힌 바에 의하면 민주당쪽에서 자신에게 선거기간 동안 전화 한 통 걸지 않았다고 토로하며 물러나려고해도 물러날 명분조차 안주지 않았느냐고 말했다. 민주당 지지자들도 이 부분에선 반성(?)한다는 모습. 무엇보다도 2년 전 선거 때는 도리어 노회찬이 민주당 때문에 패배한 것을 감안하면...[11] 만약 서울시장선거에서 한명숙 후보와 단일화에 성공하여 오세훈 시장이 이 때 떨어졌다면 훗날 박원순 시장은 역사에 없었다. 인생사 새옹지마?

이후 민주노동당과의 합당을 밀고 나가다 결국 부결되면서 심상정, 조승수와 함께 당을 탈당했고, 이후 통합진보당 창당에 참여해 치른 19대 총선에서 당선되어 (서울특별시 노원구 병) 국회의원을 지냈다.

3.1 정의당 활동

통합진보당 비례대표 후보 부정경선 사건 때에 탈당하여 정의당으로 당적을 옮겼다.

2013년 삼성 X파일 사건의 떡값검사(일명 떡검)들의 실명을 공개한 혐의로 통신비밀보호법 위반 유죄를 선고받고 국회의원직을 상실했다. 2013년 재보궐선거에서 아내이자 노동운동가인 김지선 씨가 노원병 지역에 출마했지만 당시 무소속 안철수 후보가 당선되었다.

2014년부터 정의당에서 제작하는 팟캐스트 노유진의 정치카페 고정멤버로 출연했다. 2014년 7.30 재보궐선거에서 서울시 동작구 을 지역에 출마하였다. 새정치민주연합, 정의당, 통합진보당, 노동당 이 4당이 후보 단일화로 막판까지 시끌벅적하였다. 통합진보당 후보가 노동당 김종철 후보 지지를 선언하며 사퇴하였고, 새정치민주연합의 기동민 후보가 노회찬 후보 지지를 선언하며 사퇴해 마지막에는 나경원 VS 노회찬 VS 김종철의 3자 대결로 갔지만 결과는 노회찬 48.7%, 새누리당 나경원 49.9%로 나경원 후보가 아슬아슬하게 당선되었다. 참고로 이때 김종철 후보 표를 합치면 50.1%가 되어 나경원 의원을 이길 수 있었다.(...) 이래저래 단일화에 울고웃는 인생

2015년 결선투표제로 치러진 정의당 당 대표 선거에 출마하였다. 1차 선거에서는 큰 표 차이로 1등을 차지했지만 2차 선거에서 심상정 의원에게 역전을 당해 낙선하였다. 당시에 상당수가 노회찬이 될 것으로 생각했는데, 덕분에 노회찬의 캠프 쪽에서 방심한 반면 심상정의 캠프에서는 필사적이었다고 한다.

3.2 4.13 총선 준비 과정

2015년 11월 경에는 다시 서울시 노원구 병 지역구로 이사해 총선을 준비한다고 알려졌다. 국민의당 안철수 현 의원, 그리고 새누리당 이준석 전 혁신위원장과의 3파전 양상이 예상되었다.[12][13]

그러던 중 창원 성산 출마설 기사가 나왔다. 노유진의 정치카페 84편에 따르면, 창원시 성산구의 경우 지역과 정의당 경남도당의 출마요청이 있어 고심을 하고 있었다. 또 같은 방송에 따르면 광주 광산구 출마 역시 요청 받고 있다고 힌다. 2016년 1월 30일 전국위에서 결국 창원 성산 출마가 결정되었다.# 하지만, 해당 지역구에는 현역의 새누리당 강기윤 후보, 더불어민주당 허성무 후보, 민주노총 소속의 손석형[14] 후보가 이미 있다. 국민의당 후보 출마설까지 나오는 상황에서 야권 단일화는 필수로 보인다. 허성무 후보는 이에 반발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며, 손 후보와는 민주노총 지지 후보 투표로 단일화 투표가 진행 중이다. 두번의 단일화와 본선거, 모두에서 승리하여야 당선되는 상황이라 매우 어렵다. 준플레이오프 진출도 아니고

MBC경남의 여론조사에서는 야권 단일화를 이룰 경우 가장 경쟁력 있는 후보로 노회찬이 24.6%로 가장 앞섰다.#

2월 20일, 민주노총 단일화 후보 투표에서 승리했다. 당초 예상보다 훨씬 박빙의 승부였다고.#

더불어민주당 허성무 후보와의 단일화 여론조사가 3월 27~28일 양일간 진행될 예정이다.#

더불어민주당 허성무 후보와의 단일화 후보 투표에서 승리했다. 양측 합의로 조사결과는 비공개하기로 했다고 한다.#

2016년 4월 3일 선관위로부터 야권단일후보라는 홍보 문구를 지적 받았다. 아직 국민의당 후보가 남아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결국 당일 선거 결과에서 51.5%로 여유있게 승리하며 당선됐다. 단일화 두번과 본선에서까지 모두 승리하며 노회찬의 저력을 입증한 셈이다. 문젠 선거제도 안고치면 4년 후 또 '본선보다 단일화가 더 어려웠어요' 상황에 처할지도 모른다는 것.(...)

3.3 제20대 국회 활동

당선 이후, 정의당 원내대표로 선출되었다.#

3.4 선거이력

당 내부 선거가 아닌 대한민국 선출직 공직자 선거 결과만 기록한다.

연도선거종류소속정당득표수(득표율)당선여부비고
2004제17대 국회의원 선거
(비례대표 8번)
민주노동당2,774,061(13.3%)당선2008.2.11 의원직 상실
(민주노동당 탈당에 따른 자동상실)
2008제18대 국회의원 선거
(서울 노원구 병)
진보신당32,111 (40.1%)낙선 (2위)홍정욱 당선
2010제5회 전국동시지방선거
(서울특별시장)
진보신당143,459 (3.3%)낙선 (3위)
2012제19대 국회의원 선거
(서울 노원구 병)
통합진보당52,270 (57.2%)당선 (1위)2012년 진보정의당으로 당적변경
2013년 2월 피선거권 상실
20142014년 상반기 재보궐선거
(서울 동작구 을)[15]
정의당37,382 (48.7%)낙선 (2위)
2016제20대 국회의원 선거
(경상남도 창원시 성산구)
정의당61,897(51.5%)당선(1위)

4 기타

  • 기본적으로 위트가 넘치는 유머러스한 화법을 구사하지만 그 속엔 촌철살인의 의미가 숨어있어 진보 진영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히는 으로 꼽히기도 한다.
  • 손석희 앵커, 박원순 서울시장과 동갑이다. 해당 영상은 100분 토론 손석희 앵커 하차 특집 때 나온 것으로, 손석희 앵커의 동안 때문에 노회찬 의원이 졸지에 노안이 되버렸다. 물론 박원순 시장보단 좀 젊어보이긴 하다.
  • 정의당의 개그 페이지 정의당 X-File의 이름은 삼성 X파일 사건에서 따온 것이다. 운영자 중 한 사람이 전직 노회찬 대학생 팬클럽 회장이었을 정도로 노회찬을 좋아했다.
  • 중요한 정치적 선택들을 함께 취해왔기 때문에 진보정당 지지자들어쩌면 덕후에게 심상정과의 커플링(...)이 꽤 오래 회자되었던 듯 하다. 물론 두 사람 모두 각자의 배우자가 있으며, 심상정과 노회찬은 오랜 경쟁자 관계이기도 하다. NL에게 쳐발리던 과거를 만회하기 위해 조직과 강한 리더십을 강조하는 심상정과 개인기의 비중이 강한 노회찬은 여러모로 대조되는 인물이기도 하다. 두 사람은 동지이자 라이벌인 셈이다. 참고로 두 사람의 관계에 대해 2015년 당대표 선거할 적 유세 겸 심상정 의원이 노유진의 정치까페에 나와 한번 다루기도 했는데, 확실히 가까운 유대감을 느끼긴 하는 것 같다. 여담으로 유시민은 심상정과 서울대 동문인데 심상정 왈 맨날 여자애들 모이는 곳에 와서 수다떨었다고.(...) 유시민 왈 당연히 꼬시려고 갔지
  • 클로저스 티나 성우 교체 논란 관련하여 정의당 하부위원회가 옹호 논평을 낸 사건에서, 이 논평의 철회문제에 대한 상무위원회 회의시 대부분의 위원들은 논평에 찬성하는 쪽이었으나, 노회찬 의원만이 강력히 철회를 주장해 정의당에서 철회공표를 하게 되었다고 허핑턴 포스트 기사에서 보도하였다. 다만 이에 대해 노 의원측은 철회 의견은 맞지만 당시 분위기는 보도내용과 다르다며 철회문제는 상무위 참가자들의 공감대가 있었기에 정해진 것이고 노회찬 의원은 다만 오늘의유머와 관계가 틀어진 데 대해서 아쉬움을 표현했을 뿐이라는 타 언론사의 보도가 나오기도 했다. 그리고 노회찬 의원만 강력하게 반박했다는 기사가 문제가 된 문예위 집행의원의 남편이 작성한 것으로 밝혀지면서 노회찬 의원의 발언이 정설로 굳어지고 있다. 어쨌든 노회찬의 의견은 논평 철회하자는 의견.
  • 그나마 심상정 당대표 및 여타 지도부들과 달리 메갈리아에 대한 정확한 상황인식을 하고 있었다는 평가가 있었다. 그러나 이후로 메갈리아 문제에 대해서 어중간한 중립을 선언하는 기사가 나오면서 # 노회찬도 동시에 욕을 먹는 상황.
  1. 또다른 의원은 같은 당원이기도 한 정의당 심상정 대표. 19대 국회에서 삼성 X파일 폭로 관련해 억울한 면이 있지만 노회찬 의원이 의원 자격을 박탈당한 적이 있기 때문에 깔끔한 3선은 심상정 의원이 유일하긴 하다.
  2. 당시에는 명문고 입시경쟁이 치열했기 때문에, 중학교 4학년은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었다.
  3. 그래서인지 현재 노회찬의 말투를 들어보면 거의 사투리가 사라져 있다.
  4. 1970년대까지는 고등학생들이 반체제 투쟁에 참여하는 일이 많았다. 이 당시에는 데모하다 학교를 잘려서 검정고시 쳐서 대학에 진학한 케이스도 심심찮게 찾아볼 수 있다.
  5. 노회찬 의원이 이런 운동에 참여하게 된 계기를 모 TV프로에서 직접 얘기한 적이 있는데, 본인이 교과서에서 배운 내용과 현실 사이의 괴리감에 의문점을 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알고보면 교과서에 충실한 모범생
  6. 70년대에는 전태일의 분신자살로 큰 충격을 받은 지식인들이 자신들의 지위를 내던지고 용접이나 선반공 자격증을 따서 현장에 들어가는 경우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이를 '학생 출신'이라 하여 '학출'이라 불렀다. 여담으로 이쪽에서 전설적인 인물이 바로 지금은 노동자 인권은 커녕 도지삽니다(...) 사건으로 일명 꼰대로 낙인찍혀버린 김문수였다.
  7. 현재 존재하는 민중정치연합과는 다른 또다른 PD계열의 단체이다. 후일 민노당의 초기 건설에 추축이 된다
  8. 현재는 새누리당에 있는 정태근, 그리고 국민의당에 속한 김성식도 이 정당 출신이다. '제3의 정치세력'을 표방했지만, 진보정당이라기보다는 현재 국민의당과 가까운 정치성향을 가지고 있는 정당이었다. 이들은 이회창 총리를 대통령 후보로 내세우겠다는 포부를 밝혔으나 실패. 그 뒤로 각자의 길을 걸어갔다.
  9. 비례대표 8번이었다. 그리고 자민련의 비례 득표율이 0.2%만 높았어도 그는 낙선이었다. 참고로 0.2%가 모자라 낙선한 자민련의 비례대표 1번은 김종필.(...) 참고로 이때 충격먹은 김종필은 정계은퇴한다. 반3김을 어떻게 이루긴 했다.
  10. 당시 한나라당 오세훈 시장이 민주당 한명숙 후보를 불과 0.6%차로 이겼는데, 노회찬이 가져간 표가 3%대였다. 물론 이 3%는 진보정당쪽 고정지지층의 성격이 강했고 진보정당 지지자도 한명숙쪽으로 몰표를 한 사람이 많기 때문에 실제 노회찬 표는 더 많았을 것으로 보인다. 당시 노회찬 의원은 '내가 투명인간이냐?'면서 불편한 심정을 토로하기도 했다. 선거제도 못고치면 소수정당은 희망이 없다.
  11. 당시 노회찬은 노원병에 출마했는데, 한나라당 홍정욱 후보와의 표차가 2000여표였던 반면 민주당 후보가 가져간 표만 13000여표였다.(...) 참고로 이 때 민주당 후보는 2년 후 노원구청장에 출마해 당선되었고 그 다음 선거에서도 재선에 성공한 김성환.
  12. 결론적으로는, 노후보 대신 더민주의 이동학 예비후보가 나와 3파전이 되었다. 정의당에서는 주희준 후보가 예비등록을 하긴 하였으나, 당선가능성은 굉장히 낮았다.
  13. 참고로 이시기 노회찬 의원은 범야권후보면서 자기 지역구에 출마한 안철수 의원에게 섭섭함을 토로하기도 했으나, 이후 원내대표가 되면서 안 의원과 일부 정책연대도 하는걸 보면 어느 정도는 섭섭함을 털어버린 것 같다.
  14. (구)통합진보당, (현)무소속. 19대 총선에는 48%로 석패하였다.
  15. 전임자 정몽준 서울특별시장 선거 출마
  16. 경상남도 창원시 성산구에 출마하면서 박근혜 대통령의 공약을 잘 실천하겠다는 의미에서 스스로를 진박이라 표현해 지지자들에게 큰 웃음을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