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회 전국동시지방선거

대한민국 전국동시지방선거
1995년 6월 27일1998년 6월 4일2002년 6월 1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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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998년 6월 4일 치러진 한국전국동시지방선거. 투표율은 52.7%로 1991년 지방선거의 기록을 경신하며 가장 낮은 수준을 기록하였다. 다만 이 기록은 2002년 지방선거와 2008년 총선에서 깨졌다.

참고로 1960년 지방선거 광역자치단체장 선거에서 이미 38.8%의 투표율을 기록하긴 했지만,[1] 1960년 지방선거는 동시지방선거가 아니었고, 게다가 이 선거에서 당선된 사람들은 고작 취임 4개월 후에 5.16 군사정변으로 모두 직을 잃었다.(...) 또 1960년 지방선거는 광역단체장만 38.8%였고 나머지 선거 투표율은 70%를 넘나들었다. 심지어 읍면동장 선거에서도 투표율이 60%를 넘었다. 따라서 이 선거는 최저 투표율이라고 할 수 없고, 사상 최저투표율은 2008년 제18대 국회의원 선거의 46.1%가 공인된 기록이다.

2 상세

김대중 정부 임기 초반에 열린 허니문선거[2]였고 실제로 새정치국민회의자유민주연합은 연합공천을 통해 광역 단체장 16곳 중 10곳을 확보했고 한나라당은 6곳(영남5곳+강원도)을 확보하는데 그쳤다. 그야말로 집권한 DJP 연합의 위력과시라고 볼 수 있는 선거였는데, 지도상으로는 동서가 갈렸지만 실상은 한나라당이 수도권을 포함한 서부벨트 전역을 넘겨준 것.

수도권은 여당이 석권했는데 국민회의가 서울 고건, 경기 임창렬을 당선시켰고 자민련이 인천에서 현역인 최기선 시장을 내세워 승리했다. 한나라당에서는 서울에 최병렬, 경기에 손학규, 인천에 안상수를 공천하여 DJ의 초반 실책을 견제해달라는 구호를 외쳤으나 여당이 나라를 망쳐놓은 한나라당이라는 구호 하나로 50%대의 득표에 힘입어 완승.

국민회의 서울시장 후보 공천 과정에서 잡음이 좀 있었는데 당초에는 DJ의 최측근이었던 한광옥, 그리고 DJ를 비판하며 통합민주당에 남았다가 대선 직전 새정치국민회의에 합류한 노무현 두 부총재의 경선이 유력했다. 그러나 김대중 대통령은 차기 대권으로 가는 지름길이나 마찬가지인 서울특별시장 자리에 정치인을 앉혀서 집권 초기부터 차기 대권주자를 급부상시키는 그림을 원치 않았고 두 후보의 지지율도 필승 수준이 아니었다. 그 결과 정치인이 아닌 행정가 고건 후보가 공천되었다.[3][4] 여담으로 한광옥, 노무현 두 부총재는 서울시장의 꿈을 접은 대신 국회의원 재보선에 공천되어 당선되는 형태로 보상을 받았는데 노무현은 1998년 7.21 재보선 서울 종로에서 당선되어 마침내 6년 만의 국회 복귀에 성공했고, 한광옥은 이듬해인 1999년 3월 재보선 서울 구로 을에서 당선된 뒤 그 해 12월 청와대 대통령비서실장 자리에까지 오른다.

인천과 경기는 더 복잡하게 돌아갔다. 한나라당을 탈당한 최기선 인천시장은 당초 국민회의행을 염두에 두고 있었고 김대중 역시 상도동계[5]인 최 시장을 영입함으로써 유용한 선거구호로 활용할 것을 기대하고 있었다.제2의 민추협 뭐 이런 거 대신 임창열 전 전 부총리가 자민련 공천을 받아 경기지사에 출마하는 것으로 양 여당 간 합의가 이루어졌으나 자민련의 김종필 총재가 돌연 임창열을 받지 않고 최기선을 줄 것을 요구하면서 진통을 겪은 끝에 최기선의 자민련행 및 임창열의 국민회의행을 교통정리가 되었다. 임 전 부총리는 1년전 대선정국 당시도 국민회의 입당설이 있었던 터라 국민회의행이 순탄했지만 다만 JP에게 공개디스당하며 체면을 구겼을 뿐 최 시장의 경우 이념이 안 맞는 당에 가려니 난처하다, 탈당한 명분이 퇴색되었다며 공개적으로 불만을 표시할 정도였다.[6] 그러나 결과는 두 후보 다 당선. 서울과 마찬가지로 IMF 사태에 대한 한나라당의 책임론이 여당 견제론을 압도한 덕분이었다.

충청 전역은 자민련의 득표가 70%를 넘겼으며 특히 충남의 심대평 지사는 84.6%를 득표하며 재선했다. 한나라당은 충남과 충북에서 각각 15%, 25% 득표율에 그치며 크게 패했을 뿐 아니라 대전에서는 아예 후보조차 내지 못했다. 이재환국회의원이 공천을 신청했고 당에서도 공천을 승인했으나 이 분이 정작 공천이 확정된 후에 어익후 이거 선거 나가봤자 털리겠네염이라며 공천신청을 철회한 것(...). 결국 한나라당은 호남도 아닌 대전에서 후보를 내지 못하는 굴욕을 겪는다. 그러나 이 때 2위를 기록한 국민신당 송천영 후보의 득표율을 감안하면...

한나라당은 부산시장마저 경선을 거부하고 탈당한 무소속 김기재 후보(전 시장, 43.45% 득표)에게 넘겨줄뻔 했지만 투표율 저조와 막판 바람몰이로 간신히 부산시장 자리를 지켰다. 김 후보가 탈당하자 한나라당측에서 경선의 구색을 맞추기 위해 허겁지겁 섭외해서 후보로 올려놓은 안상영 후보가 경선에서 문정수 당시 시장을 덜컥 이겨버리는 바람에[7] 본선경쟁력에 대해 의구심이 컸고, 당시 투표자 조사 결과에선 김기재가 근소한 차이로 1위로 나왔고 개표 초반 김기재 후보에게 부산시장 자리가 넘어갈 듯 했으나 중반을 넘어가면서 앞서 나가기 시작한 안상영 후보가 45.14%를 득표하며 20,926표 차(1.7%)로 당선되었다. 국민회의 하일민 후보의 득표율이 11%(14만표)에 달한게 매우 컸다. 여권에서는 후보를 내지 말고 김기재 후보를 지원하자는 얘기가 나왔으나, 오히려 역풍이 불어 한나라당 지지표의 결집이 우려되었고, 설령 김기재 후보가 당선된다 해도 한나라당으로 복당할 가능성이 대단히 높았기 때문에 부산대학교 교수였던 하일민 후보를 공천한 것.[8] 그런데 생각보다 부산광역시에서 야당표가 많이 나오면서 결과적으로는 한나라당이 이기게 되었다. 한편으로 이 선거에서의 안상영 후보의 득표율 45.1%는 현재까지 부산시장 당선자 가운데서 가장 낮은 득표율이다.

강원도지사의 경우는 새정치국민회의와 자유민주연합의 갈등과 옛 민자당의 민주계 출신으로 국민회의에 넘어와 국민회의 간판으로 출마를 준비하다 연합공천에 반발하며 무소속으로 출마한 이상룡 후보(전 노동부 장관)의 표 갈라먹기로 한나라당에게 넘어갔다. (김진선 39.27%, 자민련 한호선 33.84%, 이상룡 26.87%) 덕분에 한나라당은 "영남당"의 수모는 씻고 체면치례는 했다. 국민회의의 세력이 약한 강원도에서 어느 한 쪽을 밀기도 난처했던 정부 여당의 행보가 낳은 결과.

광역시로 승격된 울산광역시에서는 심완구 시장이 힘겨운(!) 재선을 했다.[9] 국민회의가 출마하지 않았는데도 무소속 송철호 후보가 무려 15만표(39.44%)에 육박하는 표를 얻어 심완구 후보의 16만표(42.74%)를 몰아세운 것. 물론 보수정당인 자민련과 국민신당이 출마하여 각각 7.91%, 9.89%를 득표해서 표 분열을 일으킨 탓이 컸지만, 거꾸로 말해 당시 연립여당이던 자민련이 반한나라당 기치를 내걸고 송철호 후보를 몰아줬다면 결과를 장담할 수 없었다. 여담으로 통일민주당 출신이던 심완구 시장은 이후 무슨 심정의 변화가 생겼는지 1998년 9월 최고위원을 지내던 한나라당을 탈당하여 새정치국민회의로 들어가버렸고, 이후 7년 임기를 마치고 다시 출마하지 않았다. 그리고 한참 지난 2014년 상반기 재보궐선거에서 심완구 전 시장은 이 2대지방선거에서 대결한 송철호 후보가 울산광역시 남구 을 선거구에 무소속으로 출마하자 선거운동을 지원해주기도 했다.

포항시에서도 한나라당 정장석 후보가 여야 1:1 대결에서 51.48%로 당선되었으나 제1회 지방선거에서 민주당으로 당선되었던 자민련 박기환 시장이 48.5%를 득표하는 등의 박빙승부(6천표 차)가 벌어졌다.[10]

제주도의 경우 숙명의 라이벌 관계인 신구범 당시 도지사와 우근민 전 관선지사가 동시에 국민회의에 입당하면서 경선에서 헬게이트가 열렸다. 결국 신구범 도지사가 경선패배에 불복하고 무소속으로 출마했으나 우근민 후보에게 30.7% 대 52.7%로 낙선했다. 나머지는 한나라당 현임종 후보가 차지.

특이하게도 전북지사와 전남지사는 국민회의 후보가 단독 출마해서 당선되었는데 이유는 한나라당에서 후보를 낼 엄두를 못냈기 때문.(...) 다만 유효득표율은 이들 지역이 김대중 대통령에게 압도적으로 지지를 보낸 것에 비하면 상당히(?) 낮은 편이기는 했다. (전라북도: 93.6%, 전라남도: 88.1%)

후에 경북 지사가 되는 구미시 시장 김관용 후보도 무투표 당선(실득표 90.4%). 청도군, 고령군, 칠곡군도 무투표 당선이며 흥미롭게도 문경시에서는 자민련 김학문 후보가 무투표 당선되었다(실득표 88.1%).

3 개표방송


당시 SBS 개표방송. 방송시간은 밤 12시 너머로 추정된다.

위에도 언급했듯이 이 당시 역대 최저 투표율을 기록했던 선거임을 미리 예견했는지 몰라도, MBC와 SBS는 무성의한 개표방송 편성으로 욕을 먹었다. 특히 MBC는 개표가 시작할 즈음인 저녁 7시에 당시 잠실에서 열린 1998 프랑스 월드컵 축구대표팀의 출정식 경기인 중국과의 평가전을 생중계했다. 자세한 내용은 항목 참조. 당시 축구협회에서는 개표방송을 의식해서 경기를 오후 3시로 당겨 여는거 어떻겠냐고 웬일로 제안했으나, MBC에서 거부를 때렸다고.
  1. 투표날에 한파가 밀어닥친게 원인이라고 한다.
  2. 정권 취임 극초기에 열려서 대선의 여운이 아직 남아있어 표심에 작용한 선거를 일컫는 정치용어.
  3. 이 때 두 당사자는 극명히 엇갈리면서도 상당히 이례적인 모습을 보여줬는데, DJ의 가신 한광옥은 매우 격하게 반발한 반면 김대중에게 매우 비판적인 모습을 보였던 노무현은 덤덤하게 출마를 포기한 것.
  4. 노무현과 김대중이 가까워지게 된 것도 이 무렵이라는 것이 정설이다. 서울특별시장 경선이 무산된 뒤 당직자들과의 회의 때 "정치는 노무현 부총재처럼 해야 한다."는 말을 했으며 이후 해양수산부 장관에도 임명하는 등 훗날 노무현의 대통령 당선에 작은 씨앗을 심어주게 된다. 참여정부 출범 이후 대북송금 불법 논란으로 다소 관계가 어정쩡하긴 했지만 2004년 제1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자신의 후광을 간절히 바라던 새천년민주당을 외면하고 사실상 열린우리당에 힘을 실어주면서 사실상 노무현을 계속 지지해줬다. 그 결과 새천년민주당은 전남에서 간신히 5석을 얻었고 광주와 전북은 죄다 열린우리당에 넘어갔다. 이후 노무현의 사망 때는 "내 몸의 절반이 무너져 내린 심정이다."라는 말을 하기도.
  5. 원래 최기선은 정계 입문 당시 김대중을 따르려고 하였으나 부인의 권유로 김영삼계 정치인이 되었다.
  6. 결국 2002년 선거를 앞두고 자민련을 탈당했으며 불법자금 수수 논란까지 겪는 바람에 3선 도전을 포기한다. 이후에는 2006년 선거에서 열린우리당 간판으로 인천시장에 출마했다가 낙선하여 사실상 정계에서 은퇴했지만 2010년과 2014년 선거에서는 송영길 후보를 적극 지원하는 등, 민주당 계열과 인연을 맺고 있다.
  7. 문 시장이 한보그룹 사건 관련해서 비리혐의가 얽혀 있었던 게 치명적으로 작용했다.
  8. 아이러니하게도 선거 이후 김기재 후보는 정식으로 국민회의에 입당하여 행정자치부 장관과 새천년민주당 비례대표 의원 및 최고위원을 지내게 된다. 2002년 대선 때는 이인제 캠프에 참여하여 상대편인 노무현 후보를 사사건건 흔들었으나, 이후 후보단일화가 성사되자 부산지역 선대본부장을 맡아 노무현을 적극 지원한다.
  9. 3년 전인 1995년 선거에서 여권 후보 3강 구도(심완구, 고원준, 김명규)에서도 30% : 22%로 민주당 이규정 후보를 여유롭게 꺾었던 것과 비교하면 큰 반전이었다.
  10. 이 당시에 포항 지역의 민주당 출신 정치인들이 1995년의 새정치국민회의 분당 사태로 돌고 돌아 자민련으로 입당했다. 박태준 회장이 자민련에 있는 등 포항 지역의 당시 분위기가 자민련에 우호적이었던 영향도 있다. 지금 포항에서 이름 있는 야권 정치인 치고 자민련 당적이 없었던 사람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