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lliam Marshal
1146년 혹은 1147년 ~ 1219년 5월 14일
1 소개
누구보다 위대했던 기사ㅡ 스티븐 랭턴
유럽의 기사였으며 역사상 최고의 기사로 평가 받는 인물.
2 생애
그의 아버지는 앵글로-노르만 기사중 한명이었던 존 마샬로 군사적으로는 높은 지위에 오른 사람이었다. 당시 영국은 혼돈의 시기였다. 헨리 1세는 자신의 딸인 마틸다를 왕세우려 했고, 사후에 마틸다를 후계자로 임명했다. 그러나 스티븐이 마틸다가 잠시 해외로 떠난 사이 통수낼름 왕위에 오르게 되었는데, 이를 알게된 마틸다는 분노해서 남편의 군사들을 빌려 그녀의 이복동생이었던 글로스터 백작과 함께 스티븐과 내전을 시작하게 되었다. 존 마샬은 내전 초기에는 스티븐의 편에 서서 싸웠으나 이내 마틸다의 편에 서서 싸웠고 이 사실을 알게된 스티븐이 분노해 존 마샬의 둘째 부인의 어린 아들을 인질로 잡고, 투석기 위에 올려놓은 후 성 밖에 있던 존 마샬을 보고 죽이겠다고 협박했다. 이때 존 마샬은 "나에겐 망치와 모루가 있고, 나는 아직도 더 좋은 아들을 제조할 수 있다."라는 말을 했고 이 말을 들은 스티븐은 어이가 없던지 어린 아이를 살려주었는데 이 아이가 바로 윌리엄 마샬이다. 태어난 해는 1146년 혹은 1147년으로 추정되는데 정확한 년도는 알지 못한다.
이후 윌리엄은 노르망디에 위치한 그의 삼촌의 가문으로 들어가 기사 수업을 받게 되었다. 그가 20살이 되던해, 마상 창시합에 출전했는데 대회에서 삼촌이 사망하고, 마샬은 기 드 뤼지냥의 포로가 되는 지경에 이르렀다. 당시 중세는 포로가 된 기사는 선택지가 두 가지였다. 거액의 돈을 주고 풀려나든지, 죽든지.[1]. 하지만 아버지는 자신에게 관심이 없었고, 삼촌은 죽었고 돈은 없던 윌리엄은 죽음밖에 선택할 수밖에 없었는데, 이때 리처드 1세의 어머니로 유명한 아키텐의 엘레에노르가 그를 토너먼트에서 한차례 우승을 한 경력이 있다는 이유로 포로 교환금을 대신 지불했고, 겨우 살아난 윌리엄은 기사로서 자신의 이름을 알리게 된다.
이후 마상 창시합에 나갔을 당시, 승리를 밥먹듯이 했으며 그가 경기에서 이긴 기사들이 500명이 넘는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고 기사계의 전설로써 이름을 알렸다. 이러한 실력에 헨리 2세의 장남이었던 청년왕 헨리[2]가 그에게 기사장 자리를 주었고, 이후 청년왕 헨리가 아버지에 대항한 반란을 일으키자 윌리엄은 그를 따라 싸웠다. 그러나 헨리가 반란 도중 사망하고 주군을 잃은 기사가 되어버린 그는 십자군 전쟁에 참여하기로 결심하고 성전기사단에 합류하게 된다. 십자군 원정 후, 한동안 자유롭게 살아가던 그는 헨리 2세가 귀족의 딸인 이사벨 드 클리어(Isabel de Clare)와의 결혼을 주선해주며 자신에게 충성을 다하라고 하자 헨리 2세를 섬기게 된다. 그러나 헨리 2세는 그를 이용할 목적이었는데 이사벨과 결혼한후 이사벨을 악명높은 런던탑에 가둬놓고 그를 조종했던 것이다. 헨리 2세의 충복으로 활약하며 리처드의 반란에서도 맹 활약 하였고 승리를 거두기도 했다.
그러나 헨리 2세가 홧병으로 사망하고 리처드 1세가 왕위에 오르게 되었고, 리처드 1세는 자신의 심복으로 삼기 위해 런던탑에 갇혀 있던 17살(!!!)의 이사벨과 43살의 윌리엄을 결혼시켜주며 영지 몇 개를 하사해 주었다. 이후 리처드 1세의 동생이었던 존이 리처드가 십자군 원정에 간 사이 통수를 치자 존을 지지해주었고, 이후 마그나 카르타 당시에도 존 왕에게 영지를 뺏기고 자식들이 인질로 잡혔음에도 존 왕의 편에 서서 반대파들을 개발살내버리기도 했다. 이런 충성스런 모습에 존 왕은 사망하며 아직 9살밖에 되지 않은 자신의 후계자를 잘 돌봐 달라며 부탁했고, 윌리엄은 왕의 섭정으로 활약하게 되었다.
1217년 마샬은 프랑스의 루이 왕자와 맞붙은 링컨 전투와 샌드위치 해전에서도 직접 진두에 서서 지휘하며 승리를 거두는 등 군사적 재능을 발휘했고, 마그나 카르타를 수정해서 다시 발행해 존 왕에게 반기를 들었던 봉신들에게도 환영의 표시를 받기도 했다.
이후 1219년에 사망했으며, 성전기사단의 영국본부인 템플 교회에 묻혔다.
3 리처드 1세와의 대결
정말 유명한 일화중 하나로 리처드 1세와의 대결이 있었다. 다만 이와 관련되어서 국내에는 "리처드 1세가 윌리엄 마샬에게 졌대"라는 단편적인 내용만 알려져 있지 상세한 내용은 알려져 있지 않다.
리처드의 힘을 약화시키려던 아버지의 정책에 분노한 리처드가 1187년경 반기를 들어 스스로 왕이 되려할때, 헨리는 그의 계승을 인정하지 않았고, 이후 프랑스왕 필리프 2세와 연대한 리처드 1세가 헨리 2세 베리령의 성을 포위하였을때, 헨리 2세가 윌리엄 마샬을 불러 가세할것을 명하였다. 그리고 1189년, 헨리 2세의 마지막 농성지가 된 르망(Le Mans) 외곽에서 윌리엄 마샬은 리처드를 붙잡았다고 한다(거의 죽일뻔하였다 라는 표현도 있다.). 이때 윌리엄에게 리처드가 목숨을 구명해달라 요청하였고 윌리엄은 대신 그의 말을 랜스로 찔렀다고 한다.[3]
이후 그는 그의 말을 찌른것을 사과하지 않았지만, 리처드 1세는 그에게 헨리 2세가 약속한 약혼녀 이사벨을 내어주었다 한다.[4] 이후, 둘 간의 정식 대결은 이루어 지지 않았고, 리처드 1세는 이후 이단의 땅으로 건너가 사자심왕으로 거듭났다.
허나 여기엔 약간 의문스러운 점이 있는데, 첫째로 이 글에서도 그는 경계하지 못한 상태에서의 기습에 당한것으로 되어있다. 정식으로 준비되어 있는, 우리가 흔히 연상하는 전투에서의 패배가 아닌것으로 보인다. 또한, 윌리엄 마샬 연대기의 본문에서도 리처드가 '완전한 무구를 갖추지 못한 나를 죽이는 것은 사악한 행동이 될 것'이라고 말하여, 윌리엄이 ‘그럼 악마가 그대를 대신 죽이게 하리’ 하며 그의 말을 찌른것으로 되어있다.
종합해보면, 당시 리처드는 경계하지 않고있던 상황에서의 공격을 당한데다 갑옷과 무기를 갖추지 않은 비무장 상태였다는 것이다. 뭐임? 아리랑치기? 그리고 당시의 수준에서의 개인 연대기면 굉장히 본인에게 유리하게 기록되어 있을 가능성이 크다. 동양권에서 유명인이 죽으면 쓰는 행장이나, 문중 후손들에 의해 작성된 족보가 사료 가치가 적은 것과 일맥상통하는 것처럼 말이다.
4 트리비아
- 그의 아들이었던 3남 길버트 마샬(Gilbert Marshal)도 기사였는데 1241년, 마상 창시합에서 말발굽에 밟혀 47세 나이에 죽었다. 그의 무덤은 그의 아버지 무덤 바로 옆에 묻혀있다.
- 결혼할 때 당대 기준으로 이미 노년에 접어든 나이(43세)여서, 많은 사람들은 17세의 신부가 곧 과부가 될 것으로 예상했다. 그러나 윌리엄은 30년을 더 살았고, 성관계도 열정적이었는지 둘 사이에서 총 10명의 자녀를 두었다. 그러나 직계 손주는 손녀 1명 뿐, 손자를 갖지 못해 13세기에 이미 그의 직계 후손은 끊겼다.
- 리들리 스콧 감독의 영화 로빈 후드에서도 마그나 카르타와 관련해 나름 비중을 가진 충신으로 등장한다. 배역을 맡은 배우는 윌리엄 허트.[5]
- ↑ 충성의 서약을 자신을 사로잡은 이에게 할수 있었지만 당시 분위기에서는 거의 일어나지 않았다.
- ↑ 헨리 2세와 공동 국왕이었다.
- ↑ 출처 : 외국 인터넷 기사 William Marshal - The Flower of Chivary
- ↑ 말을 박탈당한다거나 하는 것은 당시 기사에게 있어선 커다란 손실이었다. 경제력이 떨어지는 기사라면 자신의 신분자체에 변동이 생길 정도의 일이다. 영국을 제외한 대부분의 국가에서 기사를 칭하는 단어가 뭔가에 탄 자라는 어원에서 나온다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 ↑ 인크레더블 헐크의 썬더볼트 로스 장군 역을 맡은 그 배우 맞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