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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골든 보이[1]
이름 | 윌프레드 제임스 마니온 (Wilfred James Mannion) |
생년월일 | 1918년 5월 16일 |
사망년월일 | 2000년 4월 14일 |
국적 | 잉글랜드 |
출신지 | 사우스뱅크 |
포지션 | 인사이드 포워드 |
신체조건 | 165cm / 68kg |
등번호 | 10 |
소속팀 | 미들즈브러 FC (1936-1954) 헐 시티 AFC (1954-1956) 캠브리지 유나이티드 (1956-1958) |
국가대표 | 26경기 / 11골 (1946-1951) |
1 생애
1.1 어린 시절
윌프 마니온은 미들즈브러의 사우스뱅크에서 태어났다. 마니온의 부모는 아일랜드 출신의 이민자였고 슬하에 10남매를 두었다. 당시 잉글랜드의 여느 아이들과 마찬가지로 마니온은 축구에 관심을 보였고 동네 정육점에서 얻은 돼지 오줌보로 만든 공을 가지고 놀았다.[2]
그 시대의 우리는 뭐든 갖고 축구를 했었죠 깡통, 신문지 공, 정육점 아저씨에게 얻은 돼지 오줌보든요. 만약 그것들을 컨트롤 할 수 있다면 붉은 천재라 불리었겠죠
- 윌프 마니온
13살 때에 마니온은 축구팀의 테스트에 응시했지만 키가 작다는 이유로 불합격하였다. 당시 그의 키는 128cm에 불과했다. 키컸으면 그래서 사우스뱅크 세인트 피터스 팀에서 뛰면서 용접 견습공으로 일하며 용돈을 벌었다.
1.2 클럽
18살이 되던 1936년, 마니온은 지역 팀 미들즈브러와 주급 3파운드에 리저브 팀 계약을 체결했고 그 곳에서 빼어난 기술로 사람들의 눈을 사로잡았다. 첫 시즌에는 두 경기 출전에 그쳤지만 다음 시즌부터는 인사이드 라이트 포지션에서 고정멤버로 출전하기 시작하였다. 미들즈브러는 마니온의 활약에도 불구하고 두 시즌 동안 우승에는 실패했다. 1938-39 시즌에는 14골을 넣었지만 4위에 그쳤다. 마니온은 팀의 더 좋은 성적을 위해 신발끈을 조였지만... 전쟁이 터졌다.
마니온은 처음에는 프랑스와 이탈리아의 전선에 투입되었지만 포탄 쇼크로 인해 이후에는 전선에 직접 투입되지는 않았고, 말라리아로 인해 군병원에서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전후에는 인사이드 레프트로 포지션을 바꾸었다. 여기에서 그는 기량이 더욱 꽃피는데 1947년 블랙풀 FC와의 시합에서는 4대 0 승리를 거둘 때 4골에 모두 관여하는 대활약을 펼치기도 하였다. 이 시합은 지금까지도 마니온 매치라 불린다.
1940년대의 미들즈브러는 더 나은 성적을 거두기 위해 고군분투했지만 마니온은 점점 좌절에 빠져들었다. 그 이유는 주급. 당시 잉글랜드 축구 선수들의 주급 상한선은 12파운드였는데 게다가 1부 리그 선수들은 투잡도 금지되었다. 때문에 3부 리그 팀으로의 이적을 진지하게 고민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 시대는 구단이 슈퍼갑. 미들즈브러는 마니온의 이적을 허용치 않았다. 마니온을 보유하고 싶은 자. 5만 파운드를 내놓아라! 왜 영국 최고의 선수를 보내야하지 이에 마니온은 새로운 계약의 체결을 거부하고 몇 달간 파업으로 응했지만 오히려 손해를 보는건 마니온쪽이었다. 결국 1948-49 시즌 후반기에 돌아와 팀의 강등을 막아냈다.
하지만 이것은 미봉책에 불과했다. 결국 마니온은 팀과의 갈등을 해소하지 못하고 1954년 2부 리그의 헐 시티로 이적하였다. 하지만 여기에서도 마니온은 16경기밖에 뛰지 못하였는데 논란의 여지가 있다. 마니온이 신문에 기고한 글이 문제가 되었는데 축구계에 부정부패가 심하고 익명의 모 구단이 그에게 불법적으로 3천 파운드의 돈을 제공하려 했다는 것. 그리고 15,000파운드로 유벤투스 FC가 미들즈브러에 계약을 제의했다고도 한다. 리그 측에서는 이 소식에 대한 반응으로 마니온을 부정 선수로 규정, 출전 자격을 박탈하였다. 나중에 풀리기는 했지만 이로 인해 다시는 마니온의 모습을 2부 리그에서 볼 수 없었다. 이로 인해 마니온은 선수 생활의 마지막을 캠브리지 유나이티드에서 선수 겸 감독으로 보냈다.
1.3 국가대표
미들즈브러에서의 활약을 바탕으로 잉글랜드 국가대표팀에 선발된 마니온은 톰 피니와 같이 데뷔전을 치렀다. 여기에서 마니온은 해트 트릭을 기록하였고, 스탠리 매튜스와 톰 피니라는 전설적인 양 날개와 함께하는 그와 잉글랜드 대표팀의 미래는 장밋빛인 듯 했다. 하지만, 상술한 미들즈브러에서의 파업으로 인해 국가대표팀에서 자리를 잃었다가 나중에 찾았다. 1950년 브라질 월드컵에 참가하여 첫 경기 칠레전에서 쐐기골을 넣는 활약을 했다. 다음 경기인 미국전에 선발 출전했지만 결과는 역사에 남을 굴욕이었다. 최종전인 스페인전에서는 그의 이름이 없었고 1951년 10월이 그의 마지막 국가대표팀에서의 시합이었다.
1.4 은퇴 이후
그는 풋볼 리그에서 감독 생활을 하기 원했지만 어느 팀도 그에게 자리를 제의하지 않았고 그렇게 축구계를 떠났다. 그 후에는 술집 경영, 자동차 공장, 건설 현장 등 여러 직업을 전전했다. 축구계에 복귀하고 싶어서 코치 수업을 받았지만 역시 어떤 팀에서도 그에게 제의를 하지 않았고, 나중에는 그의 물건까지 팔아야 할 지경에 이르렀다. 그 시대의 다른 동료들과 마찬가지로 은퇴 후에 꽤 어려운 삶을 살았지만 전 소속팀 미들즈브러와의 사이는 나중에 회복되어 동상을 세우고 그를 위한 자선경기를 열어주는 등 여러모로 대우해주었다.
2 플레이 스타일&평가
볼을 다루는 기술이 뛰어난 인사이드 포워드. 비록 165cm로 키가 작았지만 상대 수비수의 무지막지한 태클에도 잘 버텼다. 또한 게임 리딩 능력이 뛰어나 적재적소에 위치하고 공을 뿌렸다. 2009년엔 골닷컴 선정 역대 잉글랜드 선수 40위에 랭크되었다. 그리고 골닷컴의 평가는 50년 늦게 태어났으면 원하는 대우를 받았을 선수. 전설적인 감독 매트 버스비 경 역시 그를 원더 보이로 칭했다.
마니온은 경이로웠다. 나는 그와 같이 감질나게 플레이하는 선수를 본 적이 없다.
- 지미 시드
윌프는 신나게 게임을 즐겼다. 그는 확실히 상대 수비를 혼란시켰다. 항상 동료가 골을 넣기 쉽게 짧은 패스를 넣어주고 계획을 짜는 것, 그것이 전형적인 마니온의 모습이었다.
- 빌리 스틸(마니온의 게임을 보고 평을 남긴 스코틀랜드 출신 인사이드 포워드)
게임에서 그것은 내가 플레이했던 최고의 포워드진이었다. 그들은 정말 기술적이었고 경이로운 선수들이었다. 스타일리쉬하고 우아하고 품위 있는. 공과 함께 절묘한 솜씨를 보여준 모차르트와 같다.
- 스탠리 매튜스
의심의 여지가 없다. 윌프는 천재였다. 축구 선수로서 코칭이 필요 없을 정도의 두뇌를 가지고 있었다. 그는 그의 생각 안에서 쾌활했다. 당신이 오랜 시간 축구를 알았다면, 그가 공과 함께하며 보내온 모든 시간을 안다면 재능이 거기 있었고, 욕망과 자신감이 함께 한다는 것을 알 것이다. 그는 적재적소에 공을 뿌렸다
- 토미 로튼
윌프 마니온은 일류고, 내가 평가하는 인사이드 포워드 중 최고의 왼쪽 파트너였다. 그는 텔레파시를 가르쳤는지도 모르겠고, 알맞은 속도와 알맞은 각도로 당신에게 볼을 공급하는 초자연적인 기교를 가지고 있었다
- 톰 피니
현대 축구에서 가장 위대한 축구 지능을 가지고 있다... 노련한 전략가로서 클래스가 있었다
- 알프 램지
윌프는 프레드 아스테어[3]가 춤추는 방식으로 축구를 한다
- 브라이언 클러프
3 수상
3.1 개인
- 잉글랜드 축구 명예의 전당 헌액: 20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