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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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olfgang Amadeus Mozar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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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 가장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는 모차르트의 초상화. 모차르트 사후인 1819년에 바바라 크라프트(Barbara Krafft) 가 그렸다.

오른쪽: 요제프 랑에가 그린, 죽기 한두 해 전의 모차르트를 그린 미완성 초상화. 그는 모차르트가 사랑했었던 알로이지아 베버의 남편이자, 또 모차르트의 아내 콘스탄체의 형부이기도 하다. 콘스탄체는 이 그림이 남편과 가장 흡사하게 그려졌다고 평가했다. 모차르트의 원래 머리카락은 적갈색이며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깔끔한 백발은 다 가발이다.[1]

▲ 아이네 클라이네 나흐트무지크(Eine Kleine Nachtmusik) K.525. 일종의 현악을 위한 디베르티멘토이다. 콘체르트게보우 카메로케스트(Concertgebouw Kamerorkest) 연주. 이 곡은 전 악장이 모두 전설은 아니고 레전드 급으로 유명하다. 특히 3악장은 코레일노선에서 환승 할 수 있는 역 진입시 음악으로 수도없이 쓰였다. 그 유명한 삼천원

1 이름 및 짧은 소개

음악의 신동(神童)

바흐, 베토벤과 함께 음악史에서 가장 위대한 음악가 중 하나

세계 역사상 최고의 천재 음악가이자 작곡가 중 한사람

고전 음악 작곡가. 1756년 1월 27일 오스트리아잘츠부르크에서 출생, 1791년 12월 5일 에서 사망. 잘츠부르크는 현재 오스트리아령이지만 모차르트가 태어났을 당시에는 엄밀히 말하면 오스트리아 소속이 아니었고 잘츠부르크의 가톨릭 대주교가 다스리고 있었다.

클래식을 몰라도 전 세계 모든 사람들은 모차르트베토벤은 알고 있을 것이다. 그 만큼 두 작곡가는 세기의 천재 작곡가들인데, 특히 모차르트는 세계 음악사에 영원히 기록될 음악의 천재다... 35년의 짧은 생애에도 불구하고 현존하는 작품 수만 무려 626곡에 이르는 곡을 남긴 굇수[2]이며 단순히 곡 수만 많은 것이 아니라 다수의 작품들이 음악성 측면에서 최고의 경지에 올라 있다(특히 오페라분야). 클래식 갤러리에선 모본좌로 칭하기도 한다. 모차르트의 곡들은 대부분 다 작품성과 음악성, 완성도가 최고의 경지에 이르렀다 찬사를 받으며, 어떠한 한 음도 수정할 수 없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곡의 완벽도가 다 최상의 경지에 이른다. 모든 사람이 제목은 모르지만 자신도 모르게 한번 이상은 들어봤을 매우 유명한 곡들이 많이 있다.

가끔 음악 관련 서적에선 '모르트'라고 적혀있기도 했으며, 1980년대만 해도 이 명칭이 더 흔하게 쓰였다. 그러나 독일어 외래어 표기법 상 z를 ㅊ로 전사(轉寫)하도록 되어 있고, 더욱이 된소리를 쓰지 않기 때문에 '모차르트'가 맞는 표현이다. 모차렐라 치즈와는 관계없다

세례명이자 풀네임으로는 요하네스 크리소스토무스 볼프강구스 테오필루스 모차르트(Johannes Chrysostomus Wolfgangus Theophilus Mozart). '요하네스 크뤼조스토무스'는 '황금의 입'으로 알려진 교부(敎父) 요한 크리소스토모이며, 그리스어 어원을 지닌 '테오필루스'는 대부의 이름을 따온 것이다. '볼프강'은 모차르트의 어머니가 살던 고향의 호수 이름(이면서 동시에 마을 이름이기도 하다.)에서 따온 것이고, '모차르트'는 motzen(남부 독일 방언: motschen)과 hart의 합성어인 '모츠하르트(Motzhardt)'의 변형으로, 뜻은 '험담하는 사람' 혹은 '조잡한 일을 하는 사람'(…). 음악은 조잡한 것입니다, 여러분!! 음악이나 하고 다니고!? [3]

미들네임인 아마데우스는 대부의 이름 테오필루스, 나아가 독일어인 고틀리프(Gottlieb)의 라틴어 표현으로, 뜻은 '신의 사랑을 받은 자'. 본인은 프랑스식 표현인 아마데(Amadé)를 즐겨 썼다.[4]

2 생애

2.1 어린 시절

7살의 모차르트. 화가는 미상.

음악가 및 바이올린 교육자인 요한 게오르크 레오폴트 모차르트(Johann Georg Leopold Mozart, 1719~1787)[5]와 아나 마리아 발부르가 모차르트(Anna Maria Walburga Mozart[6], 1720~1778) 사이에 태어난 3남 4녀 중 막내 아들이다. 형제는 5명이 모두 유아 시기 때 죽어버리고, 누나인 마리아 아나 발부르가 이그나티아 모차르트(Maria Anna Walburga Ignatia Mozart(통칭 난네를(Nannerl), 1751~1829)만 살아 있었다.
걸음마시절부터 누나 난네를이 아빠에게 음악을 배우는 것을 지켜보고 자랐으며 익히 알려진 대로 3세 때 클라비어 연주를 터득했고 다섯살 때 작곡을 시작했다. 음악을 배우는 속도가 너무 빠른 나머지 5살 많은 누나의 수준을 금세 뛰어넘어버렸고 동생에게 뒤쳐진 누나 난네를은 이를 몹시 속상해 했다고 한다. 한편으로 주변 사람들은 모차르트의 음악능력에 대한 레오폴트 모차르트의 말을 믿지 못해서 일부러 모차르트의 집에 찾아와서 어린 모차르트의 능력을 시험해 보고서야 비로소 믿었다고 한다.

어린시절 작곡된 그의 작품들은 대부분 모차르트가 즉흥적으로 연주하거나 흥얼거린 것을 부친이 악보로 옮겨놓은 것이다.

2.2 연주 여행

아버지인 레오폴트는 자기 아들의 음악적 재능을 보고 작곡을 그만둔 뒤 볼프강에게 피아노와 바이올린을 가르치는 데에 힘썼다. 그리고 아들의 출세를 위해[7] 모차르트의 나이 6살이 되던 1762년 모차르트와 그의 누이 난네를을 데리고 유럽 연주 여행길에 올랐으며 이후 10년 동안 모차르트는 유럽 각지를 여행하였다. 이 여행은 비록 모차르트의 출세라는 목적은 달성하지 못했지만 유럽 각지에서 유행하는 음악과 중요한 음악가들을 만날 수 있었기 때문에 모차르트의 음악인생에 큰 자산이 되었다.

첫 번째 여행에서 어린 모차르트는 뮌헨으로 가서 선제후 막시밀리안 3세 요제프 앞에서 연주를 선보였으며, 이어 오스트리아 빈에 있는 쇤부른 궁정을 방문해 마리아 테레자 여왕 앞에서 신기에 가까운 연주솜씨를 선보였고 다시 프라하를 방문하였다. 빈의 궁정에서 마리아 테레지아 여왕의 딸이자 비운의 여인이 된 마리 앙투아네트도 만났다고 하는데 이에 대해서는 아래 일화 항목을 참조.

이듬해에는 3년 반에 걸친 긴 2차 연주여행을 시작하는데 뮌헨, 만하임, 파리, 런던, 네덜란드(헤이그)를 거친 후 다시 잘츠부르크로 돌아오면서 파리, 취리히, 도나우에싱엔, 뮌헨을 거쳤다. 이 시기 모차르트에게 가장 중요했던 일은 1764-65년 런던에 머무를 당시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의 아들인 요한 크리스티안 바흐에게 작곡법을 배운 것이다. 이후 모차르트는 기악곡, 특히 교향곡과 협주곡에서 이 요한 크리스티안 바흐의 영향을 많이 받았으며 8살때 처음으로 작곡된 모차르트의 교향곡에는 그의 영향이 강하게 드러나 있다.

하지만 연주여행이 항상 즐겁지만은 않았는데, 아무래도 여행비용을 감당하고 명성을 얻기 위해서는 해당 지역 귀족들의 관심과 배려가 필수였기 때문에 레오폴트는 이들 귀족의 관심을 얻기 위해 노심초사해야 했으며 가족들이 차례로 원인 모를 풍토병에 걸려 거의 죽을 지경에 이르기도 했다.

1769년부터 2년간 계속된 3차 연주여행은 이전의 여행과 달리 과감하게 남쪽(이탈리아)으로 방향을 잡았으며 엄마와 누나 난네를이 빠지고 아빠와 아들만 참여하였다. 이 여행은 연주여행이라기보다 작곡여행이라고 부르는 것이 더 어울릴 정도로 소년 작곡가 모차르트의 역량이 빛났던 여행이었으며 이 여행의 성과 덕분에 모차르트는 훗날 오스트리아 최고의 오페라 작곡가가 될 수 있었다.

여행 첫 해 볼로냐에서는 당시 유명 오페라 작곡가였던 요세프 미츨리베섹(Josef Mysliveček)과 지오바니 바티스타 마르티니(Giovanni Battista Martini)를 만나서 그에게 조언을 받았으며 아카데미아 필라르모니카(Accademia Filarmonica)의 회원자격을 받았다.

이듬해(1770) 로마에서는 시스티나 교회에서 연주된 그레고리오 알레그리의(Gregorio Allegri)의 종교음악인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Miserere)를 두번 듣고 거의 그대로 악보로 옮겨서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이 미세레르는 당시 바티칸에서 악보를 유출시킬 경우 파문에 처할 정도로 엄격히 악보를 통제하고 있었는데[8], 당시 교황 클레멘트 14세는 겁없이 신성모독을 저지른 이 녹음기.....아니 소년을 파문에 처하기는 커녕 그의 재능을 크게 칭찬하고 황금 박차 기사단(Chivalric Order of the Golden Spur)이라는 근사한 칭호도 수여하였다.

밀라노에서는 드디어 모차르트 최초의 본격 오페라라고 할 수 있는 폰토의 왕 미트리다테(Mitridate, re di Ponto, K. 87)가 공국 왕립 극장(Teatro Regio Ducal)에서 초연되었는데,[9] 14살밖에 안된 소년 작곡가의 작품임에도 무려 21회나 상연될 정도로 당시로서는 큰 성공을 거두었다. 이 성공 덕분에 모차르트는 공국 왕립 극장에서 주기적으로 작곡을 의뢰받아 알바의 아스카니오(Ascanio in Alba 1771, K.111), 루치오 실라(Lucio Silla 1772, K.135)같은 오페라들을 잇따라 작곡하였다.

레오폴트 모차르트는 오페라 작곡가로서 가능성을 보여준 소년 모차르트가 이탈리아에서 계속 활동할 수 있도록 안정적인 직장을 찾아보려고 했지만 당시 이탈리아 음악계는 오늘날 대한민국의 정치판 수준의 복마전이 벌어지고 있었던 탓에 이렇다 할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다. 결국 1773년 모차르트는 이탈리아에서 성공에 대한 기대를 접고 고향으로 돌아가는데, 돌아오기 전 오늘날에도 절창되고 있는 소프라노 독창을 위한 모테트, 기뻐하라 찬미하라(Exsultate, jubilate, K.165)를 작곡하면서 이탈리아 여행에 대한 유종의 미를 거두었다.[10]

2.3 잘츠부르크로 복귀

고향으로 돌아온 직후 모차르트는 잘츠부르크의 영주였던 대주교 히에로니무스 콜로레도(Hieronymus Colloredo)에 의해 궁정음악가로 발탁된다. 이제 17살이 된 모차르트는 신동으로서의 이미지를 벗고 본격적인 직업음악가의 길에 들어선 것이다. 이미 뛰어난 작곡가로 유명해진 모차르트에게 여기저기서 작품 의뢰가 들어왔으며 이를 바탕으로 활발하게 작곡활동을 하였다. 이 시기 피아노 독주곡, 협주곡(피아노, 바이올린 등), 오페라, 실내악, 교향곡 등등 거의 모든 장르에 걸쳐서 작품들이 쏟아져 나왔다.

하지만 잘츠부르크는 유럽클래스의 작곡가 모차르트가 운신하기에는 너무 좁은 동네였다. 그는 밀라노에서처럼 대규모 오페라를 작곡하여 상연하고 싶어 했으나 잘츠부르크에서는 마땅히 공연할 곳이 없었다. 운영비용 문제로 왕실 극장은 1775년 문을 닫아버렸으며 다른 극장은 오페라를 제대로 상연하기에는 크기나 시설이 너무 부실했다. 그런 탓에 모차르트는 잘츠부르크에서 시피오네의 꿈(Il sogno di Scipione, K.126)이나 양치기 왕(Il re pastore, K.208)같은 소규모의 오페라밖에 쓰지 못했으며 그마저도 잘츠부르크 궁전에서 한두번 연주되고 말았다.

게다가 콜로레도 대주교는 융통성이 없고 권위주의적인 성격으로 아랫사람들을 하대하고 상당히 깐깐하게 구는 경향이 있었다. 한마디로 꼰대기질로 가득찬 인물. 게다가 음악은 좋아했지만 딱히 음악에 대한 이해가 높은 것은 아니었고 음악가들에 대한 처우도 박했는데 사실 이게 가장 큰 문제 모차르트는 당시 시세로도 상당히 낮은 수준인 연 150 플로린밖에 받지 못했다.

음악에 대한 자부심이 하늘을 찔렀던 모차르트에게 이런 대우는 당연히 견딜 수 없는 모욕이었기 때문에 자기 본업을 자주 비워두고 다른 직장을 구하기 위한 구직활동에 열을 올린다. 그는 아버지와 함께 1773년 9월에 빈을 방문했고 그 다음해 말에는 뮌헨을 방문해서 몇달씩 머물며 직장을 구했으나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다만 뮌헨에서 그의 초기 오페라 중에 가장 중요한 작품으로 알려진 가짜 여정원사(La finta giardiniera)가 작곡된 것이 성과라면 성과. 가짜 여정원사의 초연은 대성공이었으며 제대로 상연되었다면 의뢰자인 막시밀리안 선제후의 눈도장을 찍었을 수도 있었는데, 안타깝게도 해당 극장에서 상연해야 할 작품이 밀려있던 관계로 모차르트의 작품은 3번 공연 후 내려가고 말았다.

하지만 모짜르트는 포기하지 않았다. 1777년에는 아예 잘츠부르크 궁정음악가 자리를 사임해 버리고 일단 만하임으로 떠났다. 만하임에는 유서깊은 교향악단이 있었고 모짜르트는 이 악단에 취직을 기대했으나 결국 무산되었다. 대신 소프라노 가수로 데뷔를 준비하고 있던 17세의 소녀 알로이지아 베버(Aloysia Weber)를 만나 그녀의 음악선생이 되었는데, 둘은 곧 사랑에 빠졌으며 모차르트는 청혼까지 했다. 당시 모짜르트가 얼마나 그녀에게 빠졌냐면 아버지에게 보낸 편지에 알로이지아를 이탈리아로 데리고 가서 데뷔시키겠다는, 당시 상황으로 봐서는 상당히 허황된 계획까지 세웠을 정도. 하지만 그녀의 재능만큼은 모차르트가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으며 알로이지아는 이후 당대를 풍미한 콜로라투라 소프라노로 명성을 날리게 된다.

당시 모차르트는 그녀를 위해 소프라노를 위한 아리아를 몇 곡 썼는데 둘 모두 오늘날에도 상당한 가창력을 요하는 작품들이며 특히 Popoli di Tessaglia!(K. 316)는 기네스북에 사람의 목소리로 가장 고음을 내야하는 아리아로 등재되어 있을 정도로 난곡이다.[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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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차르트의 첫사랑 알로이지아 베버

모차르트가 만하임에서 일만 잘 풀렸더라면 두 사람은 큰 문제 없이 결혼했을 것이다. 하지만 당시 모차르트는 직장을 사임하고 제대로 돈을 벌지 못해서 상당히 많은 빚을 진 상태였던데다 아들의 출세에 목을 매고 있던 아버지의 간곡한 만류로 일단 연애감정을 접고 구직을 위해 프랑스 파리로 떠난다. 그런데 파리에서는 분위기가 더 좋지 않았다. 음악 선생이나 연주 알바로 돈을 충당하면서 약 6개월간 나름 열심히 구직활동을 했지만 베르사이유 궁전의 오르가니스트같은 내키지 않는 제안만 들어왔으며 설상가상으로 모차르트와 동행했던 그의 모친이 전염병에 걸려 급사하는 비극까지 벌어졌다.[12] 결국 모차르트는 파리에서도 안정된 직장을 얻지 못하고 파리 교향곡 같은 몇몇 작품만 남긴 채 쓸쓸하게 파리를 떠나게 되었다.

레오폴트 모차르트는 이처럼 자기 아들이 외국에서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아내마저 허무하게 잃게 되자 결국 모차르트에게 잘츠부르크의 복귀를 제안했으며 지역의 귀족들을 간곡하게 설득하여 연 450 플로린의 급여를 주겠다는 제안도 받아냈다. 이미 모차르트는 작은 잘츠부르크에 머물기에는 눈높이가 너무 높아져 있어서 이 제안을 받아들이기 싫었지만 대안이 없었다. 망설임 끝에 모차르트는 잘츠부르크 복귀를 결심한다.

모차르트는 고향으로 돌아오는 도중에 뮌헨을 거치는데, 이때 뮌헨에 취직하여 가수로 활동하고 있던 알로이지아와 재회를 하게 된다. 하지만 야속하게도 그녀는 더 이상 모차르트에게 관심을 보이지 않았고 두 사람의 재회는 썰렁하게 끝나고 만다.[13] 그럼에도 불구하고 알로이지아를 포함하여 그 집안의 여인들은 모차르트와 평생 밀접한 관계를 갖게 되는데 이에 대해서는 아래 콘스탄체 항목 참조.

2.4 빈으로 간 모차르트

우여곡절 끝에 잘츠부르크로 복귀했으나 이 곳 사정은 여전히 암울했다. 월급은 좀 올랐지만 콜로레도 대주교는 여전히 꼰대질을 해댔고 음악환경은 열악했다.

오페라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한 모차르트는 일종의 외주를 받아서 오페라 작곡을 시도했다. 1779년 모처럼 프랑크푸르트로부터 징슈필 오페라인 차이데(Zaide)를 의뢰받아 작곡했으나 대본에 문제가 많은데다 징슈필 치고는 오페라의 분위기가 너무 어두운 탓에 도중에 포기했다.

이후 상황이 받쳐주지 않아 한동안 잠잠했다가 이듬해 바이에른 선제후 칼 테오도르(Karl Theodor)가 궁정 카니발에 상연할 목적으로 모차르트에게 오페라 크레타의 왕 이도메네오(Idomeneo re di Creta, K.366)를 의뢰하였는데, 이 오페라가 1781년 1월 뮌헨에서 성공을 거두면서 숨어있던 오페라 작곡가의 포텐이 본격적으로 터지기 시작했다. 이 이도메네오는 모차르트의 음악인생에서 매우 중요한 작품인데, 성인이 된 모차르트의 실질적인 출세작이자 '잊혀진 유망주'로 끝날 뻔 했던 모차르트의 역량을 확인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기 때문이다.

1781년 3월, 모차르트는 신성로마제국 황위를 계승한 요제프 2세(Joseph II)의 대관식에 자신의 고용주인 콜로레도 대주교를 따라 참석하게 된다. 여기서 모차르트는 잘츠부르크에서 받는 연봉의 절반이 넘는 액수를 제안받고 황제 앞에서 연주를 하려고 했는데 콜로레도 대주교가 이를 거부하는 바람에 두 사람 사이에 큰 싸움이 벌어진다. 자신을 하인으로 취급하면서 사사건건 간섭하는 콜로레도 대주교에게 오만 정이 떨어진 모차르트는 잘츠부르크로 돌아온 즉시 사표를 제출하는데, 대주교는 뜸을 들이다가 결국 사표를 수락하면서 모차르트에게 수모를 안겨준다. 즉, 자신의 시종에게 건방진 음악쟁이의 엉덩이를 걷어차게 해서 내쫓아 버린 것.[14]

이 일로 모차르트는 아버지와도 사이가 벌어지는데, 모차르트가 계속 떠돌이 인생으로 살기보다는 수준에 좀 안맞더라도 당분간 잘츠부르크에 안정적으로 지내기를 바랬기 때문이다. 물론 혈기 넘치는 25세의 청년이 아버지의 바램대로 움직일 리는 없었으며 일단 사직한 후 지체없이 빈으로 떠났다.

빈에 도착한 모차르트는 더 이상 왕궁이나 지방 귀족들에게 굽실거리면서 자리를 얻으려 하지 않았고 이 참에 과감하게 전업작곡가의 길을 선택한다. 모차르트가 전업 작곡가라는 당시로서는 새로운 "직종"의 창시자에 가깝다는 사실은 사회사(혹은 역사사회학) 및 예술사적으로 매우 의미있는 일이다. 전업 작곡가 이전의 "음악가"들이 거의 궁정악사, 악장이나 교회 전속 음악가(미사 또는 예배음악, 장례음악 등 담당)로 직업이 협소하게 정해져 있었던 반면,[15] 전업이자 프리랜서가 되면서, 당대의 계몽주의 사상과 맞물려, 음악의 패러다임이 바뀌기 시작한 현상이자 원인이 되었기 때문. 단적으로 모차르트의 전례가 없었다면, 베토벤의 활동이나 이후 슈베르트를 위시한 낭만파 음악, 다시 현대음악의 교두보인 쇤베르크 등으로 이어지는 음악의 시대사적 변화가 가능했던 하나의 사회구조적인 요인은 형성되기 어려웠을 것이다.[16]

그런데, 모차르트가 궁정음악가와 같은 안정적인 자리를 박차고 나온 것은 무슨 남다른 의식의 소유자라서 그런 것이 아니라 그냥 천방지축인 그의 성격 때문이었다. 어려서부터 신동으로 추앙받으면서 자랐던 모차르트는 자의식이 남달랐기 때문에 남에게 굽히거나 고분고분할 줄 몰랐으며, 이런 성격은 음악가이기 이전에 가신으로 활동해야 했던 궁정 음악가의 직책에 결코 어울리지 않았다. 그의 오만함과 특유의 건방진 매너는 가는 곳마다 자기사람보다는 적을 더 많이 만드는 경향이 있었다. 설령 그가 잘츠부르크 말고 다른 곳에서 자리를 구했더라도 잘츠부르크의 경우와 똑같은 수준의 파국을 맞았을 가능성이 높다.

여튼 결과만 놓고 보면 모차르트가 프리랜서가 된 것은 모차르트 본인에게도 상당히 성공적인 선택이었으며 음악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확실하게 꽃을 피웠다.[17] 즉 모차르트는 전업작가의 시조인 동시에 확실한 성공사례를 보너스로 돈관리 잘해야 된다는 교훈까지 얹어서 제시했던 셈.

2.5 빈에서의 성공

일종의 운명의 장난?처럼 모차르트가 빈으로 오기 직전에 알로이지아 베버 집안도 만하임에서 빈으로 건너왔다. 일단은 전업가수로 성공한 베버집안의 요세파와 알로이지아가 더 넓은 무대로 진출하기 위해서였고 그 다음으로 부친이 일찍 사망해서 집안에 일정한 수입이 없었던 관계로 적절한 돈벌이 수단을 찾기 위해서였다. 그래서 돈벌이 수단으로 선택한 것이 숙박업. 여기에 모차르트가 머물면서 그의 인생 2막이 본격 펼쳐진다.

빈으로 온 모차르트는 당장 마땅한 거처가 없었다. 일단 콜로레도 대주교의 비인 저택에서 일하던 사람들의 호의로 저택의 별사(別舍)에 머물렀는데 언제 쫓겨날지 모르는 형편이었다. 이때 옛 연인 알로이지아의 집안에서 하숙집을 하고 있다는 것을 우연히 알게 되었고 그는 잠시만 머물 생각으로 숙소를 옮겼다. 옛사랑 알로이지아는 이미 요셉 랑게라는 연극배우와 결혼하여 따로 살고 있었고 그녀의 두 동생 콘스탄체와 조피가 하숙집에 살고 있었는데, 모차르트는 이 쾌활한 소녀들과 너무 재미있게 지낸 나머지 잠시 머물려던 계획을 바꾸어 계속 하숙집에 머무르게 된다. 그러다가 콘스탄체와는 재미있게 지내는 사이를 넘어 연인으로 발전한다.

두 사람의 사랑은 깊어져서 결국 결혼약속을 하는데, 문제는 양가의 부모였다. 일단 모차르트의 아버지가 이 결혼을 결사적으로 반대했다. 아직 자리도 못잡은 주제에 결혼은 사치라는 것이 그 이유. 게다가 콘스탄체의 어머니 세실리아 베버도 모차르트와 콘스탄체가 너무 가까와지자 모차르트에게 하숙집을 나가달라고 요구했다.[18] 하지만 자식을 이기는 부모는 없는 법. 모차르트의 간곡한 설득에 그의 아버지는 결국 니 알아서 하라는 식으로 설득을 포기해 버렸고 세실리아 베버도 모차르트가 빈에서 나름 잘나가는 것을 보고 결국 딸과의 결혼을 승낙했다. 우여곡절 끝에 결국 1782년 10월에 두 사람은 결혼했다. 이후 모차르트 부부는 6명의 자녀를 낳는데 4명은 일찍 죽었다. 이에 대해서는 후술.

빈에 온 모차르트의 음악인생은 상당히 순조로웠다. 빈에 오자마자 뛰어난 피아노 연주자로 각광을 받았으며 제자도 생겼다. 1781년 크리스마스 이브에는 자신보다 4살 위이며 모차르트보다 앞서 빈에서 명성을 날리고 있던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 무치오 클레멘티와 피아노 배틀을 벌였는데 여기서 사실상 승리하면서 '빈 최고의 피아니스트'라는 명성도 얻었다. 다수의 피아노 협주곡이 작곡되었으며 작곡자 본인의 연주로 공연되었는데 공연때마다 성황을 이루었기 때문에 모차르트는 작은 콘서트홀 대신 큰 강당이나 발레 공연장등을 연주장소로 선택하였다.

20세 무렵의 콘스탄체 모차르트

한편 당시 국립징슈필극장(Nationalsingspiel)[19]의 감독이자 대본작가였던 고틀리브 스테파니(Gottlieb Stephanie)는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요세프 2세로부터 독일어로 된 새 오페라를 상연해줄 것을 요청받았는데 모차르트는 스테파니를 설득하여 이 오페라의 작곡을 담당하게 된다. 여기서 모차르트의 또 하나의 중요한 징슈필 오페라 "후궁으로의 도피"(Die Entführung aus dem Serail)가 탄생한다.[20]

이와 동시에 그는 빈에서 음악적으로 자신을 도와줄 사람들도 여럿 만났는데, 대표적인 인물이 고트프리트 판 즈비텐(Gottfried van Swieten)과 요제프 하이든이었다. 장서가이자 외교관이었던 즈비텐은 바흐/헨델/텔레만을 비롯한 바로크 음악가들의 악보 사본을 다수 보유하고 있었으며 모차르트는 즈비텐의 배려로 이 사본들을 열람할 수 있었는데, 이 때 모차르트는 바로크 특유의 정교한 대위법과 유려한 합창/성악 처리법에 주목한다. 이런 작곡수법들은 이제까지 모차르트가 접하지 못했던 것들로 모차르트에게는 중요한 발견이었다. 모차르트는 즈비텐이 보유한 바로크 거장들의 악보들을 베끼고 피아노로 연주해 보면서 열심히 공부했으며, 이후 모차르트의 중요한 작품 상당수에서 이 때 익힌 대위법 수법이 반영된다.[21]

1784년에는 빈에 들른 하이든을 만났는데 두 거장은 서로의 음악에 큰 감명을 받았으며 24살의 나이차이를 딛고 금세 친구가 되었다. 하이든은 모차르트의 아버지에게 '당신의 아들은 명성으로 보나 저의 경험으로 보나 세상에서 가장 뛰어난 음악가입니다.'라는 찬사를 담은 편지를 보냈으며 모차르트는 모차르트대로 하이든의 영향과 앞서 언급한 대위법적인 전개수법이 동시에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6곡의 하이든 4중주((K. 387, K. 421, K. 428, K. 458, K. 464, K. 465)를 3년에 걸쳐 작곡하여 차례로 하이든에게 헌정하였다. 이 6곡의 하이든 사중주는 모차르트의 실내악에 일대 전환점을 가져온 작품들로 음악적 가치 못지 않게 모차르트의 인생에서 상당히 중요한 작품들이다.

한편 모차르트는 1784년에 12월에 프리메이슨 자선지회에 가입하였는데, 이 프리메이슨도 모차르트의 음악인생에 꽤 많은 영향을 미쳤다. 그는 프리메이슨 가입을 통해 다수의 친구를 얻었으며 잘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프리메이슨의 의식을 위한 음악이나 프리메이슨 사상을 반영한 음악도 몇 작곡하였다. 대표적인 작품이 K.477의 프리메이슨 장송음악(Maurerische Trauermusik)이나 K.623의 프리메이슨을 위한 소 칸타타(Little Masonic Cantata). 그리고 상당수의 연구자들은 그의 생애 최후반기에 작곡된 두 개의 징슈필 오페라 현자의 돌(Der Stein der Weisen, K. 592a)과 마술피리(Die Zauberflöte, K.620)를 프리메이슨의 사상에 의거하여 씌어진 작품으로 파악하고 있다.[22]

그러나 모차르트에게 프리메이슨이 중요한 이유가 따로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돈. 프리메이슨의 인맥은 모차르트의 일종의 돈줄 역할도 했는데, 특히 프리메이슨 동지이자 방직업자였던 미카엘 푸흐베르크(Michael Puchberg) 로부터 상당히 많은 돈을 빌렸다. 모차르트는 프리메이슨의 회원으로 가입하여 적극적으로 활동하였으며 돈좀 많이 땡겨오려고 후에는 마스터 메이슨까지 올라갔다.

2.6 오페라의 거장 모차르트

이처럼 모차르트의 빈 진출은 성공적이었다. 부와 명성도 얻었고 결혼도 했으며 사사건건 간섭하는 윗사람도 없었다. 게다가 음악적으로도 좀더 성장할 수 있었다. 문제는 돈을 많이 벌기는 했는데 실제 생활은 의외로 쪼들렸다는 것이다.

모차르트는 작곡료나 연주료도 충분히 받았고 유력가 자제들을 대상으로 피아노 과외를 하면서 제법 쏠쏠하게 돈을 벌여들였다.[23] 그런데 작곡료로 돈을 벌면 도박과 사치로 그 이상을 써버렸기 때문에 아무리 벌어도 계속 돈이 모자랐다. 즉, 돈을 벌 줄만 알았지 그것을 관리하고 쓸 줄은 몰랐던 것. 모차르트만 돈관리를 못했으면 그나마 다행인데 아내 콘스탄체의 낭비벽은 남편보다 한술 더 떴다. 이 모차르트 부부는 돈이 좀 생기자 빈 중심가의 임대료가 매우 비싼 집으로 이사를 했다. 거기에 하녀와 요리사, 미용사도 고용하고 심지어 승용마도 샀다. 그리고 자기 아들 카를 토마스 모차르트는 비싼 사립 기숙학교로 보냈다. 집에서는 뭉칫돈을 들여 자주 잔치를 벌였다. 그가 비인에서 사들였던 포르테 피아노는 당시 싯가로 900 플로린이었는데, 이는 잘츠부르크에 받았던 연봉 2년치에 해당되는 금액이다.[24]

연구가들에 의해 확인된 자료에 따르면 당시 모차르트가 상당히 많이 벌었기에 이 정도 귀족형 부르주아로써의 생활은 그럭저럭 감당을 할 수 있었다. 다만 저축을 못할 뿐이지. 진짜 문제는 이런 사치도 모자라서 도박까지 포텐이 터졌다는 것(...) 모차르트는 내기 당구와 카드놀이 등의 도박에 열중하다가 많은 돈을 잃었고 이게 누적되면서 엄청난 빚을 지게 되었다. 그는 이런 빚을 절약하는 습관과 도박을 절제하는 태도로 해결하려고 하지 않고 작곡과 연주활동을 늘려서, 즉 돈을 계속 더 벌어서 메꾸려고 했다. 결국 이런 악순환은 모차르트에게 정신적 육체적으로 상당한 과부하가 걸리게 하였는데, 모차르트의 직접적인 사인은 아직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았지만(아래 내용 참조) 그의 때이른 사망은 본질적으로 이와 같은 그의 라이프 스타일에서 비롯된 것이다.

음악 이야기로 돌아가서, 그는 빈에서 몇년간 활발한 연주/작곡활동을 했지만 오페라쪽에서는 후궁으로 도피 이후 딱히 이렇다 할 작품을 쓰지 않았다. 1784년 카이로의 거위(L'oca del Cairo)와 속아넘어간 신랑(Lo sposo deluso)의 작곡에 착수했으나 도중에 포기해버렸다. 2년 뒤 1막짜리 소규모 오페라인 극장지배인(Der Schauspieldirektor)이 쇤부른 궁(Schönbrunn Palace)에서 상연된 것이 전부.

이렇게 비인에서 명성을 얻었으면서 유독 자신이 그토록 애착을 가졌던 오페라쪽에서 지지부진했던 이유는 피아노 연주자로 바쁘게 활동했던 탓도 있지만 기본적으로 좋은 오페라 대본을 구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의 눈높이를 맞춰줄만한 대본작가로 베니스 출신의 로렌초 다 폰테(Lorenzo Da Ponte 1749 – 1838)가 있었는데, 문제는 이 분이 이미 안토니오 살리에리를 비롯해서 다른 작곡가들의 대본 의뢰를 받은 상태였기 때문에 당장 모차르트에게 대본을 써줄 형편이 안됐다는 것. 다 폰테는 몇달만 기다려 달라고 했지만 몇달을 기다려도 대본은 차일피일 미뤄졌다.

마냥 다 폰테만 기다릴 수 없어서 다른 작가에게 의뢰를 하여 전술한 카이로의 거위와 속아 넘어간 신랑의 대본을 받았지만 대본의 수준이 도저히 제대로 음악을 붙일 수가 없는 지경이었기 때문에 결국 작곡을 중도에 포기해 버린 것.

이런 우여곡절을 겪고 2년만에 어렵게 다 폰테로부터 받아든 대본이 바로 보마르셰의 희곡을 오페라용으로 각색한 '피가로의 결혼'(Le nozze di Figaro). 모처럼 마음에 쏙 드는 대본을 받아 쥔 모차르트는 즉시 작곡에 착수하였고 1786년 드디어 야심작 피가로의 결혼이 완성되어 무대에 올려졌다.[25]

오페라 역사에 큰 획을 하나 그은 이 작품은 빈에서도 큰 성공을 거두었지만 모차르트가 방문한 프라하에서는 더 폭발적인 인기를 얻었고, 모차르트의 음악은 비인을 넘어 독일 지역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피가로의 결혼의 성공에 고무된 모차르트는 다 폰테의 또 다른 대본 '돈 지오반니'(Don Giovanni)의 작곡에 착수하였다. 모차르트는 바람둥이 남자를 주인공으로 한 이 대본을 썩 마음에 들어하지는 않았는데[26] 내용이 너무 파격이어서 대중들에게 외면받을 우려가 있었기 때문이다. 다행히 프라하에서 초연된 돈 지오반니는 상당한 성공을 거두었는데, 후에 비인에서 상연되었을 때에는 생각처럼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당시 돈 지오반니는 오페라 부파 치고는 음악이나 내용이 너무 난해하고 복잡하다는 평을 받았다.

대중적인 성공여부와 별도로 다 폰테의 대본에 만족한 모차르트는 다시 그로부터 대본을 받아 1790년 다 폰테 3부작의 마지막 작품인 코지 판 투테(Così fan tutte, K.588)를 작곡하였으며 역시 상당한 성공을 거두었다.

모차르트가 돈지오반니 작곡에 한참 열중하던 1787년 5월 건강이 좋지 않았던 아버지 레오폴트 모차르트의 부음 소식이 전해졌다. 모차르트는 야속하게도 잘츠부르크가 너무 멀다는 납득하기 힘든 이유로 부친의 장례식에 참석하지 않았고 이후 모차르트는 잘츠부르크와 인연이 끊어진다.[27]

한편 돈지오반니를 작곡하던 시기에 17세의 소년 베토벤이 모차르트를 찾아와 그에게 지도를 받은 적이 있었다고 한다. 이 시기 베토벤이 빈으로 여행을 떠난 것은 사실이지만 베토벤이 모차르트를 만났다는 직접적인 증거는 없으며 학자들은 만났을 가능성에 대해서도 부정적으로 보고 있다. 자세한 것은 루트비히 판 베토벤 문서 참조.

이 시기, 나름 빈의 황실에서도 모차르트라는 떠오르는 작곡가에게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다. 1787년 12월 신성로마제국의 황제가 된 요제프 2세는 모차르트에게 연 800 플로린의 급여를 지급하고 황실에서 필요할 때 연주나 작곡을 의뢰하기로 했다. 낭비벽때문에 쪼들렸던 모차르트는 많지는 않지만 정기적인 월급을 받을 수 있는 이 파트타임 잡이 나름 도움이 됐으며 황실 음악가라는 타이틀도 내걸 수 있었다.[28]

2.7 진혼곡

음악적으로는 잇따른 명작을 내놓았지만 그의 경제사정은 계속 나빠져 갔다. 낭비벽을 고치지 못한데다 도박도 끊지 못했다. 그나마 그를 다그치고 붙잡아줄 유일한 사람이었던 아버지조차 세상을 떠나버렸다. 게다가 자신의 아이들은 잇따라 일찍 사망했다. 정신적으로 무척 힘들었던 모차르트는 전술한 미카엘 푸흐베르크를 비롯하여 지인들에게 계속 돈을 빌려야 했으며 창작속도도 눈에 띄게 줄었다.[29]

1788년에 모차르트 부부는 비인 중심가의 임대주택을 떠나 비인 교외의 알체그룬트(Alsergrund)에 있는 큰 집으로 이사를 했다. 1789년에는 돈벌이를 위해 베를린, 라이프치히, 드레스덴, 만하임을 비롯한 독일지역의 여러 도시로 연주여행을 다녔는데 목표한 만큼의 성과는 거두지 못했다. 다만 이 여행을 통해(여행 덕분인지는 사실 불확실하다) 그는 헝가리나 네덜란드의 귀족들에게 후원을 약속받고 그들에게 곡을 써주기로 했으며 이 후원금으로 드디어 그는 그간 늘어만 가던 채무의 변제를 시작할 수 있었다. 1791년부터는 창작의욕도 다시 회복되어 왕성한 작곡활동을 했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이렇게 희망을 보여준 1791년이 그의 생애 마지막 해가 되고 말았다는 것.

1791년 9월 6일 모차르트는 보헤미아의 왕이자 요절한 요제프 2세의 후임으로 신성로마제국의 황제가 된 레오폴트 2세(Leopold II)의 대관식 축제에 맞추어 프라하에서 오페라 티토왕의 자비(La Clemenza di Tito)를 상연하였는데 이때부터 병을 얻어 상당한 고열에 시달렸다.[30]

모차르트는 아픈 몸을 돌볼 새도 없이 9월 30일에는 비인에서 자신의 마지막 오페라가 된 마술피리를 초연 했다. 마술피리의 초연은 성공적이었으나 이와 별도로 그의 건강은 점점 나빠졌는데, 이런 상황에서도 쉬지 못하고 진혼곡의 작곡에 매달려야 했다. 이 진혼곡은 당시 28살의 젊은 귀족이었던 프란츠 폰 발제그((Franz von Walstegg) 백작이 거액을 주고 20살에 죽은 자기 아내를 애도하기 위한 목적으로 작곡을 의뢰한 것이다.[31] 모차르트는 작곡료의 절반을 미리 당겨받고 빠른 시일 내에 완성해 달라는 독촉을 받았는데 건강이 악화되는 바람에 작곡에 속도를 내기 힘들었다.

모차르트는 11월 20일에 고열과 부종에 시달리다가 급기야 구토를 하면서 쓰러졌고 아내와 아내의 여동생 조피가 그를 간호하고 가족 주치의에게 치료를 맡겼으나 차도가 없었다. 결국 그는 1791년 12월 5일 진혼곡의 완성을 보지 못하고 사망했다. 이 진혼곡은 결국 자신을 위한 곡이 되어 버린 셈.

이 모차르트의 사망과 관련된 이야기는 아래에 따로 자세하게 정리되어 있으니 참고하자.

졸지에 미망인이 된 콘스탄체 모차르트는 미완성 상태인 진혼곡을 완성시키는게 급선무였다. 의뢰인으로부터 이미 계약금의 절반을 받았는데 이를 완성시키지 못하면 되돌려줘야 했기 때문이었다. 시일이 촉박했던 그녀는 먼저 모차르트의 제자 요제프 레오폴트 아이블러 (Joseph Leopold Eybler, 1765~1846)에게 의뢰하였으나 아이블러는 Dies Irae와 Confutatis의 오케스트레이션 일부와 Lacrimosa를 조금 손댄 뒤 포기했다. 이에 콘스탄체는 모차르트의 또 다른 제자였던 프란츠 쥐스마이어(Franz Suessmayer,1766~1803)에게 의뢰하였으며 결국 그가 이 진혼곡을 완성하였다. 쥐스마이어는 모차르트가 죽기 직전까지 그와 함께 있었으며 이 곡의 작곡 방향에 대해서 나름 지시를 받았을 것으로 여겨진다. 그는 Sequentia와 Offertorium의 오케스트레이션을 완성했으며 Lacrimosa 이후의 Sanctus, Benedictus, Agnus Dei는 쥐스마이어 자신이 작곡했다고 한다. 이렇게 쥐스마이어가 완성한 악보는 표지에 모차르트의 사인을 위조하여 기입한 후 의뢰인이었던 발제그백작에게 전달되었다.[32]

3 모차르트의 주변 인물들

3.1 아버지 레오폴트 모차르트

항목참조.

3.2 아내 콘스탄체와 처형/처제

파일:Kfpkhnm.png
붉은 원 안의 여자가 콘스탄체[33]

모차르트와 콘스탄체의 결혼과정에 대해서는 전술한 모차르트의 생애 부분을 참조하자.

콘스탄체는 그간 영화 아마데우스를 비롯 각종 매체에 나온 철부지 이미지와[34] 모차르트의 부친 레오폴트가 몹시 마음에 안 들어했던 전력 때문에 남편을 말아먹은 악처 또는 남편의 음악을 이해못하고 사치만 즐겼던 여자라는 평가가 많았는데 이는 많이 왜곡된 평가이다. 또 그녀가 남자를 많이 만나고 다닌 행실이 좋지 않은 여자라는 평도 있었는데 이는 모차르트 부부가 자주 사람들의 파티에 참석하면서 나름 사교생활을 즐겼기 때문에 나온 소문일 뿐이며 실제 그녀가 바람을 피웠다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다.[35]

기본적으로 베버 집안의 네 자매 요제파, 알로이지아, 콘스탄체, 조피는 모두 악보를 읽고 글을 쓰는 교육을 받은 교양을 갖춘 여성들이었으며 음악에 대한 이해력도 충분히 갖추고 있었다. 만약 진짜로 콘스탄체가 별볼일 없는 천박한 여자였다면 모차르트와의 관계도 일회성을 넘어서지 못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베버집안의 네 자매는 다들 성악에 뛰어난 재능을 지니고 있었다. 지금 기준으로 봐도 엄친딸급의 자매들. 장녀 요제파와 차녀 알로이지아는 훌륭한 콜로라투라 소프라노로 당대를 휘어잡은 명가수가 되었으며[36]삼녀 콘스탄체도 모차르트와 일찍 결혼하지 않았다면 충분히 언니들처럼 전업가수가 될 수 있는 성악실력을 가지고 있었다. 막내 조피도 성악에 재능이 있었다고 하는데 자세하게 알려진 바는 없다.

모차르트는 빈에 정착한 후 요제파와 알로이지아를 위해 다수의 아리아를 작곡했으며(K 383, K 416, K 418, K 419, K 538) 종종 오페라의 배역도 맡겼다. 오페라 후궁으로의 도피의 콘스탄체역은 알로이지아를 염두에 두고 만든 배역이었다.[37] 또 돈 지오반니의 비엔나 초연 때에도 알로이지아가 돈나 안나를 담당했다. 요제파는 모차르트 최후의 오페라 마술피리에서 밤의 여왕역으로 열창하여 절찬을 받았다. 셋째 딸 콘스탄체도 전문 가수는 아니었지만 결혼 후 시가(媤家)가 있는 잘츠부르크를 방문했을 때 초연된 남편의 C 단조 미사(K. 427)에서 소프라노 독창을 담당하기도 했으며 모차르트가 소프라노를 위한 음악을 작곡할 때 그녀와 의견을 교환하기도 했을 정도로 성악에 대한 재능과 이해력을 갖추고 있었다.

다만 전술했다시피 콘스탄체는 남편 못지 않은 낭비벽을 자랑했다. 벽난로를 지필 땔감이 없어 추위를 극복하기 위해 춤을 췄다는 에피소드 등의 단편적인 이야기만 접한 사람들이 모차르트가 가난하게 살았다는 인상을 가진 경우가 많은데, 가난하게 산게 아니라 반대로 너무 사치스럽게 살았던게 문제였다.[38] 콘스탄체에 대한 후대의 비난들은 바로 여기에 근거하고 있는데, 콘스탄체가 당시의 일반적인 아내들처럼 집안일과 내조에 충실하지 않고 남편 저리가라로 사교모임에나 나가고[39] 남편 돈을 펑펑 써댔기 때문에 결국 집안이 빚에 허덕이고 남편이 일중독에 시달릴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분명 이러한 콘스탄체의 행실은 오늘날 관점에서 봐도 비판의 여지가 있다. 다만 전술했다시피 모차르트 부부가 겪었던 자금난의 근본 원인은 어디까지나 콘스탄체가 아니라 모차르트에게 있었기 때문에 그녀가 남편을 과로사로 죽게 했다던가 돈을 보고 모차르트와 결혼했다는 꽃뱀 식의 관점은 본말이 전도된 것이다.

1791년 12월, 어린 두 아들과 빚만 잔뜩 남은 상황에서 남편이 급사해 버리자 콘스탄체는 절망 직전까지 갔다. 하지만 놀랍게도 그간 철모르는 안방마님이었던 콘스탄체는 생활력 극강의 억척아줌마로 변신했다.진작에 좀 변신하지 다행히 위기에 강한 여인이었던 것. 콘스탄체는 서둘러 주문받은 진혼곡을 완성시키고 남편의 미출판 작품을 출판하거나 오페라의 공연 수익을 철저하게 받아내는 등 돈과 관련된 일을 잘 챙겨서 빚도 모두 갚고 생활도 금세 안정되었다.

이런 상황에 그녀를 도와주었던 백마 탄 기사가 있었는데, 바로 덴마크의 귀족이자 비인 주재 외교관으로 활동하고 있던 게오르그 니콜라우스 폰 니센(Georg Nikolaus von Nissen: 1761-1826)이었다. 니센은 음악에 대한 관심과 이해가 깊었던 사람으로, 그간 비인에서 유명세를 타고 있던 모차르트에게도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는데, 마침 그의 미망인 콘스탄체가 생활비를 충당하기 위해 모차르트의 유고들을 출판한다는 소문이 들리자 이를 도와줄 명목으로 콘스탄체와 자주 만나게 되었다. 언제나 그렇듯이 남녀 둘이 일을 같이 하다 보면 뭔가가 성욕이 싹트는 법. 더구나 니쎈은 전 남편과 달리(...) 점잖고 남을 잘 이해해주는 사람이었으며 모차르트의 두 아들도 잘 보살펴 주었기 때문에 콘스탄체는 주저없이 마음을 열었다. 콘스탄체가 빠른 시간 내에 경제적 위기를 탈출한 데는 니센의 역할이 컸으며 1798년경부터 둘은 같이 살며서 부부처럼 지냈다. 다만 공식적인 결혼은 모차르트의 두 아들이 모두 장성해서 출가한 후, 콘스탄체의 나이가 47세가 되던 1809년에 했다.

니센의 묘비.[40]

니센과 콘스탄체는 애초에 모차르트 때문에 인연을 맺은 부부였기 때문에[41] 두 사람은 모차르트의 악보와 편지 및 각종 유품을 보존하고 그의 전기를 발간하는 등, 모차르트를 알리고 관련 자료를 보존하는데 힘썼다. 1820년 니센이 정년퇴직을 하자 아예 제대로 모차르트 연구를 하기 위해 모차르트의 고향인 잘츠부르크에 정착했으며 충분한 자료를 확보한 니센은 모차르트의 전기를 쓰는데 착수했다. 하지만 니센은 전기를 완성하지 못하고 서문만 조금 작성한 채 1826년 사망했으며, 이후 이 전기작성은 우여곡절을 겪으며 여러 사람이 매달린 끝에 1829년에 겨우 완성되었다.

한편 니센이 사망한 후 콘스탄체는 가수에서 은퇴한 언니 알로이지아와 동생 조피에게 잘츠부르크에서 같이 살자고 제안했으며[42], 이 제안은 그대로 실행되어 세 자매는 모차르트의 고향에서 여생을 보냈다. 이처럼 모차르트의 생전에도 사망 후에도 베버 집안은 모차르트와 정말 각별했다.

여담으로 모차르트가 아내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그야말로 굉장히 저질인 글이 넘쳐난다. 언제나 당신의 소유물인 모차르트, 설탕처럼 달콤한 키스 세 개가 당신을 향해 날아가고 있어요, 지금 난 당신을 생각하면 발기(…)했다, 아아, 섹스하고 싶다(...) 이러쿵 저러쿵... 엄청나게 야한 글들이 넘쳐날 정도로 편지를 쓰고 이웃들에게 농담을 했다. 그런데 그의 아내도 천생연분답게 비슷한 답장을 보냈다. 그러나 이런 편지내용은 그 시대상에서 유행하는 농담이었을 뿐 딱히 두 사람이 변태기질이 있어서 그런 것은 아니니 오해하지는 말자.카톡으로 애인한테 섹드립 치는거랑 비슷한건가

모차르트빠라면 이런 쪽팔리는 편지나 자료들도 일절 버리지 않고 보존에 힘썼던 콘스탄체와 니센에게 감사하자. 그들의 노력이 아니었다면 현재 우리는 대작곡가 모차르트에 대해 지금보다 훨씬 아는게 적었을 것이다.[43]

3.3 누나 난네를(마리안네)

7세의 모차르트와 12세의 난네를
1763년 유세비우스 요한 알펜

난네를[44](Maria Anna Walburga Ignatia Mozart, 1751-1829)은 일찍 죽지 않고 생존한 모차르트의 유일한 혈육이었으며 동생처럼 어려서부터 음악에 재능을 보였다. 그녀는 모차르트보다 5살 위로 어렸을 때에는 모차르트와 같이 연주여행을 다니면서 남매 신동으로 각광을 받았다. 하지만 아무래도 당시에는 여자가 전업음악가를 한다는게 쉽지 않았기 때문에[45] 1770년 이탈리아 연주여행부터는 동생과 같이 다니지 않고 고향 잘츠부르크에서 교양을 쌓고 신부수업에 열중한다. 20대 초반에 남자친구가 생겼지만 아버지의 반대로 결혼하지는 못했다.

마리안네는 어머니의 급작스러운 사망으로 집안에서 어머니 역할을 떠맡아야 했으며 이런 탓인지 당시로서는 굉장히 늦은 나이인 32살이 되어서야(1783년) 잘츠부르크 법관이었던 프란츠 폰 베르흐톨트 추 존넨부르크(Johann Baptist Franz von Berchtold zu Sonnenburg)와 결혼하여 자신의 집에서 30키로 정도 떨어진 길겐(st. Gilgen)에 정착했다. 이 존넨베르크는 이미 결혼을 두번이나 했고 전처에게 낳은 자식도 5명이나 있었는데, 다만 돈도 매우 많았기 때문에 생활에 어려움은 없었다. 마리안네와 존넨베르크는 3명의 아이를 낳는데, 첫째 아들은 외할아버지 레오폴트 모차르트가 사망할 때까지 길렀으며 막내 딸은 1년만에 죽었다.

1801년 결혼 18년만에 남편이 죽자 마리안네는 4명의 의붓자식과 2명의 친자식을 데리고 잘츠부르크로 복귀한다. 의붓 자식들이 장성해서 슬슬 독립한데다 넉넉하게 유산을 물려받아서 생활에 어려움은 없었기 때문에 소일거리 차원에서 음악교사를 했다. 하지만 잘츠부르크로 복귀할 당시 이미 나이가 50이었기 때문에 오래 하지는 못했다.

모차르트와 관련해서 마리안네가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은 1820년 콘스탄체와 니센 부부가 잘츠부르크에 오면서 부터이다. 마리안네는 그간 며느리를 몹시 싫어했던 아버지의 영향 때문에 콘스탄체에게 그리 호의적이지 않았으며, 모차르트 사후 두 사람은 일절 연락을 주고받지 않았다. 이런 사정때문에 마리안네는 잘츠부르크에 재혼남을 데려온 콘스탄체를 처음에는 쌀쌀맞게 대했다. 하지만 콘스탄체와 니센이 자신의 동생 모차르트의 연구와 자료수집에 열중하고 있고 이를 위해 직접 그의 고향까지 찾아온 것을 알게 되자 생각을 바꾸었다. 마리안네는 자신이 모차르트와 주고받았던 편지와 악보 등의 중요한 자료 일체를 콘스탄체 부부에게 제공하였으며 모차르트와 가깝게 지냈던 증인으로서 그의 행적을 증언하는데 협조하기도 했다.

마리안네는 1825년경부터 시력을 잃고 급격히 쇠약해졌으며 1829년 78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죽기 얼마 전 마리안네는 조카 프란츠 사버 볼프강 모차르트를 극적으로 만날 수 있었는데, 그는 자신의 계부 니센이 사망하자 그의 추도식에 모차르트의 진혼곡을 지휘하기 위해 잘츠부르크에 찾아온 것이었다. 그간 희미하게 존재여부만 알고 있다가 평생 처음 만난 두 사람은 서로 손을 잡고 펑펑 눈물을 흘렸다고 전해진다.

3.4 모차르트의 자식들

모차르트 부부는 총 6명의 자식을 낳았지만 전술했다시피 두 명만 성인이 될 때까지 살아남았다.

1. 라이문트 레오폴트 - 1783.6.17.~1783.8.19. 장남인데 일찍 죽었다.
2. 카를 토마스 - 1784.9.21.~1858.10.31. 차남.
3. 요한 토마스 레오폴트- 1786.10.18.~1786.11.15. 3남인데 일찍 죽었다.
4. 테레지아 콘스탄치아 아델하이트 프리데리케 마리아 안나 - 1787.12.27.~1788.6.29. 장녀이나 일찍 죽었다. 다른 요절한 자녀들 중에서는 그나마 6달 동안 살아 있었다.
5. 안나 마리아 - 1789.11.16. 사산(死産)했다.
6. 프란츠 사버 볼프강 - 1791.6.26.~1844.6.29. 4남.

차남인 카를 토마스(Karl Thomas Mozart, 1784~1858)[46]는 이탈리아로 건너가 음악을 공부하다 중도 포기하고 공무원으로 살면서 이탈리아에 아버지의 음악을 알리는 데 기여했다. 4남인 프란츠 사버 볼프강 모차르트(Franz Xaver Wolfgang Mozart, 1791~1844)는 아버지의 직업을 이어받아 음악가 및 음악 교사로 일했다. 다만 아버지가 죽기 4달 전에 태어났기 때문에 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전혀 없었으며, 음악적으로는 당대의 음악적 조류(낭만파)를 받아들이지 않고 계속 빈 고전파 풍의 구식작법으로 곡을 썼기 때문에 그대는 왜 시대의 흐름을 보지 못하는가 큰 이름을 남기지는 못했다. 자세한 것은 문서 참조.

이 두 아들들은 모두 독신으로 살아서 모차르트의 가계는 여기서 다 끊겨버렸다. 안습

4 모차르트에 관한 일화

4.1 성격에 대한 논란

어렸을 적에 폭스 테리어 종의 개와 카나리아, 찌르레기 등의 새를 집에서 키웠다. 링크

인생을 살펴보자면 매체에서 언급되는 일반적인 '괴팍하고 자유분방한 천재', 즉 천재 캐릭터클리셰의 오리지널 판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모차르트의 서간집을 보면 어렸을 때는 스카톨로, 좀 나이 들고 나서는 검열삭제를 좋아한 듯. 내용이 참으로 아스트랄하다. 이 지저분한 소재는 당시 이 동네 보통 지식인들이 자주 써먹던 소재이기도 했다. 심지어 이런 행각은 서간집 외에 작품으로도 남아있는데, 당시 작곡가들이 여흥 거리로 쓰던 장르인 짤막한 카논들 중에도 노골적인 스카톨로지 메시지를 담은 곡이 몇 곡 있다. 대표적인 예로 '내 엉덩이를 핥아라(Leck mich im Arsch KV 231(382c)'(...). 모차르트의 카논 중 스카톨로지 성향이 있는 곡들은 당시 엄격했던 검열 제도 때문에 제3자가 상당히 순화된 건전가요풍 가사로 임의 개작하고 나서야 출판할 수 있었다.

후배인 베토벤의 전설적인 성격에 가려져서 잘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모차르트의 성격도 베토벤 못지 않은 개차반성(...)을 자랑했다. 그의 친구가 모차르트 아버지인 레오폴트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그의 성격을 짐작할 수 있는데, 볼프강이 가진 음악적 재능이 절반으로 줄고 그 절반이 괴팍한 점을 덮으면 그 녀석은 완전한 사람이 될 겁니다.라고 적어 보냈다. 오죽하면 당사자의 아버지 되는 사람에게 이런 내용의 편지를 보냈을까. 사실 레오폴트도 아들의 성격은 이미 알고 있었다

이런 사회성 결여와 앞서 언급한 스카톨로지 변태 성향 때문에 모차르트 아스퍼거 증후군이나 투렛 증후군 환자였다는 설이 진지하게 돌아다니기도 했으나 모두 낭설에 불과하다. 2000년대 후반경에 재능 비범하고 사회성 떨어지는 천재들을 죄다 아스퍼거로 몰아가는 무개념이 판을 친 적이 있었다. (...) 당장 나무위키의 모태가 된 리그베다 위키에서도 2010년까지만 해도 온갖 뜬소문에 근거해서 모차르트를 비롯 아인슈타인뉴턴오다 노부나가에 여러 역사적 네임드들이 모조리 "아스퍼거 증후군 의심을 받는 사람들 목록"에 올라간 적이 있었으나[47] 싸그리 들어내진 적이 있었다.

애초에 스카톨로지설 자체가 확실치 않은 설이다. 물론 여기에 대해서는 아직 논란이 많기는 하지만 당시에도 현대처럼 똥과 엉덩이를 이용한 욕이나 농담이 유행하고 있었고 모차르트도 그런 더러운 소재를 이용해 농담을 한 것으로 보는 사람들이 많다. 우리나라 입장에서는 똥을 핥으라느니, 방귀를 뀌라느니 같은 말들이 농담이 아닌 진심으로 들릴지 몰라도 외국은 가장 많이 쓰이는 욕들 중에 'Shit(똥)', 'Ass(궁둥이)'같은 말들이 껴있기 때문에 농담이라 보는 경우가 많으며 강박적 외설증, 즉 틱장애일 가능성도 있다고 보는 사람도 있다.

다만 정신병 논란과 별도로 그의 특유의 괴팍하고 오만한 성격이 주변에 많은 적을 만들고 사회생활을 어렵게 만든 것은 사실이다. 이런 점들은 후대에 모차르트가 '비운의 천재', 또는 '인정받지 못한 천재'로 인식되는데 큰 역할을 했는데, 이런 인식들이 동료 작곡가인 살리에리나 부인 콘스탄체 등에게 불똥이 튀어 그의 주변 사람들이 과도하게 부정적인 평가를 받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그의 생애를 읽어보면 알 수 있겠지만 모차르트는 결코 인정받지 못한 천재가 아니었으며 그가 시대를 뛰어넘는 대작곡가가 된 데에는 수많은 사람의 도움과 영향이 있었다는 것을 잊지 않도록 하자.

훗날 모차르트는 잘츠부츠크 시절에 받던 급여에 대해 "하는 일에 비해서는 많고, 할 수 있는 일에 비해서는 형편없는 금액"이라고 평가했다. 자신의 음악성에 대한 엄청난 자신감과 동시에 궁중음악가 시절 의도적으로 태업을 했다고 해석될 여지가 있는데, 당시 잘츠부르크에서 받은 월급이 심한 박봉이었던 것은 사실이다. 모차르트의 능력을 고려하면 더더욱 말도 안되는 금액. 이후 잘츠부르크를 떠나 빈에서 생활할 때 벌이 자체는 엄청나게 늘었는데, 이 때에는 또 사치와 도박에 포텐이 터지는 바람에(...) 결국 엄청난 빚을 지게 되었다. 그래도 모차르트는 연간 1만 플로린을 벌었으며, 이는 당시 오스트리아 중산층 소득의 약 22.1배 정도의 수준이었다. 지금 상황으로 비유하자면 모차르트는 연봉 10억원 정도를 벌어들였지만 12억원 정도를 지출하는 바람에 빚쟁이가 된 상황이라고 할수있다. 물론 물가차이나 당대의 소득과 계층간 격차같은건 고려해봐야되겠지만.

이외에도 모차르트는 여성 편력이 심했다는 이미지가 있고 영화《아마데우스》도 그런 이미지를 상당히 부각시켰지만, 원래 그런 시대였고, 그렇다고 도를 넘을 정도로 막장인 인물은 아닌 듯 하다. 오페라 돈 조반니를 한창 작곡 중에 있다는 소문을 듣고 모차르트를 찾아온 카사노바가 자신이 겪은 일화를 오페라에 넣어 달라는 부탁을 단칼에 거절했을 정도. 사실 카사노바의 행동이 모차르트가 보기에도 너무 도를 넘긴 했다. 돈 조반니를 작곡할 당시에도 '꼭 이런 부도덕한 호색한을 주인공으로 해야만 하나'하고 갈등했고, 결국 작곡이고 뭐고 다 때려칠까 하다가 어차피 오페라의 스토리는 돈 조반니가 벌을 받는 것으로 끝난다는 각본가의 말을 듣고 작곡을 계속했을 정도였다.

4.2 모차르트와 베토벤

모차르트는 루트비히 판 베토벤보다 한세대 앞선 인물이지만 같은 비인 고전파에 속해 있기 때문에 서로 자주 비교를 당하는 신세인데, 대체로 천부적인 재능을 가진 '천재' 모차르트에 반해 끊임없는 노력을 통해 신체적 약점마저 극복해 낸 '수재' 베토벤이라는 식으로 비교를 한다. 대중적으로는 "모차르트는 하늘에서 내려온 천재, 베토벤은 하늘로 올라간 천재" 라는 말도 있을 정도. 그러나 모차르트 역시 시행착오 없이 처음부터 덥썩 명작을 양산했던 것은 아니며 기회가 있을 때마다 음악공부를 게을리하지 않은 작곡가였다.[48] 모차르트 생전에도 이런 평가가 많았는지, 본인의 편지에서 "사람들은 나를 천재라고만 생각하는데 나처럼 연습과 노력을 많이 한 사람도 없을 거야"라면서 푸념했다고 한다.

후에 로시니는 "모차르트는 천재성만큼 지식을 가지고 있으며, 지식만큼 천재성을 가지고 있는 유일한 음악가"라고 말하기도 했다.

하루는 베토벤이 거리를 걷다가 어느 집에서 연주되고 있던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 20번을 듣고, 옆에 있던 동료에게 "크라머! 크라머! 우리는 절대로 이런 곡을 쓸 수 없을 걸세!"라고 찬탄했다는 일화가 있다. 베토벤은 실제로 이 곡을 모차르트의 작품 중에서 가장 사랑했고, 자기 스스로 카덴차를 붙여서 연주할 정도였다고 한다. 베토벤을 기려, 지금도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 20번은 베토벤의 카덴차로 연주한 음반이 가장 많고, DG에서 나온 베토벤 전집[49]에는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 20번이 끼여 있기도 하다. 베토벤의 카덴차는 장대하고 화려하며, 이 작품의 성격을 제대로 짚어냈다. 인류 최고의 음악가로 칭송되는 두 사람이 함께 작곡했다는 것만으로도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 20번의 가치는 입증된다고 볼 것이다.

4.3 마리 앙투아네트에게 청혼한 모차르트?

6살의 모차르트는 1차 연주여행에서 당시 합스부르크의 여왕이었던 마리아 테레지아가 있던 빈의 궁정을 방문한 적이 있었는데, 이때 장난을 치다 넘어지자 모차르트보다 1살 많은 마리아 테레지아의 딸 마리 앙투아네트가 일으켜 세워주었다고 한다. 이때 모차르트는 대담하게 마리 앙투아네트에게 청혼을 했다고 한다. 혹은 마리아 테레지아가 소원을 말해보라고 했더니 당돌하게 '공주와의 결혼'하고 싶다고 말했다고 한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더 큰 후에 보자고 했다나.

앙투아네트에게 청혼했다는 이야기는 어린 모차르트의 당돌하고 조숙한 귀여움을 보여주는 일화로 유명하지만, 당대 유럽 사회의 사회상을 생각해 보면 100% 절대로 불가능한 이야기다. 설령 마리아 테레지아가 큰 뒤에 보자고 했다는 이야기가 사실이라고 해도, 장단이나 맞춰준 것이지 진지하게 생각했을 가능성은 전혀 없다. 당시 유럽의 귀천상혼 관습에 따르면 지배가문의 자식은 다른 귀족도 안 되고, 오직 다른 지배가문의 자식과 결혼해야 했다. 그런데, 지배가문은 커녕 봉신 영주나 가신도 아닌 평민 남성과 공주의 결혼이라는 건... 일단 교황의 특허장부터 받아와야 할 테고, 다른 국가들의 외교적, 정치적 조롱을 감당해야 하며, 왕가의 공주가 격이 맞지 않는 결혼을 했다는 데 대한 국내 귀족들의 격렬한 반발(심하면 반란)까지 감당해야 하는 일이 된다.(...)

게다가 당시 왕족급의 귀족들에게 결혼은 사랑의 결실이 절대 아니라 일종의 사업이자 정치였다는 것도 염두에 두자. 마리 앙투아네트가 어떻게 결혼을 했고 어떻게 최후를 맞이했는지를 보면 이 말이 실감날 것이다.

현대의 경우에 이런저런 차별이 실존한다 해도 일단은 '모든 인간의 평등'이 도덕적으로 옳다고 받아들여지는 것과는 달리, 근세 유럽에서는 격에 맞지 않는 결혼(귀천상혼)은 아예 도덕적으로 잘못된 것이라고 여겨졌음을 명심하자. 마리아 테레지아는 당시 자신의 아들이 악단을 꾸리자, '돈도 없는데 그런 뻘짓을 왜 해'라고 편지를 보냈다(…). 정치적인 이야기지만, 당시 오스트리아는 프로이센과의 국제전쟁과 검소한 성품의 마리아 테레지아의 긴 통치를 받으면서 자연스럽게 긴축재정을 실시하는 국가가 되었다.

4.4 사기적인 음감

모차르트가 7살이었던 때, 악사들이 노래를 부르는 것을 보고 아버지에게 "왜 사람들이 노래를 부르면 반음 올릴 때와 반음 내릴 때의 음높이가 다른 건가요?"라고 질문했고, 아버지는 당연하다는 듯이 피아노를 쳐주며 "그건 네가 잘못 들은 거고 반음을 올리든 내리든 반음만큼의 음높이는 일정하다"고 가르쳐 주었다. 이를 두고 모차르트가 온음, 반음 개념을 초월하여 음을 18등분해서 들을 수 있었던 컴퓨터급 절대음감을 지니고 있었다는 근거가 되기도 하는데, 5/18반음(27 cents)과 4/18반음(22 cents)을 구분할 수 있는 능력은 절대음감이 아니라 오히려 예민한 상대음감 능력이라 볼 수 있다. 흠좀무

당대 바로크 시대에는 바흐의 평균율이 표준적인 조율방식이 아니었으며, 음계를 구성하는 비율 뿐 아니라 기준음의 기저주파수 자체가 연주회 장소마다 달랐다. 구체적으로 현대음악에서 A4=440 Hz인데 17세기의 베니스에서는 465 Hz, 18세기 프랑스는 392 Hz, 독일은 415 Hz였으며,[50] 교회는 반음[51] 낮은 튜닝을, 연주회장은 반음 높은 튜닝을 사용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만약 상황이 이렇다면 현대음악에서 의미하는 절대음감의 소유자는 엄청 괴로운 음악적 환경에 놓이게 된다. 연주회 여행을 다녔던 모차르트가 매번 가는 곳마다 오케스트라를 갈아 뒤엎고 하프시코드까지 새로 두드려 맞추지 않은 이상 예민한 상대음감이었을 수 있다.

4.5 난무하는 모차르트 관광지

모차르트는 베토벤과 더불어 관광지와 기념관/박물관을 마구 양산하는 작곡가로도 유명하다. 25년이나 살았던 그의 생전에는 별로 관심을 주지 않았던 잘츠부르크가 정작 그의 사후에는 '모차르트의 고향'이란 이름으로 매년 막대한 관광객을 불러들이고 있다. 모차르트가 이 작은도시 하나 벗어나려고 엄청나게 발버둥 쳤다는 점을 고려하면 아이러니. 여튼 국제 모차르트 재단 본부도 여기 있으며 음악대학의 이름은 아예 라틴어로 모차르테움(Mozarteum)이라고 지었다.[52]

일전에 잘츠부르크는 동계 올림픽 유치를 신청했다 떨어진 적이 있었는데 이 때에도 캐치프라이즈는 '모차르트의 고향'이었다. 이 잘츠부르크에는 모차르트에 관련된 기념품 이것저것 많은데 특히 모차르트 초콜릿 혹은 모차르트봉봉이라고 불리는 모차르트쿠겔이 유명하다. 1890년 파울 퓌르스트(Paul Fürst)라는 사람이 개발한 초콜릿으로, 오리지널 모차르트쿠겔은 그때부터 지금까지 가내수공업으로 하나하나 만들어지며 미라벨이나 레버 등 다른 브랜드에서 공장에서 찍어내는 것도 있다. 물론 오리지널은 잘츠부르크 현지에서만 살 수 있고 국내에서 많이 보이는 모차르트 얼굴 찍힌 초콜릿은 다 미라벨 같은 데에서 만든 유사품이다.

모차르트에 대한 지분(?)을 요구하는 또 하나의 도시가 바로 프라하. 현재 프라하는 모차르트가 머물렀거나 다녀간 곳이 모조리 박물관이나 관광지가 되어 있다. 실제로 생애 후반에 모차르트는 오히려 빈보다 프라하에서 더 각광을 받았고 오페라 돈 지오반니를 비롯해서 교향곡 38번(일명 프라하)이나 오페라 티토왕의 자비 등의 중요한 작품들이 프라하에서 초연되었다. 현재에도 프라하는 모차르트 생전부터 그의 진가를 제대로 알아준 도시였다는 이유로 '모차르트 도시'라는 자부심이 대단하다. 좀 오바스럽기는 하지만 근거 없는 주장은 아니다.

한편 독일 남부의 로텐부르크에서도 해마다 음악회가 벌어지는데 이곳은 모차르트와 인연이 딱 하나 밖에 없다. 모차르트의 여행 도중 마차의 말을 갈아타기 위해 커피 한 잔을 마시고 떠났다는 것.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는 건가...

독일 남서부 만하임에 있는 예수회 성당에는 모차르트가 이 도시에 며칠 거주하는 동안 미사를 드렸다는 표지석이 붙어있다. 유명한 사람은 그냥 앉았다 일어서기만 해도 그 자리가 유적지가 된다

그런데 각 도시들의 이런 눈물겨운(?) 노력을 우습게 보는 도시가 있는데 바로 비인. 당연히 비인에도 모차르트와 관련된 기념시설들이 넘쳐난다. 그런데 모차르트와 베토벤 슈베르트 등의 역대급 대작곡가들이 모두 비인에서 음악의 꽃을 피웠기 때문에 아마 만하임이나 로텐부르크 수준으로 이들이 거쳐간 곳을 마구 기념했다가는 아예 도시 전체가 박물관이 되버릴 것이다.

1991년, 그의 사망 200주기를 기념하여 전세계적인 모차르트 열풍이 불어닥쳤다. 우리나라에선 남양유업의 꼬모란 유산균 요구르트 광고에 모차르트의 초상이 미소짓는 걸 CG로 입히며, 영화 아마데우스에서 모차르트를 연기했던 배한성의 '모차르트도 넘어간 맛'이라는 나레이션까지 삽입된 광고까지 나왔었다.

4.6 콘스탄체와 파혼할 뻔 했던 모차르트

연애시절 모차르트와 콘스탄체는 양가 부모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돈독하게 지냈던 잉꼬커플이었지만 한 때 파혼직전까지 간 적이 있다. 이유는 모차르트의 질투 때문이었다. 1782년 봄 경에 어떤 파티에 참석한 두 연인은 사람들과 게임을 했는데, 콘스탄체가 내기에 져서 어떤 젊은이가 콘스탄체의 엉덩이 사이즈를 재도록 하는 벌을 받았다. 그런데 이 벌이 실제 실행되자 이를 장난으로 받아넘기지 못한 모차르트가 완전 빡쳐버렸다.[53]

당연히 파티가 끝나고 둘은 큰 싸움을 벌였고 이 사소한 일로 인해 급기야는 파혼 이야기까지 나왔다. 다행히 얼마간의 냉각기 끝에 모차르트의 화가 풀려서 파혼이 이루어지지는 않았다.

5 죽음을 둘러싼 의혹

5.1 모차르트의 죽음

모차르트는 한참 명성을 구가하고 있던 35세 나이에 급서한다. 40을 못 넘기고 죽었기 때문에 '천재는 단명한다'라는 이미지에도 영향을 준 인물. 뭐 당시의 상황으로 보면 모차르트는 살만큼 산 편으로 일단 영유아의 사망까지 합친 평균은 넘었다. 그러나 일단 살아서 청년기를 맞이한 사람치고 단명한 것은 맞으므로 전체 평균에 대입시키는 것은 좀 무리가 있다. 인간은 히드라처럼 전 생애에 걸쳐 사망률이 일정한 것이 아니라, 성인기 이전의 유아기에 급격히 높아졌다가 성인기로 접어들면 급격히 낮아지고, 종국에 노인기에서는 예외없이 전부 죽는 형태다.

모차르트는 병에 걸린 지 15일 만에 사망했는데, 주치의는 모차르트가 죽을 당시의 상태만 가볍게 기록하고 부검은 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그의 죽음은 미스테리로 남고, 추측만 무성했다. 사인은 '열과 발진, 사지통(四肢痛)'.

5.2 살리에리의 독살설

그 가운데에선 안토니오 살리에리가 모차르트를 죽였다는, 아직까지도 진실이라고 오해를 많이 받는 주장이 엄청나다. 한국이나 여러 나라에서 밀로스 포먼 감독의 영화 아마데우스(1984) 덕분에 그렇게 알려졌다고 아는 이들도 보이는데, 이 이야기는 살리에리가 살아있을 때조차도 거론되던 소문이다. 정작 그 영화와 그 영화의 원작이 되는 희곡에서는 독살은커녕 시도도 없으며, 그냥 살리에리가 모차르트에게 심적 압박을 가해 죽게 만든 것으로 묘사된다. 오히려 독살이 나오는 극은 푸시킨의 희곡 《모차르트와 살리에리》다.

1823년 11월, 베토벤의 제자인 이그나츠 모셀레스[54]는 당시 노환으로 투병중이던 살리에리를 만나 그 소문에 대한 진실까지 질문했을 정도였다. 당시 일제포르슈타트 병원에 입원해 있던 살리에리는 처음에 면회를 거부했으나, 여러 번 설득한 끝에 그를 겨우 만날 수 있었던 모셀레스는 의사와 살리에리의 딸 요청으로 그를 흥분시키지 말라는 요구대로 부드럽게 말을 하면서 답변을 듣었다고 한다.

모차르트를 죽도록 싫어한 건 사실이지만 그가 죽는데 난 털끝만큼도 그 어디에도 끼어들지 못했다. 나에게 그런 오명은 반갑지 않다...

모셀레스는 베토벤에게 이걸 이야기했는데, 비서인 안톤 쉰들러[55]는 직접 가담하지 않았어도 그를 미워하고 말이라는 칼로 그를 상처낸 범인에 들어가지 않겠느냐고 의견을 말했었다. 이에 모차르트, 살리에리 모두에게 음악 교육을 받은 바 있던 베토벤은 나로선 누가 범인이니 뭐니 구분할 생각이 없거니와, 살리에리를 믿는다고 의견을 밝히며 그 소문을 못미더워했다. 또한 영화처럼 살리에리는 잊혀졌던 것도 아니다. 비록 지금은 모차르트에 견주면 묻혀진 이름이지만, 당시 75살이라는 엄청난 장수와 같이 늘그막까진 꽤 음악가로 인정받고 편히 살다가 세상을 떠났는데, 영화 덕에 늘그막을 아주 비참하게 죽은 걸로 아는 이들도 많다. 모차르트의 아들 프란츠 크사버 볼프강이 바로 살리에리에게 교육을 받은 적이 있다.

세월이 지나 러시아 음악가 니콜라이 림스키코르사코프가 오페라 《모차르트와 살리에리(Mozart et Salieri)》(1898)에서 살리에리가 모차르트를 죽인 것으로 설정하고, 피터 셰퍼의 희곡 《아마데우스》(1979)가 영화화에 큰 영향을 끼치면서 이렇게 더 알려지게 된 것. 위에서도 언급했지만 후자의 경우는 그를 지독하게 괴롭히기만 할 뿐이지, 독약으로 직접 살해는 안한다. 그리고 정말 살리에리가 모차르트의 천재성을 질투해서 살해하려했다면 정말 앞뒤가 안맞는게 그런 이유에서라면 먼저 하이든부터 제거했어야했다.

결론적으로 살리에리가 모차르트를 죽였다는 주장은 전혀 근거가 없다. 전술한 모차르트의 생애에서 보았다시피 그는 과로와 격무로 인해 몸을 돌보지 못해 사망한 것이며 살리에리는 모차르트에게 해를 끼친 적이 없고 오히려 그의 막내 아들에게 음악을 가르치기도 했다. 나름 한시대를 풍미한 음악가에게 살인자라는 오명을 씌우는 일은 더 이상 없어야 할 것이다.

5.3 죽음의 원인에 대한 현대의학적 관점

2001년 전염병 전문가 Jan V Hirschmann, MD가 Archives of Internal Medicine에 발표한 논문에 따르면, 돼지를 통해 감염되는 기생충인 선모충증이 모차르트의 사망원인이었을 가능성을 제기했다. 돼지고기를 날로 먹거나 덜 익혀 먹었을 경우 걸리며, 고열이 나고 근육통을 일으키며 쇠약해지는 지금도 적합한 치료법이 없는 무서운 질병이다. 그런데 모차르트는 바로 돼지고기를 매우 좋아했다.
어찌나 돼지고기를 좋아했던지 아내 콘스탄체에게 돼지고기를 찬양하는 편지를 보낸 적이 있다.

사랑하는 아내 콘스탄체에게

내가 지금 무슨 냄새를 맡고 있는지 알겠소?
바로 포크 커틀릿이지. 어찌나 맛이 좋은지!
나는 당신의 건강을 축원하며 먹는다오.

모차르트가 병에 걸리기 44일 전에 보낸 편지. 그런데 선모충증의 잠복기는 약 50일이다(…). 포크 커틀릿은 튀겨서 먹는다. 선모충도 잘 튀겨서... 비록 선모충증 이론이 모차르트의 증세를 설명할 수 있지만, 증언들을 토대로 병의 진행 과정을 고려해 볼 때, 특히 선모충 감염의 최종 단계인 호흡곤란에 의한 사망의 흔적이 없었다는 점에서 설득력이 떨어진다.

사실 모차르트의 사망원인은 오랜시간 관심을 끌고 온갖 설이 난무하는 주제로, Faith T Fitzgerald, MD는 Mozart의 사망원인에 대해 감별진단(differential diagnosis)하여 논문도 발표했다. 위의 BBC 기사에서 Dr. Fitzgerald는 선모충증 이론이 '150개의 가설더미 위에 그냥 하나 더 얹은 것 뿐'에 지나지 않는다고 평했다. 그의 진단은 "acute rheumatic fever, with carditis, polyarthritis, erythema marginatum, and possibly, chorea"(...)라고 한다.[56]

모차르트의 가계에서 어떤 단명에 관한 유전적 요인을 찾고자 하는 시도가 있었지만, 그것은 모차르트의 누나인 마리안네, 아버지 레오폴트가 전부 환갑을 넘겼다는 점을 고려하면 필요 없는 작업이었다. 모차르트 학자간에서 이견이 그나마 없는 죽음의 원인으로는 모차르트 그 자신이 몸을 막 다루었다는 사실이 있다. 모차르트는 주스가 되었든 물이 되었든 술이 되었든 과음하는 버릇이 있었다. 물론 결정타는 마지막 해 1791년, 오페라를 두 곡을 동시에 작곡하면서 레퀴엠까지 떠안은 결과 나타난 과로였다.

모차르트 부검 결과에는 '속립진열'이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것이 어떠한 병이었는지는 알 길이 없다.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은 모차르트의 아내 콘스탄체의 여동생이 전하는 기록이다. 그녀에 따르면, 모차르트는 고열에 시달리면서 끊임없이 헛된 말을 되풀이하고 있었는데, 마지막으로 크게 기침을 하더니 검은 밤색 액체를 뿜은 뒤 쓰러졌다.

5.4 그의 장례식

명성과는 달리 장례식에는 살리에리와 모차르트의 친척들을 포함한 일부만이 참석했는데, 눈보라가 치는 기상여건속에서 모두 빨리 돌아가 버리고 매장자 홀로 묘지로 향했다는 섬뜩한 이야기가 있다. 그의 유해는 빈 외곽에 위치한 성 마르크스 공동묘지에 묻혔는데 지금까지도 묘지를 찾지 못하고 있다(…). 빈의 많은 시민들이 참석했던 베토벤의 장례를 생각하면 엄청난 차이다.

그런데 이런 모차르트의 장례는 원래 당시 빈 중산층의 장례가 그랬던 것을 생각할 때 결코 초라하거나 막 치러진 게 아니다. 시신이 그냥 아무렇게나 버려진 게 아니다. 다만 매장지까지 아무도 동행하지 못하게 되어 있는 규칙에 따라 그가 어디에 묻혔는지 아무도 모르는 데다 사후 묘지 관리도 좋지 않아 유해를 찾을 수 없게 된 것이다.

모차르트 시절 황제 요제프 2세계몽군주로서 사회 전반의 여러 분야에서 개혁을 시행했는데, 그 중 하나가 장례절차에 관한 규정이었다. 요제프 2세는 전염병에 따른 피해를 막고자 전염병으로 죽었거나 죽었다고 의심되는 환자의 사체는 반드시 개인매장이 아닌 공동묘지에 묻도록 했다. 물론 높으신 분들이 반대함에 따라 개인매장을 허하게 되는 방향으로 가닥이 나중에 잡혔지만, 그 때 티푸스 의심 환자로 보였던 모차르트는 그런 거 없었다.

성 마르크스 공동묘지에서 모차르트는 열두 구 가량을 공동 매장하는 곳에 묻혔고, 아무런 표시를 하지 않았다. 이 부분에 한해선 영화 아마데우스의 묘사대로다. 하지만 이건 아내가 무슨 돈을 엉뚱한 데 쓰고 다니느라 돈이 충분하지 못했던 것이 아니고, 단지 그때 법이 그랬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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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엔나의 성 마르크스 공동묘지에 세워진 모차르트의 묘비. 물론 지금까지 설명했듯이 사진 위의 위치에 모차르트가 묻혔다는 보장은 절대 없으며, 단지 이 공동묘지 어딘가에 있다는 것만을 반영해서 세워졌을 뿐이다. 참배가는 이들이 있다면, 착오 없기를...

어쨌든 그 뒤로 그가 유명해지자 뒤늦게 DNA 분석까지 해 가는 등 엄청난 노력을 들여 시신을 찾고 있으나, 아직까지 전혀 진전이 없다. 남아있는 건 적갈색인 그의 머리카락 일부분 뿐(…). 이걸 두고 정말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인가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다. 저 위의 묘비에도 슬퍼하는 모습의 천사 조각이 있는 걸 보면...

6 모차르트의 음악

모차르트의 작품 번호에는 특별히 'KV'나 'K'를 써서 매긴다. 자세한 내용은 쾨헬 번호 참고.

모차르트는 신동 또는 천재의 이미지가 강한데, 그가 천재인 것은 맞지만 자신의 재능에 안주하지 않고 계속 경험을 쌓고 노력을 했기 때문에 35년이라는 짧은 생애를 딛고 위대한 작곡가가 될 수 있었다.

어렸을 때부터 연주여행을 다녔던 모차르트는 유럽 각지의 음악을 접하고 명망있는 음악가들들 만날 기회를 얻었으며 이런 경험들은 그의 음악에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8살 때에는 그의 초기 기악곡 양식 정립에 큰 영향을 미친 요한 크리스티안 바흐로부터 교향악과 협주곡의 작곡법에 대해 배웠다. 1770년의 이탈리아 여행에서는 여러 오페라 작곡가들로부터 이탈리아 오페라 양식을 익혔고 마르티니 신부로부터 대위법의 기초도 배웠다. 잘츠부르크의 궁정음악가로 일하던 시절에는 같이 잘츠부르크에서 활동하던 미하엘 하이든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57]

빈에 정착한 이후에는 쯔비텐이 수집한 바로크 음악 필사본으로부터 대위법을 익혔고 이어 대작곡가 요제프 하이든을 직접 만났다. 모차르트에게 하이든은 음악적 친구이자 스승이었다. 모차르트는 1782부터 3년에 걸쳐 작곡한 6곡의 현악 4중주곡 하이든에게 헌정하여 감사와 존경을 표했다. 하이든 가문의 두 형제가 모두 모차르트에게 은인이었던 셈.

모차르트는 기악분야에서도 훌륭한 작품을 엄청나게 많이 남겼지만 그의 확실한 진가는 성악에서 드러난다. 특히 오페라분야에서는 음악적으로 전무후무한 성과를 이루었다. 그의 오페라에 대해 자세한 것은 모차르트의 오페라 문서를 참조하기 바라며, 일단 간단히 이야기하면 그의 선배 글루크가 주창한 '극과 음악이 일치하는 오페라'의 이념을 본격적인 예술작품으로 구현한 사람이 바로 모차르트다. 오페라 아리아나 성악곡에서는 벨칸토 창법 일변도의 기교적인 발성에서 벗어나 좀더 호소력 있고 가사와 감정의 전달이 용이한 창법을 구사하였다.

6.1 모차르트의 교향곡, 관현악

6.1.1 어린 시절(초기) (1764–1771)

  • 교향곡 1번 E플랫장조, K.16
  • 교향곡 2번 B플랫장조, K.17
  • 교향곡 3번 E플랫장조, K.18
  • 교향곡 4번 D장조, K.19
  • 교향곡 5번 B플랫 장조, K.22
  • 교향곡 6번 F장조, K.43
  • 교향곡 7번 D장조, K.45
  • 교향곡 8번 D 장조, K.48
  • 교향곡 9번 C장조, K.73
  • 교향곡 10번 G장조, K.74
  • 교향곡 11번 D 장조, K.84
  • 교향곡 12번 G장조 , K.110
  • 교향곡 13번 F장조, K.112

6.1.2 잘츠부르크 시기(중기) (1772년-1781년)

  • 교향곡 14번 A장조, K.114
  • 교향곡 15번 G장조, K.124
  • 교향곡 16번 C장조, K.128
  • 교향곡 17번 G장조, K.129
  • 교향곡 18번 F장조, K.130
  • 교향곡 19번 E플랫장조, K.132
  • 교향곡 20번 D장조, K.133
  • 교향곡 21번 A장조, K.134
  • 교향곡 22번 C장조, K.162
  • 교향곡 23번 D장조, K.181
  • 교향곡 24번 B플랫장조, K.182
  • 교향곡 25번 G단조, K.183
  • 교향곡 26번 E플랫장조, K. 184
  • 교향곡 27번 G장조, K.199
  • 교향곡 28번 C장조, K.200
  • 교향곡 29번 A장조, K.201
  • 교향곡 30번 D장조, K. 202

6.1.3 후기 (1781년-1791년)

  • 교향곡 31번 D장조 "파리", K.297
  • 교향곡 32번 "이탈리아 형식의 서곡" G장조, K.318
  • 교향곡 33번 B플랫장조, K.319
  • 교향곡 34번 C장조, K.338
  • 교향곡 35번 "하프너" D 장조, K.385
  • 교향곡 36번 "린츠" C장조, K. 425[58]
  • 교향곡 38번 "프라하" D장조, K. 504
  • 교향곡 39번 E플랫장조, K.543
  • 교향곡 40번 G단조, K.550
  • 교향곡 41번 "주피터" C 장조, K. 551

6.1.4 그 외

  • 3개의 독일 춤곡 K.605
  • 세레나데 7번 D장조 '하프너' K.250: 교향곡 35번과 관련이 있다.
  • 세레나데 9번 D장조 '포스트 호른' K.320
  • 세레나데 13번 G장조 '아이네 클라이네 나흐트 무지크' K.525

6.2 협주곡

6.2.1 피아노 협주곡

  • 피아노 협주곡 1번 F장조, K.37
  • 피아노 협주곡 2번 B플랫장조, K.39
  • 피아노 협주곡 3번 D장조, K.40
  • 피아노 협주곡 4번 G장조, K.41
  • 피아노 협주곡 5번 D장조, K.175
  • 피아노 협주곡 6번 B플랫장조, K.238
  • 3대의 피아노를 위한 협주곡 7번 "로드론" F장조, K. 242
  • 피아노 협주곡 8번 "뤼초우" C장조, K.246
  • 피아노 협주곡 9번 "주놈" E플랫 장조, K.271
  • 2대의 피아노를 위한 협주곡 10번 E플랫 장조, K.365
  • 피아노 협주곡 11번 F장조, K.413/387a
  • 피아노 협주곡 12번 A장조, K.414/385p
  • 피아노 협주곡 13번 C장조, K. 15/387b
  • 피아노 협주곡 14번 E플랫장조, K.449
  • 피아노 협주곡 15번 B플랫장조, K.450
  • 피아노 협주곡 16번 D장조, K.451
  • 피아노 협주곡 17번 G장조, K.453 [59]
  • 피아노 협주곡 18번 B플랫장조, K.456
  • 피아노 협주곡 19번 F장조, K.459
  • 피아노 협주곡 20번 D단조, K.466. [60]
  • 피아노 협주곡 21번 C장조, K.467
  • 피아노 협주곡 22번 E플랫장조, K.482
  • 피아노 협주곡 23번 A장조, K.488 [61]
  • 피아노 협주곡 24번 C단조, K.491
  • 피아노 협주곡 25번 C장조, K.503
  • 피아노 협주곡 26번 "대관식" D장조, K.537
  • 피아노 협주곡 27번 B플랫 장조, K. 595

6.2.2 바이올린 협주곡

5개를 묶어서 잘츠부르크 협주곡이라고 부른다.

  • 바이올린 협주곡 1번 B플랫 장조 K.207
  • 바이올린 협주곡 2번 D장조 K. 211
  • 바이올린 협주곡 3번 G 장조 K.216
  • 바이올린 협주곡 4번 D장조 K.218
  • 바이올린 협주곡 5번 A장조 K.219

6.2.3 호른 협주곡

  • 호른 협주곡 1번 D 장조 K. 412 [62]
  • 호른 협주곡 2번 E플랫장조 K.417
  • 호른 협주곡 3번 E플랫장조 K.447
  • 호른 협주곡 4번 E플랫장조 K.495

6.2.4 목관 협주곡

  • 바순 협주곡 B플랫장조 K. 191
  • 플루트와 하프를 위한 협주곡 C장조 K. 299 [63]
  • 플루트 협주곡 1번 G장조 K.313
  • 플루트 협주곡 2번 D장조 K.314
  • 오보에협주곡 C장조 K.314 [64]
  • 클라리넷협주곡 A장조 K.622 [65]

6.2.5 신포니아 콘체르탄테[66]

  • 바이올린, 비올라와 오케스트라를 위한 신포니아 콘체르탄테 E플랫장조, K. 364
  • 오보에, 클라리넷, 호른과 바순을 위한 신포니아 콘체르탄테 E플랫장조, K. 297b

6.3 실내악

  • 현악 4중주 1번 G장조 '로디' K.80/73f
  • 현악 4중주 2번 D장조~7번 E플랫 장조 "밀라노 4중주" K.155/134a~160/159a
  • 현악 4중주 8번 F장조~13번 D단조 "비엔나 4중주" K.168~173
  • 현악 4중주 14번 G장조~19번 C장조 Op.10 "하이든 4중주"
  • 현악 4중주 20번 D장조 "호프마이스터" K.499
  • 현악 4중주 21번 D장조~23번 F장조 K.575, 589~90 "프러시안 4중주"
  • 플루트 4중주 1번 D장조 K.285
  • 플루트 4중주 2번 G장조 K.285a
  • 오보에 4중주 F장조 K.370
  • 피아노와 목관을 위한 5중주 E플랫 장조 K.452
  • 클라리넷 5중주 A장조 K.581
  • 세레나데 10번 B플랫 장조 K. 361: 관악기와 더블베이스를 위한 곡으로, 모차르트의 관악합주곡의 대표작이다.
  • 디베르티멘토 3번 E플랫 장조 K.166/159a
  • 디베르티멘토 4번 B플랫 장조 K.169/159d
  • 디베르티멘토 11번 D장조 K.251
  • 2대의 호른과 현악 4중주를 위한 디베르티멘토 F장조 '음악적 농담' K.522

6.4 피아노

6.4.1 소나타

  • 피아노 소나타 1번 C장조, K.279
  • 피아노 소나타 2번 F장조, K.280
  • 피아노 소나타 3번 B플랫장조, K.281
  • 피아노 소나타 4번 E플랫 장조, K.282
  • 피아노 소나타 5번 G장조, K.283
  • 피아노 소나타 6번 D장조, K.284
  • 피아노 소나타 7번 C장조, K.309
  • 피아노 소나타 8번 A단조, K.310
  • 피아노 소나타 9번 D장조, K.311
  • 피아노 소나타 10번 C장조, K.330
  • 피아노 소나타 11번 A장조, K.331
  • 피아노 소나타 12번 F장조, K.332
  • 피아노 소나타 13번 B플랫장조, K.333
  • 피아노 소나타 14번 C단조, K.457
  • 피아노 소나타 15번 F장조, K.533
  • 피아노 소나타 16번 C장조, K.545 도~미↗솔↘시도레도
  • 피아노 소나타 17번 B플랫장조, K.570
  • 피아노 소나타 18번 D장조, K.576

6.4.2 변주곡

6.5 모차르트의 오페라

따로 문서를 만들었으니 참조하자.

6.6 성악

  • 레퀴엠 K.626
  • 아베 베룸 코르푸스 K.618
  • 대 미사 C단조 K. 427(미완성)
  • 기뻐하라, 환호하라(엑술타테 유빌라테) K. 165: 이탈리아의 교회음악 양식을 소화한 것으로, (경과적 역할의 레치타티보를 제외하면) '성악을 위한 협주곡'의 성격을 띤다.
  • 그 외의 다수 합창곡 및 성악곡들

여기에 없는 작품 목록에 대해서는 한국어 위키백과의 모차르트 작품 목록 페이지를 참고.

6.7 모차르트 작품 연주

모차르트 스페셜리스트로 꼽히는 지휘자로는 네빌 마리너, 감자포대 카를 뵘 등이 있다. 특히 도이체 그라모폰에서 상당한 양의 레코딩을 남긴 카를 뵘 같은 경우는 아직도 대다수가 폐반되지 않아서 구하기도 쉬운 편.

모차르트의 건반음악은 비교적 간단한 노트에도 불구하고 난이도 있기로 유명하다. 악보 읽기는 그다지 어렵지 않지만 간단한 만큼 한 음도 헛되이 연주할 수 없기 때문. 모차르트 곡은 한 음 틀리면 티가 확 난다. 기계적으로까지 들릴 수 있는 음악을 감정을 살려서 연주하기란 쉽지 않은 법이다. 쇼팽 에튀드를 암보하는 음대 입시준비생에게 모차르트의 소품을 들이밀었더니 욕을 먹었더라는 이야기가 있다. 믿거나 말거나. 믿거나 말거나가 문제가 아니다. 모차르트는 전공하는 입장에서 진짜 지옥같다. 음악계의 피카소

모차르트의 음악을 백조에 비유한 이들도 있다. 잔잔한 호수에 미끄러지듯이 수영하는 백조의 다리는 쉴틈없이 바둥바둥거리고 있다나? 이런 표현을 돌직구로 느끼고자 한다면 그 간단하다던 반짝반짝 작은 별 변주곡을 들어보면 되겠다.

피아노를 조금 쳐 본 사람은 알겠지만, 모차르트의 곡들은 옥타브가 많다거나 하지 않다. 손이 작아도 무리없이 칠 수 있는 몇 안 되는 거장 음악가 중 한 명이다.[67]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차르트의 악곡들이 연주하기 힘든 것은 트릴과 어마어마한 노트들 때문. 영화 아마데우스를 보면 모차르트는 피아노를 연주할 때 항상 즐겁고 가볍게, 신나게 연주하는 모습으로 나오는데, 실제로 모차르트의 악곡들을 연주하기 위해서는 그런 느낌이 필요하다. 마치 날아가듯이 연주해야 듣는 사람이 모차르트 곡의 진가를 느낄 수 있다.

그러나 마냥 가볍고 빠르게 치다 보면 음이 모조리 빠지고 제대로 표현되지 않는 것이 모차르트의 악곡이다. 모차르트의 음악을 느낌을 살려 제대로 치기 위해서는 수많은 연습이 필요하다. 기본적으로 건반을 둥글게, 정확히 누르는 타건법, 그리고 손가락과 손목에 무리한 힘을 싣지 않고 자유자재로 치는 법, 악보에 표현된 이음줄과 붙임줄(의외로 모차르트 악곡은 이 이음줄 표현이 정말 중요하다. 이음줄 하나는 곡의 느낌에 상당히 많은 영향을 미친다.)을 정확히 구사하는 법을 익혀야 한다. 모차르트 악곡은 거의 페달을 쓰지 않기 때문에 아기자기한 느낌이 들며 베토벤 이후의 악곡에서 느껴지는 페달을 사용한 장엄함은 거의 찾을 수 없다. 그래서 더더욱 이음줄 등의 악상 기호를 정확히 표현해야만 느낌을 살릴 수 있다.

한 마디로 요약하면 수많은 연습과 훈련 위에 통통 튀는 느낌으로 연주하는 것이 모차르트 악곡 표현의 정수라고 할 수 있겠다.

모차르트는 즉흥 연주를 많이 했다. 출판된 악보에 간단하게 표현된 노트는 그냥 기본적 멜로디를 표기한 것일 뿐, 본인이 연주할 때는 그것을 바탕으로 즉흥적으로 덧붙여서 야단법석일 정도로 화려한 애드리브를 펼쳤다고. 모차르트의 제자였던 사람이 스승의 연주를 들리는 대로 적어놓은 종이 조각이 전해지는데, 음표가 엄청나게 많다. 불꽃 같은 애드리브를 시전한 모차르트나, 그걸 또 받아적은 제자나... 또한 모차르트의 악보는 고쳐쓴 흔적이 거의 없다. 한 마디로 머리 속에 있는걸 그대로 옮겼다는 뜻이다. 외계인 그래서 그 많은 작품들을 남길 수 있었는지도.

대중적이면서도 기억에 오래남는 선명한 멜로디를 기반으로 작곡한 곡에 조바뀜이 계속 일어나는 실험적인 시도도 많이 하는 등 청자에게는 굉장히 감정적이면서도 연주자에게는 보기보다 굉장히 어려운 기교를 요하고, 생전 즉흥연주를 좋아 했다는 점이나 짧은 생애를 살았으면서도 당대 음악의 패러다임을 뒤바꾼 것이나 괴짜 기질도 포함해서 대중음악에 비유하자면 연주자의 면모는 브라이언 존스 혹은 지미 헨드릭스, 작곡가의 면모는 폴 매카트니, 퀸의 프레디 머큐리와 비슷한 점이 많다.

7 기타

Fate/Grand Order의 서번트로 등장했다. 클래스는 캐스터.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Fate 시리즈) 문서 참조.

이 사람 출신지를 벌교읍으로 변조해놓은 짤방이 있다. 링크
  1. 백발 가발은 당시 정장의 일부였다.
  2. 다만 이 626곡 중 일부는 그의 작품이 아닌 것으로 확인되었다.
  3. 독일어계의 성은 보통그들 조상의 직업을 따서 만든 것으로 조상 대대로 직업을 물려받은 것이 아니면 현재 직업과는 아무 관계가 없다. 독일에서 가장 대표적인 성 뮐러(Müller)는 풍차 돌리는 사람 내지 방앗간 주인(...) 정도 되겠다.
  4. 모차르트가 살던 당시 유럽에서는 라틴어로 이름을 짓거나 바꾸는 것이 유행했다고 한다. 모차르트 역시 유행에 따라 그리스식 테오필루스를 라틴어식 아마데우스로 바꾸었던 것으로 보인다.
  5. 장난감 교향곡의 작곡자로 알려져 있는데, 결국 원작자는 베네딕토신부이자 작곡가인 에트문트 앙게러(Edmund Angerer, 1740~1794)임이 밝혀졌다.
  6. 통칭 페르틀(Pertl).
  7. 좀더 직설적으로 말하면 '돈벌이'를 위해서였다. 여행 초기에는 누나 난네를도 어린 나이라는 프리미엄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종종 '소녀 연주자'로 소개되었다.
  8. 특별한 정치적 이유는 없고 일종의 바티칸 신비주의 전략의 일환이었다고 보면 된다. 참고로 이 음악은 바로크 초기 작곡가인 알레그리의 작품으로 되어 있으나 18세기 초에 토마소 바이(Tommaso Bai)라는 작곡가에 의해 한차례 개작되었다.
  9. 모차르트는 이 미트리다테 이전에도 바스티앙과 바스티엔느(Bastien und Bastienne 1768, K.50)나 어리석은 아가씨(La finta semplice 1769, K. 51)와 같은 오페라를 작곡한 적이 있었지만 극장에서 제대로 상연되지는 않았다.
  10. 이 모테트는 사실 소프라노가 아니라 카스트라토 가수였던 베난치오 라우찌니(Venanzio Rauzzini)를 위해 작곡된 것이다. 이 라우찌니는 루치오 실라에서 세실리오 역할을 맡아서 상당히 인상적인 가창력을 보여주었고 이 모테트는 그에 대한 보답으로 작곡된 것.
  11. 들어보면 알겠지만 고음 문제가 아니라도 이래저래 부르기 굉장히 어려운 아리아이다. 아무리 명가수가 된 알로이지아지만 당시 제대로 데뷔도 하지 않은 17세의 소녀가 이런 아리아를 제대로 불렀을지는 의문이다.
  12. 자금난에 시달렸던 모차르트가 치료비를 마련하지 못했던 탓에 그의 모친은 제대로 치료를 받지 못했으며 이로 인해 결국 사망하였다.
  13. 이런 상황이 제기된 것은 물론 연애감정 자체가 식은 탓도 있지만 그 보다 두 사람이 처한 상황이 현실적으로 너무 맞지 않았던 탓도 있다. 알로이지아는 소녀티를 완전히 벗기도 전에 이미 성공가도를 달리고 있는 가수가 된 반면 모차르트는 일종의 몰락한 유망주로서 과거 신동의 칭호가 무색하게 빈털터리 신세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알로이지아는 부친이 일찍 사망하는 바람에 사실상 소녀가장으로 집안을 꾸려가고 있었기 때문에 좀더 현실적인 선택을 해야 했다. 1780년 알로이지아는 부유한 연극배우이자 화가였던 조셉 랑게와 결혼하는데, 결혼시에 남편으로부터 자신의 모친에 대한 경제적 원조를 약속받았다.
  14. 당시 잘츠부르크에는 요제프 하이든의 친동생 미하엘 하이든이 있었기 때문에 콜로레도 대주교는 건방지고 다루기 힘들었던 모차르트의 부재를 딱히 아쉬워하지 않았다.
  15. 직업이 협소하다는 것은 '하는 일'과 '할 수 있는 일'의 범위가 좁게 정해져 있었다는 얘기다. 그 범위를 벗어나면 심하게는 처벌 또는 사형 당할 수도 있었으나, 모두가 알다시피 개혁군주의 하나로 통하는 요제프 2세의 정책의 영향과 함께 그는 이 모두를 초월하는 음악을 남겼다.
  16. 물론, 사회구조적인 요인만이 음악의 시대사적 변화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아니다.
  17. 다만 밑에 나와 있다시피 돈관리를 잘못해서 그 많은 돈을 다 탕진하기는 했다.
  18. 그래서 하숙집에서 두집 정도 떨어진 곳으로 숙소를 옮겼다.
  19. 우리말로 번역하면 국립"노랫말"극장
  20. 연구자들은 이 오페라의 여주인공의 이름이 콘스탄체이며 역경을 이겨내고 사랑을 이루는 내용 등을 볼 때 자신의 처지를 투영한 작품으로 파악하고 있다. 게다가 콘스탄체는 자신의 옛 연인이었던 알로이지아 베버를 염두에 두고 만든 배역이니 모차르트에게는 더더욱 이 작품이 각별했을 것이다.
  21. 잘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모차르트는 바흐나 헨델의 몇몇 작품을 편곡하거나 고전파 수법으로 재구성하기도 하였다. 대표적으로 바흐의 5개의 푸가 편곡(K.404) 이나 헨델의 오라토리오 아시스와 갈라테아의 편곡(K.566)이 있다.
  22. 두 오페라의 대본작가가 쉬카네더(Emanuel Schikaneder)인데 이 분도 프리메이슨 소속이다. 두 작품 중 현자의 돌은 모차르트와 다른 4명의 작곡가의 공동작품인데 상연기록만 남아 있고 악보가 분실되어 버렸기 때문에 실체를 알 수 없었으나, 1996년에 음악학자 데이비드 버치(David Buch)가 이 작품의 모차르트의 자필 사본을 발견하여 현재는 연주 가능한 수준의 악보가 나와있다.
  23. 전술한 클레멘티와 피아노포르테 연주대결에서도 승리하여 한방에 잘츠부르크 시절 연봉 수준의 상금을 받기도 했다.
  24. 다만 그가 잘츠부르크에서 받았던 연 450 플로린의 연봉은 정말 심하게 박봉이긴 했다.
  25. 다 폰테는 모차르트 오페라의 빛나는 조연이었다. 모차르트의 이태리어로 된 또다른 걸작 오페라 돈 지오반니와 코지판 투테도 모두 다 폰테의 대본으로 바탕으로 작곡된 것이다.
  26. 이 돈 지오반니 대본의 주인공인 바람둥이 남자의 실존 모델은 바로 다 폰테 본인이었다. 다 폰테는 당시 최고의 난봉꾼으로 알려진 카사노바 못지 않게 여성편력으로 악명이 높은 사람이었다. 한편 카사노바가 모차르트를 직접 찾아와 돈 지오반니에 자신의 일화를 반영하면 어떻겠냐고 제안한 적이 있었는데 모차르트는 가차없이 거절했다.
  27. 이후 누나 란네를과도 다시 재회하지 못했다. 다만 모차르트가 사망한 후 한참 뒤인 1820년에 콘스탄체가 잘츠부르크에서 난네를을 만났으며 이후 콘스탄체와 그녀의 세 자매들이 모두 잘츠부르크에서 말년을 보냈다.
  28. 황실이 이런 제안을 한 이유는 본격적으로 궁중음악가로 활용하려는 목적보다 모차르트라는 유명 작곡가에게 일종의 장학금을 지급하고 비인에 계속 머물게 하려는 목적이 더 컸다(황실에는 이미 전속 음악가가 차고 넘쳤다). 황실에서 모차르트에게 요구한 것은 황실의 축제나 무도회 때 연주될 춤곡을 작곡하라는 정도가 전부였기 때문에 모차르트는 계속 음악활동에 전념할 수 있었다. 이 지원금 성격의 급여는 요세프 2세가 1790년 사망하면서 중단된다.
  29. 다만 1788년 이후 창작된 작품들은 수는 적지만 작품성은 대단히 훌륭하다.
  30. 당시 모차르트는 마술피리의 작곡 주문을 받은 상태에서 진혼곡을 작곡해달라는 주문이 들어왔다. 이런 와중에 2달도 남지 않은 레오폴트 2세의 대관식에 맞춰 상연할 오페라 주문을 또 받았다. 제아무리 천재라도 이런 강행군에서는 몸이 견뎌낼 재간이 없다.
  31. 발제그백작은 이 작품을 자신이 쓴 것으로 사칭하여 발표하려고 했다. 거액을 준 이유도 자신의 의도를 작곡가에게 납득시키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그는 실제로 쥐스마이어가 완성한 악보를 필사하여 1793년 12월 자신의 지휘로 연주를 했다고 하는데 이 때 자신의 작품으로 사칭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다만 이 곡의 초연 자체는 1793년 1월에 이미 이루어졌다.
  32. 많은 학자들은 쥐스마이어가 모차르트의 스케치나 모차르트가 생전에 레퀴엠의 작곡을 위해 연주하던 것을 듣고 기억하여 이용했을 것으로 보고 있다. 레퀴엠의 끝곡인 Communio는 곡의 첫 부분인 Introitus와 Kyrie의 선율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는데 이는 모차르트의 지시라는 것이 정설이다. 음악적으로 보면 라크리모사 이후 쥐스마이어가 완성한 부분은 모차르트가 직접 작곡한 부분에 비해 수준이 많이 떨어지기 때문에 다른 작곡가나 연주자들에 의한 수정보완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는데, 그래도 아직까지는 쥐스마이어판이 가장 많이 연주된다.
  33. 1762-1842. 장수한 탓에 사진의 발명이 이뤄질 때까지 살아남았다. 모차르트는 초상화의 시대에서 살았지만... 위의 사진은 1840년에 촬영된 것. 다만 현재 원 안의 인물이 콘스탄체가 맞는지 여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34. 뮤지컬 모차르트! 에서도 콘스탄체는 무식하고 돈만 아는 여자로 나온다.
  35. 심지어 모차르트의 제자 쥐스마이어와 모차르트의 막내아들의 이름이 프란츠 사버로 똑같다는 이유로 이 막내아들이 사실은 쥐스마이어의 아들이라는 정신나간 주장도 있었다. 프란츠 사버 모차르트는 유전자감식이 따로 필요 없을 정도로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와 닮았다.
  36. 두 사람을 위해 모차르트가 작곡한 아리아나 오페라의 배역을 보면 얼마나 대단한 능력을 지닌 가수들이었는지 알 수 있다.
  37. 다만 알로이지아가 초연때 실제로 이 배역을 맡았는지는 불확실하다.
  38. 애초에 당시에 벽난로를 갖춘 집 자체가 상당히 비쌌다. 땔감이 없었던건 일시적으로 돈이 부족했던 상황이었을 뿐이지 계속 그렇게 살았던게 절대 아니다.
  39. 모차르트 부부는 집안일을 해줄 사람을 고용했기 때문에 이런 귀족스러운 생활이 가능했다. 심지어 이 부부는 요리사까지 고용했다.
  40. 묘비에 Gatte der Witwe Mozart(모차르트 미망인의 남편)라고 씌어있는데 이를 보면 그가 얼마나 모차르트에 열중한 사람이었는지 알 수 있다.
  41. 재혼 후에도 콘스탄체는 콘스탄체 모차르트라는 이름을 계속 사용했다.
  42. 큰 언니 요제파는 1819년 사망했다.
  43. 사실 니센은 모차르트가 주고받은 편지들을 정리하면서 정도가 심한 내용들은 살짝 편집하거나 점잖은 표현으로 바꾸기도 했다. 그런데도 수준이 저정도;;;
  44. 난네를은 어렸을 때의 애칭이며 성인이 된 후에는 마리아 안나 또는 마리안네로 불렀다. 이 항목에도 이런 점을 반영하였다.
  45. 모차르트와 교환한 서신에 보면 나름 작곡도 한 것 같지만 현재까지 전해지는 그녀의 작품은 없다.
  46. 영화 아마데우스에 나오는 모차르트의 아들이 이 사람일 것이다.
  47. 똑같은 논리면 전투력 강화에 집착하고 부하들의 군율위반엔 웬만해서는 참형으로 대처했던 이순신 장군한테마저 아스퍼거 증후군 설을 뒤집어씌울 수 있다.
  48. 반대로 베토벤도 재능으로 따지면 누구에게도 밀리지 않는 작곡가이다. 단지 모차르트처럼 그 재능이 유년기부터 폭발적으로 드러나지 않았기 때문에 신동이라는 이미지가 약할 뿐이다.
  49. ORIGINALS로도 나온 적이 있는 리히테르의 연주가 들어갔다.
  50. 참고문서 링크
  51. 이게 평균율에서처럼 f2과 f1가 반음 차이라면 f2/f1=2^(1/12)인 관계가 아닐 수도 있다.
  52. 잘츠부르크가 모차르트 도시가 되면서 정말 불쌍하게 된 사람이 있는데 바로 전술한 미하엘 하이든. 그는 잘츠부르크를 떠나지 못해 안달을 냈던 모차르트와 달리 무려 43년간 잘츠부르크에서 충성스럽게 음악활동을 했고 잘츠부르크에 있던 시절의 천방지축 모차르트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던 작곡가였다. 당시 콜로레도 대주교가 모차르트를 별 망설임없이 내쫓았던 것도 미하엘 하이든이 든든하게 버티고 있었기 때문. 그런데 지금은 그런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 자체가 거의 없으며 심지어 잘츠부르크 시민들 상당수도 제대로 모르고 있을 정도니 정말 안습. 현재 잘츠부르크에는 미하엘 하이든 기념관이나 박물관은 고사하고 그가 있었다는 흔적조차 찾기 힘든 지경인데 좀 너무하지 않나 싶을 정도다. 혹시 잘츠부르크를 방문하는 모차르트팬이 있다면 모차르트에게 도움을 아끼지 않았던 미하엘 하이든에게 마음 속으로 안부라도 전하고 오자.
  53. 아마 벌 자체보다도 이 과정에서 오갔을 지저분하고 짓궂은 농담들에 화가 났을 것이다.
  54. Ignaz Moscheles,1794~1870. 그도 음악가로 살아있을 때 꽤 인정받긴 했지만 지금은 듣보잡이 되어버렸다.
  55. 1795~1864. 제자로 잘못 알려져 있는데 비서이다. 그도 음악가이긴 했지만. 베토벤 연구가인 레이너드 솔로몬이나 알렉산더 윌록 세이어는 쉰들러를 베토벤이 왜곡되도록 연구를 가로막은 악당이라고 비난했다. 자세한 건 루트비히 판 베토벤 참고.
  56. 대충 번역하자면, 심근염, 심내막염, 다발관절염, 경계성홍반, 무도증을 동반한 급성 류마티스열. 류마티스열은 아직도 위생이 좋지 않은 개발도상국에선 흔한 질환이고 물론 이 시기 오스트리아에서도 보편적인 질환이었다.
  57. 미하엘 하이든과 모차르트는 20살이 나이 차이에도 불구하고 꽤 친한 사이였으며 모차르트는 빈에 정착한 이후에도 자주 미하엘 하이든에게 이것저것 물어보고 종종 악보를 요청하기도 했다. 그래서 악보 정리과정에서 미하엘 하이든의 작품이 모차르트의 작품으로 잘못 알려지기도 했다. 예를 들어 K.444의 짧은 교향곡은 미하엘 하이든의 곡에 모차르트가 짧은 서주를 붙인 곡이다.
  58. 교향곡 37번은 미하엘 하이든의 것으로 확인되었다.
  59. 3악장의 도입부가 자기가 시장에서 산 찌르레기의 소리에 착안하여 쓴 것으로 알려져 있다.
  60. 이곡은 베토벤이 젊은시절 모차르트 작품중 가장 좋아하는 곡이였으며, 자주 연주했다고 한다.
  61. 이탈리아 피겨스케이터 카롤리나 코스트너의 2011-2012 시즌 프리 스케이팅곡
  62. 두번째 악장은 모차르트의 사후에 그의 제자인 프란츠 크사버 쥐스마이어(Franz Xaver Süssmayr)에 의해 1792년에 완성되었다.
  63. 아마추어 연주자를 위해 쓴 곡으로, 사뭇 다른 두 악기의 조화는 매우 독창적이다. 하지만 정작 모차르트는 플루트를 싫어했다. 왜 싫어했는지는 플루트 항목 참고.
  64. 플루트 협주곡으로 알려져 왔지만, 원래는 거의 확실하게 오보에 협주곡이다.
  65. 모차르트 말년의 작품 중의 하나로, 모차르트가 클라리넷을 위해 작곡한 3곡중 하나다. 특히 2악장은 모차르트 작품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명곡.
  66. 교향 협주곡
  67. 베토벤, 쇼팽, 나아가 리스트를 치다 보면 손이 작은 연주가들은 피눈물을 흘리게 된다.. 그리고 라흐마니노프에 이르러서는 통곡을 하게 된다 도에서 다음 미를 누르라고? 난 여기서 빠져나가야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