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화인민공화국의 국가주석 | |||||||
1대 | → | 2대 | → | 3대 | |||
마오쩌둥 | → | 류사오치 (1959 ~ 1968) | → | 리셴녠 |
刘少奇·劉少奇(유소기) / Liú Shàoqí (1898년 11월 24일 ~ 1969년 11월 12일)
역사는 인민이 쓰는 것이다. 다행히도 역사는 인민이 쓰는 것이다.- 문혁으로 실각할 당시 남긴 말
생산보다 구매가 더 좋고, 구매보다 대여가 더 좋다!- 그의 실용주의적인 경제관을 나타내주는 말로, 덩샤오핑 개혁개방의 원조였다.
1 개요
중화인민공화국의 제2대 국가주석이다. 마오쩌둥 밑에서 2인자로 머물다 대약진 운동의 실패 이후 대약진운동의 뒷수습을 하며 1인자로 떠오른다. 매우 실용주의적인 인물로, 마오쩌둥의 정책을 뒤집으려고 하다가 마오가 일으킨 문화대혁명으로 역풍을 맞게 된다. 이후 권력에서 물려나고 비참하게 최후를 맞이한 인물이다.
2 생애
1898년 11월 24일 중국의 후난 성에서 출생. 마오쩌둥이 후난성 출신이므로 류사오치는 마오의 고향 후배 격이 된다.
1939년 중일전쟁 시절의 모습. 저우언라이(오른쪽)와 함께 제2차 국공합작시기라서 공산군도 국민당군 군복을 입고 있다. 저우언라이의 군모에 붙은 마크는 중화민국 청천백일기의 백일마크다.
1920년 소련으로 유학을 갔고, 1921년 중국 공산당에 가입한다. 1922년에 귀국해서 노동운동에서 큰 활약을 했다. 마오쩌둥이 농촌지역에서 활약했던 것과 달리 류사오치는 도시지역에서 활약을 했다. 대장정 중 열린 쭌이회의에서 마오쩌둥을 지지함으로써 마오쩌둥 지도체제가 확립되는데 큰 기여를 하였으며, 1945년 중국 공산당의 5인비서 중 1명으로 뽑혔다.
마오쩌둥(사진 가운데)과 함께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이 성립되자 부주석의 자리에 올랐으며, 1954년부터는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장의 자리에 올라 마오쩌둥에 이어 2인자의 자리를 확실히 굳힌다. 그리고 1959년 대약진 운동 실패의 책임을 지고 마오쩌둥이 국가주석을 사임하자 취임하였다. 마오쩌둥이 물러난 이후 고향인 후난 성을 시찰하게 되는데 이 때 대약진 운동의 실패로 찌들어 있던 현실을 바로 보게 된다. 마오쩌둥의 병크였던 삼면홍기(총노선,대약진운동,인민공사)에 비교적 긍정적인 의견을 표했던 류사오치는 현실을 바로 보게 된 후 "천재가 3할이면 인재가 7할이야."라는 말을 남기게 된다.
덩샤오핑(왼쪽)과 함께
이후 덩샤오핑과 손을 잡고 시장경제정책을 도입하여 경제정책의 변경을 꾀한다. 대약진 운동의 무리한 중공업화 정책을 폐지하고 다시 농업과 경공업의 비율을 높이는 정책을 폈으며 이런 노력 덕분에 중국의 농업 생산량은 대약진 운동 이전의 수준으로 회복된다. 하지만 여전히 중국 공산당 내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던 마오쩌둥은 이런 류사오치와 덩샤오핑을 수정주의자라고 깠고 결과적으로 이 두 세력은 대립하게 된다.
1966년 문화대혁명이 발생하자 마오쩌둥을 따르는 홍위병의 표적이 되어 비판을 받게 되었고, 결국 1968년 10월 31일 결국 국가주석직에서 물려나게 되고 당에서 제명당하게 된다. 이후 베이징에서 가택연금상태에 놓여져 있었는데 1969년 7월 18일 홍위병이 그의 저택을 습격, 2시간 동안이나 폭행, 폭언을 당했으며 이후 카이펑으로 옮겼으나 별 다른 의료처치를 받지 못해 지병이 악화되어 그해 11월 12일 사망하였다.[1]
마오쩌둥이 사망한 이후인 1980년 복권되었으며, 1981년 무죄가 인정되었다. 그리고 1987년 마오쩌둥, 저우언라이, 주더와 함께 중국 건국의 아버지 4인으로 뽑혀서 지폐에 초상이 실렸다. 그리고 경제 정책은 류샤오치의 것이 전면 채택되어 마오쩌둥 노선은 폐기됨으로써 류샤오치가 최종 승자가 되었다.
2.1 비판: 문화혁명은 피할 수 있었다?
류사오치가 실용적이였고 올바른 인물이었을지 몰라도 그가 마오의 역린을 건드린것이 실각의 화근이였다. 류사오치는 실제로 덩샤오핑처럼 현실을 볼 줄 알고 대처능력도 뛰어났다. 그러나 그가 하필이면 최고 권력자인 마오의 자존심을 건드리는 계기였다 다른 건 다몰라도 자존심과 권위만큼 강한 마오를 정면으로 비판하였다. 그로인해 마오의 신임을 곤두박질쳤다. 사실 그가 차라리 마오를 어느정도 존중하고 저우언라이나 덩샤오핑처럼 유연하게 마오의 역린을 건드리지 않고 그를 형식상 상황으로 만들고 자기가 엉망이된 중국을 어느정도 수습을 하고 마오를 어느 정도 존중하고 설득하여 정책을 펼쳤으면 마오 뒤를 이어 최고권력자가 되고 문혁이 안일어 났을지도 모른다.
3 가족관계
결혼을 여섯 번이나 했으며 이중 마지막으로 결혼한 왕광메이(王光美 1921~2006)와의 관계가 가장 유명하다. 왕광메이는 본래 물리학도였으나 중국 공산당의 영어 통역원으로 활동하다가 류샤오치와 인연을 맺게 되었다. 왕광메이와 류샤오치는 나이 차이가 상당했는데 왕광메이는 1921년 생으로 23살이나 차이가 났다.
류샤오치가 국가주석 직위에 오르자 그녀도 일종의 퍼스트 레이디 자격으로 활동하였는데 남편을 도와 외교 활동에 참여하는 것을 두고 '치파오 외교'로 불리기도 하였다. 하지만 왕광메이 역시 남편과 함께 문화대혁명 때 커다란 고초를 겪어야 했는데 여기엔 마오쩌둥의 아내인 장칭의 개인적인 질투도 한몫 했다는 평가가 강하다. 왕광메이가 당했던 수모 중 유명한 사례가 바로 '탁구공 목걸이'. 왕광메이가 류샤오치와 함께 버마를 순방할 당시, 하얀 치파오와 당시 버마의 권력자인 네윈이 선물한 버마산 루비 목걸이를 착용한 왕광메이의 모습에 대해 외신들이 큰 관심을 가진 적이 있었다.
장칭은 이를 '부르주아적 패션'으로 트집을 잡았고, 홍위병들은 이를 빌미로 삼아 왕광메이에게 치파오와 하이힐, 그리고 탁구공으로 만든 목걸이를 걸게 한 뒤 맹렬하게 비난을 가했다.
왕광메이는 12년 동안 옥살이를 하다가 4인방이 숙청 당한 이후 복권되었다. 이후 전국인민정치협상회의 및 상무위원회 위원직을 맡았으나 현실 정치에는 거의 참여하지 않았고 사회 봉사 활동 등에 힘쓰다가 2006년에 사망했다.
류샤오치와 왕광메이 사이에는 1남 3녀의 자식이 있다. 두 사람 사이의 유일한 아들이었던 류위안(刘源. 사진 위에서 왕광메이의 영정 사진을 들고 있는 인물)은 현재 인민해방군 상장이며, 총후근부 정치위원으로 군부 내의 반부패 정풍 운동을 주도하고 있다. 이 점에서 시진핑 시대 중국 군부의 새로운 실세로 평가받고 있는데, 역시 문화대혁명 시절 고초를 겪었던 시진핑 주석과의 인연에 따른 것으로 전해진다. 관련 문서
2015년 말 류위안이 인민해방군에서 퇴역했다는 보도가 나온 상태다. 명목상 이유는 65세의 나이로 상장 계급상의 정년에 해당하고, 현재 추진되고 있는 중국의 병력 축소 및 조직개편에 따른 것이라고 하지만, 류위안을 주축으로 하는 인민해방군 내 반부패 운동에 대한 군부 일각의 반발 때문이라는 시각도 존재. 대신 류위안이 전국인민대표대회 등의 다른 요직으로 자리를 옮겨 계속 시진핑의 측근 역할을 수행할 가능성도 남아있다.
류위안을 포함해 류샤오치의 자녀들도 문화대혁명 때 수모를 당해야 했다. 딸인 류아이친(劉愛琴)은 네이멍구 자치구에서 근무하다가 홍위병에게 폭행당해서 허리를 크게 다쳤다. 류사오치가 왕광메이와 결혼하기 전 전부인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들인 류윈빈(劉允斌)과 류윈뤄(劉允若)[2] 역시 홍위병에게 폭행당한 뒤 수감되었다가 류윈빈은 자살, 류윈뤄는 병으로 인해 출소했다가 병사했다. 게다가 이 자식들은 모두 홍위병들이 자신의 부모를 모욕하고 폭행하는 것을 보도록 강요받은 것은 물론이고 자식들 스스로도 부모들을 모욕하도록 강요당했다.- ↑ 치료를 받지 못한 배경에 대해서는 1) 의사를 불렀는데 "인민의 적을 치료할 수 없다"면서 거부했다는 설, 2) 의사는 치료해줄 의향이 있었으나 홍위병들에게 보복당할까봐 두려워서 못했다는 설이 엇갈리고 있다. 정확한 내용을 아는 이의 추가 바람.
- ↑ 류윈뤄는 다른 이유로도 박해를 받았다. 류윈뤄는 소련에 유학하면서 현지의 소련 여성과 연애를 했었다. 하지만 당시 중국과 소련의 관계는 썩 좋지 않았고, 류사오치는 아들의 연애가 자칫 외교 관계에 영향을 끼칠 수 있다고 우려했다. 그래서 류사오치는 류윈뤄에게 중국 여성과 결혼할 것을 권고하며 여러 여자들을 소개해 줬으나, 류윈뤄와 딱히 맺어진 여성은 없었고 계속해서 편지로 소련 여성과 연애를 했다. 여기까지는 류사오치 집안의 가족 문제일 뿐인데, 장칭과 홍위병들은 이를 꼬투리 잡아서 류사오치와 류윈뤄가 소련에게 국가 기밀을 누설한 간첩이라고 누명을 씌웠다. 류사오치와 류윈러는 편지를 보내면서 항상 다른 당 간부들에게 편지를 보내는 사실과 편지의 내용을 신고했으며 소련 간첩이란 혐의는 사실이 아니라고 주장했으나 당연히 먹히지 않았다. 또한 류사오치가 류윈러에게 소개해 준 여성 중 한명은 홍위병에게 폭행당해서 평생 반신불수 신세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