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5년 원수계급을 받았다. 원수예복을 입은 주더. 그러나 얼마안가 계급은 다시 폐지.
건국직후 마오쩌둥(오른쪽)과 함께 천안문 광장에서 열병식을 관람하는 주더(왼쪽)
저우언라이(오른쪽)와 같이 길을 걷는 주더(왼쪽).
朱德(주덕) / Zhū Dé (1886년 12월 11일 ~ 1976년 7월 6일)
중화인민공화국의 군인이다. 중국 인민해방군의 실질적인 창건자. 마오쩌둥 못지 않은 드라마틱한 인생을 살았다.
원래는 한학을 공부하던 선비였고 지방시험격인 향시에도 합격했으나, 서양학문에 동경을 품고 이후 청두사범학교에서 공부를 해서 체육교사가 되었다. 그런데 당시 정세가 심상치 않자 운남강무당에 들어가서 군사학을 공부하고 군인이 되었다. 이후 손문이 이끄는 신해혁명에 가담하였다. 이후 능력을 인정받아 지방 군벌에서 군단장급으로 출세하였다.
주더는 당시 많은 중국인들과 마찬가지로 아편중독에다가 많은 첩을 거느린 구시대적 인물이었으나, 어느날 갑자기 참혹한 농민의 처지에 동정심을 느껴 다른 인생을 살기로 결심한다. 이후 아편도 끊고 모든 지위와 재산을 버리고 좀 더 공부를 하기 위해 1922년 독일로 유학을 갔다. 독일의 괴팅겐에서 유학하면서 철학과 역사를 공부했으나 1925년 중국인 유학생들의 소요를 조직했다는 이유로 독일에서 추방되었고, 이후 저우언라이의 추천을 받아 중국 공산당에 입당하였다. 독일에서 추방된 후 소련에 가서 군사학을 잠시 공부하다가 1926년 중국에 돌아왔다. 당시 제1차 국공합작이 성사되면서, 주더는 국민혁명군의 지휘관이 되어 국민당군의 북벌에 참여하였다.
1927년 4월 국민혁명군의 상하이 점령 직후 장제스는 돌연 국민당내의 공산당원을 학살하는 4.12 상하이 쿠데타를 벌여 국공합작의 붕괴와 전면적인 국공내전이 벌어졌다. 주더도 체포되었으나 요리사를 가장하여 탈출할 수 있었다[1]. 이후 게릴라전을 벌이면서 1만명의 병력을 확보하였다.
1928년 국민당군의 추격을 피해서 마오쩌둥이 만든 정강산 (井剛山)[2] 해방구에 자신의 병력을 데리고 합류하였다. 이때부터 공산당군은 주모군(朱毛軍)으로 불리기도 했다. 마오는 이론적인 전략전술론에는 일가견이 있었으나, 전문적으로 군사학을 공부한 적이 없기 때문에, 공산군의 실질적인 지휘는 주더가 맡아했다[3]. 그의 지휘가 탁월했기 때문에 "축지법을 한다", "도술을 부린다"는 소문도 생겨났다고. 그리하여 4번에 걸친 국민당군의 토벌에 번번히 대승리하고, 주모군은 60만까지 성장하였다. 수령님의 프로토타입?
이후 장강산에 도피해온 고위 공산당 인사들이 많아지면서 마오쩌둥과 주더는 군의 지도권을 잃었다. 이후 공산당의 주도권을 장악한 소련유학파 출신 소위 28인의 볼세비키들은 소련의 혁명이론을 교조적으로 따르다가 국민당군의 제5차 토벌에서 괴멸적인 피해를 보게 되었다. 이때문에 공산군은 중국을 반바퀴 돌아 서북쪽의 오지로 도피하였고, 이를 대장정이라고 한다. 이 대장정 기간중 1935년 공산당 지도부들이 모두 참여한 준의 전원 회의에서 마오쩌둥은 주도권을 회복하였고, 주더도 다시 군을 총지휘하게 되었다.(이후 마오쩌둥은 1976년 사망할때까지 중국 공산당의 절대적인 1인자로 군림하게 된다.)
이후 주더는 이미 나이가 60대였기 때문에 일선 야전지휘는 하지 않았지만, 공산당군을 총지휘하면서 항일전쟁의 게릴라전이나 제2차 국공내전의 승리에 큰 기여를 했다. 그리하여 1955년 인민해방군에 계급이 도입되었을때 10대개국원수중 서열이 1위였다. (2위가 펑더화이, 3위가 린뱌오)
1949년 중공정권이 창립되었을때 이미 60대의 고령이었기 때문에 정치일선에서는 물러나 있었다.
권력에 별로 관심이 없었고 마오쩌둥에 순순히 따르는 인물이었기 때문에 펑더화이, 린뱌오, 허룽과 같은 다른 원수들보다 험한 꼴은 덜 보았다. 펑더화이는 대약진운동 실패로 마오쩌둥에게 정책 철회를 요구하다 마오쩌둥에 의해 실각당했고, 린뱌오는 문화대혁명 과정에서 마오쩌둥 암살을 계획하다 실패하여 소련으로 망명하던 중 몽골 영공에서 비행기 폭발로 사망했고, 허룽은 마오 부인이었던 장칭과 린뱌오의 음모로 비판받고 감옥에 갇혀 지내던 중 병사했다. 장칭과 린뱌오는 주더도 저런 꼴을 만들기 위해 홍위병을 부추켜 비판회를 여는 등 주더에게도 칼날을 겨누었으나, 저우언라이가 개입하여 더이상의 박해는 당하지 않았다. 다만 문화대혁명 와중 공산당 중앙위원회에서 실각된 적은 있었다.
어쨌든 편히 살다가 1976년 마오가 사망하기 두달전에 사망했다. 한나라 개국후 유방에 의해 목이 날아간 한신, 팽월 등 다른 유방군 장수들과 달리 숙청되지 않고 목숨을 보존하는데 성공한 조참을 연상케하는 인물.- ↑ 이때 붙은 별명이 "주방장"이었다. 이때 임신중이던 아내가 처형당한다.
- ↑ 여담으로 이문열은 정강산(징강산)이 수호전의 양산박을 모델로 하고 있다고 했다. 실제로 마오쩌둥은 대장정 당시에도 수호지를 가지고 다니며 읽었을만큼 수호지가 표상하는 민중의 반항에 자기가 이끄는 홍군 세력의 항쟁을 투영하고 있었다. 지리의 문제가 아니라 현대의 양산박으로 민중들에게 각인되기를 바란 것.
- ↑ 공적으로도 마오쩌둥은 정치위원 역할을 맡았지만, 사적으로도 이때 마오쩌둥은 홍군 전사 출신이던 허쯔쩐과 연애하는 중이었기 때문에 군내에서 '주 군장(军长)은 군량을 나르기에 열심이고, 마오 위원(委员)은 연애에 열심이네' 같은 풍자적인 노래가 불렸다고도 한다. 중국군에서는 정치장교를 정치위원라고 하며 줄여서 위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