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장정


역시 대륙!

1 개요

大长征/红军大长征. the Long March.

1934년부터 1936년에 걸쳐 중국공산당중화민국에게서 피하여 서중국 대륙 동남부에서 서북부로 근거지를 옮려고 감행한 행군. 역사 이래 인류가 단일한 군사상 목적으로 행한 기동으로는 최대 기록이다. 줄여서 '장정', '서쪽으로 대천도한다'는 뜻으로 '대서천'으로도 부른다.

간단하게 설명하면, 중국국민당이 옆자리 중국공산당을 자꾸 괴롭히자 중국공산당이 못 견디고 다른 동네로 도주한 것인데 문제는 그 이사한 거리가 무려 9,600km나 된다는 것이다. 리 단위로 따지면 25000리. 그것도 자동차의 힘도 빌리지 않고 도보와 우마를 이용한 전근대다운 이동 수단만으로, 장비와 훈련에서 앞선 국민당군의 추격을 뿌리치면서.

나중에 산시성에 도착했을 때 살아남은 인원은 6000명. 처음 시작할 때 모인 6만 8000명 중 6만 2000명이 중국국민당군의 포로로 잡히거나, 병에 걸려 죽거나 굶어 죽었다.[1]단체 베어 그릴스 찍기 [2]

딱 봐도 불가능해 보이는 난도에, 지리멸렬한 패주나 다름없는 행군이었지만, 막대한 희생을 감수하면서도 결국 중국공산당과 중국공산당의 무력 역량인 홍군의 주력은 산시성 정착에 성공했고 이것을 기반으로 기사회생하여 10여년 후에는 국민당을 축출하고 혼일사해의 대업을 마침내 이루었다.

사실상 현대 중국의 공산당 정권의 정통성은 이 대장정에 있다고 봐도 된다.

2016년 10월 22일. 대장정 80주년을 맞이하게 된다.#

2 대장정 배경

불과 수백명 밖에 되지 않는 군소 정당인 중국 공산당은 국공합작 이후 국민당과 함께 혁명 사업에 투신하였다. 하지만 미하일 보로딘의 국민당의 레닌주의 노선 기반 개조 이후로 공산당은 자신들의 규모에 맞지 않는 강력한 발언권과 지분을 차지하면서 존재감을 드러내었고 강력한 행동력으로 국민당을 서서히 장악해나가고 있었다. 이 때문에 쑨원 생전에 서산회의파 등이 공산당의 행동이 지나치다고 반발하여 국공합작에 반대하고 나섰고[3] 이러한 정통우파에 이어서 공산당이 주도한 지나치게 과격한 토지개혁과 민중봉기에 반감을 가지게 된 중산층, 향신 출신의 국민당원들과 중산함 사건 이후 자신과 대립각을 세우는 공산당의 공세에 대응하려던 장제스를 중심으로 하는 국민당의 신우파 세력이 4.12 상하이 쿠데타를 일으켜서 중국 공산당과 노동자, 농민 조직을 무력으로 섬멸하였다. 이로 인해 제1차 국공합작은 파탄나고, 중국 공산당은 기존에 상하이를 위시해 도시 노동자 사이에서 갖던 세력을 거의 상실했다.[4] 많은 지도급 인사가 살해당하거나 투옥당했고 남은 지도부에 의해 졸속으로 추진됐던 무장봉기도 죄다 실패로 돌아가면서 중국 공산당은 회복이 불능할 만큼 강하게 타격당한 듯했다.

그러나 당시 중국 대륙에 있는 도시에는 자본주의의 모순이, 도시보다 몇 십 배나 거대한 농촌에는 봉건제도의 모순이 절대 다수한 빈민층을 괴롭혔고 이런 모순과 착취는 고스란히 중국 공산당이 재기할 수 있는 자양분으로 쓰였다. 현대판 양산박이라 할 만한 징강산에는 마오쩌둥주더가 이끄는 홍군이 자리 잡았고 독안룡 류보청, 산적 출신 허룽을 위시해 이후 홍군의 주요한 지휘관들도 이 시기에 두각을 드러냈다. 이렇게 광범위한 중국 대륙 남부 내륙 지방에서 중국 공산당은 농촌 빈민들에게 열렬히 호응받으면서 힘을 모으고 있었다.

1931년 11월에는 인구 250만의 장시성 루이진 지역에서 정부 주석 마오쩌둥, 부주석 장궈타오, 군사위원회 주석 주더를 선출하면서 중화소비에트공화국 임시 정부 성립을 선언한다. 중화소비에트공화국은 장시 성, 푸젠 성을 거점으로 이외에도 후난성, 광시성, 안휘성을 위시해 양쯔강 이남 주요 지역에 소비에트 특구를 수립하고 홍군을 양성하여 세력을 키워가고 있었다. 루이진을 수도로 해서 각지의 해방구를 모두 합치면 그 인구가 천만 명 이상이었다.

무너진줄 알았던 중국 공산당이 국가까지 수립하여 세력을 다시 키워 나아가자 중국국민당 정권은 재차 공산당 해방구와 유격근거지에 대한 대대적인 군사작전을 준비한다. 국민당군은 대규모 토벌대를 편성해 공산당의 근거지로 진격하지만 지방군의 무능과 태업, 농촌을 확고히 장악한 상태에서 지형지물을 이용한 유연한 게릴라 전을 펼치는 공산당의 대응에 효과를 보지 못했고 일부 효과를 본 공세에서도 만주사변, 러허사변, 복건사변 등의 이변이 발생하면서 국민당은 공산당의 완전 섬멸이란 목표를 이루지 못했다.

그러자 장제스는 한스 폰 젝트를 위시한 독일 군사고문단의 조언을 받아들여 공산당이 장악한 지역으로 섣불리 진군하는 것을 자제하고 요처마다 콘크리트 진지를 건설하면서 야금야금 전진하면서 공산당의 밥줄이자 정보원 역할을 하던 민간인들을 강제로 이주하게 하고 소금을 위시해 필수 물자 유통을 차단하는 전술을 채택하기에 이른다.삼만년 조이기

각설하고 중화기로 무장하고 공군까지 동반한 국민당의 정규군에 무장조차 빈약한 게릴라들이 정면대결을 선택했으니 결과는 당연지사. 홍군은 연일 거듭 참패하면서 각지에 있는 해방구가 무너지게 된다. 결국 1933년 장궈타오는 제4방면군을 이끌고 자신에 세운 어위완 소비에트를 탈출해 쓰촨성 북부로 이동해 새로운 근거지를 마련하며, 허룽의 제2방면군도 후난성의 근거지를 버리고 쓰촨성으로 이동한다. 이제 양쯔강 이남의 해방구는 마오쩌둥과 주더가 지도하는 루이진과 그 주변 지역만 남게 된 것이다.

이렇게 국민당군과 중국공산당의 무력 역량인 홍군이 정면으로 충돌한 1934년, 공산당은 그야말로 궤멸하는 상태가 될 만큼 타격당했다. 콜 오브 듀티처럼 홍군 병사 두 사람당 소총 한 정도 돌아가지 않을 정도로 극도로 빈약하게 무장한 군대를 완전히 편성된 진지 앞으로 닥돌했으니 당연한 결과. 홍군은 그야말로 저글링 케첩되듯이 쓰러져갔고 공산당은 공격은 커녕 근거지도 지킬 수 없을 만큼 위험한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장제스가 회심의 미소를 지은 것은 당연지사고 공산당 수뇌부도 현재 근거지를 고수할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됐다. 자세한 것은 초공작전 문서에서 확인.

3 대장정 개시와 쭌이 회의

대장정 초기 단계부터 산시성을 목표로 이동한다는 방침이 정해진 것은 아니었으나 국민당군은 이미 포위망을 좁혀오고 있었고 현재 위치를 고수하다간 다같이 죽는다는 위기의식이 공산당 지도부 사이에서 폭넓은 동의를 얻고 있었다. 포위망을 탈출해 새로운 혁명 근거지를 찾아야 한다는 공감대가 형성되자 공산당 지도부는 탈출을 결정했다. 그리고 이로써 중화소비에트공화국은 사실상 포기되어 해체되게 된다.

이에 후난성, 장시성, 광시성 일대의 홍군은 각자의 해방구를 포기하고 여러개의 방면군으로 재편돼 이동을 시작했다. 일부는 비참한 최후를 맞기도 했지만, 주력군은 국민당의 포위망을 돌파해 양쯔강의 남안을 따라 서진하기 시작했다. 충분히 예상됐던 기동인데도 홍군를 격멸하는데 실패하자 격노한 장제스는 장시성과 구이저우성 일대의 구 군벌군을 총동원해 홍군을 추격했고 홍군은 포위망을 돌파한 후에도 대다수 장비를 유기한 채 허겁지겁 도주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홍군은 근거지를 버리고 도주하는 와중에도 높은 사기를 유지하고 있었고 주로 농민의 자제들로 구성된 홍군은 자신들이 술과 아편에 절은약빨은 국민당군보다 한결 우수한 전투원이라는 사실을 입증했다. 형편이 바뀔 수 없을 만큼 확실한 포위ㆍ섬멸의 기회를 매번 놓쳐 버린 장제스는 자신의 포위망에서 공산당을 말려 죽이려던 당초 계획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고 홍군의 대다수 병력은 선발대와 토착공산주의자들이 마련한 제1차 집결지인 구이저우 성의 쭌이에 마침내 집결할 수 있었다.

1935년 1월 쭌이에서는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전원회의가 열리는데, 이 회의가 이후 중국 대륙의 역사를 결정짓고, 20세기 현대사에 엄청난 후폭풍을 가져온다. 이 회의에서 마오쩌둥을 필두로 한 토착 공산주의자 그룹은 모스크바 유학파로 구성된 기존 지도부의 전략상ㆍ전술상 오류가 당에 막대한 피해를 주었다고 주장하면서, 지도부의 총사퇴를 요구하였다. 또한 기존 지도부의 도시노동자 위주의 혁명 전술은 오류가 명백하며, 농민을 혁명의 중심으로 내세우는 신전술을 채택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격렬한 논쟁에도 위에서 봤듯이 기존 지도부의 오류가 워낙 뚜렷했던 까닭에 마오쩌둥 그룹이 마침내 승리했고 소련 유학파가 중심이 된 지도부는 총사퇴하였고 코민테른 대표 이덕(오토 브라운)도 영향력을 상실하였다. 마오쩌둥중국 공산당의 핵심 세력으로 급부상한 것이다.

4 홍군 분열

소련 유학파는 모두 밀려났지만, 그 후 진로를 두고 마오쩌둥과 장궈타오가 충돌한다. 마오쩌둥은 장정을 지속해 유지단이 세운 서북의 깊숙한 내륙 지역 산시 성(섬서성)의 해방구로 가기를 주장했다. 여기서 멈추면 압도적인 병력을 가진 국민당군에게 결국 당하고 만다는 것이 이유였다. 반면에 장궈타오는 자신과 제4방면군이 자리 잡은 쓰촨 성(사천성)에 소비에트 정권을 수립하자고 주장했다. 20세기 공산 촉한?서북 지역은 중원과 너무 멀고 인구와 공업 기반도 희박한 내륙의 오지라 미래가 없다는 게 이유였다. 하지만 마오쩌둥은 쓰촨성 주변은 고립지인데다가 이미 군벌들이 자리잡고 있다는 점을 들어 장궈타오의 안에 반대했다.

결국 홍군은 대분열해 마오쩌둥과 장궈타오가 서로 다른 길을 간다. 이때 마오쩌둥과 평생을 함께했던 주더를 비롯한 수많은 간부와 병사 대부분이 장궈타오를 따른다. 장궈타오는 제4방면군과 함께 쓰촨성에 소비에트 정권을 다시 수립했는데 이것은 장궈타오의 독단 행동이었다. 일단은 둘로 나뉘어 진군한 후 특정 지점에서 합류하기로 합의된 뒤 군사를 나누었던 것이나 쓰촨성에 소비에트 정부를 세우고 싶었던 장궈타오는 같이 군을 이끌게 된 주더와 수많은 간부를 협박해 지휘권을 빼았고서 독단으로 행동한 것이다. 이 과정에서 장궈타오의 4방면군은 죽음의 대습지와 대설산을 다시 넘어야하는 고난의 행군을 했으나 결국 국민혁명군의 공세에 밀려서 불과 1년 만에 와해되었다. 장궈타오와 주더를 비롯한 간부들은 간신히 국민당군의 추격을 뿌리치고 고작 수백명의 병력과 함께 거지꼴로 서북의 산시성 해방구로 피신했다.(...). 데리고 갔던 10만의 병력을 대부분 털려버리고.

한편 병력 대부분을 장궈타오에 뺏긴 마오쩌둥은 불과 8000명의 홍군을 데리고 지방 군벌과 국민당군의 추격을 뿌리치면서 계속 북상해 1935년 11월에 옌안에 도착해 장정의 종료를 선언하였다. 1936년 후난성에서 탈출한 허룽의 제2방면군이 옌안에 뒤늦게 도착하고, 와해된 쓰촨성 소비에트에서 탈출한 제4방면군의 잔존 간부들도 옌안에 도착해 홍군의 분열은 종식된다.[5]

5 의의

대장정이 성공한 덕분에 현대 중국의 기반이 세워졌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정도로 그 의미는 심대하다. 역사, 문화, 이념적으로도 현재 중국 대륙을 통치하는 공산당의 정통성은 오로지 대장정에 기반을 둔다.

사실 장정 자체는 병력의 90%를 잃어버린 기나긴 퇴각과 도주의 과정이다. 대장정의 처음부터 끝까지 함께한 홍군 병사는 고작 3000여명 정도로 추정될 정도에 불과하다. 계속되는 전투와 필사의 각오로 탈출하는 과정에서 수많은 홍군 병사가 죽거나 낙오했으므로 대장정이 끝난 후에도 홍군은 반격할 여력이 없어 국민당의 공격만 기다리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수많은 지역을 통과하면서 중국 대륙의 엄청난 농민들이 실제로 홍군을 접하였고, 삼대기율 팔항주의로 대표되는 홍군의 엄정한 규율과 소농과 빈민을 배려하는 정책에 호감을 가지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거쳐가는 지역의 수많은 농민 자제들이 자원입대해 홍군 병력을 보충했다. 즉 중국공산당은 근거지와 군사력의 상당부분을 상실했지만, 중국 대륙의 절대다수를 차지하는 농민들의 관심과 (소극적이나마) 지지를 얻을 발판을 마련한 것이다.[6]

특히 중국공산당은 국민당군의 공격으로 할 수 없이 해방구를 포기하고 도주하면서도, 자신들의 이동을 침략자 일본과 맞서 싸우러 가는 항일원정으로 계속 포장하였다. 선동질은 진짜 쩐다... 지주의 토지를 몰수해서 모든 농민들에게 분배하겠다는 토지개혁과 함께 이런 선전은 당시의 중국대중에게 매우 잘먹혀 들어갔고, 삼대기율 팔항주의를 내세운 홍군의 엄격한 규율은 이들과 마주친 농민층에 깊은 인상을 남겼다.

쭌이 회의에서 산시성에 혁명을 도모할 새로운 근거지를 건설한다는 계획이 당에서 최종으로 승인받으면서 대장정은 단순한 '퇴각'이 아닌 새로운 근거지를 건설하려는 '전진'으로 새로이 포장질위치하게 됐다.

또한 이 사람들을 지휘한 중국공산당 간부들은 결국 살아남아 항일전과 국공내전을 승리로 이끌고 신중국의 엘리트가 된다. 결국 국민당의 말살 의도에도 살아남았다는 것 자체가 승리인 것이다. 전투에서 패한 도주였을지언정 대정정의 역할이 전쟁에서의 승기를 결정할 만큼 중요했던 것이다. 하지만 시안 사건이 없었어도 그랬을까?

특히 이 대장정을 완수한 지도부는 그야말로 전설은 아니고 레전드급의 존재로 신격화되면서 신중국 건국 이후에 신성불가침의 권위를 가지게 되었다. 문제는 이게 너무 강력해서 이 간부들의 2세, 3세까지도 태자당이라고 불리면서 현대중국의 사실상의 귀족 계급이 되버린 것이다. [7]

6 여담

워낙 스케일이 장대하면서도 드라마틱한 대사건이었던 탓에, 이후 한자 문화권에서는 '장정'이라는 표현이 일반명사처럼 쓰이게 됐고 많은 문학작품에도 동기를 부여했다.

중국은 우주개발을 추진하면서 독자개발한 로켓에 '창정'이란 명칭을 붙였는데, 이것은 장정(長征)을 중국식으로 읽은 것이다.

이 대장정에는 조선인 김무정, 김산도 참가하고 있었다. 또한 장진호 전투에서 중공군을 지휘한 쑹스룬은 임관하자마자 이 대장정에 참가했다.

7 주요한 인재

  • 마오쩌둥(모택동)
  • 저우언라이(주은래)와 덩잉차오 부부
  • 덩샤오핑(등소평)
  • 주더(주덕)
  • 쑹스룬(송시륜)
  • 린뱌오(임표)
  • 장궈타오(장국도) -제4방면군 사령관. 베이징 대학 출신의 엘리트로서 당 초기에는 거의 저우언라이와 동급이었다. 마오쩌둥의 지도력을 인정하고 그 휘하에 머문 저우언라이와는 달리, 장궈타오는 항상 "청강생(마오쩌둥은 베이징대학에서 직원 겸 청강생 신분으로 공부했고, 장궈타오는 정식 입학생이었다.)주제에..."라며 마오쩌둥을 무시했고, 소련에서 스탈린의 신임을 얻고 돌아와 한때 마오쩌둥의 지위를 위협했지만 대장정을 도주로 폄하하고 독자 전선을 운용하려 들었다. 한때 마오쩌둥을 체포해서 처형하고 당을 장악하려는 계획을 세웠으나, 휘하부하인 예젠잉이 마오쩌둥쪽으로 넘어가면서 무산되고, 마오쩌둥은 무사히 장정을 계속하였다. 이후 장궈타오의 쓰촨성 해방구는 국민당군의 집중 공세를 당해 아주 개발살이 났고(...) 살아남은 간부들만 데리고 허겁지겁 마오쩌둥의 뒤를 따라 연안으로 피신하였다. 하지만 마오쩌둥의 몇배에 달했던 휘하병력은 모조리 잃어버렸고, 결별 과정에서 마오쩌둥과 감정적으로 사이가 악화되었기 때문에 가시방석이나 다를바가 없었다. 결국은 마오쩌둥 휘하의 옌안을 이탈하여 국민당에 귀순하였으나, 국민당은 이용가치가 없어진 그를 돌봐줄 필요도 없었고 푸대접만 받았다. 1946년 국공내전이 재개되자 홍콩으로 망명하였고, 중국 본토에 공산정권이 들어서자 다시 캐나다로 망명하여 그곳 양로원에서 지내다 사망. 캐나다에서 회고록을 남겼는데, 마오쩌둥이 당을 장악하기 이전의 당사정을 알 수 있는 귀중한 사료로 평가받고 있다. 중공정권이 창립되자 배신자로서 "이완용" 취급을 받았으나, 중공체제가 안정되자 아무래도 중국사의 전통인 "한때나마 역사를 주도한 자도 결국 영웅이다"라는 논리에 따라서, 대장정 기념관에는 동상까지 세워져 전시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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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에 세워진 장궈타오 동상.

참고: 국토대장정, 장정 1만 광년
  1. 약 3만 명 정도로 추산되며 이렇게 많이 잡힌 이유는 행군하다 병들거나 배고파 낙오한 병사들을 포로로 잡은 케이스.
  2. 실제로는 더 많은 수가 중도에 탈락했고 처음 시작할 때 모인 사람 중에 끝까지 완주한 수효는 3000명 아래이다. 장정 도중 계속해서 병력을 보충했기 때문이다.
  3. 서산회의파에 속한 사람들 중 유명한 사람이 후에 중화민국 주석을 지내는 린썬이다.
  4. 전체 당원의 80%가 지방 군벌삼합회에 무자비하게 살해되거나 체포 후 투옥됐다. 이런 상황을 배경으로 한 소설이 앙드레 말로가 쓴 "인간의 조건"이다.
  5. 그 후 장궈타오는 중앙위원회에서 엄청나게 개갈굼당한 뒤에 1938년 옌안을 떠나 장제스의 중국국민당에 입당한다. 장제스가 대만으로 도망한 후에는 홍콩으로 망명해 살다가 죽었다.
  6. 전투에선 무참하게 패배했지만, 대중의 관심과 우호적인 여론을 조성하는 성과가 있었다는게 베트남전의 분수령이라고 평가되는 테트 공세하고도 비슷하다.
  7. 다만 시진핑의 아버지인 시중쉰은 대장정에는 참여하지 않고, 대장정을 하고 있던 마오쩌둥이 도착할 산시성의 해방구를 건설하고 있었다. 대장정 참여 안한 간부로서는 꽤 올라간 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