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치환

목차

1

chung58.jpg
유치환(柳致環, 1908년 7월 14일 ~ 1967년 2월 13일). 대한민국시인이자 교육가. 호는 청마(靑馬). 경상남도 거제시에서 태어났으며 국민학교 입학 전 충무로 이주하여 유년기를 보냈다. 극작가 유치진이 그의 친형이다.

연희전문학교에 입학했다가 중퇴했고, 시를 쓰면서 한때 사진관을 경영하기도 했다. 1931년 '문예 월간'에 첫 시인 '정적'을 발표하면서 등단했고, 그 뒤 여러 직업을 전전하던 중 부산에서 문예동인지 '생리(生理)'를 하며 그렇습니다! 남자도 생리를 할 수 있습니다 1939년 첫 번째 시집인 '청마시초'를 발간했다. 1940년 만주로 피신했다가 해방 후에는 교육계에 투신, 충무/부산/경주 등 지방에서 국어선생님으로 근무하였으며[1], 경남여고/대구여고 등의 교장을 역임했다.

만주 피난 활동과 교직활동 중, 그리고 6.25 전쟁 중에도 틈틈이 시를 쓰고 시집을 내 출간한 활발한 문학인이었다. 1946년에는 창립 조선청년문학가 회장을 지냈으며, 1957년에는 초대 한국시인협회장을 지내는 등 한국 문학사에서 꼭 짚고 넘어가야 하는 인물. 특히 이것은 소리없는 아우성으로 시작하는 교과서 필수요소인 '깃발'과 '생명의 서', '행복' 등이 유명하며 수능 필수 암기 리스트에 들어가 있기도 하다.

통영여중 재직 당시 가사선생님으로 근무했던 여류시인 정운 이영도( 1916년 10월 22일 ~ 1976년 3월 5일)에게 그야말로 한 눈에 반해 살아 생전 20년 동안 연애편지를 써서 보냈다. 처음 만나게 된 1947년부터 교통사고로 죽게 된 1967년까지 이룰 수 없는 짝사랑에 대한 고통과 회한, 그리고 설렘과 기쁨을 잔뜩 버무려 표현한 연애편지들 가운데 한국전쟁 이전의 것은 소실되고 남아 있던 것이 5000여통이라 한다. 그중 200통을 추려 유치환의 사망 두달 후에 《사랑했으므로 幸福하였네라》(중앙출판공사, 1967) 라는 제목의 책으로 출간되었는데 당시로서는 기록적인 부수인 25,000부를 찍어냈다.

문제는 유치환은 처자식이 있는 유부남이었다는 점. 반면 이영도는 21세에 남편을 잃고 외동딸을 홀로 키우고 있던 미망인이었다. 다만, 두 사람은 현실의 만남을 갖지는 않았다고 한다. 그러니까 유치환 아내분 세상에 이 이야기가 쫙 퍼졌는데도 20년동안 꾹 참았다는 것. 존경스럽습니다. 더 문제는 이영도라는 이름이 남자이름같아서 잘 모르는 사람들은 이 둘이 남자간의 뜨거운 사랑을 나눴다라든지의 식으로 상상한다는 거 참고로 이영도는 위에 나온 책 판매수익을 모두 기부했다.

거제시에 청마기념관과 청마거리가 있고 통영시에 청마문학관이 있으며[2], 부산광역시 동구에는 '유치환의 우체통'이라고 불리는 문화공간이 있을 정도로 지역구에서는 완벽하게 네임드 존잘 취급을 받는 분.실제로도 그런 분이긴 하다

부산남여상[3]의 교장으로 재직하던 중 1967년 2월 13일에 야근을 마치고 귀가하다가 부산 동구 수정동에서 시내버스에 치였고, 병원으로 후송되던 도중 끝내 숨지고 말았다.

문제가 있다면 친일파 의혹이 끊임없이 제기된다는 것. 특히 1942년 2월 6일 자 만선일보에 기고한 친일성 산문이 2007년 10월 19일 경남대학교 국어국문학과 박태일 교수에 의해 발견되면서 기존의 애국 시인 이미지가 많이 퇴색되었다. 그나마 형 유치진이 백범 김구 선생이 이미 당대에 인증한 거물급 친일파인지라 상대적으로 묻히는 편. 재고의 여지가 없는 친일파인 형과는 달리 유치환 본인은 매우 전형적인, 친일과 애국적 행보 사이를 오락가락하는 변절자 혹은 나약한 인텔리라고 보는 것이 가장 객관적일 것이다.

2 작품

다음과 같은 작품들이 있다.
  1. 이 시기 제자였던 분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어디 경치 좋은 곳에 올라가 뒷짐을 지고 있다가 유치환 시인이 즉석에서 시를 짓기 시작해 그걸 받아 적는 일이 종종 있었다고 한다.
  2. 거제시통영시가 청마의 출생지 인정 여부를 놓고 법정싸움까지 벌이기도 했으며, 이 때문에 통영의 청마문학관에서는 문학답사 온 대학생들에게 거제의 청마기념관을 가짜라고 공격하기도 했다. 단 이는 2013년의 일이며, 현재도 그런지는 추가바람.
  3. 현재의 부산영상예술고등학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