義禁府
1 개요
고려와 조선 시기 왕명을 받들어 중대한 죄인을 수사하던 기관. 사극에서 '저 놈의 주리 틀어라'라는 대사가 나오면 100% 의금부로 끌려간거다. 현대 대한민국으로 보자면 검찰청, 국가정보원의 여러 면모를 섞어놓았다고 볼 수 있는 조직.[1] 금오(金吾), 금위(錦衣)백의사?라는 명칭으로 불리기도 했다.
2 역사
원간섭기 충렬왕이 치안을 담당하고자 편성한 순마소(巡馬所)가 그 시초이다. 이후 조선이 건국되면서 순마소는 순군만호부(巡軍萬戶府)로 명칭이 바뀌어 그 명맥이 유지된다. 조선 초에는 고려 때처럼 치안을 담당하는 경찰 업무를 주로 맡았지만 이후 조선의 관제 및 법제가 자리를 잡아가면서 수사 기관으로 역할이 이동하기 시작한다.[2] 태종 때 이르러 드디어 의금부라는 이름을 얻게 됐으며, 킬방원 왕권 확립에 크게 공헌한다. 각종 사화가 많았던 연산군 시기에는 밀위청(密威廳)이라 불리면서 말 그대로 공포정치의 대명사이기도 했으며 조선판 중앙정보부 그 이후로도 조선 왕조 역사 전반에 걸쳐 굵직굵직한 정치적 격변의 시기 마다 강한 힘을 발휘했다. 그러다 1894년 갑오개혁을 맞아 조선이 6조를 폐지하고 아문이라는 행정기관을 설치하면서 의금부 역시 의금사로 명칭이 변경되고 법무아문의 관할 밑으로 들어가게 된다. 법무부 밑에 검찰청이 있는거를 생각하면 쉽다.
3 누가 의금부에 끌려왔는가?
전격 코렁탕 명단 사극을 보면 개나소나 다 의금부로 끌려오는데 그런 일은 별로 많지 않았다.
- 대역죄인 : 가장 일반적인 경우. 각종 반역을 실제로 꾀한 경우 뿐만 아니라 왕에 대한 음해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역시도 중대한 범죄로 다루었다. - 강상죄 : 유교 국가였던 조선이었던만큼 유교 윤리를 어기는 일을 할 경우에도 의금부가 팔을 걷고 나섰다. 존속살해와 같은 오늘날의 기준에서 보더라도 분명한 패륜행위야 당연했고, 천주교 신자가 급증한 19세기 무렵부터는 제사를 지내지 않고 신주를 불태우는 등의 행위를 한 천주교 신자 역시 의금부로 압송됐다.
- 외국인 범죄자, 외국인을 대상으로 범죄를 저지른 자, 밀무역을 행한 자.
- 그리고 의외이지만 신문고 처리를 담당했던 것도 일시적으로 의금부의 소관이었던 적이 있었다.
- 괘씸죄(...) : 심지어 왕의 심기를 심히 거스르는 직언을 했다가도 재수없으면 얼마든지 끌려갈 수 있었다.
ㅎㄷ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