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의사

1945년 겨울

서울 종로 2가에 염동진이 나타났다
아니
스며들었다
그가 누구인지
어디서 왔는지
누구의 동지인지
어디로 갈 것인지 몰랐다
수군거리기를
중국 북부에서 독립운동을 했다 한다
수군거리기를
가족 전부가
공산당에게 학살당했다 한다
극우테러 본부 백의사 우두머리
잠자리에서도
검은 안경 벗지 않는
장님
잠자리에서도 권총을 챙겼다
청년 유진산은 머리였고
청년 김두한은 주먹이었다
모자 벗은 머리에서
포마드 냄새가 진했다
냉혈인간
그의 말은 칼끝
그의 생각은 찰나였다
그의 하루하루는
누구를 죽이는 일
누구를 없애버리는 일이었다
단독정부가 들어선 뒤
홀연 사라졌다
그러나 그의 극우 테러는 백주에 호열자로 퍼져나갔다

-시인 고은 염동진.

1 개요

白衣社. 한국 해방 이후 미군정기 시기에 있었던 정치깡패집단. 1945년 11월경에 월남한 청년,학생들을 중심으로 서울에서 조직되었다.

여기서 독립운동가 박기수가 임정국내특수공작대 백의사의 공작자재 요원으로 활동했다고 한다.

중국 국민당남의사를 모방해서 조직하여 만든 전문테러단체로, 해방 이후 미군정기 시기 혼란한 상황속에서 수 많은 정치인들을 암살, 테러를 자행하기도 했다. 총사령관은 염동진이었다.

백의사는 김구보다는 신익희 쪽에 더 가까웠다.[1] 간부인 이성렬에 의하면 백의사는 김구의 테러조직 소리를 들었는데, 좌익들 사이에서는 이승만의 테러조직은 삼우회, 김구의 테러조직은 백의사라 할 정도라고 한다. 임시정부 국내특파원이었던 백창선에 의하면 1948년 만주에도 백의사에서 8명과 함께 갔다왔다고 한다. 조카로 김종진이 있다. 최서면 연구소장이 이영신에게 보낸 '京高特秘 第3210號 金九 一黨의 愛國團員 檢擧에 關한 件'[2]에 염동진에 대한 자료가 있는데 이것은 훗날 백의사의 염동진 연구에 큰 성과가 되었다.

2 테러

평양 모란봉 아래 영명사(永明寺)라는 절의 박고봉과 함께 조직한 이 단체의 성원인 백관옥[3][4], 선우봉[5], 박진양 등이 1945년 9월 3일 조선공산당 평남지구위원장인 현준혁[6]을 백주대낮에 암살한 바 있었다. 이 사건이 발각되어 관련자 대부분은 1945년 9월부터 11월에 걸쳐 월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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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준혁의 묘.

이영신이 '비밀결사 백의사'를 발표하기 전에는 9월 28일에 좌익 장시우가 죽인걸로 되어있었다.

백의사는 임시정부 내무부장 신익희가 야심적으로 조직한 '정치공작대'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었다. 신익희의 '정치공작대'는 주로 북한에서 '반탁, 반공 공작'을 하던 조직이었다. 신익희의 정치공작애에는 해방직후 신익희와 연계를 갖고 백창섭이 조직한 '임시정부 특파사무국' 관계자들이 참가했다.

관련자의 진술에 따르면 백의사는 이성렬, 김정의, 김형집, 최기성, 백시영, 이희주 등으로 구성된 '대이북집행부서'가 조직되어 있었다고 한다. 이들은 신익희의 '정치공작대'와 연합했고, 1946년 초반 북한으로 밀파되었다.[7] 참고로 조선시대에도 동명이인이 존재했다. 여담으로 1962년에 쿠데타에 가담했다가 감옥에 갔다. 백의사 간부라고 나온걸 보면 동일인물이다. 1962년의 민주당 쿠데타의 경우 당시 미국 대사관에서는 쿠데타가 또 일어날것 같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조기에 일망타진되었다.

이들은 여러가지 테러 사건을 일으켰다. 대표적인 게 1946년 3.1절 기념 행사에 나온 북한의 김일성에게 수류탄을 던진 것인데, 노비첸코라는 소련 장교가 대신 부상을 당했다. 당시 김제철(金濟哲)이 김일성을 권총으로 쏘려 했으나, 미행이 붙어서 못했다. 김형집(金亨集)이 안전핀을 제대로 뽑지 않고 수류탄을 던져서 김일성에게 떨어졌을 때는 터지지 않았고, 노비첸코가 그걸 다시 집어서 던지려는 와중에 수류탄이 터져 그의 눈와 한쪽 팔이 절단되었다. 이는 나중에 영화로도 만들어졌고, 노비첸코는 북한 행사에 잘 불려다니며 인민의 영웅으로 숭배되었다. 그는 제대 이후 농사를 지으며 힘들게 살았지만, 생명의 은인이라고 김일성이 데려와서 사망할 때까지 호의호식하며 대접받았다. 그의 아들도 김정일이 연금을 지급할 정도로 고마워하고 있다고 한다.

그 외에 임정 외무부장 신익희 명의로 된 승차권이 발견되었다고도 한다. 그래서 북한은 김구를 파쇼테러단이라고 비난했다. 김책이나 강량웅 가족 사살로도 유명하다. 그리고 자주민보에서도 김일성 수류탄 암살사건이나 강량욱 가족 사살사건을 김구의 소행으로 보고있다. 참고로 자주민보는 수구꼴통이라 부르는 보수진영쪽이 아니라, 거의 북한쪽에 가까운 논조를 가진 신문이다. 권총암살이나 폭탄테러는 이승만보다, 김구와 백의사의 특기였다. 저격 = 김립 피살, 폭탄 = 이봉창, 윤봉길 등. 게다가 이런 화기나 폭탄류를 오래동안 썼던건 김구였다는걸 기억하자. 이승만은 외교론자이기 때문에 테러를 부정적으로 생각했었고, 실제로 이를 맹렬히 비난을 했던적 있다.

강준만 교수의 한국현대사 산책 1940년대편 1권(p230)에 의하면, 이 사건은 김구와 신익희의 지시로 저지른 사건이라고 한다. 그리고 앞서말한대로 임정 내무부장 신익희 명의의 승차권외에도 2월 15일에 발급된 승차편의 공여에 관한 의뢰장과 신임장을 가지고 있었다. 조선공산당은 김구의 귀국시, 그들의 기관지를 통해 김구를 '민족혁명의 지사' 및 '반제에 일생을 바친 고결한 지사'로 예찬했었는데 이 사건을 통해 사이가 나빠졌다고 한다.

권중희나 미군정 보고서에 의하면, 안두희가 백의사 단원이라고도 하는데 아니라는 말도 있다. 이성렬(李聖烈)씨는"내가 아는 한 안두희는 백의사 사원이 아니다."라고 단언했다. 게다가 안두희는 백의사 요원이 아니라고 부인했다.

안두희가 백의사 단원이라고 보기 어렵다는 측의 주장의 근거가 여럿있는데, 김구가 저격당하자 염동진은 분노했었다는 증언이 있었고, 한편으로는 애초에 백의사가 김구, 이승만, 한민당, 미국 CIC와 연락망을 갖고 있었던 단체라고 하지만, 앞서말한 소련군정문서에 나왔듯이 백의사는 김구의 직접적인 지도하에 있다. 다만 송진우, 여운형, 장덕수 암살이 백의사의 소행이란게 밝혀지자 김구의 지도하에 있다는걸 은근슬쩍 빼버리려는 사람들때문에 문제지...김구의 비서, 선우진은 안두희는 결코 백의사가 아니라고 했다. 그러니까 선우진도 백의사에 대해 알고 있었다는것. 그리고 도진순도 염동진은 백범 암살을 사주안했을 것이라며 반박했다. 그런데 도진순은 치하포에서 김구에게 살해된 스치다를 계림장업단이라고 주장하는 병크를 일으킨 적이 있는지라...

백의사는 임시정부 법통론을 정의라고 여겼으며 임시정부[8]를 부정하는 이들을 암살하였다. 특히 좌파세력을 소련 공산당과 결탁한 기회주의자로 보는 입장을 견지하여[9] 좌파 세력 척결을 주장하였는데, 이 때문에 좌파만 암살했을 것 같지만 임시정부에 반대하는 이들은 좌우를 가리지 않고 암살했다.

3 정치인 암살

실제로 암살당한 요주 인물 중에서는 좌파보다 우파가 더 많았다. 송진우, 여운형, 장덕수 암살범들은 백의사와 연관되어 있었는데, 여운형을 제외하고 송진우와 장덕수는 한민당 핵심간부인데다가 우파였다. 송진우의 경우 반탁운동 방법론을 두고 신중론을 취해서 짚신감발을 해가면서 반탁하자는 김구와 경교장에서 싸웠고, 여운형은 애초에 임정봉대에 부정적인 입장이었고, 장덕수는 한민당 한독당 통합을 한민당을 임시정부에 바치는 일이라고 반대한 일이 있었다. 이 때문인지 한민당 총수 김성수는 한민당 결성시에 임정 봉대론을 주장하였고 한민당 한독당 통합에 찬성하는 등 임시정부 세력의 요구를 다 들어주는 척 했다. 하긴 송진우와 장덕수의 최후를 보고 무섭기도 했을 것이다 그러고는 김구가 법정에 소환되어 입장이 불리해지자 이를 정치적 호재로 이용, 이승만과 손잡아서 떨궈버렸다. 이승만이야 당시 시중에 돌아다니는 암살명부에 이승만 이름이 올려있었기 때문에 더 불안했을 것이다.

그리고, 임정법통론을 고수한 대표적 인물이 김구였다. 다만 김구가 직접적으로 지시를 내렸다는 증거는 없다고 하지만 죽일놈이니 처치하길 원했다고 한다. 장덕수 암살로 김구가 법정에서 참고인 자격으로 소환되자, 김구는 "자신이 암살하기로 마음 먹으면 행동자와 1:1로 대면해서 지시를 내리지 간접적으로 암살을 하도록 하지는 않는다."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법정소환 후 김구는 증거불충분으로 풀려났다. 공판록에서 다음과 같은 사실이 나왔다.

(問) 그러면 검사가 증거품으로 조서한 11호 12·13·14호는 각각 金錫璜 趙尙恒 辛日俊 孫禎秀의 진술서인데 그중 필요한 부분을 읽어드릴 터이니 그에 대한 의견을 말씀해 주시요. 이로부터 전기 4명의 진술서 중 필요한 부분만을 계속해 낭독하였는데 그 내용의 요점만을 적으면 이런 것이다.

결국 4명이 진술한 것 중에서 공동 일치한 점인데
1. 처음에 김석황이가 김구선생은 張씨를 처치하기를 원한다는 말을 했다는 것
2. 그의 사실여부를 알아보려고 김석황 이외의 전기 3명이 죽첨장에 김구를 찾아만났더니 장덕수 明濟世 裵恩希 등 사람들은 李박사 밑에서 일하면서 미소공위에 참가한다니 죽일 놈들이다라고 김구씨가 말하는 것을 듣고 그 분심을 짐작하는 동시에 김석황의 말을 확인했다는 것 주로 이 점이었다.

이에 金重穆의 진술서인 증거품 10호 중 이상에 일치된 요점을 낭독하고 나서 라만검사는 다시 심문하였다.

실제로 김구는 장덕수를 '죽일놈' 운운했다고 한다. 해방이전의 김구는, 장제스의 후원을 받고있었으며 작은 단체를 이끌고 있었다. 광복군이 있긴 했으나, 역시 규모가 작았다. 그래서 누군가를 없애기위해서는 암살자와 1대1로 지시하고, 계획도 짜야 한다.
하지만 해방 이후의 김구는 한국독립당이라는 거대 단체를 이끌고 있던 수장이라서, 암살자와 직접 면담까지 할 필요가 없었다. 그게 결정적인 차이다. 그리고 장덕수 암살과 연루되어서 유죄를 선고받았던 최서면은 해방 이후 Y대시절부터 김구밑에서 학생운동을 했었다.

MBC의 <이제는 말할 수 있다>-백의사 편에서 나온 백의사 대원들은, 자신들이 임시정부를 부정하는 자들을 처단하였으므로 옳은 일을 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신동아에서 조사한 백의사 관련기사.

참고로 염동진은 김구의 밀고로 중국공산당에게 고문당했다는데, 이건 허위사실이다. 왜냐하면 김구와 백의사는 해방이후에도 견고한 관계였기 때문이다.
미군의 CIC 비밀문건에 의하면, 여운형, 장덕수의 암살범들이 백의사의 암살특공대라고 주장한다. 역사편찬위원회에서는 이게 몇몇 장교들의 발언만 근거로 한거기 때문에 신뢰성이 떨어진다고 했지만, 대부분의 자료들을 가지고 판단하면 신뢰성은 떨어지언정 무조건 틀렸다고 볼수는 없다. 그리고 저 장교들만 발언뿐만 아니라 실제로 행동에 옮기기도 했는데, 저 장교들이 바로 여순사건의 제4연대다...

이성렬에 의하면,

『광복 후 좌익들이「이승만의 테러조직은 삼우회(三友會), 김구의 테러조직은 백의사(白衣社)」라고 할 정도로 백의사는 백범선생과 밀접한 관계에 있었습니다. 백범 선생이 염 사령(廉 司令:염동진)을 중국공산당 정보부에 넘겼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얘깁니다. 내가 1945년 9월 염 사령을 처음 만났을 때, 그는 눈이 잘 안 보인다고는 했지만 맹인이 아니었어요. 그런데 얼마 후 38선을 넘어올 때 같이 월남하던 백관옥(白寬玉)에게 염 사령이「눈이 안 보인다」는 얘기를 하더랍니다. 서울에 와서는 아주 맹인 행세를 했지만, 모두 반신반의했어요. 무슨 다른 생각이 있어 염 사령이 맹인 행세를 하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여운형 암살배후가 백의사란건 유명한데, 여운형의 경호원인 박씨에 의하면 범인이 김구의 전 숙소였던 이모씨집으로 도피한게 이상하다고 했다. 그리고 한지근은 한현우와도 친했다. 여운형 암살 사건 발생후 한지근은 권총과 실탄 10발을 한현우 집에 숨겨두었다고 한다.(...)# 실제로 한현우와 한지근 둘다 친분이 있었고, 송진우 암살범 한현우도 김구쪽과 관계가 있었다. 당시 우익 테러단체에 관계한 인사들은 서로가 서로를 너무 잘 알고 있었다.[10] 사실 한현우는 최서면(장덕수 암살범)과도 잘 알고있었다는 것이다. 문제는 이들의 개인적 친분관계와 조직적 연결관계가 결합되고 분리되는 경계선을 명확히 설정하기가 어렵다는 점이다.예를들어서 여운형 암살배후 가운데 김영철이란 인물 경우 서북청년단과 백의사를 둘다 왔다갔다 했었다. 그런데 백의사는 어디에나 있는 세포조직이니... 그런데 한지근은 자신이 한현우가 이끄는 같은 그룹이라 실토했다.

◦ G-2 WS 98, 7-2047,

여운형 암살, 송진우 암살과 연결되어 있다. 한지근이 자기는 송진우 암살에 연루된 한현우가 이끄는 그룹에 속해 있었다고 실토.

참고로 서북청년단은 처음에 김구의 밑에 있었다가 1946년 전후로 이승만 밑으로 간다. 그런데 김영철은 임정특별행동대원이라고 한다. 그리고 여운형 암살범중 하나인 신일준은 장덕수 암살혐의로 사형을 판결받았다. 김영철과 신일준의 개입은 여운형 암살의 공소시효 만료때 암살범들이 자수함으로써 드러난것이다.(...) 그런데 암살 하수인들도 자세한 건 몰랐다(...). 훗날 백의사에 대한 다큐멘터리가 제작되었는데 송진우를 저격한 한현우의 인터뷰를 볼 수 있다.

그리고, 테러리스트들은 주요정치인들이 암살당했을때, 마치 '자기가 했다'는 것처럼 되려 범인들을 옹호했었고, 따라서 해방정국 백의사를 비롯한 테러리스트들 사이간에 복잡한 인간관계 속에서 한지근이 김구의 전 숙소에 머물렀다는건 충분히 있을 수 있다. 임정이 조선에 오기전에 마지막으로 한 회의가 여운형 사형. 그런데 송진우, 여운형, 장덕수의 암살자들이 임정 휘하의 청년단체들이었다는게 문제지.

참고로 '전백'은 한현우가 송진우를 암살한후에 경교장을 찾아갔다. 여운형 암살 당시 백의사의 신동운이 노덕술과 면담을 했다고 한다. 노덕술은 이 당시 수사과장이었고, 당시 암살배후가 누군지 훤히 알고도 남을정도의 위치에 있는 인물이었다. 이런 인물이 백의사와 서로 짜서 '단독범행'으로 축소시키고 사건을 무마시켰으니 설명이 더 필요한가? 처음에는 신동운이 노덕술과 면담하고,그후에는 신일준이 노덕술과 면담했다고 한다.(...) 그런데 1974년 여운형 암살범들이 자수했는데,그들을 면담하고 심문한 배명인 검사는 송진우, 여운형, 장덕수의 암살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고 했다. 여기 나오는 최서면도 백의사인데, 46년에 대북반탁공작대로 북한에 갔다왔다고 한다.

1947년자 동아일보에 의하면, 백의사 간부인 선우봉(홍보간부)이 공갈협박으로 징역2년을 받았다고 한다.

실리 보고서(전문번역)에 의하면, 조직원들은 직업­군인(안두희, 박경구), 해안경비대, 세관원, 경찰관(박광옥), 소방관, 모든 정부부처의 직원[11], 모든 정당의 정치인(유진산), 상인, 산업가, 밀수꾼, 농부, 그리고 평범한 일상 시민 출신자들이라고 한다. 엄청난 조직이다. 김두한이 라디오 방송에서 자신이 백의사 소속이라는걸 밝혔다. 그외에도 만주나 중국에도 지부가 있다.

미국 정보문건에 따르면, 염동진은 제4연대의 연대장으로부터 서신을 주고 받으면서 김구와 함께 군사쿠데타를 일으키려했다고 한다. 참고로 그당시(48년)의 제4연대 연대장은 최남근이다. 47년 5월경의 연대장은 이한림(1921~)이다.

1946년 5월 당시 연대장은 정일권. 그런데 저 제4연대는 바로 여순사건의 그 연대다.
  1. 신익희가 포함된 임시정부의 수장은 김구다. 그러나, 백의사 테러가 문제시 되고 있는 해방 이후에는 신익희가 김구와 정치 노선을 달리하여 이승만 계열과 주로 손을 잡았음을 고려해야 한다.
  2. 동경특필 제3201호 김구 일당의 애국단원 검거에 관한 건
  3. 동생은 백찬옥
  4. 야인시대에서는 김두한에게 심영의 행방을 알려주는 역할로 등장한다.
  5. 나중에 공갈협박으로 징역 2년을 받았다.
  6. 현준혁은 조만식과 함께 평남 건준을 이끌었던 인물로 극좌적인 인물이 아니었다. 적어도 조만식같은 중도우파 민족주의자들하고 커다란 마찰없이 연계를 맺었던 인물. 남한에서는 김일성의 사주로 현준혁이 암살된 것처럼 알려졌고, 여명의 눈동자에서도 김일성의 사주를 받은 최대치가 현준혁을 암살하는 것으로 나온다. 그러나 1990년대 이후에는 백의사의 소행이라는 것이 밝혀졌다.
  7. 이성렬은 1948년에 수배되었다는데, 동일인물인지는 알 수 없다. 한자는 똑같다.
  8. 한국독립당
  9. 임정 시절부터 사회주의 계열을 대하는 입장이었는데, 해방 후 신탁통치 떡밥 이후로 이러한 입장이 더 강화되었다.
  10. 테러조직들은 대부분 우익청년단체들
  11. 실제 김구는 미군정에 일하는 한국인 직원들에게 파업을 시키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