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희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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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동양 오리온스 시절. 이 포카칩 유니폼은 고양 오리온 오리온스가 15~16시즌에 다시 입게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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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SK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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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서울 SK 나이츠 코치
전희철(全喜哲)
생년월일1973년 6월 26일
국적대한민국
출신학교경복고 - 고려대
포지션센터/파워포워드/스몰포워드
프로입단1996년 동양제과 농구단
소속팀대구 동양 오리온스 (1996~2002)
전주 KCC 이지스 (2002~2003)
서울 SK 나이츠 (2003~2008)
국가대표 경력1993 자카르타 ABC [1]
1994 토론토 세계선수권 / 히로시마 아시안게임
1995 서울 ABC
1996 애틀랜타 올림픽
1997 리야드 ABC
2002 부산 아시안게임 [2]
수상내역농구대잔치 베스트 5 1회 (96)
KBL 베스트 5 1회 (97)
1997 리야드 ABC 우승 / 대회 MVP [3]
2002 부산 아시안 게임 금메달
서울 SK 나이츠 영구결번
No. 13

1 개요

대한민국의 前 농구선수이자 현재 SK나이츠 코치. 대학농구의 최고 인기 시대를 이끈 선수 중 한 명이다. 프로 시절에도 초창기에는 뛰어난 활약을 보였지만, 아쉽게도 대학 시절의 명성만큼은 아니었다. 별명은 에어본 혹은 에어희철.

2 선수 생활

2.1 아마 농구 시기

경복고에서 1학년 때부터 198cm의 키로 팀의 주전 센터를 맡아 한 경기에 31득점 20리바운드를 기록하기도 하며 팀을 우승으로 이끌면서 일찍부터 초고교급 선수로 주목을 받았다. 이제 겨우 고등학교 1학년이 198cm니 앞으로 더 크면 얼마나 굉장하겠냐 하는 기대감도 있었지만, 키는 결국 저 때 키에서 하나도 안 컸다.

대학은 고려대로 진학, 김병철과 함께 1학년 때부터 바로 팀의 주전을 꿰어 찬 후 센터파워포워드를 넘나들며 좋은 운동능력을 바탕으로 경기 중에 멋진 덩크까지 선사하며 활약했다. 하지만 당시 고려대 농구부는 고교생 티도 아직 못벗은 전희철, 김병철이 양대 에이스일 정도로 멤버가 부실 (윤호영[4]-김병철-이지승[5] -박권우[6] -전희철-정인교)하여 이상민, 오성식, 문경은, 김재훈, 우지원, 김훈 등 대학올스타급 라인업을 가진 연세대[7]는 물론 중앙대[8]에도 밀리는 수준이었다. 농구대잔치에서도 실업팀들을 상대로는 그렇게까지 압도적인 활약을 하지 못 했다. (박희성, 강병수의 산업은행, 최명도, 김현국의 경희대에도 지는 등 14개팀 중 5승 8패로 6강 진출 실패. [9]
2학년에 이르러 양희승, 박재헌, 박훈근, 박규현 등을 후배로 받으면서 좀 더 전방위적인 멋진 활약을 하며 오빠 부대를 이끄는 대학 농구 스타 중 한 명이 되었지만, 서장훈이 가세한 연세대 앞에 패배하고 만다. "전"희철-양"희"승-김병"철"(전희철 트리오;;;)의 활약속에 1993-94 농구대잔치 정규리그 12팀 중 4위에 오르지만 (연세대는 11승 전승으로 1위) 플레이오프 8강전에서 김현준, 김진이 이끄는 삼성전자(정규리그 5위)의 노련미에 말려 1승 2패로 역전패하고 만다. (만약 4강에 진출했다면 연세대와 재대결이 가능했다. 당시 4강은 연세대-삼성전자, 상무-중앙대)

3학년, 슈퍼루키 현주엽, 신기성이 가세하면서 고려대는 MBC배 대학농구에서 이상민, 서장훈이 건재한 연세대를 격파하는데 성공했고 (물론 현주엽의 활약이 더 컸다), 농구대잔치의 정규시즌에서는 연세대에게 패하며 2위를 기록했지만, 내로라하는 실업팀들을 연파하며 농구대잔치 우승을 거머쥘 강력한 후보로 꼽혔다. 플레이오프 상대는 앞선 시즌인 1993-94 시즌에 중앙대에게 패한 기아자동차. 이제 늙어 가는 걸로 보였던 허재, 김유택, 강동희에 부상에서 몇 년만에 겨우 회복한 한기범이 주축 멤버였다. 때문에 고려대가 기아를 물리치고 농구대잔치 결승전에 나가리라 예상한 사람이 많았지만 고려대는 패배하고 말았고, 패배의 원흉 중에는 전성기를 지난 김유택 앞에서 정규 시즌의 위력을 보이지 못한 전희철 역시 현주엽과 함께 포함되어 있었다.

4학년이 된 전희철은 신기성, 김병철, 양희승, 현주엽과 함께 고려대 농구부를 거의 사기 수준의 강함으로 이끌면서 대학 농구를 제패했고, 농구대잔치 역시 정규시즌 전승의 위엄을 달성하는데 성공했다. 특히 정규 시즌 서울방송과의 경기에서, 앞서가던 경기가 서서히 쫓기자 혼자 힘으로 드라이브인 2번, 덩크슛, 3점슛까지 혼자 9점을 몰아넣으면서 승기를 가져오던 모습은 지금도 잊을 수 없는 명장면으로 꼽힌다. 정규시즌에서의 모습이 너무나 막강한 나머지 당시 고려대는 농구대잔치 파이널 우승 후보 1순위였다. 하지만 또 한번 전희철과 현주엽을 비롯한 고려대 선수들은 허재-강동희-김유택 앞에서 정규 시즌의 위력과는 동떨어진 모습을 보였고, 무적이라던 전희철과 고려대는 기아자동차에게 패하여 허무하게 탈락하며 그렇게 전희철의 아마 농구 시대는 끝났다.

2.2 실업에서 프로 시기

이미 프로화가 되는 게 기정사실인 상황에서 전희철은 김병철과 함께 동양제과 농구팀에 지명되어 입단, 프로화를 앞두고 열린 실업 리그인 코리안 리그에선 경기중 화끈한 덩크까지 구사하는 등 맹활약을 보인 끝에 신생팀 동양을 우승시키는데 성공했다.

그리고 출범한 KBL 원년, 교체 없이 풀타임으로 경기를 소화하다시피 하며 시즌 평균 23점 6.9 리바운드를 기록했고, 이 평균 23점은 그 시즌 9위의 기록이었고 득점 10위권 안에서 한국인 선수는 전희철이 유일했다. 이 때문에 비록 팀은 플레이오프에서 탈락했지만 전희철은 좋은 평가를 받았다. 다음 시즌에 스탯은 18점대에 5.6 리바운드 정도로 줄었지만 그럼에도 팀을 다시 플레이오프에 진출시키는데 성공했다. 시즌 후 전희철은 공익근무로 병역을 치렀다.

소집해제 후 맞이한 99-00시즌. 세계 프로 스포츠를 통틀어도 유래를 찾기 힘들 정도의 패배를 쌓았던 오리온스에 복귀한 전희철은, 당시 현대의 센터 로렌조 홀의 팔꿈치에 맞아 이마가 찢어진 와중에도 그대로 붕대를 감고 뛰며 덩크슛을 선보일 정도로 인상적인 활약을 했다. 하지만 팀이 중요한 고비를 맞이한 와중에 발목부상으로 이탈하는 일도 있었고, 팀을 플레이오프로 진출시키는 데는 실패하고 만다.

00-01 시즌. 김병철까지 복귀하며 전희철은 비로소 오리온스를 플레이오프로 이끌 것만 같아 보였다. 하지만 외려 팀은 이전 시즌보다 더욱 총체적 난국에 빠져들고 말았으며, 전희철은 평균 15점 5리바운드라는 준수한 활약을 보이긴 했지만 외국인 선수들로만 채워진 다른 팀들의 골밑을 공격하는데 버거워하는 모습도 보였고 또 한번 부상을 당하며 시즌 중에 전력에서 이탈하기도 했다. 결국 팀을 나락에서 구해내지는 못 했다.

01-02시즌. 김승현과 마르커스 힉스가 합류한 오리온스는 그야말로 승승장구하며 지난날의 오욕을 털어냈다. 전희철은 스몰 포워드와 파워 포워드를 오가며 14점 4리바운드를 기록하며 팀의 우승 공신 중 한 명이 되었으나, 김승현과 힉스로 인해 좁아지는 자신의 팀 내 역할을 납득하지 못하고 시즌 후 팀에 트레이드를 요청했고, KCC 이지스로 옮겨가게 된다.

02-03 시즌. 앞선 시즌에서 이른바 토탈 바스켓볼의 위용을 보인 KCC 이지스에 있어 골밑 공격과 외곽 공격이 전부 가능한 전희철의 합류는 호랑이에게 날개를 달아주는 게 될 것만 같아 보였다. 하지만 전희철은 KCC이지스의 복잡한 패턴 플레이에 전혀 적응 못 하고 그냥 3점 덜 들어가는 슈터로 전락, 평균 10점 2리바운드의 기록만 남겼고 팀은 나락에 빠졌다.

03-04 시즌. 시즌 초 팀에서 주전으로도 나오지 못하는 상황 속에 다시 트레이드를 요청, 조성원과 트레이드 되어 SK나이츠의 일원이 된 전희철은 평균 14점 4리바운드를 기록하며 살아나는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다음 시즌이 되면서 더더욱 강력한 외국인 선수들이 득세, 전희철은 평균 10점 4리바운드 정도만의 기록을 남기고 만다. 그 뒤 이런 저런 잔부상 속에 한시즌 한시즌 지나갈수록 예전의 위력은 사라져 갔다.

07-08 시즌을 평균 3.7점 2.3 리바운드의 기록으로 끝내고 FA자격을 얻은 상태에서 현역 생활을 이어가려 했지만, 다른 팀들 중 전희철을 원하는 팀은 없었다. 원 소속팀인 SK나이츠에선 1억을 제시했지만 전희철은 1억 2천을 요구하며 제의를 거부, 현역에서 은퇴했다.

3 선수로서의 특징

198센티라는 키에 단단한 체격임에도 스피드와 탄력이 한국 선수들 중에는 동급 최고 수준이었다. 이런 운등능력을 이용해 골밑을 헤집고 다닐 수 있었고, 그러면서도 한 시즌에 평균 40퍼센트 확률로 3점슛을 넣은 일도 있을 정도[10]로 슛 능력도 좋았다. 특히 중거리에서 넣는 턴어라운드 페이드어웨이는 전희철의 특기였다. 운동능력을 살린 덩크도 멋지게 잘 넣었으며, 리바운드를 잡자마자 곧바로 꽂아넣는 팔로우업 덩크도 잘 했다.

한편으로는 골밑 몸싸움과 리바운드 같은 궂은일을 꺼린다는 비판도 대학 때부터 받았고, 팀플레이에 능숙하지 못하다는 비판도 좀 있었다. 지나치게 운동능력에 의존하며 공격 기술이 부족하다는 비판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KBL에서 골밑에 있는 외국인 선수가 한 명 뿐일 때는 훌륭한 활약을 보였다. 그러나 공익근무를 마친 후에는 잔부상 속에 이전에 비해 운동능력이 많이 줄어들었고, 그렇게 줄어든 운동능력과 외국인 선수들의 골밑 장악 속에 장점은 줄어들고 약점은 더욱 부각되어 결국 위력을 잃어갔다.

원년 시즌의 활약과 이에 대비되는 이후 시즌의 모습들 때문에 KBL에서 외국인 선수 제도로 인한 희생양 하면 항상 꼽히는 선수. 한편으로는 공익근무 이후 급격히 늘어난 부상들 때문에 공익근무 당시 몸 관리가 부족했던 거 아닌가 하고 말하는 사람도 있고[11] 계속된 부상만 아니었다면 센터나 파워포워드가 아니라 스몰포워드로서 계속해서 좋은 활약을 했을 수 있다고 보는 의견도 존재한다.

4 국제 대회에서의 전희철

아시아권에서 항상 한국 팀의 벽이었던 중국전을 보면 파워 포워드로 나섰을 때는 딱히 팀플레이로 만들어내는 효과도 없고 중국의 상대 선수와 비교해 우위에 있는 게 전혀 없는 상태에서 수비 구멍만 되는 모습을 보였다.

1997년 아시아선수권에서는 대표팀의 센터로 출전[12], 준결승에서 중국[13]을 상대로 이전에도 이후에도 보인 일이 없는 육탄전을 마다하지 않는 골밑 수비로 중국의 거대한 선수들과 맞서고, 센터 포지션임에도 정확한 외곽슛으로 중국팀의 센터를 끌어내 다른 한국 선수들이 골밑을 돌파할 공간을 만들고, 중국이 지역방어로 나오자 냅다 3점슛을 꽂아 비수를 꽂기까지 하는 등 엄청난 활약을 펼치며 중국전 승리의 일등공신이 되었다. 일본[14]을 상대한 결승전에서도 훌륭한 활약을 보였으며[15] , 대한민국 대표팀은 우승. 대회 MVP는 당연히 전희철의 몫이었다.

2002 부산 아시안 게임에선 스몰 포워드 자리로 출장, 중국 선수에게 밀리지 않는 높이로 외곽슛을 연달아 꽂으며 팀 승리의 공신 중 한 명이 되었으며, 이렇게 전희철은 아시아 정상을 두 번이나 차지한 몇 안 되는 한국 선수 중 한명이 되었다.

5 지도자 경력

현역 은퇴 후 SK나이츠에서 2군 감독을 맡았다가, 2009년 1군 코치직으로 자리를 옮겼다. 이후 구단 운영팀장, NBA산하 D리그 연수, 구단 전력분석원 등 다양한 경험을 쌓은 후 2011년 4월부터 현재의 보직인 1군 코치직을 계속해서 수행하고 있다.

6 기타

고려대 농구부에 있던 시절 박한 감독의 무작전 농구 때문에 술자리에서 제대로 작전 짜인 농구 하고 싶다고 울부짖었다는 카더라가 있다. 하지만 전희철은 작전 농구의 극한인 신선우 감독 밑에서 전혀 적응 못 하는 모습만 보이고 말았다.

현역시절에 유난히 부상을 많이 당해서 유리몸의 이미지가 있는데 경기중 불의의 부상도 있기는 하지만 상대 용병의 거친 플레이나 운이 억수로 나쁘게 부상을 당한 경우도 많아서 전희철 입장에서는 억울한 면이 많기도 하다. 그 예로 과거 전주 KCC 이지스의 전신인 현대의 용병이었던 로렌조 홀에게 대놓고 얼굴을 파리채 블록으로 얻어맞는다던가 상대선수와 같이 넘어지는데 안면에 니킥으로 얻어맞는다던가 오리온스 시절 리바운드를 잡으려고 라이언 페리맨 뒤에서 점프해서 착지하다가 치아로 페리맨의 머리에 정통으로 찍어버려서 치아 부상을 당한다던가 여러가지로 불운한 경우도 많았다. 이때 전희철도 그렇지만 페리맨의 머리 윗부분이 심하게 찢어진 모습이 카메라에 담기기도 했다.

은퇴식과 함께 등번호 13번이 SK나이츠에서 영구결번이 되었다.[16] SK나이츠에서 별다른 활약을 못 해준 전희철이 영구결번이 되었다는 사실에 의외라는 반응을 보이는 사람이 있는 한편, 팀에서의 활약을 떠나서 한국 농구의 전설인 선수에게 나이츠에서 좋은 예우를 했다고 보는 사람도 있다.
  1. 고려대 2학년 때 처음 선발되었다.
  2. 1998~99년 기간은 공익근무로 인해 국가대표팀 선발 불가
  3. 1969년 신동파가 뛰던 방콕대회 이후 18년만의 우승이었다.
  4. 휘문고-고려대-삼성전자를 거친 단신가드였다. 은퇴후 KBL 심판으로 전업하여 선수시절보다도 명성(?)을 떨친다.
  5. 경복고 출신의 포워드로 수비전문 선수로 유명했다. 대학시절 문경은, 김영만 등 상대 주득점원을 틀어막는 모습을 자주보였으나, KBL 출범후 외국인 테크니션(ex> 데이비드 잭슨)에게는 탈탈 털리는 모습을 보여줬다.
  6. 휘문고 출신. 92년 당시 4학년으로 190의 단신이나 엄연히 빅맨이었다. 90년대 초반만해도 신장 190 초반의 센터(?)가 흔했으며 193의 정재근, 최병식 등이 197의 김유택과 함께 국대 골밑을 지키던 시절이었다.박권우의 1년 선배들인 노정현193-정한신191-강병수192도 이 시절의 대표적인 단신 빅맨이었으며, 이로인해 전희철의 입학이전까지 고려대의 골밑은 동네 놀이터나 다름없었다.-_-;; (라이벌 중앙대의 센터진이 표필상200-정경호202 였던걸 감안하면...) 박권우는 동기 정인교와 같이 산업은행에 입단했다가 KBL 출범 시 은퇴한다.(은행원으로 전환한 것으로 보인다.)
  7. 전희철의 1학년 시절, 연세대와의 맞대결을 살펴보면 MBC배, 춘계, 추계 대학연맹전 및 정기연고전까지 연전연패하다 1학년 마지막 무렵에 열린 1992-93 농구대잔치에서 처음으로 이긴다. 더군다나 이 승리는 고려대의 연세대 전 공식경기 4년만의 승리였다.
  8. 김승기-홍사붕-김영만-양경민-정경호-조동기-안병익 등 당시 대학농구팀 중 최장신 라인업을 자랑했다. (정경호 202-조동기 197-안병익193. 이때는 서장훈이 아직 입학하기 전이다.)
  9. 92-93 농구대잔치에서 연세대는 4강, 중앙대는 6강에 들었다. 우승은 기아자동차, 준우승은 삼성전자.
  10. 3점슛성공률은 30%는 평균, 40%는 리그 최상, 50%는 전설이다. 파워포워드에 센터까지 볼 수 있는 선수가 이 정도의 성공률을 보이는 건 엄청난 것이다. 올드농덕용 설명: 채치수 + 정대만
  11. 사실, 전희철은 공식신장 198cm에 신발벗고 196cm라고 알고 있기때문에 당시 병역법상 면제기준인 196cm에 아슬아슬하게 걸쳤는데, 신검때 소수점차인 195.6cm가 나오면서 상무 지원가능이 되었다. 당시 상무가 병역법때문에 196cm이상 선수 입대가 안돼서 살짝 조정했으며 이때문에 당시 군의관과 싸웠다는 카더라도 있었을정도.(상무측에서 196cm이상 선수의 입대를 원한건 사실이다.) 하지만 전희철은 현역이 아니라 우지원과 함께 이른바 마지막 방위라 불리는 18개월 방위 판정이 나왔고, 이후 방위 폐지와 공익요원 신설로 인해 당시 병역법상 상무 입대보다 8개월 빠른 18개월 복무면 끝나는 공익요원을 선택해 병역을 해결한다. 프로선수로써 1년 빠른 팀 복귀가 가능했기 때문에 당시 입장에선 당연한 선택이지만, 공익복무로 인한 몸관리 실패에 대해선 스스로의 책임이 있다.
  12. 당시 주전센터였던 서장훈은 중이염이 심하게 걸려 경기를 뛸수 없는 수준이었고, 현주엽 마저 출국직전 훈련에서 무릎을 크게 다쳐 대회내내 벤치에만 있었다. (엔트리를 교체하기엔 너무 늦었었다.) 이로인해 대표팀 골밑은 193cm의 정재근과 전희철 뿐이었고, 3번치고는 나름 장신이던 양희승(195cm), 우지원(193cm) 등이 헬프하는 수준이었다.
  13. 왕지지(211cm)-공샤오빈(205cm)가 포스트를 지키고고 후웨이동(198cm)이 3점을 팡팡 날리던 그팀이다.1년전 애틀랜타 올림픽 8강팀;;;
  14. 217cm의 노장센터 야마자키와 혼혈선수 마이클 다카하시(198cm)가 있었다.
  15. 결승전에서 야마자키를 맞아, 전희철은 엄청난 헐리웃 액션(;;)으로 2연속 공격자 파울을 유도 야마자키를 위축시킨다.
  16. 다른 영구결번은 문경은 10번.